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바위를 어떻게 타고 내려왔지?
경기도 여주군과 양평군을 잇는 남한강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남한강의 세 곳의 보중 맨 아래 자리하고 있는 이포보를 아래주고 있는 산성이 있다. 바로 파사산성이다. 사적 제251호로 지정돼있는 파사산성은,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의 경계에 있는 파사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서쪽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삼국시대의 석축산성이다.
이 파사산성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정상을 지르는 길이 있다. 성에서 내려와 능선 길을 따라 조금 가다가 보면, 이정표가 그 아래 마애불이 80m 거리에 있음을 알려준다. 밑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산 정상 밑에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를 인위적으로 깎아 마애불을 선각하였다.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36-1에 소재하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고려시대의 특징인 거대마애불
선각을 한 마애불은 고려 시대의 특징인 거대마애불이다. 인위적으로 깎아 만든 수직절벽에 높이 5.5m 정도의 큰 마애여래입상을 선각했다. 희미하긴 하지만 그 모습은 당당하다. 거대마애불들 중에는 규모가 커서 비례가 안 맞는 경우도 있지만, 상자포리 마애불은 규모가 큰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규모가 알맞다.
상자포리 마애불은 이중의 두광을 갖추고 있으며, 어깨부문이 각이 져서 당당해 보인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를 걸치고,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선각이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에 선각을 한 선이 일부 지어지기는 했지만, 그 당당함을 알아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사각형인 얼굴에 어깨까지 늘어진 귀와 큰 눈과 코, 그리고 입 등 거대 마애불답게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며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팔꿈치가 각이 되게 가슴 앞에 두었으나, 왼손은 마모가 되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이러한 표현은 보물 제822호인 이천 설봉산 영월암 마애불과도 같은 표현기법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천년 세월의 서원을 바위에 담아
많은 선각을 한 마애불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비바람에 씻겨 점차 그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상자포리 마애불의 경우에도 선각을 한 선들이 많이 희미해졌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돌에 새겨 놓았으니, 점차 사라져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선각 마애불들을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이 하루 빨리 서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도 모른다.
어린 소녀가 열심히 마애불을 향해 절을 한다. 무슨 기원을 하고 있을까? 주말과 휴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상자포리 마애불. 마애불의 동쪽 바위틈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나온다.
목도 마르고 날도 더운지라 바가지에 떠서 한 모금을 마신다. 속이 시원하다.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남한강 물줄기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반짝인다. 상자포리 마애불의 주변에서는 기와조각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도대체 저 바위를 어떻게 타고 내려오면서 선각을 한 것일까? 마애불을 만날 때마다 갖는 질문이다. 이곳에도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점차 희미해져가는 선각 마애여래입상을 보면서,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르면 그저 바위벽만 남아있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문화재로 지정된 많은 마애불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데도 속수무책이다. 자연적인 풍화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일까? 언제 또 다시 찾아올 줄 모르는 마애불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저 아래 흐르는 남한강이, 생명의 강이 될 수 있도록 보호해 달라는 속마음과 함께.
연화대에 보살상을 새긴 포초골 미륵좌불
경기 여주군 금사면 외평리 454-1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호인 포초골 미륵좌불상. 이 불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있는 높이 1.7m의 석조미륵좌상이다.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 좌불상은, 현재는 사찰 안 용화전에 자리하고 있다.
포초골 미륵좌불을 찾아본 것은 벌써 서너 번은 되었는가 보다. 처음에 찾아갔을 때는 전각에 단청도 하지 않은 채로 만났는데, 그 뒤에는 용화전에 단청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지난 해인가 찾아갔을 때는 먼저는 보지 못한 광배를 찾았다고 했다. 이렇게 갈 때마다 달라진 모습을 보인 포초골 석조미륵좌불이다. 문화재는 찾을 때마다 이렇게 다른 모습을 만나기도 한다.
머리에 갓을 쓴 석조 미륵좌불상
여주 금사면의 미륵좌불상은 민머리에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으며, 네모진 얼굴에는 반쯤 감은 눈, 오똑한 코, 풍만한 양 볼과 짧은 귀가 표현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어깨의 주름과 가슴에 묶인 띠 매듭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둔탁한 편이다.
