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에는 고려 때의 절이었던 안국사지가 있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를 않아 언제 이 절이 창건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발굴조사 시 발견된 유물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절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중창을 하였으나, 다시 폐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절들이 이렇게 중건과 소실, 혹은 폐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긴 시간을 전해진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석불과 석탑 등이 남아 그 역사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역사의 흔적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때야 추정이 가능하지만, 지금처럼 이리저리 그 소중한 문화재들을 옮겨다니면 그도 힘들어질까 걱정이 된다.


불안정한 모습, 그러나 고려의 석불

안국사지에는 석불입상이 있다. 좌우에 협시보살이 서 있고 중앙에 본존불이 서 있는 삼존불의 형태다. 2003년 발굴 조사 때 출토된 연호를 보아 고려 현종 12 ~ 21년 때인 1021~1030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서 있는 본존불은 원통형의 관 위에 보개를 씌었는데, 그 형태가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만들어 보기에도 불안정하다.

양편에 선 협시보살도 하나의 돌에 조각을 한 수법을 택했다. 조각을 한 수법이 소박한 것으로, 이러한 조각수법은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조각기술이다. 본존불의 두 손은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몸에 비해 길고 빈약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지가 않는다.



이러한 본존불의 형상은 이 지방에서 고려시대의 석불에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형식화 되고, 제작기술이 쇠퇴한 지방적인 특색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현재 이 석불입상은 보물 제100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몸돌은 어딜 가고

석불입상 앞에는 보물 제101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석탑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석탑은 현재 1층에 1매의 몸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4매의 지붕틀이 얹혀 있는 모습이다. 아마 몸돌이 사라져버린 듯하다. 많은 문화재들의 훼손이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점이다.

원형의 형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1층 몸돌의 형태는 매우 간단히 처리를 하였다. 3면에는 여래좌상을 돋을새김을 하였고, 한 면에는 문고리를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대개 4면 전체에 좌불을 새기거나 양편에는 문고리, 남은 방위에는 창살 등을 조각하는 데 비해, 기본형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고려탑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는 석탑은 추녀가 심하게 올라간 편이며,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4단씩 조각되어 있다. 석불입상의 뒤에는 배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다. 흔히 배바위라고 부르는 이 바위에는 암각문이 두 군데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글씨를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판독을 한 결과, 바위를 바라보고 왼편에는 목공전설이 오른편에는 매향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 충남 기념물 제16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안녕을 구하기 위한 자연석인 매향비

배처럼 생긴 바위에 적은 암각문을 판독을 한 결과 이 매향비문은 경오년 2월이라고 적혀있어, 1330년이나 1390년에 음각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매향비문은 돌을 다듬어 적기도 하지만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안국사지의 매향비문은 배처럼 생긴 바위에 음각을 하였다.



 

한 곳의 사지를 둘러보는 데는 길게는 한 나절에서 짧게는 두세 시간이 소요된다. 이렇게 찬찬히 들러보고 나와도, 후에 또 다른 것이 나타나면 늘 후회를 하는 것이 현지답사다.

언제나 하나하나 다시 둘러보는 것도 그러한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다. 당진 안국사지. 그 형태가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남아 있는 유적에서 그 모습을 찾아본다. 머리속에 그려지는 절의 모습이 확연치가 않은 것은, 주변을 너무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역사는 많은 것들을 변하게 만들지만, 그 모습이나마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텐데 말이다.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산 27번지, 태학산의 해선암 뒷산 기슭 큰 바위에 높이 7.1m나 되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을 해질녘 찾아가면 백제의 미소라는 서산 마애삼존불과는 또 다른, 고려의 은은한 미소를 만나볼 수 있다.

바위를 깎아 돋을새김으로 처리한 삼태리마애불은 고려시대 거대마애불의 완벽한 예술품이라고 평가를 할 만하다.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나 얼굴 모습,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고려시대의 불상 양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마애불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보물 제407호로 지정된 삼태리마애불의 얼굴 부분은 바위의 주변을 깎아내 돋을새김으로 조각하고, 몸의 부분은 선각처리를 하였다. 이는 고려 후기 마애불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이 마애불이 만들어진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즉 거대한 마애불이라는 점, 그리고 일부를 돋을새김 하여 부분 강조를 한 점 등, 고려 마애불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 학술적인 면이 아니라고 해도, 삼태리마애불은 지역적 연고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후기 이후 이 지역의 특징이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백제의 미소 못지않은 고려의 미소.

