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는 보물 제97호로 지정된 거대한 원풍리 마애불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12m 높이의 자연 암벽 가운데 약 6m 정도의 네모 난 크기의 방형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두 구의 불상을 나란히 배치했다. 이렇게 쌍 좌상으로 조각을 한 예나, 자연 암벽에 감실을 조성한 경우는 극히 희귀한 예로 주목받고 있다.

 

연풍에서 충주 방향으로 새로 난 3번 도로를 이용해 나가다가 보면, 조령교를 지나 조령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신풍삼거리 지방도로 내려 3번 도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우측에 내를 끼고, 좌측 계단 위 암벽에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다.

 

 

눈이 채 녹지 않았을 때 찾아간 원풍리 마애불 가는 길은 그야말로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올라야 했다. 쌍 좌상으로 조성된 마애불을 바라보고, 눈이 쌓인 계단을 오르니 염불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마애불 앞에 천막을 치고, 안에서 염불을 하고 있다. 무슨 염원이 있기에, 추운 날 저리도 열심히 염불을 하고 있는 것일까?

 

거대한 마애불 조성 누가한 것은 나옹조사일까?

 

원풍리 마애불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를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다보여래는 석가모니가 설법을 할 때 다보탑과 함께 땅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설법이 참이라고 증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석가모니와 다보여래를 함께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경주 불국사에 조성된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법화경에 나오는 내용을 상징한다는 이러한 쌍 좌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드문 예이다.

 

 

 

자연암벽을 움푹하게 파서 자연적인 감실을 만든 것도 그러하지만,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두 분의 여래와 작은 화불을 조각한 것은 뛰어난 예술품으로 평가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말기 범어사에 묵고 있던 고승 여상조사가 조성했다고도 하고, 고려 때 나옹선사가 조성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인근 지역의 거대마애불의 한 형태로 보아, 고려중기인 12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서 전설에 보이는 나옹선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근한 이름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란 유명한 글을 남기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옹선사는 고려 말의 고승으로 역사의 격동기를 살았던 분이다. 1320년에 태어나 1376년에 입적한 나옹선사는 공민왕의 왕사이며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여상조사는 신라 말에 범어사에 묵었던 고승이라는 점을 보아도, 원풍리 마애불을 조성한 주인이라고 보기에는 시대가 맞지를 않는다. 과연 누가 이 거대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이여송이 두 부처님의 코를 망가트렸다?

 

감실 안에 조성된 두 분의 여래상을 보면 넓적한 얼굴에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이 마애불은 가늘고 긴 눈과 큰 입, 평평한 가슴 등 형식화된 면이 많이 보인다. 마모가 되어 알아보기 힘든 광배에는 작은 화불들이 5구씩 조각이 되어있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식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현재 어떠한 장식을 한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그런데 두 분 마애좌상을 보면 코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높은 곳에 조성한 마애불의 코가 어떻게 떨어져 있는 것일까? 전하는 말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기 위해 온 중국의 이여송이 원풍리 마애불을 보고, 그 마애불의 모습이 장사와 같다고 하여 코를 떼어갔다고 한다.

 

 

아마도 이여송은 이 마애불로 인해 주변에 장사라도 태어날 것을 염려했는가 보다. 또 일설에는 인근 마을에서 사는 여인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코를 떼어갔다고 하지만, 그 높은 곳을 올라 코를 떼어갔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다.

 

원풍리 마애불을 보고 내려오면서 도로 앞으로 흐르는 내를 보니, 자연 바위 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작은 폭포처럼 보인다. 저렇게 맑은 물이 흐르는 이곳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올려다 본 마애불이 엷은 미소를 띠우는 듯하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많은 얼굴들. 그 온기 없는 얼굴이 오히려 더 따듯하게 느껴진다. 아마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온기를 느끼고 싶음인가 보다.