무릎은 신체에 비해 크게 조성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양 발목 사이에는 부채꼴 모양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안정감이 있고 육중한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석조 불상은 고려시대의 거대 석조불상의 형태에서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중대석에 보살상을 새긴 연화대좌
일반적으로 미륵입상이나 좌상을 모신 전각을 용화전이라고 한다. 이 포초골 미륵좌불상이 소재하고 있는 절은 그 동안 상당히 불사를 많이 하였다. 하기에 용화전 주변도 정리가 되어있으며, 절 경내 곳곳에는 아직도 불사를 계속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포초골 미륵좌불상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꽃잎이 큼지막하여 시원한 느낌을 준다. 중대석에는 8각의 각 면에 보살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이렇게 보살입상을 새겨 넣은 연화대좌는 그리 흔하지가 않다는 것에서 이 미륵좌불상의 독특한 형태를 볼 수 있다.
뒤늦게 발견이 된 광배
연화대좌의 하대에는 커다랗게 앙화가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이 불상을 보면 4각형의 원만한 얼굴에 넓고 당당한 어깨, 그리고 둔탁한 옷주름의 표현 등을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 볼 수 없었던 광배는 나중에 주변을 정리하다가 땅 속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광배응 몸 전체를 감쌀 수 있을 정도로 큰 편이며, 윗 부분이 배의 선미처럼 휘어져 있다. 광배에는 위편에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원을 중심으로 하여 각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고려 시대에 조성된 포초골 석조미륵좌불상. 4월 26일 오후에 찾아간 절집에서 만난 석불좌상은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을 마음 편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도솔천의 부처님은 왜 도솔암 외원으로 오셨을까?
도솔천(兜率天)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 위에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유순이란 고대 인도의 거리 단위로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대략 11~15㎞라는 설이 있다.
도솔천은 육계(六界) 육천(六天) 가운데 제4천으로 미륵보살이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도솔천에는 내원과 외원이 있는데,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이며, 외원은 천계 대중이 환락하는 장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내원과 외원이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 안 깊숙한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도솔산에 자리한 선운사
고창 선운사 안으로 들어가면, 선운산 깊숙한 곳에 도솔암이 자리하고 있다. 선운산은 높이 336m이다. 본래 도솔산(兜率山)이었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가 유명해지면서, 선운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선운산의 주변에는 구황봉(298m)·경수산(444m)·개이빨산(345m)·청룡산(314m) 등의 산들이 솟아 있다. 선운사를 지나 도솔암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러고 보면 외원에서 내원으로 가는 길인가 싶다.
도솔암 극락보전을 지나쳐 위로 오른다. 극락보전은 아미타여래상을 주불로 모시는 곳이다. 흔히 극락전 혹은 무량수전이라고도 명명한다. 조금 오르니 눈앞에 펼쳐지는 기암괴석과 절경들. 순간 자연에 압도당한다. 나한전이 자리하고 있다. 도솔암 나한전은 아라한을 모시는 곳이다.
나한은 소승불교의 수행자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성자를 말한다. 아주 오랜 옛날 이곳 용문굴에 살고 있던 이무기가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혀, 인도에서 나한상을 모셔다가 안치하였더니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어진 나한전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천년 세월의 마애불, 그 모습에 압도당하다
나한전을 지나면 깎아지른 바위 암벽에 새긴 보물 제1200호인 도솔암 마애불을 만난다. 아마 도솔천을 오르기 위해 이 모든 것이 도움을 주지나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마애불 중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도솔암 마애불은 미륵불로 추정된다. 결국 미륵정토를 가기 위해서는 주변에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연결이 된다는데 놀랍기만 하다.
지상 6m의 높이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좌정하고 있는 미륵불. 그 높이가 5m, 폭이 3n나 되며 연꽃문양을 새긴 계단모양의 받침돌까지 갖추고 있다. 마애불의 머리 쪽을 보면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 속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보인다. 아마 이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이 있었던 것 같다. 동불암이라는 누각을 세웠던 자리라고 한다. 마애불을 올려다보면서 마음속으로 기원을 한다. 이 모진 세상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인 도솔천으로 올라가겠다고.
도솔암 내원궁.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전각이 하나 보인다. 마침 사시예불 시간인지 염불소리가 청아하다. 상도솔암이라고 부르는 도솔암 내원궁은 바로 미륵정토인가 보다. 거대한 자연 바위 위에 초석만을 세우고 전각을 지었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다. 주변 경관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해 지장보살을 모신 내원궁. 보물 제280호로 지정이 된 이 지장보살은 고려 후기의 불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사후세계의 주존인 지장보살좌상을 모신 이 내원궁이야말로 인간이 고통 받는 사바세계에서 가장 이상형의 피안인 듯 하다.
누가 세상에 태어나 고통을 받고 싶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사람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작은 행복만이라도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도솔암 내원궁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곳이 바로 도솔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마음 하나에 도솔천이 있음을 깨닫는다.
