324일 화성행궁 상설한마당의 개막식에 펼쳐진 어가행렬. 정조대왕이 행궁 앞에 이르러 장용외영의 군사들과 화성유수의 영접을 받고 입궁을 하려고 하자, 난데없이 징을 두드리면서 사람들이 정조대왕의 앞으로 뛰어들어 엎드린다. 이른바 격쟁(擊錚)’을 시작하는 것이다.

 

격쟁이란 조선시대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 담장위에 올라가거나, 대궐로 뛰어 들어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행위를 말한다. 또는 왕이 행행하는 길거리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 왕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격쟁은 조선조 성종 때부터 시작해, 실록에 보면 총 300회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 정조와 숙종 때 가장 많은 격쟁이 이루어졌다.

 

 

격쟁 이전에는 태종조에 백성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 위에 달았던 북을 쳐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문고가 있었다. 신문고는 조선시대 민원제기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문고는 원래 취지인 백성들의 원통함을 풀기 위해 치는 예는 거의 없었다. 일부러 한양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지방에 거주하는 관민은 사용빈도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고의 제도가 효용도 없게 되자 연산군대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왕에게 하소연을 하는 제도인 격쟁

 

조선조에는 각종 민원을 제기하는 방법인 정소(呈訴)’가 있다. 정소란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각종 민원을 문서로써 관에 요구하고 청원하는 행위를 말한다. 정소는 신분 성별에 제한 없이 모든 백성이 가능했으며, 부녀자와 노비도 할 수 있었다. 정소 절차는 경국대전에 보면, ‘억울하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는 서울은 주장관, 지방은 관찰사에게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억울함이 있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래도 억울함이 있으면 신문고를 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문고 제도가 사라지면서 대신 격쟁이라는 제도가 생겨났다. 격쟁이란 억울한 일이 잇는 백성들이 임금에게 하소연을 하기 위해, 왕이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하문을 기다리던 것이다. 신문고를 폐지한 후 정서를 올려 불복한 자로 하여금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게 하였던 제도이다.

 

하지만 격쟁으로 인한 폐단도 생겨났다. 심지어는 지방의 수령을 유임시키고자 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하면, 사소한 일까지 들고 나와 임금의 앞을 막는 일이 허다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히여, 속대전에서 법제화되었으며 대전회통에서 증보되었다. 격쟁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자손이 조상을 위하여, 처가 남편을 위하여, 동생이 형을 위하여, 종이 주인을 위하여 하는 4가지였다. 이밖에 민폐에 관계되는 것도 가능하였다.

 

 

사리에 맞지 않으면 장을 치거나 유배를 보내기도

 

하지만 심하게 임금의 행행을 막고 읍소하는 자가 많아지자,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해 격쟁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잘못된 경우는 형벌로 논하게 했다. 사리에 맞지 않는 일로 격쟁을 논하는 자는 장 1003,000리 유배의 벌을 내렸으며, 읍민이 수령을 유임시키고자 격쟁하는 것은 장 100에 처하였다.

 

이렇게 무례한 격쟁에 대한 것을 막기 위해 엄하게 다스리기도 했다. 무고하게 수령을 고소하는 것은 부민고소율(部民告訴律)’, 사소한 일을 해당 도의 관찰사나 수령에게 고하지 않고 격쟁으로 직접 왕에게 아뢰는 자는 월소율(越訴律)’, 사실과 다른 허위로 상소한 자는 상서사부실률(上書事不實律)’로 처벌했다.

 

명종 15년인 1560년에는 궁정에 함부로 들어와서 격쟁하는 자가 많아, 이들을 엄벌에 처하였으며, 정조 1년인 1777년에는 위외격쟁추문(衛外擊錚推問)의 법을 정하였다. 그 이후 철종 9년인 1858년에는 왕이 도성 밖으로 거동할 때에만 격쟁할 수 있다는 법을 정하였다.