난 원래 드라마와는 거리가 먼 인사이다. TV를 볼 때도 뉴스나 다큐멘터리 외에 것은 잘 보게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요즈음 새롭게 시작한 ‘신의’라는 드라마와 접하게 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채널을 돌리지 않고 본 유일한 드라마이다.

 

SBS의 드라마 ‘신의’는 2012년 8월 13일부터 방송하는 월화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기존에 만났던 드라마와는 다른 IF의 가정설을 극화한 드라마이다. 사람들은 색다른 소재에 늘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 신의는 첫 회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고 볼 수 있다.

 

 

김종학 연출 송지나 극본의, 신의는 고려 공민왕 1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과거를 사는 무사 최영 역의 이민호, 조금은 푼수 같이 현대를 살아가는 속된 여의사 유은수 역의 김희선, 기철 역의 유오성, 공민왕 역의 류덕환, 노국공주 역의 박세영등이 열연을 한다.

 

상상 속으로의 여행이 주는 재미

 

이 드라마에서 우리가 주시해야 할 배우는, 한참이나 연기를 쉬었다가 브라운관을 통해 만나게 되는 여의사 유은수역의 김희선이다. 2012년 서울의 강남에서 병원이라도 개업하기 위해서는 돈 많은 남자를 잡아야한다는 조금은 너무나 시대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여의사 유은수는, 시공을 초월해 고려에서 현대로 온 최영에게 이끌려 고려로의 여행을 떠난다.

 

칼을 맞은 노국공주를 살려 낸 유은수는 다시 서울로 돌아오려고 하지만, 하늘 문이 닫혀버리게 된다. 유은수는 돌아갈 수가 없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최영을 칼로 찌르게 되고, 다시 최영을 살려내기 위해 수술을 감행한다. 그리고 난 뒤 궁 안에서 온갖 팔푼이 같은 좌충우돌을 해가며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푼수 여의사의 좌충우돌 고려생활

 

33세의 성형외과 전문의 유은수. 그녀는 외과전공이었지만, 외과가 돈이 안 된다고 하자 미련없이 성형외과를 택한 조금은 속물스런 요즘여자이다. 그런 유은수의 행동은 낯선 과거의 세계 고려의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오직 현대로 돌아가 3년만 고생을 해서 돈 많은 친구를 꼬드겨 강남에 개업의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현대에서 하늘 문을 통해 660년 전의 고려로 최영에게 끌려간 여의사 유은수(김희선). 조금은 팔문이 같은 그녀의 연기가 드라마의 재미를 더한다.

 

29세의 고려무사 최영, 그 남자는 엑스트라 분장을 하고 여의사 유은수를 납치해 고려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이 푼수 끼 많은 여의사에게 무엇인가 조금씩 끌려가고 있다. 여의사 유은수도 이 660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강남에서 고려로 자신을 데려간 젊은 무사의 눈빛 속에 깃든 슬픔을 보게 되고, 그런 젊은 우달치부대의 대장인 최영에게 마음이 끌린다.

 

판타지와 역사,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서부터 꿈을 꾼다. 어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았다면, 꿈속에서 자신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그 나쁜 사람을 벌한다. 또는 하늘을 날아 역사 저 편으로 가서 활약을 한다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악한들을 혼내기도 한다. 드라마 ‘신의’는 그런 재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역사 속에서 가정은 늘 재미롭다. 만약에 그 시대에 내가 그곳에서 이렇게 적을 물리쳤다면, 혹은 악한들을 물리쳤다면, 과연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등의 꿈을 이루어 줄 수가 있다.

 

최영 역을 맡은 이민호. 많은 우려를 나았으나 그의 연기는 눈에서 보이는 슬픔으로 인해 한 역사를 이끌어가는 비운의 무사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드라마 ‘신의’에는 긱양각색의 군상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사람, 그런가 하면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 미련 없이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사람도 만날 수 있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도 그 안에 존재시키는 재미를 느낄 수가 있다.