머릿돌만 포개어져 있는 삼층석탑, 그래도 고맙다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인 안양중초사지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에 1층의 몸돌만이 남아 있고, 그 위에는 지붕돌만 포개어져 있는 형태이다. 중초사터에 남아 있는 이 삼층석탑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고, 1960년 옛 터에 유유산업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1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부는 2·3층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3개 포개져 있다. 기단과 1층 몸돌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워 급한 경사를 이루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간략화 되었다.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해제된 석탑
안양시 석수동 중초사지에 있는 이 삼층석탑은, 지금은 건물만 남은 유유산업의 정문에 들어서면 좌측에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보물 제 4호)와 고려시대 석탑이, 문화재 보호구역(826㎡)내에 나란히 서 있다. 향우측에는 또다른 석탑의 부재로 추정되는 면석이 있다. 그중 석탑은 1963년에 보물 제 5호로 지정되었다가 최근에 해제된 상태이다.
‘중초사’는 통일신라 흥덕왕대의 사찰로 당시의 큰 절이었던 황룡사의 항창이 절주통으로서 이 당간지주의 불사에 참여 할였다고 한다. 그만큼 중초사는 커다란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초사는 『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흥지도서(興地圖書)』,『가람고(伽藍考)』같은 문헌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에 이미 폐사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안정한 석탑, 그러나 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해
전체적으로 기단부가 너무 크고, 탑신의 1층 몸돌이 그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석탑이다.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지면 위에 두꺼운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이단괴임으로 조각된 별석을 놓아 상층 기단부를 받치고 있는, 단층 기단 형식을 취하고 있다.
4매로 짜여진 기단중석은 중앙에 탱주는 없이 양우주만 조각되었고, 그 위에 덮여진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다. 괴임은 일단이나 남면은 약간 부서진 상태이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매의 돌로 조각되었는데, 1층 몸돌인 탑신석만 있을 뿐, 이삼층은 몸돌은 사라진 채 머릿돌인 옥개석만 포개어져 있다.
노반 이상의 상륜부 역시 사라진 상태이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한 편으로, 받침은 1 ·2층이 4단이고 3층은 3단이다. 대체로 이 탑은 원형을 잃었으나 고려시대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3월 3일에 찾았던 중초사지. 굳게 닫힌 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다가 우여곡절 끝에 안으로 들어가 찬찬히 돌아본 삼층석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형태로 보아도 상당히 훼손이 많은 석탑이다. 더구나 2, 3층의 몸돌까지 사라져, 지붕돌만 포개어진 모습은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아프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라도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숱하게 수탈을 당하고 망가져 그 형체조차 찾을 길 없는 수많은 문화재들. 그래도 이렇게 일부분이나마 남아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아무리 못생기고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해도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탑을 잃은 비, 짝 잃은 쓸쓸함이 느껴져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는 원래 경기도 여주의 땅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하여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것으로 알려진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후 중창을 이루지 못한 절이다. 이곳을 찾았을 때는 초겨울의 바람이 불고 날씨가 급격히 추워져서인가, 법천사의 발굴 복원 작업이 중단되고 있었다.
법천사에는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현묘탑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일본 사람들이 밀반출하였다. 그 후 1915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는 경복궁 경내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앞에 서 있다. 이 현묘탑이 새로 지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옮길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59호 지광국사 현묘탑비
현재 법천사지는 발굴, 복원 중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전각이 있던 자리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전각의 자리로만 추정해도 이 절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현묘탑비는 고려시대의 스님인 지광국사(984 ~ 1067)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을 세운 이후,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에 지광국사의 업적과 삶을 기록한 비다. 국보 제101호인 탑은 제자리를 떠나고, 탑비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묘탑비의 앞면에는 지광국사가 984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원혜린이라고 기록돼 있다. 16세(999년)에 스님이 되어 승통, 왕사, 국사의 칭호를 얻었으며, 84세인 1067년에 이곳 법천사에서 돌아가신 것을 기록하였다.
국보 제59호 현묘탑비를 보면 놀랍다. 받침돌은 고려 초기 탑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삼국통일을 한 신라 말기부터 고려조로 넘어오면서 받침돌의 형태가 달라진다. 즉 거북의 몸에 머리는 용머리로 조성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받침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새로운 받침돌의 형태는 그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현묘탑비
지광국사현묘탑비를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작품성을 엿볼 수 있다. 천년이 지난 과거에 이렇게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연꽃의 잎과 구름속의 용이 조각된 왕관 모양의 머릿돌. 그리고 비 몸돌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과, 금방이라도 몸돌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은 용. 섬세하고 화려한 구름 등이 현묘탑비의 뛰어난 예술성을 느끼게 만든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