 

 

격쟁을 가장 많이 처리한 정조대왕

 

정조대왕의 행행 중에는 총 3,355건의 상언이나 격쟁을 처리하였다. 이는 한 번의 행차 중에 평균 51건의 민원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상언이나 격쟁은 조선 후기 왕들이 모두 허용한 일이지만, 정조대왕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만큼 정조대왕이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준 임금이었다.

 

정조대왕의 행행 중의 격쟁 중에는 정조 15년인 1791년 평민인 박필관이 격쟁을 통해 사회의 폐단을 금지시켜줄 것을 호소한 사건이 있다. 사실 격쟁은 조선시대 백성이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회모순의 심화로 일반백성들의 생활이 극심하게 어려워지자, 자신들의 괴로움을 호소하고자 격쟁을 많이 이용했다.

 

 

정조 15년인 1791122일 평민인 박필관이 격쟁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아전과 백성이 결탁하는 일, 2.상민이 족보를 위조하는 일, 3.소를 함부로 잡는 일, 4.산 소나무를 함부로 자르는 일, 5.지방 토호들이 토지겸병을 마음대로 하는 일, 6.노비를 30명 이상 가지는 일, 7.장토(庄土)30결 이상 소유하는 일 등을 금해줄 것과 그밖에 군역에 대한 수포를 20척으로 줄여줄 것을 청했다.

 

이 격쟁을 들은 형조에서는 일반평민이 감히 노비나 토지, 군포 문제를 거론했다고 죄를 줄 것을 왕에게 청했다. 그러나 정조는 격쟁내용을 검토한 뒤 노비문제와 토지, 군포에 관한 것은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그 외의 사항은 각 도에 명령하여 엄금하도록 했다.

 

우리는 여기서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규제대로 한다면 박필관은 부민고소율과 월소율에 해당 해 장 100을 맞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격쟁을 고한 박필관의 원을 들어주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지도자 상이 아니겠는가?(자료 인용 / 구글 검색) 사진 /수원시 정책홍보담당관실 김기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 요즈음 화성에는 주말과 휴일이 되면 몸살을 앓고 있다. 바로 KBS-2TV의 리얼 버라이어티 ‘12-등잔 밑이 어둡다편이 방송이 되고 난 후에 일이다.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수원으로 몰려든다. 그리고 그들은 화성을 돌아보며, 12일의 추억에 젖는다.

 

이들이 화성을 돌아보면서 가장 즐겨 찾는 곳은, 바로 12일의 멤버들이 찾았던 곳이다. 그러나 정작 수원 화성을 제대로 즐기기에는 무리한 코스이다. 10년이라는 세월동안 틈만 나면 찾았던 화성. 안과 밖으로 돌아본 화성은, 방법에 따라 계절에 따라 제대로 즐기는 법이 따로 있다. 그동안의 경험에 의해 수원 화성을 백배로 즐기는 법을 소개한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화성을 즐길 수가 있을까?

 

사실 수원 화성을 한 번에 다 돌아본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더구나 자녀들과 함께 찾아왔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수원 화성을 100배로 즐기는 방법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우선 화성을 대번에 바람 지나 듯 획 지나간다면, 그것은 화성에 대해서 무지라고 생각한다.

 

화성은 그냥 일반적인 성이 아니다.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것을 보면, 기록과 정조대왕의 애민(愛民), 과학적인 방법, 자연친화적인 조형물 등, 우리나라의 축성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거대한 자연친화적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화성을 곳곳을 곱씹으면서 100배로 즐기며 돌아본다는 것은, 어쩌면 내 가족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100배로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100배로 즐기면서 화성을 둘러보자

 

(1코스)

연무대에서 국궁체험 후 출발(화성열차 탑승) - 성신사 하차 - 오솔길로 서장대 오름 - 성안 길로 장안문까지 이동(화서문에서 장안문까지는 화성열차를 이용시 성밖의 경치 관람함) - 장안문에서 성 밖의 길로 방화수류정 옆 북암문까지 이동 - 북암문을 이용 성 안으로 들어와 수원천을 따라 걸음 - 화성박물관을 돌아본 후 재래시장 탐방 - 지동벽화길 구경(소요시간 3시간 30. 천천히 아이들과 함께 거닐면 4시간 소요)

 

() 1코스는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고 있는 코스로, 국궁체험과 화성열차는 주말과 휴일에 관람객이 한꺼번에 몰릴 시 체험이 어려울 수도 있음.

