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정림사지에는,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석불좌상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전각을 세우고 그 안에 모셔져 있다. 현재 이 전각을 세운 자리는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곳이 백제시대 절터의 강당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이다. 정림사는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림사라는 명칭도 고려시대의 절 이름이다.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명문을 통해 고려시대에 백제 때의 강당자리를 금당으로 삼아, 이 석불을 주존불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석불좌상.

 

날씨가 차갑다. 지난 날 온 눈이 녹아 정림사지 안은 온통 질퍽하다. 신발에 흙이 달라붙어 걷기조차 힘들다. 전각의 계단 위에는 온통 진흙투성이다. 달라붙은 흙을 이곳으로 털어냈기 때문이다. 많은 돈을 들여 정림사지를 정비를 한다고 하면, 이렇게 신발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흙이 달라붙지 않도록 마당정비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전각은 7칸으로 짓고, 중앙을 위시해 좌우로 문을 내었다. 대개 절의 대웅전 등은 가운데 문은 ‘어간문’이라고 하여 일반인들은 출입을 삼간다. 좌우 문을 통해 출입을 하는 것이 예의지만, 정림사지 전각은 가운데 문으로 드나들어 안도 온통 흙투성이이다. 날씨가 이러하니 괸람객들도 별 도리가 없겠지만.

 

전각 안에 모셔진 보물 제108호인 정림사지 석불좌상. 올려다보는 순간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고려 때 조성이 된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 거대석불의 한 맥락으로 보인다. 그만큼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나 석불 등은 크기에서 어느 시대의 것보다는 거대불들이 많이 남아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가 보관은 머리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게 제작이 되어 얹혀 있다.

 

 

심하게 파괴가 된 석불좌상

 

이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가 된 것이다. 지금의 형태로는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대좌 등의 솜씨로 보아 당시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는 석불좌상으로 보인다.

 

머리와 갓은 후대에 다시 만들었다고 하지만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형태는 왼팔을 가슴께로 끌어올렸으나, 오른팔은 어깨서부터 떨어져나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들다.다만 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를 통해 당시 이 석불좌상의 위엄을 엿볼 수가 있을 뿐이다. 이 대좌는 남원 만복사지 경내에 남아있는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불상 양식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된 대좌는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대좌의 아름다움으로 마모된 불상을 기억하다

 

대좌는 삼단으로 나누어 조각을 하였으며, 가운데 중대는 좁고, 상대와 하대가 넓은 ‘공(工)’자 형태로 구성을 하였다. 대좌도 많이 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석불좌상에 비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팔각 받침돌로 구성을 하고, 각 면에 큼직한 눈 모양을 새겨 넣었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을 했다.

 

여러 단의 돌을 놓고, 그 안에 갖가지 조각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한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대좌. 그 대좌 하나만으로도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위상을 기억해 내기란 어렵지가 않다. 아마도 백제 때의 중심사찰이었던 이곳에 정림사를 세운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강성한 나라를 꿈꿔왔을 것이다. 정림사지 석불좌상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지만, 볼 때마다 조금씩 달라 보이는 것은 그만큼 내 눈이 열리고 있기 때문인지.

문화재 답사는 답사라는 특성상 날마다 새로운 문화재를 그때그때 답사를 해서, 날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 기사가 일반적인 뉴스의 생성과 달리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2박 3일 정도 답사를 나가게 되면, 15~20점 정도의 문화재를 담아오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마을에서 조금 위편에 보면, 경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이 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일대가 바로 승안사지이다. 승안사지는 통일신라 때 상당히 번창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승안사는 성종 12년인 1481년에 편찬된 『둥국여지승람』에는 기록되어 있는 절이다.

