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콕박물관에서 재밌는 역사 이야기를 먼저 관람하세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거리두기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수원시 박물관사업소가 유튜브 채널을 이용한 수원 온라인 박물관코너를 신설, 소장하고 있는 대표유물에 대한 역사와 스토리를 집에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콘텐츠로 제공해 눈길을 끈다.

 

수원시 유튜브 채널(https://www.youtube.com/user/suwonloves)에 지난 22일 공개된 3개의 집콕박물관 영상은 각 박물관의 대표유물에 얽힌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며 높은 조회 수를 기록 중이다.

 

우선 수원박물관 편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팔달문 동종의 천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냈다. 동종 1080년 고려 개성에서 만들어져 1687년 만의사 대종으로 재탄생한 뒤 화성 축성 이후 성문을 여닫을 때 파루용으로 쓰였던 동종의 역사가 자세한 영상과 함께 소개됐다.

 

 

수원화성박물관 편은 보물 제1477-1호로 지정된 채제공 초상 시복본을 소개하며 정조가 사랑했던 번암 채제공(1720~1799)을 조명했다. 조선 시대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채제공은 초대 수원 유수를 지내고 수원화성 축성을 총괄한 인물로, 정조의 명을 받은 화가 이명기가 그린 초상화를 통해 당대의 스토리가 펼쳐진다.

 

수원광교박물관이 소장한 삼국접양지도는 일본이 스스로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인정했던 증거물로 등장한다. 1785년 일본의 대표적인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제작한 지도에 조선의 영토로 독도가 표시된 명확한 사실을 담았다.

 

 

이들 수원 온라인 박물관 영상은 수원시 유튜브 채널과 수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수원광교박물관의 홈페이지에 함께 공개됐다. 박물관사업소는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박물관별 전시 영상과 수원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등을 업데이트해 지속적인 서비스를 이어가며 수원시민들이 좀 더 편하게 전시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

 

백광학 박물관사업소장은 코로나19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많은 시민이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원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통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수원시에는 수원의 유구한 역사와 우리의 서화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원박물관’, 세계유산 수원화성과 조선의 문화군주 정조대왕을 만날 수 있는 수원화성박물관’, 광교 도시변천과 우리나라 근현대를 살펴볼 수 있는 기증유물로 꾸며진 수원광교박물관이 있다.

 

속초시 동명동에 소재한 보광사는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산사의 느낌을 받는 곳이다. 앞으로 20m 정도를 나가면 영랑호와 닿고, 주변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시내 중심가까지도 걸어서 15분 정도면 나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면서도, 산사의 분위기를 맞볼 수 있다.

 

이 절은 예전 원효스님이 도를 닦던 자리라고도 전해지며, 골짜기 이름을 불당골이라도 한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면 커다란 바위에 '관음'이라고 각자를 해 놓았으며, 이 관음바위 위에서 '영랑스님'이 동해와 금강산을 바라보고 공부에 전념했다고도 전한다.

 

관음바위가 있는 절 뒤편은 산이라고 해도 그저 작은 소나무 동산 정도이다. 그 위로 오르면 바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그 바위 옆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어르신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한편으로 가면 커다란 바위가 자리한다. 이 바위가 바로 영랑스님이 날마다 공부에 정진하던 '관음바위'라는 것이다. 밑으로 내려가면 바위에 커다랗게 '관음'이라는 글자를 각자해 놓았다.

 

 

속초 영랑호 보광사는 설악산을 뒤뜰 삼고 동해를 앞뜰 삼아 영랑호를 품은 속초의 대표적인 전통사찰이자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다. 보광사는 속초를 찾으면 꼭 들려야하는 전통문화 장소로 승속 구분 없이 맑고 향기로운 세상으로 함께 가는 열린 도량이다.

 

보광사는 원래 안양암으로 1623(인조 원년) 광명당 등휘당이 창건하고 1937(개산314) 도천면이 속초면으로 개칭되자 보광사로 개칭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지장보살좌상,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현왕도, 사천왕탱화 등의 성보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대표적인 전통사찰이다. 전통사찰로 지정된 영랑호 보광사에는 역사와 세월을 이겨낸 빛나는 문화유산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대웅전의 <목조지장보살좌상> <현왕도>는 강원도 지정문화재이며 그 외의 많은 비지정문화재를 보유한 외형적 아름다움 외에 전통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찰이다.

 

보광사는 소가 누워 평화롭게 풀을 먹고 있는 와우형(臥牛形)의 길지에 스님이 부처님께 기도하는 형국의 호승배불형(胡僧拜佛形)터로, 배산임수(背山臨水) 좌청룡 우백호의 용이 여의주를 품고 있는 비룡함주형(飛龍含珠形)의 천하대복지(天下大福池) 명당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201944일 일어난 속초·고성 대화재 당시, 화마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전각과 유물들을 지켜낸 불가사의한 도량으로 부처님의 가피가 충만한 최길상(最吉祥)도량이다.

