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은 도시계획자이면서 동시에 개혁자이기도 했습니다. 수원 팔달산에 걸쳐 화성을 축성한 정조대왕은 팔도의 상단을 수원으로 불러 모아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상권을 강화했습니다. 더불어 둔전과 많은 물을 저수할 수 있는 저수지 등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30일 오후 3시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화성박물관 기획전시실 앞에서 열린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기획전에 참석한 이재준 수원시 제2부시장은 정조는 바로 도시계획자라고 했다. 이어서 당시에는 농업은 첨단산업이었다고.

 

 

우리나라는 60~70년대만 해도 농업이 첨단산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조대왕의 업적이 있어 그동안 수원에는 지금은 이주해 간 농청진흥청이 들어왔고, 서울대 농과대학이 자리한 전국 최고의 농업도시가 되었습니다. 이제 농촌진흥청이 이주해 간 자리에는 2,200억을 들여 농업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관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 30일부터 201521일까지 전시가 되는 농업개혁의 산실특별기획전은 농업도시 수원의 전통을 재조명하고 수원시와 농림축산식품부가 함께 준비 중인 농어업역사문화전시체험관건립에 내실을 기하고자, ‘수원화성 착공 220주년 기념으로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화성> 특별기획전시를 마련한 것이다.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이 돋보이는 윤음

 

이날 특별기획전의 기념식은 먼저 가야금 독주와 판소리 등 식전행사로 시작했다. 이어서 자리에는 이재준 제2부시장과 수원시의회 김진우 의장, 이낙천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이사장, 김충영 수원시 청소년 육성재단 이사장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했다. 기념촬영과 테이프 커팅을 마친 일행은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각종 자료들을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는 화성유수 서유구의 자손들이 기증한 자료들도 함께 전시가 되어있으며, 정조의 농업정책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는 화성 성역을 중지시키는 윤음 등도 국문으로 번역해 전시를 하였다. 정조 18년인 1794년 화성 축조가 한창일 때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정조는 그 해 1019일 신하들과 화성성역의 진행여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성역을 중단할 것을 명하였다. 대신 화성 북쪽의 평평하고 비어있는 땅을 개간하고, 관개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면 옥토가 되어 생산량이 높아질 것이므로 이 비용을 이용하면 화성 축성 공사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을 예견하였다. 이 윤음을 따라 내하전 12,666냥으로 둔전을 개발하고, 5,690냥으로 만석거라는 수리시설을 축조한 것이다. 윤음의 내용을 보면

 

<화성성역이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정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원침을 봉안하면서부터 유수부로 승격시켜 체모를 높이고 행궁을 설치하여 우러러보며 의지하는 마음을 붙였다. 성지(城池)를 설치함은 기호의 요충지 때문이기도 아니었고 5천 병마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에 경사들과 모의하지도 않고 재정의 출입을 묻지도 않고서 경영하기 시작하여 이곳에 성을 쌓고 참호를 팠는데, 남북의 망루가 장차 완공을 고하게 되었다. 만일 흉년이 들지 않아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았다면 이 역사는 계속해 나아감만 있고, 미루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자료 구비한 농업정책 기획전 돋보여

 

기획전에는 조선후기 이앙법의 방법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수리관개와 관련된 농기구와 함께 <홍재전서><응지농서>, 5.6m에 달하는 <윤음><천일록>, <화성성역의궤> 등의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농학자로, 1836년 화성유수로 부임하여 농업개혁가로서 변모를 실현한 사유구의 관련유물 등이 전시되고 있다.

 

우리 수원이 농업의 도시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 이렇게 정조대왕의 농업정책에 관한 많은 자료를 보고나니 새삼 내 고장에 대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 농어업역사문화전시체험관이 완공되고 나면 전국에서 가장 훌륭한 농업에 관한 자료를 갖고 있는 수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개관식에 참가한 한 시민은 이런 좋은 자료를 전국의 농생명과학고나 농업과 관계되는 일을 하는 담당자들이 한 번씩 둘러보았으면 좋겠다고. 더불어 농기구 등도 함께 전시가 되고 있어 배움에 있는 학생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한다.