 

승안사지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12월이 다 지나기 전에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고 있던 승안사지다. 좁은 길로 마을들을 이리저리 지나 도착한 승안사지. 이곳에는 보물 제294호인 승안사지 삼층석탑이, 석불좌상과 20m 정도 떨어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고 300여년 정도가 지난, 정조 23년인 1799년에 발간된 『범우고』에는 승안사지가 사라지고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승안사는 언제 무슨 일에 의해서 사라진 것일까? 현재 있는 석불좌상의 크기로 보아,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의 거대불로 보인다. 고려시대 때에 이렇게 큰 거대불을 조성한 이유는 북벌의 상징이다. 옛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세월의 흔적이 아닌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서 파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안사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비례가 맞지 않아 어색한 석조여래좌상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 많은 석조문화재가 조성이 되었다. 그 중에서 석조불상과 석탑 등은 상당수에 이른다.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역시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심하게 훼손이 되어 본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머리는 민머리인 듯한 이 석조여래좌상은 모든 비율이 제대로 맞지가 않는다. 눈은 움푹 들어간 듯 보이며 코가 유난히 크다. 얼굴이 길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다. 여래좌상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석인과 같은 모습에 가깝다. 좁은 어깨로 인해 전체적인 체구는 왜소해 보이며, 유난히 큰 코와 일자로 꽉 다문 입으로 인해 엄격한 인상을 풍긴다.

 

목 부분이 떨어진 것을 붙여놓은 자국이 남아있으며, 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쳤다. 옷의 주름도 사선으로 비스듬히 나타나고 있어, 자연스럽지 못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구성의 비례가 잘 맞지가 않아 어색해 보인다.

 

잘린 팔과 사라진 하반신

 

이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은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거기다가 좌상의 발 부분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 현재 좌상의 다리 부분은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심하게 훼손이 된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이 거대한 석불의 팔과 다리 부분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훼손이 되었을까?

 

 

조선조 성종 12년 부터 정조 23년 사이에 이곳에 어떤 재난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융성하던 승안사라는 사찰이 사라지고, 이렇게 거대석불이 심하게 훼손을 입을 것을 볼 때, 어떠한 재난을 당했다는 것을 추정할 뿐이다. 기록문화에 약한 우리의 문화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것은, 바로 이런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하기에 이렇게라도 기록을 남겨 후손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에, 바쁜 답사 길을 재촉하는가 보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숱한 문화재를 찬탈해간 일제는,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에 어지간히 욕심을 내었던 것만 같다. 그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예, 조선 전체를 들고 가지 그랬어!”라는 말이다. 그런 말이 하고 싶을 정도로 일제는, 우리 문화재를 수도 없이 일본으로 가져갔다.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뒤뜰에 서 있는 보물 제276호인 발산리 오층석탑. 지금은 오층은 사라지고 사층만 남아있다. 이층의 기단위에 세운 이 오층석탑은 원래는 완주군 고삼면 삼기리 봉산사 터에 남아있던 석탑이다. 이 석탑을 군산 개정면에 농장을 갖고 있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오층석탑

 

아마도 처음에는 이 석탑도 오층이었을 것이다. 그런 탑의 맨 위층이 사라졌다는 것은, 다 들고 갈 수 없어, 그 위층만 가져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석탑은 신라 탑의 모양을 본 따 제작한 우수한 석조공예품이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간결하게 정리가 된 고려 탑의 조형미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탑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졌으나, 그 후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옮겨 딴 곳에 터를 잡고 있지만, 이 석탑과 석등은 제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 소재가 분명한 것을 이렇게 엉뚱한 곳에 놓아둔다는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옥개석의 아름다운 곡선에 반하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받침돌은 신라 석탑을 모방하였다. 네 개의 기둥을 새긴 몸돌인 탑신석과 머릿돌인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하였다. 삼단 받침으로 꾸민 지붕돌은 끝이 약간 위로 치켜져 있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백제탑의 양식이 화려하고, 신라탑의 모습은 장중하다고 한다. 고려 초기의 석탑의 형태를 보면 이런 백제탑과 신라탑의 형태를 모방해,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탑의 형태를 창출해 내었다.

 

 

그 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지붕돌인 옥개석의 추녀 끝이다. 마치 한옥의 처마가 치켜 올라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듯, 그렇게 엷은 곡선을 그리고 있다. 자칫 딱딱한 석조 조형물인 석탑을, 그 곡선하나가 여유로움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지붕돌에서 보이는 처마 끝이 올라간 곡선이 고려탑의 특징이다.