 

 

보광사는 모든 것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봄에 <영랑 축전>, 여름에 <영랑호 칠석달빛문화제>, 겨울에 <동지팥죽축제>를 연례행사로 주관하고 있으며, 나눔의 일환으로 어린이 구호단체(www.goodworld.kr) 굿월드자선은행과 결연하고 부설 굿월드스토리에 협찬하고 있다.

 

관음바위 한편에는 누군가 일부러 파 놓은 듯한 자국이 보인다. 관음바위 위에 오르면 펼쳐지는 동해와 설악산, 그리고 금강산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밑으로는 영랑호의 푸른 물이 소나무 사이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다시 관음바위를 떠나 봉우리 위의 바위 밑을 통과한다. 흡사 석문과 같은 바위돌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세상사 저리 의지를 하고 믿고 살면 참 좋으련만. 30~40년 전에는 이 바위 아래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시끄럽게 징을 두드려대고는 했다.

 

관음바위는 보광사 와불전 70m 뒤 산등성이에 있는 가로15m 높이8m로 동해바다 일출을 바로 볼 수 있는 큰 암벽이다. 오른쪽 모서리에 세즉사바구난대성(世卽娑婆救難大聖)’이라 쓴 작은 글씨가 있고, 사방 1.2미터의 큰 글씨로 중앙에 관음(觀音)’이라는 두 글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그 옆 왼쪽에는 작은 글씨로 西曆 一九五二年 六月 日, 李亨根 題, 蒼軒 崔泓熙 書라고 새겨져 있다. ‘관음의 뜻은 관음보살을 말한다. 관음보살은 세상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분으로 보광산 불당골에 화현하여 세계평화와 국태민안을 서원하며 큰 바위에 새겨졌다.

 

각자를 창헌 최홍희(1918.11.9.~ 2002.6.15)는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리 출생이다. 창헌 최홍희는 일본주오대학 법학과1학년인 1944년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 근무 중 조선학병중심으로 전국반일동맹조직을 도모하다가 검거, 6년형을 받고 평영형무소에 수감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그 후 대한민국육군에 들어가 장성이 되었다. 6.25한국동란 중 1952년 지역 1군단장 이형근 장군과 창헌 최홍희 장군(후에 6군단장)의 글씨가 보광사 관음바위에 암각 되어있는 것이다.

 

창헌 최홍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탁견이라 하자 태권도라는 용어를 고안 태권도(跆拳道)라는 명칭을 지었으며, 독립운동가·군인·서예가로 19526월에 보광사 바위에 본인의 글씨로 관음이라 새겼다. 최홍희는 1군단 참모장 때 무술시범을 열었으며 1953년 제29보병초대사단장부임 해 부대이름을 태권도부대라 하고, 19553군관구 사령관으로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했으며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태권도라는 글씨를 받았다.

 

 

1960년대 제2훈련소장, 1961년 제6군단장, 1962년 예편 후 말레이시아 대사, 1966년에는 박정희와 트러블로 인해 1972년 해외로 망명했으며, 캐나다로 중심으로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설립하였다. 북한과 함께하여 공산권국가에 태권도를 보급하는데 힘썼으며, IKF 후계자로 장웅IOC 위원을 지명했고, 2002년 평양에서 83세로 사망, 애국렬사능에 안장되었다.

 

관음바위는 보광사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관음바위 외에도 보광사는 여러 문화재와 유물, 미술작품 등을 전시하여 시민들과 속초를 찾는 분들에게도 문화체험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템플스테이, 야외 음악회, 결혼식 장소로도 무료 대관을 원칙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전화를 한 통 받았다. 평소 착하기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워 할 녀석이다. 그런 착한 녀석이 울먹이며 말을 제대로 못하니 마음이 찡하다. 말을 들어보니 아무리 참고 살려고 해도 시누이들 꼴이 보기 싫어 못 살겠다는 소리다. 일만 벌어지면 시누이들이 찾아와 난리를 피운다고 한다. 남편까지 덩달아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혼자만 애를 태우고 있다니. 녀석은 왜 자신은 매번 이렇게 모진 일을 당하고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고 울먹인다. 그동안 시집과의 불편한 관계로, 적지 않은 고통을 받은 녀석이다. 언젠가는 이혼을 하겠다는 녀석을 진정 시키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이제 겨우 한 숨 돌리고 살만하다고 하더니, 또 무슨 일이 벌어졌나보다, 무엇이라고 위로를 해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녀석이야 워낙 천성이 착한 놈이라 무엇이라고 위로라도 좀 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저 단순히 위로를 한다고 해서 녀석의 마음이 쉽게 편안해지지는 않을 듯하다. 워낙 말도 없이 혼자 고통을 감내하는 편이라, 딱히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조심스럽다. 그저 마음 단단히 먹고, 늘 나만 고통스런 것이 아니란 생각을 갖고 살라고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옛날 할머니들의 시집살이 이야기가 생각난다. 방송 일을 하면서 우리소리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이 있어, 늘 현장을 다니면서 채록을 하고 소리를 하신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녹음을 해 들려주고는 하던 프로그램이다.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부여에 사시는 분인데 당시 연세가 79세라고 하셨으니, 이제 살아 계시다고 하면 100수를 바라보는 분이다. 소리를 하시고 나서 한탄스런 시집살이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데, 듣고 있는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형님형님 사촌형님 시집살이 어쩝디까?