 

총 24부작으로 우리에게 수백 년의 시대를 뛰어넘어 만나게 되는 사랑을 보여 줄 드라마 ‘신의’. 서로가 추구하던 삶의 목적이 달랐지만, 이들은 시공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단다. 어찌 보면 드라마 ‘신의‘는 우리에게 주는 재미 외에도, 진정한 사랑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군상들에게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기 위해 일침을 가하는지도 모르겠다. 여의사 유은수 역의 김희선의 연기가 기대되는 것도, 지금까지의 그녀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재미 때문일 것이다.(자료 사진은 SBS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전북 익산시 웅포면 송천리에 소재한 숭림사. 고려 충목왕 원년인 1345년에 처음으로 창건된 선종 고찰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어떻게 변천이 되어왔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다만 숭림사의 대웅전인 보광전 중수기에 따르면 순조 19년인 1819년에 중수를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숭림'이라는 사찰명은 중국의 달마대사가 숭산 소림사에서 9년간 앉아 도를 닦고 득도하여, 첫 선종사찰이 되었으므로 숭산의 '숭(崇)'자와 소림의 '림(林)'자를 따서 숭림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맞배지붕인 보광전은 단아한 아름다움 배어있어

 

숭림사는 보광전이 대웅전이다. 보광전 안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안치하였는데, 복장기문에 의하면 조선조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조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복장기문에 의해 보광전은 17세기 이전에 지은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보물 제82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보광전의 규모는, 정면 3칸·측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대웅전이 맞배지붕으로 구성된 예도 드문 경우이지만, 보광전의 건축기법과 법식이 특이해 조선조 후기 건축물 연구에 주목받는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조성된 숭림사 보광전. 주변을 돌면서 살펴보면 참으로 단아한 멋을 느낄 수가 있다.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화려하지 않은 보광전은 중간 중간 기둥들이 자연 재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다듬지 않고 사용한 나무들이 그대로 자연을 느끼게 만든다.

 

 

 

자연석인 주추의 위를 평평하게 다듬은 것 또한 그러하다. 지붕의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물인 다포양식임에도 건물 옆면에 공포를 배치하지 않은 것 또한 특이하다. 화려하지 않고 단아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은 숭림사 보광전. 보물로 지정된 까닭을 알 만하다.

 

보광전 안 닫집의 아름다움

 

보광전의 불상 안에는 용과 구름으로 조각이 된 화려한 닫집이 장식되어 있다. 보광전 건물 안쪽은 보 끝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고, 기둥 윗부분에는 연꽃, 용의 몸, 용 앞발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건축 부재들이 화려한 모양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외부의 장식과는 달리, 보광전의 내부 장식은 화려하게 치장이 되어있다.

 

 

 

퇴색할 대로 퇴색이 된 닫집은 그야말로 목조각 예술의 극치를 표현하고 있다. 연꽃과 구름 용 등이 서로가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닫집은 요즈음의 닫집의 형태와는 차이가 있다. 퇴색한 색이 오히려 닫집의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듯하다.

 

보물 제825호 숭림사 보광전. 그저 낮은 야산 자락에 자리를 하고 앉은 전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야할 것처럼 자리를 하고 있다. 오래된 고향집을 찾은 것처럼 편안함을 주는 숭림사 보광전.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마음을 편하게 하기 때문인가 보다. 크고 화려하게 지어대는 요즈음의 건축물 때문에 오히려 크지 않고 화려하지 않은 숭림사 보광전이 더욱 값지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오래도록 그 앞을 떠나지 못한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무엇인가에 간절한 바람을 빌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각자가 마음속에 믿는 종교적 대상을 찾아간다. 나도 인간이기에 다를 바가 없는 것이, 힘이 들 때면 무엇인가 마음을 정리할 곳을 찾아 길을 나선다. 그저 문화재를 답사하다 보니 많은 신앙의 대상을 만나게 되고,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마음속 간구를 해보기 위함이다.