 

 

 

(2코스)

장안문 출발 - 성안으로 화서문까지 이동 - 보물인 화서문을 둘러본 후 화령전 앞을 지나 행궁으로 이동 - 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 무예24기 관람(무예 24기 시범은 오전 11시와 오후 3시 두 차례 이루어지기 때문에 1시간 전에 장안문에서 출발해야 함) - 행궁 구경과 체험하기 - 공방길 구경 - 팔달문을 거쳐 재래시장 구경 - 남수문에서 성안으로 들어가 창룡문까지 이동 - 연무대 국궁체험(소요시간 3시간)

 

() 2코스는 화서문에서 행궁으로 이동할 때 만나게 되는 행궁동 일원에서 9월 한 달 동안 세계 최초로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린다. 이때 자녀들과 함께하기를 권한다. 생태가 살아있는 마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생태마을을 돌아본다면 관람시간은 1시간 정도가 추가로 필요하다.

 

 

 

(3코스)

팔달산 남쪽 중앙도서관 출발 - 오솔길을 걸어 산으로 오르면서 지석묘군과 부석소 관람 - 용도 끝의 외곽인 화양루 상 밖에서 서편으로 난 길을 이용해 서삼치까지 이동(이 길은 소나무 숲이 정말 좋다) - 관광안내소에서 성안으로 이동 - 우측으로 걸어 서남암문으로 들어가 용도 걷기 - 서남암문으로 뒤돌아 나와 팔달문 쪽으로 이동하기 - 팔달문 관광안내소에서 공방길을 따라 행궁으로 이동 - 무예24기 관람과 행궁 둘러보기 - 화성박물관 관람 - 수원천 - 재래시장 구경(소요시간 3시간)

 

() 3코스 역시 무예 24기를 관람하는 시간이 있어 시범시간인 오전 11와 오후 3시 공연 1시간 30분 전에 중앙도서관을 출발해야 함. 재래시장에서 먹거리를 즐긴 후 지동 벽화길 관람을 하면 더 바람직하다.

 

 

사실 화성을 돌아본다는 것은 일괄적이지 않다. 그것은 화성이라는 친자연적인 거대한 조형물이 계절에 따라 그 멋스러움을 달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와 같은 코스로 즐긴다면 남들과는 다른 화성을 만날 수가 있다. 화성과 행궁, 박믈관과 재래시장, 벽화길과 노을빛 전망대.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딴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재미를 주는 곳이 수원 화성이기 때문이다.

3월 16일(토). 전국 전국의 파워소셜러들이 두 번째로 수원을 찾았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주최로 수원에 모인 이들은, 수원 곳곳을 돌아보고 난 뒤 수원을 SNS(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홍보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번에 모인 소셜러들은 지난해와는 좀 다르게, 여행 전문 블로그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글도 글이지만, 사진을 찍는 실력들이 작가 못지않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모바일을 이용한 홍보라고 해도, 사진이 좋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런 효과를 보았기 때문에 초청을 한 이들 파워소셜러들. 1박 2일의 팸투어가 끝나고 돌아가자마자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기대 이상으로 좋은 사진과 글, 어찌 매료당하지 않을 것인가?

