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3일, 30도를 훌쩍 넘은 살인적인 더위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른다. 이런 날 이천에 있는 설봉산 영월암에 올랐다. 영월암 대웅전 뒤편 암벽에 새겨진 보물 제822호 마애여래입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남들은 이런 질문을 한다. ‘문화재라는 것을 한 번만 보면 되지 않나?’라는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한번 답사를 한 문화재라도 갈 기회가 있으면 다시 들리고는 한다. 그것은 문화재란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바위를 누가 떠 매고 갈 것도 아닌데’라고도 한다. 그래도 지켜보아야만 할 것이 바로 소중한 우리 문화재이다.

 

 

이천 설봉산 영월암(위)과 자연암석에 새긴 보물 마애불(아래)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도 없는데


주차장에서 영월암까지의 거리는 1.5km이다. 그리 높지 않은 설봉산이지만, 차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길이다. 거기다가 그 무더운 날에 한 어깨에는 무거운 카메라 가방까지 메고 있다. 돈을 준다고 오르라고 해도 마다할 산행이다. 하지만 절집을 찾아 참선을 하는 마음으로 주변 경치를 보면서 걸음을 옮긴다.


옷은 모두 젖어버렸다. 땀으로 흥건히 젖어버린 몰골은 꼭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그렇게 오른 영월암. 대웅전을 비켜 뒤로 오르니, 커다란 자연 암벽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 마애불은, 머리 부분과 손 부분은 얇게 돋을새김을 하였고 나머지는 선으로 음각하였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거대마애불

 

높이 9.6m의 거대한 이 마애불은 ‘마애여래불’로 명칭을 붙였지만, 민머리 등으로 보아 ‘마애조사상’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눈, 코와 입을 큼지막하게 새겼다. 두툼한 입술에 넙적한 코, 지그시 감은 눈과 커다랗게 양편에 걸린 귀. 그저 투박하기만 한 이 마애불에서 친근한 이웃집 어른을 만난 듯하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을 안으로 향했다.


얼굴과 두 손만 부조로 조성을 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우편견단의 형식으로 조성한 법의는 몸 전체를 감싸며 유연한 사선으로 흘러내린다. 이러한 옷의 주름이나 팔꿈치가 직각으로 굽혀진 것은 고려시대 마애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조사상이나 나한상으로 보기도 한다.


천 년 세월을 온갖 풍상에 저리도 의연하게 서 있는 마애불. 머리 부분은 암벽의 상단에 조각이 되어 올려다보면 몸에 비해 조금은 작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균형은 조금 비례가 맞지 않은 듯하지만, 저 단단한 암벽을 쪼개고 갈아 내어 저런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여인이여 무슨 사연이 있길래


마애불 앞에 한 여인이 절을 하고 있다. 이 복중에 어찌 그리 애를 닳는 것인지. 수도 없이 절을 하는 모습으로 보아, 아마 천배를 하는 듯하다. 물을 마시면서 해도 자칫 탈진이 올 수도 있다. 그런데 저렇게 이 복중에 절을 하다가 보면, 자칫 탈진이 올 수도 있는데. 나도 더운 복중에 천배를 해보았기에, 그 진한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 간절할까? 아마도 이렇게 자신을 던져 기원을 하는 것이라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곁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조차 죄스럽다. 그저 마음속으로 함께 기원을 하는 수밖에.

 


“천년 세월 이곳을 지켜 오신 설봉산 마애불님. 저리 간절히 비는 것이라면, 꼭 들어주세요. 세상엔 나쁜 사람들도 잘 사는데, 저리 땀을 흘리는 사람의 사연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세상을 지켜가는 것일 테니.”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를 만나다가 보면, 목이 잘린 석불들이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석불의 목이 잘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조 유생들에 의한 훼파와 더불어, 일제의 석불의 목 훼손이 극성을 떨었다. 근자에 들어서는 종교적인 이질감에 의한 훼손도 합해져, 여기저기 목이 잘린 석불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자리한 원주시립박물관 뒤편 길가에 보면 석불좌상 두 기가 나란히 있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일제 때 남산 추월대로 이전하였다가, 1962년 5월에 강원감영과 포정루 쪽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그 후 현재의 위치인 시립박물관 뒤편으로 옮겼다. 이 두 기의 불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져 새로 보수를 하였다. 새로 보수를 한 머리 부분이 조금은 걸맞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요즈음 말로하면 두 기의 목이 잘린 석불의 위에 새로 맞춰 올린 두상은 훈남에 속한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현재 남아 있는 몸체와 대좌만으로도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고려초기의 뛰어난 석불좌상

 

두 기의 석불좌상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단정한 체구의 세련된 형태, 법의는 통견에 평행 옷주름 등이 신라 말의 석불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서, 적어도 고려 초기의 수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얼굴 부분이 사라져서 그 뛰어난 모습의 전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위와 같은 모습으로 조각이 된 석불좌상. 이 석불도 머리가 잘려나간 것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

 

수인은 깨어진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상태로 보아, 지권인임이 분명하다. 두 기의 석불좌상은 같은 지권인을 하고 있는데, 두 기가 다 비로자나불 석불좌상으로 추정된다. 손이 깨어진 것조차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법의는 양 어깨로 흘러내려 주름이 잡혀있으며, 가슴에는 내의에 나비매듭을 엮었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여 오른발을 젖혀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이다. 법의가 무릎까지 덮고 있는데, 주름을 넣어 아름답게 표현을 하였다. 머리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두 기의 석불좌상이 앉아있는 대좌 역시 뛰어나다.