 

투박한 이층기단을 몸돌이 살려내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이층의 기단 위에 오층을 올린 탑이다. 이층의 기단 중 아래기단은 삼단의 낮은 단으로 쌓았는데, 그 낮은 기단 안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하였다. 고려의 석조물에서 보이는 안상은 보이지 않는다. 상층 기단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장의 돌로 표현을 하였다. 상층 기단의 몸돌에는 우주를 표현하고, 지붕돌인 덮개돌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그런 형태가 탑의 몸돌과 구분이 된다.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오층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그 꾸밈새 안에는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자칫 기단의 투박함이 몸돌이 표현한 부드러움에 묻혀있다. 돌을 이용한 탑을 조성하면서도, 나름 그 아름다움을 창출해 낸 고려탑. 그 처마 선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백제탑의 우아하고 선이 아름다운 점과, 신라탑의 장중하고 무게가 있는 이점만을 골라 탑을 조성하였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고찰 무량사에 소재한 오층석탑이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문성왕(서기 839~856)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무량사는 고려 초기에 대중창을 하여 30여동의 요사와 12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전소가 된 것을, 조선 인조(서기 1623~1649) 때 진묵대사께서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절이다. 무량사를 찾은 날은, 절 경내에 하얀 눈이 꽤 많이 쌓여있다. 경내에는 사람들이 다닐만한 길만 치워놓았을 정도이고, 탑 주변에도 눈이 하얗게 쌓여있다.

 

오랜 기억에 남아있는 무량사

 

무량사는 인연이 깊은 절이다. 벌써 20여 년 전부터 이곳을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1993년이었으니, 올 해로 20년 째 이곳을 몇 번이고 찾아왔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명창이신 고 박동진 선생님과 동행을 했었다. 판소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서 들린 곳이었기에, 남다른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때도 무량사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기억이 난다. 다만 김창진 명창이 10년 세월을 득음을 위해 독공을 했다는 삼성각 앞에, 또 한 채의 요사가 자리를 하고 있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무량사는 늘 정겨운 곳이다. 전국의 사찰을 문화재답사를 위해 찾아다니지만, 가끔은 너무나 많은 변화로 인해 당황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려전기의 균형 잡힌 오층석탑

 

무량사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보물인 석등과 오층석탑, 그리고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전이 일렬로 서 있다. 맨 앞에는 보물 제233호인 석등이 서 있고, 그 뒤편에 보물 제18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그 뒤편에는 외부를 중층으로 지어진 보물인 극락전의 웅장한 자태를 볼 수가 있다.

 

눈이 쌓인 한 겨울의 오층석탑. 이 무량사 오층석탑은 고려 전기에 조성한 탑이다. 이 탑은 백제탑의 아름다움과, 신라탑의 장중함을 이어받아 조성한 것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기단은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을 했다. 기단부에 조성한 석재의 면을 둥글게 깎아내어,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한 마디로 균형이 잘 잡혀있다. 그런 점이 안정감이 보이기도 한다. 몸돌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덮개석인 지붕돌과 몸돌의 줄어드는 비례가 알맞아,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지붕돌의 넓이가 몸돌에 비해 넓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이 탑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낮은 몸돌을 지붕돌이 무게감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탑, 어디한 곳 흠잡을 데가 없어

 

무량사 오층석탑을 보고 있노라면, 백제와 신라의 문물이 합쳐 낸 문화의 극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두 고대국가의 서로 다른 문화가 이곳에서 만나, 석조문화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무량사 오층석탑은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만든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마저도 추운 줄을 모르니 말이다.