 

 

“난 이곳만 오면 전율이 느껴져요”

 

수원의 도심 한 복판에 우뚝 선 팔달산 중턱의 지석묘군에서 걷기 시작한 이들은, 화성의 서남쪽 성벽을 따라 걷고 난 뒤 행궁 앞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난 이곳 신풍루 앞에만 서면 나도 모르게 전율이 느껴져요”

 

그동안 이곳 수원을 몇 번인가 방문을 했던 한 소셜러의 말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조금 기다리면 알게 된다는 것이다.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는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가 되면 신풍루 솟을삼문 앞에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곳에서 하루에 두 차례씩 열리는 무예 24시 시범을 보기 위해서이다.

 

 

무예 24기는 정조임금이 실전에 맞게 집대성한 것으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되어 있는 무예를 말한다. ‘무예24기(武藝二十四技)’는 조선시대 군사무예교범인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24가지의 무예로, ‘무예이십사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 무예도보통지 속에는 무예이십사기로 기록되어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각종 외침을 겪었던 조선이 자주국방을 이루기 위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 삼국의 무예 중 정수만을 집대성한 실전무예이다. 더욱 무예도보통지에는 우리나라의 무기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하던 무기들까지도 그 동작 등을 실어 실전의 교범으로 삼고 있다는 데에서, 가히 당대 최고의 무예지라고 볼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무예 24기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본국검 2. 예도 3. 제독검 4. 쌍수도 5. 쌍검 6. 마상쌍검

7. 등패 8. 왜검 9. 왜검교전 10. 월도 11. 마상월도 12. 협도

13. 장창 14. 기창(騎槍) 15. 죽장창 16. 기창(旗槍) 17. 당파 18. 낭선

19. 권법 20. 곤봉 21. 편곤 22. 마상편곤 23. 격구 24. 마상재 등이다.

 

 

진검을 사용하는 위험한 시범

 

하루에 두 차례의 시범 중에는 날이 선 진검 등을 갖고 대나무와 짚단 등을 베는 실전의 시범이 있다. 진검을 갖고 실전을 방불케 하는 무예24기 시범단원들. 왜 한 소셜러가 전율이 온다고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만 같다. 그들의 칼날 아래 순식간에 몇 토막으로 난 짚단과 대나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우수수 땅으로 떨어진다.

 

관람객들의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극에 달한다. 벌써 몇 번이고 보아온 무예 24시 진검시연이지만, 오늘 새삼 깨닫는다. 왜 그들이 많은 박수를 받는 것인지. 하지만 이런 진검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늘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이렇게 진검을 갖고 실전시범을 보이다가 다치기도 한다는 것.

 

자칫 다치기라도 하면 병원비는 물론, 시범을 보이지 못하는 날은 그나마 출연료조차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기에 시범단원들은 늘 생계걱정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수원과 정조대왕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화성과 무예 24기이다. 그 중 화성은 고착적인 축조물이지만, 무예 24기 시범은 역동적이다. 당연히 수원시에서는 이들에게 대우를 해주어야만 한다.

 

 

열악한 환경 개선해야

 

최근에도 한 단원이 시범을 보이던 중 다리를 삐어 며칠간 시범을 보이지 못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이 시범을 보일 수 없으면 출연료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범을 보이고 생활을 해야 하는 시범단원으로서는 당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보다도 수원을 홍보하는 면에서는 뛰어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작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불안한 앞날뿐이다.

 

굳이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한 단원은

 

“일당으로 출연료를 받다가보니 빠지지 않으려고 무리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보면 사고의 위험이 더 높아질 뿐이다. 또한 가족들을 생각하다가 보면, 아무리 몸이 좋지가 않아도 나가서 시범을 보일 수밖에 없다. 정말로 생활이 이렇게 어렵다면 어떻게 긍지를 갖고 시범을 보일 것인가?”라고 한다.