전하, 저곳에 저수지를 만들면 족히 1만 명은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정말인가? 그러면 저곳에 저수지를 만들라

 

1795년 능행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장안문에 오른 정조대왕과 화성유수 조심태가 나눈 대화 중 일부이다. 만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저수지를 조성하기를 상소한 조심태. 그리고 그 때 조성한 저수지가 바로 만석거이다. 정조는 이 외에도 화성 주변에 만석거와 축만제, 만년제 등을 조성해 치수를 통한 과학적인 농경을 실시한다.

 

현재의 수원을 농업도시 수원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수원이 어떻게 농업도시가 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 것이다. 하지만 수원이야말로 과거 정조시대부터 지금까지 농업개혁의 도시이자 농업연구의 도시이다.

 

정조는 정조 17년인 1793년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오랜 시간 구상해 왔던 개혁을 시도하였다. 도시의 규모와 위상을 한양의 도성과 버금가도록 만들고 최고의 축성기술을 이용하여 공격과 수비에 용이한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한양 육의전 외에 화성에도 시전을 설치하여 상업발전을 도모하였으며, 농업기반시설을 조성하여 농업 진흥을 이루도록 독려하였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이상도시를 모범적으로 만든 뒤 이 모델이 전국적으로 파급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곳 수원화성은 정조가 만들고 싶었던 조선의 축소판이며 1794년은 그 첫발을 디딘 기념비적인 해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특별기획전을 준비하였다. 농업도시 수원의 전통을 재조명하고 수원시와 농림축산식품부가 함께 준비 중인 농어업역사문화전시체험관 건립에 내실을 기하고자, ‘수원화성 착공 220주년 기념으로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화성> 특별기획전시를 마련하였다.

 

 

정조대왕이 꿈꾼 나라는 강한 국가였다.

 

조선조 제22대 국왕으로 등극한 정조는 정조 2년인 17786, 당시 사회가 마치 병든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병든 사회를 타개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개혁과제를 대내외에 천명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경장대고(更張大誥)’이다. 백성이 풍요롭게 살고, 인재를 키워 나라를 살찌우며, 군사제도를 강화하여 국방력을 키우고, 재물의 씀씀이를 다져 재정이 튼튼한 나라. 정조가 꿈꾼 나라는 이 네 가지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은 농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국가의 재정수입도 그 해 농사의 풍흉에 달려 있었다. 정조는 어느 임금보다 농업 생산성을 안정시키고 증대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매년 정월에 권농교(勸農敎)와 권농윤음(勸農綸音)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농사지을 것을 권하고, 지방관들에게는 이에 대한 행정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당대의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종합하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이 정리하여 올린 응지농서(應旨農書)’를 바탕으로 농서대전農書大全편찬을 추진하였다.

 

 

만석거부터 조성하기 시작

 

정조는 1794년 화성성역을 일시 중지하고 대신 둔전을 만들고 화성유수 조심태가 간한 만석거(萬石渠)’라는 수리시설을 축조하도록 명령하였다. 만석거 축조로 인해 화성 장안문 밖의 드넓으면서도 척박했던 대유평은 수전지대로 변했으며 극심한 가뭄도 무사히 극복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화성에서 1798만년제(萬年堤)’, 1799년에는 축만제(祝萬堤)’가 연이어 축조되었으며, 수리시설 축조와 더불어 개간된 둔전에서 얻은 소출은 화성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정조대 서둔동 일대에 조성된 농업기반시설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권업모범장과 농림학교가 들어섰으며, 해방 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농촌진흥청이 설립됨으로써 수원은 농업연구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30일 오후 3시게 개막식을 갖고 201521일까지 특별기획전으로 전시가 되는 수원화성 착공 220주년 기념’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화성>전에는 수원화성의 수리시설과 둔전에 관한 자료는 물론 3D 영상물을 제작하여 척박했던 땅을 개간하여 둔전을 만들고, 수리시설을 통해 풍작을 이루는 모습을 이야기하듯이 풀어냈다.

 

특히 영상제작을 위하여 일제강점기 지적도 등을 검토하여 수원의 옛 지형과 물길을 고증하였다. 수리관개와 관련된 농기구와 함께 연출하여 보다 입체적인 상영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번 전시회에는 <홍재전서><응지농서>, 5.6m에 달하는 윤음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농학자로, 1836년 화성유수로 부임하여 농업개혁가로서 변모를 실현한 사유구의 관련유물 등이 전시된다.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령전 안에 있는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조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 화령전 운한각에서 2512시부터 262주기 정조대왕 탄신제향이 거행되었다. 운한각 안에는 순조의 하교에 의해 현릉원 재실에 모셨던 정조의 어진을 1801년에 옮겨 봉안하였다. 순조는 이 화령전을 축조한 후 매년 장중한 탄신제향을 이곳에서 거행하였는데, 조선의 임금 가운데 어진을 모신 전각에서 탄신일에 제향을 지낸 것은 정조대왕이 유일하다.