 

기단부 상단에는 우주와 탱주를 서로 다른 돌을 이용해 표현을 했다. 그리고 아래지석과 위 덮개석의 면을 둥글게 깎아, 석재가 주는 딱딱함을 없앴다. 그 위에 몸돌은 층이 올라 갈수록 줄어들면서, 적당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아랫면을 홈을 내어, 몸돌이 겉돌지 않게 조성을 하였다. 몇 장의 돌을 이용해 지붕돌을 조성하였다는 것도 특이하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아있다. 몸돌이 이층부터 차츰 줄어든다가나, 받침돌의 면을 둥글게 조성한 것들이 그러하다. 아마도 이 오층석탑을 조성한 장인이 백제와 신라의 많은 탑을 돌아본 후, 이 탑을 조성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무량사 오층석탑의 아름다운 선의 정점은, 바로 지붕돌의 처마 끝에서 보인다.

 

 

한 장의 돌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양편의 처마 끝이 날아오르듯 위로 적당히 솟아있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선을 표현할 수가 있었을까? 많이 치솟지도 않고, 그렇다고 처지지도 않게 솟아오른 처마 끝. 그저 석탑 하나에도 이렇게 아름다움을 표현 할 수 있었던 선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언제나 이런 감탄이 끝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발길이 닿는 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려는지.

경기도 화성시 기안동 산2-2 등 40필지에 조성이 된, 경기도 기념물 제93호 ‘수원고읍성 (水原古邑城)’은 최초로 조성한 시기가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흙을 다져 쌓은 이 고읍성은 토성으로 조성을 하였다.

 

고려 때 수원에 읍성으로 쌓았으며, 조선 정조 13년인 1789년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읍성을 쌓을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당시도 이곳이 수원부의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토성으로 쌓은 수원고읍성

 

수원 고읍성은 본래 낮은 산의 능선을 이용하여 계곡 아래의 평지까지 에워 싼 형태였으나, 성터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540m 안팎이다. 아래는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윗부분의 넓이는 2∼2.5m이고 높이는 4∼5m, 경사면은 7~8m 정도이다. 이 토성에는 동문터와 서문터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수원고읍성의 옛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1,320m쯤 되며, 성안에는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복원하여 보면, 융릉의 뒤편까지 토성이 뻗어있기 때문에 4km쯤 되어 큰 차이가 난다. 결국 이 성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읍성의 기능을 갖고 있다가, 수원 화성으로 읍치를 옮길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이 축성될 때까지 읍성의 기능을 가져

 

이 수원고읍성은 아래에 활석을 깔고 그 위에 판축을 하거나 적갈색 통양을 두텁게 쌓아서 조성하였다. 현재 토성의 성벽은 도로로 인하여 잘려있으며, 이곳을 마을사람들은 ‘고서문(古西門)’ 또는 ‘고자문(古字門)’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서문 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동북쪽 꼭대기에도 동문 터가 남아있다.

 

11월 10일(토) 오후에 찾아간 수원고읍성. 주변은 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안내판이 없었다면 읍성인지 아니면 그저 토축이 쌓인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질 않는다. 읍성 내에는 관아와 객사, 군영, 운금루 등의 건물지만 일부 발굴이 되었으며, 다른 건물들은 이미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자리조차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주변 정리부터 해야

 

성내에는 고려시재와 조선조의 기와와 자기류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는데, 고려시대부터 수 백년 동안 수원의 읍성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많은 전각과 군사들이 기거를 하였던 것 때문인 듯하다.

 

경사면을 밟고 올라가는데 쌓인 낙엽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그저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 하나로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외에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선뜻 알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석축 위로 길처럼 조성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옛 읍성의 성벽의 위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무슨 큰 역할을 하였겠느냐고 한다. 하지만 토성은 그 나름대로 지키는 방법이 있었다. 고려 때 쌓은 성이라면 당시의 전쟁을 할 때의 주 무기는 칼과 창, 활 등이다. 만일 적이 이 경사진 면을 기어오른다고 하면, 겨울에는 물을 뿌려 경사면을 얼리고, 여름에는 물을 부어 미끄럽고 발이 빠지도록 한다.

 

낮은 토성이긴 하지만, 이 토성은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감당을 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길지 않은 구간을 돌아보았지만, 주변이 엉망이다. 기념물이라고 해도 역시 문화재이다. 문화재 주변이 온통 정신이 사납다. 문화재 안내판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 수원고읍성. 담당부서에서는 주변부터 정리를 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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