 

수인은 지권인을 한 모습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다

 

뛰어난 고려시대의 대좌를 보다.

 

이 두기의 석불좌상을 올려놓은 대좌는 두 기가 모두 사단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정면을 보고 우측에 있는 석불좌상의 대좌는 하단에는 팔각으로 조형을 해,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동물들을 부조로 조각하였다. 이단은 팔각으로 조성을 하고 조각을 했으며, 삼단 역시 팔각으로 해 천인상을 조각하였다.

 

대좌는 모두 4단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맨 위 사단은 원형으로 조성하고 꽃과 받침을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방의 장인이 아닌 중앙에서 활동하는 있는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좌측에 있는 석불좌상 역시 같은 형태로 대좌를 조성했는데, 이단에는 가지를 문양으로 넣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곳도 천인상을 새겼는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맨 위단에는 꽃을 새기고 넓은 잎을 새겨 넣은 것이 다르다.

 

 

우측 석불좌상의 대좌에 있는 천인상(위)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아래)

 

이런 형태로 닮은꼴로 조성이 된 두 기의 석불좌상이, 삼존불 좌상 가운데 양편에 있는 협시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고려 초기의 석불좌상. 비록 머리가 없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남은 부분만으로도 훌륭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이 두기의 석불좌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일괄 지정이 되어 있다.

홍천군 홍천읍 진리 구인당한약방 옆에 보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4호인 홍천 진리 석불이 있다. 좁은 보호각 안에 있는 이 석불입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2,28m에 받침대인 대좌나 광배도 없이 발견되었다. 발견될 당시 머리가 없던 것을 주민들이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석불입상이 입고 있는 옷의 형태나, 양편 팔목에 팔찌가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보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어깨에는 보살상의 옷인 천의가 길게 발목까지 늘어져 있고, 허리 아래서 부터는 치마인 군의가 여러 겹 주름치마로 표현이 되어 있다. 머리가 없어 시대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으나, 거친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입상으로 보인다.

 

 

좁은 보호각 창살, 답답해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문화재를 제대로 볼 수 없도록 막아놓거나, 좁은 살창 등으로 첩첩히 싸놓으면 그도 또한 불편하긴 마찬가지이다. 좁은 보호각 안에 석불입상이 있어 전체를 찍기가 어렵다. 그리고 전면은 목책으로 만들어져 있어, 전체 석불을 찍기도 어렵다.

 

부분을 나누어 찍다가 보니, 밑에는 누가 치성을 드린 흔적도 보인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 역시 머리를 주민들이 만들어 붙였다고 하는데, 그 모양새가 이상하다. 머리는 민머리에 얼굴이 넓적한 것이, 보살이라고 하기보다는 나한상에 가까운 머리를 올려놓았다.

 

어울리지 않는 머리가 슬프다

 

요즈음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머리가 없는 석불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머리는 과연 언제 어떻게 해서 사라진 것일까? 숭유정책을 편 조선조 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각종 정변을 통해서도 훼파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종교적인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도, 훼손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목 없는 석불들의 처리 방법이다. 석불은 지역마다 그 조각기법이 차이가 난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차이가 난다. 하기에 어느 지역, 어느 시기에 조성된 석불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보니 목이 없는 석불이 보기가 좋지 않아, 새로운 두상을 올려놓을 경우도 생긴다. 그럴 때는 가급적이면 전문가와 상의를 하여, 그 몸체에 걸 맞는 두상을 올려야 할 것이다. 자칫 전문가의 참여 없이, 보기가 흉하다가 하여 아무 두상이나 올려놓는다고 하면, 그는 차라리 아니함만 못하다. 지나침은 오히려 부족함보다도 못하다고 하지 않던가.

 

 

수난을 당해 목이 사라진 석불을 보기도 마음이 아픈데, 거기다가 아무런 두상이나 마구 올려놓아 더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이왕이면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서, 어울리는 머리 부분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한 자료가 이제는 CD로 3,000장이 훨씬 넘었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으니, 아마도 김정호 선생만큼은 안되도 이제는 구석구석 꽤 돌아다닌 듯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 문화재의 10분지 1도 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꼭 쓰고 싶은 책이 4권 정도이다. 하나는 정자요, 또 하나는 고택이다. 그리고 마애불에 대한 책도 한 번은 내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성곽이다. 성곽은 가는 곳마다 힘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한 바퀴를 돈다. 그것은 언젠가 성에 대한 역사이야기가 아니라, 성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쓰고 싶어서이다.