 

양평에 있는 정자와 문화재를 답사 중에 전화를 받았다. 아는 분이 갑자기 사망을 했다는 것이다. 지인이라고는 해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분이다. 그저 풍문으로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 늘 친근한 사람인양 착각을 하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런데 한창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다니.

 

 

우리나라 최대의 지장보살입상이 있는 미타사

 

아침에 가방을 둘러메고 길을 나섰다.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찾아가,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다. 마침 멀지 않은 곳인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미타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지장보살입상이 있는 곳이라서 그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절집에서 지장보살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미타사를 오르는 입구에 장엄하게 서 있는 지장보살입상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잠시 마음속으로 간구를 한다. 그저 혼자 가야하는 길이니 부디 편안하시라고. 그리고 다음 세상일랑 아무쪼록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자고.

 

 

갑자기 찾아 온 발가락통증

 

잠시 미타사로 오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비탈길의 좌측에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전각을 지은 곳이 있다.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곳이다. 현재 충북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은, 화강암 자연석에 동쪽으로 향하여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전각을 지어놓아 조금은 어두운 듯하지만, 주변을 모두 석축으로 조성을 해 말끔하게 정리를 해 놓았다. 그런데 이 마애불을 찾아 돌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발가락에 심한 통증이 온다. 갑자기 통증이 밀려오니 걸음도 편하게 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아직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이제 슬슬 몸에 ‘늙어간다’는 신호인 듯하다.

 

 

발을 절룩거리며 계단 위로 오르니, 장엄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마애여래입상 앞, 나무로 만든 곳에 털썩 주저 않는다. 발가락에 찾아온 통증은 숨이 막힐 정도다. 답사를 한다고 산길 등을 무리하게 오래 걷다가 보면, 가끔 허벅지 등에 아픔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고려 후기의 마애여래입상을 만나다

 

잠시 앉아 발가락을 주무르며 마애불을 올려다본다.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은 머리와 어깨 부분을 돋을새김을 하고, 나머지는 모두 선각으로 처리를 하였다. 양 옆으로는 누군가 돌을 길게 쪼아낸 흔적이 있다. 처음에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생긴 작업의 흔적은 아니다. 후에 누군가 마애불을 더 정확하게 보일 수 있도록, 돌을 긁어낸 듯하다.

 

미타사 마애여래입상은 소발인 머리에, 상호는 넓적하고 둥근 편이다. 원만하게 표현이 된 얼굴 부분은 눈, 코, 입 등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하게 알아볼 수가 없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전체적으로는 자비로운 얼굴이다. 어깨는 수평으로 돋을새김을 해 당당하다.

 

이 마애여래입상의 수인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미타불 수인의 한 종류인 듯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우견편단으로 조성했다. 양편의 팔에 늘어진 옷자락은 V자를 그리고 있으며, 주름이 사선으로 그려져 있다. 발 부분은 생략이 된 듯하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도식화한 것으로 보아, 이 마애여래입상의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 후반기로 보인다.

 

 

 

그래도 답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마애불 촬영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른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진다. 이왕 나선 길이다. 몇 군데를 더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마애불을 올려다보는 순간, 이 마애불을 조성한 장인은 왜 이런 산골짜기에 들어와, 그 오랜 시간 바위를 쪼개 마애불을 조성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장인도 나처럼 누군가의 평안을 위해 이렇게 바위를 쪼개고 다듬어 마애불을 조상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먼 길 떠나는 고인의 마지막 길이 평안하기를 다시 한 번 빌고 뒤돌아선다.

 

 

 

발가락의 통증은 참기가 어려울 정도다. 마침 고인을 모신 곳이 병원이라, 진찰을 받아보았다. 발을 너무 무리하게 많이 사용해 통증이 왔다는 것이다. 약을 복용하고 편히 쉬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안심이 된다. 답사를 떠나는 길은, 결코 편안한 길이 아니다. 하지만 그 먼 길을 가는 분도 있기에, 통증이 조금만 갈아 앉는다면, 또 길을 나서리라 마음을 먹는다.