 

1박 2일 수원편이 방영되고 난 후, 수원은 그야말로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신풍루 앞으로 모여들어 무예24기 시범을 보면서 박수를 보낸다. 수원을 찾아오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단원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도록 대우를 해야 한다. 늘 불안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무예24기 시범단원들. 그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이 1795년 윤2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인 정조대왕 능행반차도(陵幸班次圖)’. 이 능행반차도는 조선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가 중심이 되어 그린 것이다.

 

이 능행반차도를 보면 행렬이 장엄하면서도 축제분위기 같이, 반차도에 그려진 인물들의 행색과 거동이 경쾌하게 표현이 되어있다. 반차도에는 모두 1779명의 인물과 779마리의 마필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흥환어행렬도를 보면 그보다 더 많은 인원이 능행길에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능행반차도 중 정조대왕의 가마 앞 쪽에 두 무리의 고취대가 있다

 

어가의 뒤를 따르는 기마고취대 장엄하다

 

능행반차도는 경기감사가 앞을 서고 그 뒤에 총리대신의 행마가 그려져 있다. 그 뒤편에는 말에 올라탄 고취대가 18명이 따르고, 뒤편으로는 훈련대장이 말을 타고 있다. 훈련대장의 뒤로는 중군(中軍)이 따르며 그 뒤편으로 다시 북과 장고, 해금, 피리, 징 등을 불고 치며 8명의 고취대가 따른다.

 

조금 뒤편으로는 금군별장이 말을 타고 있으며, 조금 뒤편으로는 얼굴을 가린 내인들이 말을 타고 따른다. 그 뒤편으로는 또 다른 정리사 행렬이 따른다. 그 뒤편으로 양편을 기를 든 군사들이 따르고, 정조대왕의 가마가 보인다. 가마 뒤로는 왕을 상징하는 용기가 따르고 있고, 그 용기 뒤편에는 고취악대의 본진이 뒤따른다.

 

 가마 뒤를 따르는 51명의 고취대의 모습. 장엄하다.

 

정조대왕의 가마 뒤편으로는 51명의 고취악대는 맨 앞에 4명의 나각수, 8명의 나팔수, 4명의 고수와 2명의 운라, 4명의 자바라와 두 줄로 늘어선 8명의 태평소, 그리고 3명의 해금과 3명의 저(대금)이 열을 지어 행렬을 한다. 그 뒤로는 6명의 피리와 3명의 장고, 3명의 북, 맨 뒤에는 징수를 포함한 3명이 뒤따른다.

 

그 뒤편에도 두 곳에 기마고취대가 행렬 안에 끼어 있어, 전체적으로 능행반차도에는 다섯 무리의 고취악대가 편성되어 있다. 능행반차도에 나타나는 고취악대는 모두 91명이나 편성이 되어있으며, 이들은 모두 말에 올라타고 있다.

 

 조리를 하는 재료를 실은 우마차 앞에도 6명의 고취대가 자리한다 

 

현대의 고적대 편제와 동일해

 

조선조의 군악편제는 내취라고 명칭을 붙였는데, 영조 때에 편찬된 속대전에 의하면 겸내취와 원내취가 국왕의 거동 때 또는 정전에 출좌할 때 시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겸내취와 원내취의 기록이 병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내취는 장악원 소속의 악공이라기보다 병조에 속했던 군악대원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의 군악대의 제도는 성종 때 확립된 제도로 국조오례의』 『악학궤범등에 기록되어 있다. 행악인 전부(全部)고취와 후부(後部)고취는 왕의 어가를 중심으로 하여 앞뒤로 배열하는데,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는 악사가 각 1명이고, 악공은 50명이다.