동생동생 말도마라 시집살이 개집살이

고초당초 맵다한들 시집보다 더매우랴

시집살이 삼년만에 이내손은 두껍잔등

삼단같은 머리채는 짚덤불이 되었구나

 

 

그 시집살이 노래의 일부다. 이 도입부만 들어도 시집살이가 어떤지 짐작이 간다. 요즈음 사람들이야 이런 시집살이를 해보질 않았을 테니 이해도 안 될 테지만 말이다. 오죽하면 시집살이를 개집살이라고 표현 했을까? 고초당초란 아마 그 당시에는 매운 것을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집살이가 맵다는 말은 자주 쓰는 말이다. 얼마나 힘든 시집살이였는지 벙어리 3, 장님 3, 귀머거리 3도합 9년이 지나야 시집살이를 안다고 했을까?

 

부여에서 만났던 할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면 가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시집이라고 오니 때거리도 변변찮아. 그래도 밤이면 길쌈하고, 낮에는 밭에 나가 밭 매고, 그 때는 전깃불도 없었지. 호롱불 밑에서 졸다가 넘어져 불을 낼 뻔 하기도 했어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새벽부터 일어나 소 여물 끓여놓고, 밭에 나가 밭을 매다가 들어와, 참이며 점심 차려 들로 내가야 하고, 하루 종일 그렇게 들락거리면서 일을 하다가, 밤이 되면 또 길쌈을 해야만 했단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바뀔 것도 없다. 거기다가 겨울이면 먹는 것도 시원치 않아서 아이들에게 젖을 물려도 나오지가 않아당시야 분유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을 때란 생각이다. 더구나 있었다고 해도, 그런 것을 사 먹일 수 있는 형편이었을 테지만. 그런 세월을 살아오셨단다.

 

 

할머니를 만났던 세월이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으니, 벌써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을 것이다. 아마 지금은 이때보다 더 편한 생활들을 하고 있을 주부들이다. “그래도 아이들 키우고 서방 뒷바라지를 하면서 시부모까지 잘 섬겼지. 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고 살았으니시집살이의 고통이 무엇인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그동안 세월은 참 많이도 변했다. 요즈음에야 누가 그렇게 살 것인가? 그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버리거나 헤어지기 일쑤다. 아마 이런 시집살이를 하라고 하면, 단 하루도 버티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남자들이 여자들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저 아침에 받은 전화 한 통 때문이다. 요즘 여성답지 않게 숨죽이고 살아 온 녀석의 푸념이라, 하루 종일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어쩌겠니. 할 말은 없지만 예전에는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다 살았단다. 늘 블로그를 찾아오는 녀석이니 오늘도 이 글을 볼 것이다. 그 녀석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따로 없다. 그저 옛날보다는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니, 조금만 참고 살아보라는 말 밖에는. 오죽하면 개집살이란 표현까지 한 말이 시집살이일까?

 

이 계절엔 지천에 깔린 것이 봄을 느낄 수 있는 봄나물이다. 두릅을 살짝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입안에 도는 쌉싸름한 맛이 일품이다. 하기에 미식가들은 봄 두릅은 금이라고 할 정도로 최고로 친다. 특히 인삼의 주요 성분이자, 면역력에 좋은 사포닌이 풍부해 환절기 건강관리에 봄철 최고의 음식으로 꼽는다.

 

 

두릅은 4~5월 경 새순을 채취해 많이 먹는데 몸에 활력을 공급해주고 피로를 풀어주기 때문이다. 두릅은 아침에 봄철 춘곤증을 이기는 최고의 나물이라고 한다. "봄 두릅은 금이고 가을 두릅은 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계절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아 주는 것은 단연 두릅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 4월에는 많은 나무들이 잎이 나기 때문에 새순을 채취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두릅은 물론 엄나무 순이나 오가피나무 순 등 각종 새순을 채취할 수 있는 계절이기 때문에 온 천지에 몸에 좋은 봄나물이 지천에 깔렸다. 그런 각종 봄나물을 상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계절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봄나물비빔밥 한그릇으로도 입맛을 내기에는 부족함이 없기때문에 밑반찬은 집에 있는 것을 이용하면 된다. 고등어구이, 고추짱아찌, 깻잎짱아찌, 김, 장어무침, 총각김치 등 더 많은 것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 봄 향기가 가득한 밥상 한 상이면 봄을 마음껏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국이 필요하다면 황태미역국 정도면 죽하다.

 

 

이 계절에 쉽게 구할 수 있는 봄나물. 그것을 이용해 한 상 잘 차려먹으면 새로운 기운이 가득하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