 

 

원래는 새벽 1시에 맞추어 제향을 올려

 

화령전에서 정조대왕의 탄신제향을 올리던 시간은 새벽 1시였다. 하지만 정조대왕의 탄신기념일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기를 바라고, 연례행사로 진행하기 위해 양력을 기준으로 삼아, 10월 네 번째 토요일에 올리기로 의견이 모아져 3년 전 복원한 탄신제향을 기본으로 현대적 요소를 가미해 지내게 되었다.

 

12시가 가까워지자 장용외영의 깃발을 든 장용영 무사들이 많은 유림의 인원을 대동하고 화령전 문안으로 들어섰다. 이날 제향은 행사안내를 시작으로 제관입장 - 망전례 - 초헌례 - 삼상향 - 독축 - 아헌례 - 종헌례 - 망료례 - 국궁사배례 - 예필례 - 음복례의 순으로 거행이 되었다.

 

 

이날 초헌관은 정조대왕 기념사업회 회장이 맡았으며, 아헌관은 염상덕 수원문화원장이, 종헌관은 김정수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가 맡았다. 창홀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이수자인 이상훈이 맡아 집례를 했다. 또한 여민락과 수제천 등의 의식음악은 수원국악예술단이 연주했다.

 

장중한 의식 볼 수 있어서 의미 있는 날이다

 

탄신제향을 찾은 한 시민은 올해 마음먹고 제향에 참석을 했다면서

말로만 듣던 궁중 제향을 이렇게 수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제향이라고 하면 성균관에서 열리던 문묘제향이나 종묘에서 역대 임금님들이 제를 지내는 종묘제례만 만날 수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화령전에서 정조대왕의 탄신제향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정말 수원시민으로서 자긍심을 느낀다.”고 한다.

 

 

중국에서 수원 화성 관광을 왔다가 이곳에서 정조대왕 탄신제향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는 한 관광객은

중국에도 많은 의식이 있지만 이렇게 국왕의 제향을 지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번에 한국에 나와 의미 있는 행사를 보게 되어 정말 기쁘다.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중국으로 돌아가면 지인들에게 자랑을 해야겠다,”며 웃는다.

 

제향이 시작되기 전에 화령전을 찾은 한 시민은 삼문 앞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다가

안내판에 정조대왕의 어진초상화리고 기록해 놓았다. 초상화는 일반인들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다. 대왕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어찌 어진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초상화라고 적고 있는가?”라고 뼈 있는 소리를 하기도.

 

어진이란 역대 왕들의 모습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을 말한다. 어진제작은 모두 세 종류로 도사(圖寫)와 추사(追寫) 그리고 모사(模寫)가 있다. 도사란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바라보면서 그린 것을 말한다. 추사란 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 수용을 그리는 경우이다. 모사란 이미 그린 어진이 훼손됐거나,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때 원본을 범본(範本)으로 해 신본을 그린 것을 말한다.

 

 

왕의 모습을 지칭하는 어진은 진용(眞容), (), 진영(眞影), 수용(晬容), 성용(聖容), 영자(影子), 영정(影幀), 어용(御容), 왕상(王像), 어영(御影) 등 다양하게 불렸다. 모두 왕을 높이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숙종 39년인 1713년 숙종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것을 이이명(李頤命)의 건의로 어진이라 했는데, 이후 이 명칭을 따라 어진이라고 주로 일컫는다.

 

한편 이날 독축에서 올린 정조대왕 탄신제 축문은 다음과 같다.

이제 단기 4347년 서기 2014년 갑오년 1025. 감히 조선국 제22대 국왕 정조 경천 명도 흥덕 영모 문성 무열 성인 장효 선황제께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장엄하고 근본 된 사당의 의절이 있으므로 화령전 운한각에서 제향을 올립니다. 얼굴색을 바로잡고 보시는 것과 같이 맑은 술과 여러 음식을 정갈하게 베풀어 밝게 올리니 삼가 흠향하여 주시옵소서.’