 

 

덕주공주가 청건했다는 덕주사를 가는 길

 

성을 보면 그 성곽이 얼마나 견고하게 쌓여졌는지 알 수가 있다. 월악산에 있는 덕주사를 오르다가 만나는 덕주산성.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덕주공주가 신라 말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덕주사를 오르는 길목에 만날 수가 있다.

 

원래 이 덕주산성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덕주공주는 이곳 덕주사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인 1256년에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덕주산성의 동문인 덕주루의 밖과 성안

 

월악대왕의 가호가 있다고 전하는 덕주산성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다. 조선조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3개의 성문이 남아았는 덕주산성

 

덕주산성은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이다.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인 월악루, 동문인 덕주루, 북문인 북정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한창 복원을 하고 있는 덕주산성의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다. 아름답게 조성을 한 월악루는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나 된다.

 

 

덕주루 성문의 안편 무지개아치와 덕주산성의 성벽 외부

 

덕주골 입구에 서 있는 동문인 덕주루는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 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으로 쌓여있다. 아는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시대에 따른 성을 쌓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겹으로 된 철옹성에는 슬픈 사연이 많아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 하 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동문주변), 그 외곽으로 하성이 있으며(제3곽)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 등 첩첩히 쌓여진 철옹성이다. 이러한 성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하여, 성문을 축조한 것일까? 권력이 무엇인지 참 슬픈 우리 역사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덕주루라고 현판이 붙은 동문. 보기에도 견고한 성이다. 문루 위로 올라가면 주변으로 쌓여진 성곽이 얼마나 첩첩이 쌓았는지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단단하게 쌓은 성곽이 어떤 일로 다 무너져 내렸을까? 역사란 이렇게 모든 것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북문인 북정문과 문 위에 복원한 문루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를 돌아보고 명오리를 지나 나오면 새터 말 도로변에 북문인 북정문이 있다. 최근 보수를 한 북정문은 평지에 있어서인가 동문인 덕주루보다 더 견고하게 축조가 되어있다. 북정문 곁에 놓여진 돌들을 보면 그 크기가 2m 가 넘는 것들이 있어, 이 덕주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북문 주변에 놓인 옛 성돌의 크기를 보면 덕주산성의 견고함을 알 수가 있다(위) 아래는 돌 축대를 쌓기 위해 사용한 석주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 역사의 훼손된 부분을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저 어디를 가나 온전히 보존이 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역사들. 그 안에는 우리 선조들의 땀과 피와 한이 맺혀져 있다. 그런 것 하나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과연 먼 후대에 우리의 자선들에게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그러한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는 길은, 우리의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전해주는 길 뿐이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2 운주사 경내에 소재한, 보물 제797호 운주사석조불감(雲住寺石造佛龕)을 보는 순간 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금동으로 목조각으로 만든 작은 불감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석조불감이 있다니.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이다.

 

하기에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다탑봉 골짜기에 자리한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의 대표적 예이다. 다탑봉이라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주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산의 정상에 이르는 동안 여러 기의 석탑과 불상을 볼 수 있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거대 석조불감 

 

건물을 본뜬 불감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그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서 보아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다.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예이다.

 

불상을 새긴 수법은 그리 정교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나타난 지방적인 특징이 잘 묻어나온다. 이처럼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유례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등을 서로 맞댄 감실 안의 두 불상 역시 특이한 형식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의 특징을 그대로

 

불감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안에 계신 부처님의 상을 보니, 눈을 지그시 감고계시다. 누군가가 입을 훼손한 듯도 하다. 꺼멓게 보이는 부분이 아마 무엇인가를 갖고 훼손을 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부처님 스스로 말 많은 세상, 입을 다물어 버리셨는가도 모르겠다. 좀 더 멀리 떨어져 바라다본다. 그래도 석조불감 안에 좌정하신 부처님은 미동도 없다.

 

그저 세상사 다 접어두고,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누군가 열심히 마음을 다하면 언젠가는 저 눈도 뜨시지는 않을까? 뒤로 돌아가 본다. 또 한분의 부처님이 앉아계시다. 등을 서로 맞대고 계신 두 분의 부처님들이 어떤 말을 우리에게 하는 것일까? 두 손을 모아 가슴으로 올린 부처님 역시 한일자로 굳게 입을 다물고 계시다.

 

 

 

그러나 찬찬히 올려다보면 그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느껴진다.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저 두 분은 등을 마주하고 계시는 것일까? 한분은 인간세계를 바라다보면서 할 말을 잊으신 것이고, 또 한분은 피안(彼岸)인 운주사 안을 바라보면서 참 세상을 알려주시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네 속 좁은 인간들이 그 뜻을 어찌 알리요. 하지만 운주사 불감 안에 계신 부처님들은 오늘도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계시다. 혹 그것이 세상을 바로 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마디 일침은 아니었을까?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그런 주문은 아니었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운주사 불감 안에 좌정하신 부처님을 바라보다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만다. ‘맞습니다. 세상에 가장 더러운 것은 바로 저랍니다. 오늘 그 모든 것을 참회합니다.’ 눈을 들어보니 주변에 가득한 탑들 위로 초여름의 무더운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불감 안에 두 분이 매우 더우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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