 

정조대왕 능행반차도에 나타나는 이 기마고취악대의 형태는, 요즈음 군악대의 고적대나 각급 학교 등에서 나타나는 고적대의 악기편성과 동일하다. 인원의 편성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고적대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보면 나각(소라), 나팔, 태평소, 대금, 피리, 해금, , 자바라, 장고, 운라 등 동일한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명절 다음날인 211. 행궁을 찾아 벽에 그려진 능행반차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몇 차례나 보았지만, 그저 무심히 바라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능행반차도를 보다가 중간 중간 말을 타고 있는 기마고취대의 모습에 눈이 번쩍 뜨인다. 정조대왕의 어가 뒤편을 따르는 고취대의 인원이 악학궤범 등에 나오는 인원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편제는 다르다고 해도 51명의 고취대가 어가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능행반차도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이기 때문에, 당시의 고취대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능행반차도에 나타난 편제에 관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겠지만, 고취대 하나만 갖고도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빗물저금통’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꽤나 의아해 할 것만 같다. 하지만 말 그대로이다. 빗물을 저금해 두었다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빗물관리 시설을 말하는 것이다. 수원시에서는 극심한 가뭄과 물 부족 현상을 이겨내기 위하여, 새로운 빗물 저장고를 제작해 가정에 설치를 해주고 있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가끔 뉴스를 통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지고 있는 논밭이나, 말라버린 하천의 물길을 보면서 애를 태우기도 한다. 지자체에서는 이러한 물 부족 현상을 이겨내기 위해서 다각도로 노력을 하고 있다.

 

사진은 수원시 화서1동 소재 한 주택 지붕에 설치된 빗물저금통의 모습

 

물부족 해소와 물의 재활용

 

수원은 예전 정조임금 때부터 물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정조임금은 축만제와 만석보 등을 설치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을 만들기에 많은 노력을 했다. 현재도 수원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저수시설이 있어, 딴 곳보다는 물의 부족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봄철 가뭄이나 등에 대비해 미리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빗물저금통은 빗물을 저장할 수 있는 빗물저장탱크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 수원시는 연중 기존의 건축물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는다. 신청을 하면 빗물저금통 설치전문가들이 지붕의 상태, 홈통 등 현장을 실사하는 등 선정과정을 거쳐 총 공사비의 90%, 최대 1천 만 원까지 지원해 빗물저금통을 설치해주고 있다. 

 

광교산에서 발원하는 수원천(위)과 정조임금 당시에 조성한 축만제

 

차츰 시 전체로 확대 실시 할 예정

 

수원시는 빗물저금통의 시설을 관내 농가와 주택 등, 주민들의 신청과 선정의 과정을 거쳐서 설치를 했다. 우선은 화서1, 2동과 입북동의 농가를 비롯해, 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 및 어린이집 등 총 12곳에 설치를 했다. 빗물저금통은 내년에는 공공기관 및 일반주택을 대상으로 빗물저금통의 설치를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수원시 담당자는 “우선 송죽동 주민센터와 권선동 고가차도 등에 추가적으로 빗물탱크를 설치할 예정이며, 주민센터에서는 건물옥상으로 떨어진 빗물을 모아, 낙엽 등 이물질을 제거한 후 빗물관리시설에 모아둔다. 이 빗물은 건물의 청소용수나 조경수, 생활용수 등으로 활용하고, 도로에도 뿌려 도심 열섬현상을 완화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한다.”고 밝혔다. 

 

상광교 사방댐과 (위) 하광교 소류지

 

수원시는 빗물의 재활용을 통해 물 부족을 해소하고 하수도 부하를 경감시키며, 상수도 사용량을 감소시켜 공공요금을 줄이는 것은 물론 재난방지에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수원시는 또 빗물재활용을 위한 빗물저금통의 설치를 점차 확대할 방침이며, 주민센터의 경우 시설을 전면 개방해 센터 인근 주민들도 언제든 이 빗물을 받아가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빗물저금통을 설치한 화서1동 주택의 한 주민은 “이렇게 빗물저금통을 설치해 버려지는 빗물을 이용함으로써, 상수도 사용료 등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면서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물 부족 현상이 일어날 것을 미리 대비한다는 것은, 일찍 화성 주변에 많은 수리시설을 조성한 정조대왕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면서 수원은 물에 관한 한 최고라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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