민머리 위에는 둥근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다. 삼태리마애불의 특징은 바로 이 머리상투 부분이다. 큰 바위에 솟아나게 만든 이 상투부분이 거대한 바위 위로 솟아나 있어, 흡사 큰 바위에 조각을 한 마애불을 갖다 붙인 듯한 느낌이 들게 조성하였다. 살이 오른 넓적한 얼굴과 길게 치켜 올라간 눈, 커다란 코와 작은 입으로 인해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그 근엄한 표정 중에서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보인다. 해질녘에 찾아가면 그 신비의 미소가 더욱 느껴진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는 삼태리마애불. 아마도 이 마애불을 조성한 장인의 마음이 그렇게 여러 차례 변화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긴 시간 이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점차 마음의 문을 열어간 듯하다. 삼태리마애불은 참으로 특이하게 생겼다. 목이 짧아서 목에 있어야 할 3줄의 삼도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는 것도 특이하다. 법의는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묵직하게 처리하였다. 상체와 양쪽 옷자락은 세로선의 옷주름을 표현하였고, 하체에는 U자형의 옷주름을 새겼는데 옷주름은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지역적 특성이 강한 마애불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했으며 오른손은 왼손 위에 손등이 보이도록 하였다. 이런 수인은 고려시대의 미륵불에서 나타나는 수인과 같은 것이어서 이 마애불이 미륵불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은, 경기도 안성과 충청도 충주, 천안 등에서 흔히 나타나는 미륵신앙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삼태리마애불 역시 지역 특성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의 윗부분 바위에는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미륵불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을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세상에서 찌든 시름을 다 잊게 된다. 그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겼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를 지켜내고 있는 삼태리마애불. 해질녘 바라다본 마애불의 미소에 마음속에 가득한 세상을 향한 미음이 봄눈 사라지 듯 한다. 마음이 답답하고 미음이 가득하다면, 이 삼태리마애불을 찾아가 고려의 은은한 미소를 바라보기를 권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소재한 봉선사.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인 969년에 법인국사인 탄문이 창건한 절이다. 법인국사는 운악산 기슭에 절을 짓고 이름을 운악사라고 하였다. 운학사는 조선조 세종 때 7개의 종파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종으로 통합이 됨에 따라 혁파되었던 절이다.

그 뒤 조선조 예종 1년인 1469년에 정희왕후 윤씨가 선왕인 세조의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으로 중창하고 이름을 봉선사로 개명하였다. 그 뒤 명종 6년인 1551년에는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수차례나 훼손되어 다시 중수를 하였다.



봉선사 대종과 괘불이 전해

봉선사는 한국전쟁 때 150칸이나 되는 전각들이 완전 소실이 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전각들은 모두 근래에 들어 다시 중창한 것이다. 현재 봉선사에는 조선 초기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보물 제397인 대종이 남아있다. 이 대종은 1469년에 제작한 종으로, 이렇게 큰 대종을 당시에 주조하였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2월 26일 오후, 의정부에서 봉선사로 향했다. 봉선사를 찾아가려면 광릉내 숲을 지나야만 한다. 엄청난 고목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길을 지나 봉선사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이다. 봉선사 일주문 앞에는 많은 차량들이 서 있고, 연신 사람들이 경내로 들어선다. 아마도 모처럼 주말을 맞아 나들이를 나온 듯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배터리가 아웃이라니

봉선사 주차장에서 대웅전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길을 굳이 차를 갖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로 인해 불안하다. 밖에 차를 대고 걸어도 불과 10여분도 안 걸리는 거리가 아니던가?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와 하마비가 서 있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선방을 촬영하다가 보니, 배터리가 떨어져 버렸다.

이럴 수가 있나, 여유분의 배터리는 차에 두고 왔는데 난감하다. 할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렇게 휴대를 한 손전화를 이용해서라도 답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봉선사에는 16동의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있는 청풍루를 비롯해, 운하당과 관무현, 대웅전의 양편에는 관음전과 지장전이 서 있다.



대웅전의 뒤편으로는 조사전과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다경실과 개건당, 방적당, 동별당, 서별실, 종루 등이 자리한다. 휴대폰으로 하나하나 촬영을 하다가 보니 영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그래도 어찌하랴, 그나마 고맙게 생각을 할 수 밖에.