 

지난 13일 오후 1시부터 화성행궁 화령전에서 열린 5회 정조대왕 숭모 전국백일장 대회에서 뛰어난 글 솜씨로 선정된 입상자들의 시상식이 22일 오후 6시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있었다. 수원시인협회가 주최를 하고 정조대왕 숭모 전국백일장 집행위원회 주관, 수원문화재단이 후원한 백일장에는 500여명이 실력을 겨루었다.

 

이날 시상식에는 70여명의 수상자와 가족들이 참여를 했으며, 이번 백일장에는 대전을 비롯지방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해 실력을 겨루었다. 이날 시상식에는 임병호 경기시인협회 이사장을 비롯하여 김우영 수원시인협회 명예회장 등 시인들도 참석을 해 수상자들을 축하해 주었다.

 

5회 전국백일장에는 초등부에서 장원 구도윤(정자초 4)을 비롯하여 25명이 입상을 했으며, 중등부에서는 장원 김경모(천천중 3) 17명이 입상을 했다. 고등부에서는 안양예고 1학년에 재학 중인 유예정이 장원을 했으며, 그 외 17명이 입상을 했다. 대학, 일반부에서는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4학년인 염보라 양이 장원을 차지했으며, 그 외 16명이 입상을 했다.

 

 

해가 갈수록 글 솜씨들이 좋아져

 

인사말에 나선 수원시인협회 김광기 회장은 인문학 시대에 문학예술은 예술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다. 또한 산업분야에서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예술을 한층 발전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인사말을 했다. 이어서 축사에 나선 임병호 경기시인협회 이사장은 훌륭한 작품을 써준 여러분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해가 갈수록 글 솜씨들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 기쁘다앞으로 여러분들이 모두 열심히 글을 써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초등학생부 참방부터 시상에 들어가 일반부까지 시상을 마친 후, 김우영 수원시인협회 명예회장이 수상자로 나선 장원 입상자들에게는 염태영 수원시장의 상장이 주어졌다.

 

오늘 우리 아이가 상을 받는다고 해서 함께 왔어요. 아이가 이렇게 상을 받는 것도 처음이지만 앞으로 글쓰기를 열심히 연습을 해 내년에는 꼭 장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초등학교 입상자의 어머니라는 이아무개씨는 연신 아이가 대견스럽다고 즐거워한다.

 

 

뜻하지 않은 큰 상을 너무 고마움을 느낀다.

 

김우영 수원시인협회 명예회장은 이번 일반부의 장원은, 1등과 2등을 나누기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만큼 솜씨들이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고. 시상식이 끝난 후 대학, 일반부 장원을 한 단국대학교 문예창착과 4학년인 염보라 양을 만나보았다.

 

어머니께서 몸이 불편하셔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었어요. 그런데 병원에 찾아가보니 같은 병실에 할머니 한 분이 입원해 계셨는데 거의 운명을 하시기 직전이었죠. 그런데 자식들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글 소재로 삼았죠. 요즈음은 홀몸 어르신들이 많이 계셔서 그런 문제를 갖고 글을 썼어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염보라 양은 점점 고령화가 되어가는 사회를 바라보면서 그런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글로 담아냈다고 한다. 시상식을 마친 후 한 어머니는

아이들이 이렇게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백일장을 마련해 주어서 감사하다. 앞으로 아이에게 더 많은 책을 읽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내년에도 꼭 참석을 하여 더 실력을 쌓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한다.

 

조선시대 문예부흥을 일으킨 정조대왕의 혁신적인 위업과 문예사상, 효 정신을 계승하고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의 역사성을 널리 알리고자 개최하는 정조대왕 숭모 전국백일장. 이번 글 제목은 소리, 행궁의 가을, 보름달이 시제로 주어졌었다. 백일장에는 수원을 비롯하여 오산, 화성, 용인, 안양, 김포, 안성 등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으며, 그 외에도 인천 대전, 춘천, 보령 등에서도 일반부에 참가를 해 전국백일장 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신흠은 <상촌고>에 남긴 오언율시에서 송편을 유두절 음식으로 노래하고 있다.