기온이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산을 오르는 행위는, 그야말로 제 정신이 아닌 행동이다. 그것도 무슨 돈벌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날이 좀 선선해 진 다음에 해도 될 텐데 말이다. 늘 새로운 것을 써야 하는 문화재 답사는, 웬만한 정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연 8일 째 찜통더위라는 8월 4일.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고달사지’를 찾았다. 꼭 고달사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위 해목산 중턱에 있는 상교리 석실묘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기념물 제198호인 상교리 고려 석실묘는, 고달사지 느티나무에서 800m 정도를 해목산으로 오르면 된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길을 걷다가 보니 옆으로 차들이 지나간다. 팍팍한 여름의 길은 차가 천천히 지나가도 뿌옇게 먼지가 인다. 그 또한 참기 힘든 일이다. 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소리가 들린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이런 날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니”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이 맞는 듯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33도가 넘었다는 시간에 멀지 않은 길이라고 해도,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오를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잘 정리가 된 고달사지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원종대사 승탑을 만날 수가 있다. 그 못미처 해목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안내판에는 ‘여주 상교리 고려 석실묘 500m'라고 적혀있다. 그동안 산으로 오르면서 이 500m에 대한 아픈 기억이 생겼다. 몇 곳의 문화재를 답사를 하다가, 500m 안내판을 보고 길을 나서 더위에 몇 번인가 탈진이 오는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벌써 3번 째 오르는 곳이다. 처음 100m 정도만 가파를 뿐, 그 다음부터는 평지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8월 복중에 오르는 길이다. 그리 만만치가 않다. 산을 오르면서 만난 나무들도 찜통더위에 지쳤는지, 모두 잎들이 기운없이 늘어져 있다. 며칠만 이 더위가 계속되면 농작물에도 심각한 정도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한다.

 

 


 

주변 정리가 잘 되어있는 석실묘


석실에 도착하니 주변이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다. 세 번째 오른 석실묘이지만,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모습은 처음이다. 사실은 며칠 전에 누군가 전화를 했다. ‘여주 고달사지 뒤편 석실묘에 잡풀이 자라 엉망이다’라고. 그래서 오른 해목산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것을 보니, 이 더위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석실로 조성한 이 고분은 1983년 11월 ~12월에 한양대학교 박물관 발굴단에 의해서 완료가 되었다. 발굴 당시 상감청자 파편 등의 유물로 보아 고려 때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석실은 고려 때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발굴 전에 석실의 기단부는 완전히 흙더미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불탑의 기단을 연상케 하는 방향기단


석실의 지상 위에 쌓인 돌로 조성한 방향기단과, 그 밑에 연도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석실로 구분이 되어있다. 하부의 원형의 석실에는 연도가 달려 있고, 상부에는 방형의 이층으로 된 기단이 쌓여있어 ‘상방하원 석실묘’라는 명칭을 붙였다. 지하의 석실은 원형으로 돌 축대를 쌓고, 그 앞으로는 연도를 조성해 열쇠모양의 형태처럼 조성하였다.


석실의 위편은 큰 돌 두 장을 놓아 석실을 덮고 있으며, 그 위에는 이층으로 제단 모양으로 된 기단이 있다. 1층 기단은 동서가 442em, 남북이 280cm, 높이가 46cm 정도의 장방형이고, 2층 기단은 그보다 조금 적지만 높이는 50cm 정도이다. 현실 벽의 높이는 167~175cm 정도이다.

 


고려 말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실묘는, 아래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로 미루어보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석실 위에 돌탑처럼 방형기단을 조성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찾아간 상교리 고려 석실묘. 말끔하게 정리한 문화재의 주변이, 잠시 그 찜통더위를 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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