화마를 입고도 남아있는 대종

봉선사의 대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주조된 종 중 몇 개 남지 않은 조선 전기의 동종이다. 예종 원년인 1469년에 왕실의 명에 따라 만들었다. 높이 238㎝, 입지름 168㎝, 두께 23㎝의 이 종은 꼭대기에는 용통이 없고,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등져 종의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조선종의 형태이다.




종의 몸통 위부분에는 이중의 가로줄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 짓고 있다. 줄 윗부분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보살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아랫부분에는 강희맹이 짓고 정난종이 글씨를 쓴 장문이 새겨져 있다. 글에는 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만드는데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어서, 이 종을 제작하기 위해 대대적인 불사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시간 이상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종각으로 향했다. 그러나 종각은 출입을 통제시켜 놓아, 이층 누각으로 오를 수가 없다. 다행히 또 하나의 대종을 본떠 만든 종이 축대 위에 있어, 그곳에서 보물 대종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주말, 광릉내 숲과 함께 돌아보기 좋은 봉선사. 날도 풀렸으니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충북 증평군 도안면 광덕리 산21에 소재한 광덕사. 이 절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949년 한 보살은 석불의 꿈을 꾸고, 석불 옆에 세 칸의 작은 암자를 지은 뒤 광덕사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고려 초기인 10세기를 전후해 조성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한 기 서 있다. 석불입상의 내력으로 보아, 고려 때 이곳에 절이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광덕사는 도안면 소재지에서 충주 방면으로 36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도안농공단지입구에서 작은 고개를 넘어 1km 쯤 접어들면 도안면 광덕2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마을회관에서 700여m쯤 더 들어가면 농경지를 지나 산기슭에 외따로 떨어진 작은 절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광덕사다.


어쩌다가 쇠 머리띠까지

광덕사는 작은 절이다. 절 경내에는 모두 3동의 전각이 있다. 절로 들어서면 우측에 석불입상이 보인다. 석불입상은 전체 높이가 4.8m에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석불입상은 마모가 심한 편이다. 특이하게 이마에는 쇠 띠를 두르고 있는데, 이는 목과 머리에 균열이 생겨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석불은 그 크기에 비해 간단하게 조성했다. 미간에 있어야 할 백호는 보이지가 않는다. 양 귀는 길게 늘어졌으나 어깨에는 닿지 않았다. 눈은 가늘게 반쯤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석불의 인상은 위엄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오래 동안 노천에서 비바람에 마모가 되어서인지 선명하지 않은 부분이 보인다.




두 개의 돌로 조성된 석불입상

광덕사 석불입상은 두 개의 돌로 조성이 되어 있다. 연화대좌와 석불이 같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함께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석불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는 80cm의 높이로 꾸몄으며, 꽃잎 등을 표현한 수법이 투박하다. 고려 초기 지방에서 나타나는 석불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이 석불의 연호대좌와 석불의 조각 등으로 보아, 이 지역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연화대좌 위에 세운 석불입상은 일석으로 꾸며졌다. 머리는 큰 편이며 이목구비가 큼지막하게 표현을 했다. 오랜 세월 풍우에 씻겨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었는데,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듯하다. 왼손을 배에 붙여 손바닥을 안으로 향했다. 법의는 양편 어깨서부터 주름이 잡혀있으며, 아래로 내려가면서 U 자형으로 표현을 하였다.



문화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광덕사 석불입상은 1949년에 암자가 지어지면서 나름대로 보존이 잘되고 있다. 이렇게 절 경내에 있지 않고, 야외에 있는 석불이나 탑 등은 훼손이 심하다. 아무래도 관리하는 이들이 없다보니,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광덕사 석불입상의 이마에 머리띠를 두른 것도 경내에 있어 가능한 것이다. 야외에 있었다고 하면 관리가 안 돼 파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갑자기 지역마다 문화 콘텐츠를 개발한다고 난리도 아니다. 하지만 정작 지역의 문화를 잘 이용하는 지자체는 그리 많지가 않은듯하다. 그 이유는 문화를 관리하는 부서들이 대개는 전문적인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땅에 수많은 문화재들. 이렇게 쇠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 석불입상의 앞에서 괜스레 낯이 붉어진다.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마곡산 줄기 부처박골에 가면, 마애보살좌상을 선각한 바위 옆에 또 하나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고려중기 이후에 조각된 것으로 설명이 된, <소고리 마애삼존석불>이 있다. 바위 밑에는 누군가 치성을 드린 듯 촛불이 커져있다.