유월이라 유두일 좋은 명절에(佳節流頭日)

황촌으로 내쫓긴 신하로구나(荒村放逐臣)

수단을 먹는 것은 토속을 따르고(水團遵土俗)

송편 빚어 이웃집에 선사하누나(松餠餽鄕鄰)

 

손으로 빚어서 만드는 떡. ‘이란 ()’이라고 표현을 한다. 나눔이기 때문에 정이라는 것이다. 과거 우리네들은 떡을 해서 이웃과 함께 온 동네가 나누어 먹었다. 그런 나눔의 정을 잊을 수가 없어 떡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 60(신풍동)에 소재한 수재떡 전문점 여미에서 만난 이순덕씨.

 

떡은 과거 나눔의 표상이죠. 우리네들은 집안에 잔치가 있거나 모든 경사가 있을 때 시루떡을 정성스럽게 쪄서 이웃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나눔의 정을 잊어가는 것 같아요. 그런 나눔의 정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서 떡을 만들기 시작했죠. 물론 떡집에서 떡을 해도 나눔은 마찬가지겠지만, 수제로 만든 떡은 그 안에 정성과 정이 함께 들어있어요.”

 

 

입안에 정이 남아 있어.”

 

수제 전문 떡집 여미’. 여미(餘味)‘염치의 방언으로 음식을 먹은 뒤에 입안에 남아 있는 맛을 말한다. 우리는 늘 음식을 먹는다. 하지만 그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그런 느낌을 제대로 느끼게 만들기 위해 수제떡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올 추석을 맞이해 조상님들께 제대로 만든 손맛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저희들은 현재 학교나 문화센터 등에서 전통주와 전통음식 등을 강의하고 있어요. 궁중음식이나 발효음식, 수제떡 전문가들이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든 떡을 사람들에게 공급하고 있죠. 떡은 혼자 먹는 음식이 아닙니다. 모두가 나누어 먹는 음식이죠.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석 연후가 끝나갈 무렵인 10일 오후. 지난해 생태교통 수원2013’을 이끌어 낸 행궁동 화서문로 수제떡집 여미에서 만난 이순덕씨는 우리 떡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단다. 시종일관 떡 자랑이다, 수제떡집 여미 점포 안에는 많은 떡이 보이지 않는다. 벽에는 각종 경연대회 등에서 수상을 한 상장만 즐비하게 붙어있다.

 

이번 추석에 많은 분들이 주문을 해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정말 쉬지도 못하고 떡을 만들었죠. 저희들은 기계로 만드는 떡이 아니기 때문에 세 사람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쉴 새 없이 일을 했어요. 점포 안에 모든 떡은 다 팔렸어요. 그리고 저희들의 떡은 오래가지가 않아서 많이 만들어 놓을 수가 없어요.”

 

 

정조의 마음을 알기에 행궁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순덕씨가 우리 수제떡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09년부터라고 한다. 떡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정을 나누기 위해서라는 것. 벽에 즐비한 상장은 그동안 이순덕씨가 얼마나 우리 떡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정말 밤낮으로 쉬지를 못했어요. 어떻게 해야 맛있는 떡을 만들 수 있나? 어떻게 해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조상님들이 즐겨 드시던 떡을 만들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하면서 떡을 만들다보니 정말 쉴 틈이 없었죠.”

 

그런 노력의 결실이 벽에 걸려있다. 20135월 대한민국 국제요리 경연대회 라이브 부분과 전시부분 금상, 20135월 국제요리 경연대회 전통주 부분 경기도지사상 수상, 10월 전주비빔밥축제 전국요리경연대회 전라북도 도지사상 수상, 20144월 한국음식관광박람회 궁중음식부분 국무총리상 수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정조대왕이 부친을 뵈러 화성 행궁으로 능행을 할 때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1795년의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어머니에게 각색 송병을 대접한 기록이 있어요. 여기에는 특이하게 돼지고기와 닭고기, 그리고 표고버섯과 석이까지 소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죠. 제가 행궁동에 자리를 튼 것은 이곳에 화성 행궁이 있기 때문입니다

 

5일이나 되는 추석연휴 끝날 만난 수제떡을 만든다는 이순덕씨. 떡 이야기만 나누어도 떡 맛이 솔솔 풍긴다. 정조대왕의 마음을 모든 이들에게 전하고 싶어 행궁동에 자릴 틀었다고 하는 수제떡집 여미의 대표 이순덕씨. 날을 잡아 정이 넘친다는 그 맛을 꼭 한 번 보아야겠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