이천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삼존석불을 바라보다가 한참이나 웃었다. 그 모습이 지금까지 보아오던 마애불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애삼존석불을 보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우리가 흔히 즐겨있던 손오공의 이야기인 서유기가 삼존불 안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 만의 생각이겠지만, 이 삼존석불 안에 서유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애삼존석불은 중앙에 본존불을 크게 돋을새김 하였다. 높이는 203cm인데 얼핏 보니 서유기의 손오공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혹은 다시 보면 저팔계와도 닮았다. 원래는 손오공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누군가 코를 쪼아내서 저팔계와 비슷한 모습도 하고 있다.

마애삼존석불이 서유기를 본뜬 것은 아닐까

서유기는 중국 명대의 장편소설이다. 오승은이 지은 책으로 승려인 현장이 천축국인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온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이야기다. 서유기에 나오는 현장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로, 602년에 태어나 664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현장을 따르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각각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삼장법사를 따라 불경을 구하러 인도를 가면서 81차례나 모험을 한 끝에 불경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소고리 마애삼존석불을 보다가 갑자기 서유기가 생각이 나는 것은 왜일까?


이 마애삼존석불은 소고리 부처박골에서 산을 향하고 있다. 모두가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두 다리를 결가부좌한 좌상이다. 본존불과 양편이 협시불, 모두 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좌협시 보살은 60cm, 우협시 보살은 93cm의 크기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본존불은 손오공, 좌협시 보살은 사오정, 우협시 보살은 삼장법사를 닮았다.

마애불의 추정연대가 혹 1500년 이후는 아닌지?

고려중기 이후라고 하면 1150년 이후가 된다. 만일 이 마애삼존석불이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한 것이라면, 손오공을 주인공으로 한 서유기를 지은 시기와는 연대가 맞지를 않는다. 마애삼존석불의 문화재 설명문에는 막연히 고려 중기 이후로만 적고 있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마애삼존석불이 혹 150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서유기를 지은 오승은은 1500년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혹 명대의 이 책을 보고, 누군가 그 서유기의 이야기를 마애불로 표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삼존석불은 아무리 보아도 서유기를 도식화해서 만든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애삼존석불의 본존불을 보면 콧구멍을 뚜렷하게 표현했다. 눈이나 생김새도 손오공을 닮았다.

얼핏 보아도 일반적인 부처의 상이 아닌 손오공이라는 생각이다. 함께 동행을 한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중앙에 본존불을 보면 무엇이 생각나느냐고. '손오공'이라는 대답이다. 그렇다면 나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남들도 왜 대뜸 손오공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삼존불 안에 손오공, 사오정, 삼장법사가 있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진 본존불. 고려조나 조선조의 마애불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전혀 다른 조각의 형태. 그리고 토우 등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 등, 이 삼존석불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이목구비도 도식화 되어있으며, 일반적인 불상조성의 규범에서 벗어나 있다. 그저 관 위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두광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협시보살의 형태도 마찬가지다.

좌협시 보살을 보면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삼장법사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고 있다. 본존불과 좌협시 보살이 삼도를 표현한데 비해, 우협시 보살은 삼도가 없다. 머리는 맨머리인데 두건 같은 것을 쓰고 있다. 서유기의 사오정과 같은 모습이다. 마애삼존석불을 돋을새김한 바위도 이 지역에서 보이는 바위와는 재질이 다르다.


바위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있다. 옆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의 돌과는 전혀 다른 석질인 듯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바위가 여기 와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저 마애삼존불이 내 눈에는 서유기의 인물들 처럼 보이는 것일까? 그동안 너무 많이 돌아다녔더니, 이젠 머리까지 이상하게 되어가는가 보다.

인근에는 없는 석회암같이 구멍이 뚫려있는 바위. 그리고 서유기의 손오공, 삼장법사, 사오정과 같은 인물의 표현. 이 마애삼존석불을 떠나면서도 머릿속이 혼돈스럽다. 왜 저것이 서유기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래서 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얻기 위한 여정이 계속되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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