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대표하는 명필들의 글씨가 모인 ‘비림박물관(碑林博物馆)’
중국 시안(西安市 碑林区 文昌门内 三学街)에 소재한 비림박물관(碑林博物馆)은 중국을 대표하는 성계가들의 필체가 한자리에 모여있는 대표적인 비석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박물관이다. 본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었으나 현재는 송나라 때부터 900년에 걸쳐 시안에서 수집한 비석 1,000여 점을 보유한 박물관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곳에는 ‘서성’이라 칭송받는 왕희지(王羲之, 303~361년)의 글씨를 비롯해 서예인이라면 누구나 모범으로 삼는 구양순(欧阳询, 557~641년), 당대 해서의 모범이 된 안진경(颜真卿, 709~785년), 우리나라 서예에 큰 영향을 끼친 조맹부(赵孟頫, 1254~1322년) 등 저명한 중국 서예가들의 필체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하이라이트는 제1~3 전시실이다. 제1 전시실은 국보급 문화재인 ‘개성석경(开成石经)’이 유명하다. 도합 114개의 비석 양면에 65만여 자를 새긴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서적’이라 불린다. 내용은 <논어>, <맹자>, <시경>, <효경>, <의례> 등 유가에서 중시하는 13종의 경서로 채웠다.(디음 백과침조)
“역시 집 밥이 최고여~” - 두릅 비빔밥 한 그릇
생활을 하면서 늘 취재를 다니는 날이 많다보니 제 시간에 때를 맞춰 식사를 한다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늘 정해진 시간에 끼니는 해결한다고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을 하지만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집에서 식사를 준비해 집 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요즈음은 코로나19로 인해 바깥출입을 자주 하지 않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집에서 한 끼라도 챙겨먹으려고 노력한다 봄철이 되면 전통시장을 나가거나 주변 가까운 들에 나가면 각종 먹거리들이 깔려있다. 워낙 산나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언제나 산에서 채취할 수 있는 각종 나물이며 버섯 등은 꼭 챙겨두는 편이다.
이 계절에 입맛을 돌게 하는 것은 단연 두릅이다. 참두릅도 좋고 땅두릅도 좋다. 닌 향이 강한 땅두릅을 즐기는 편이다. 땅두듭을 살짝 데친 다음에 깨끗하게 손질을 해서 초고추징을 넣거 기름을 두른 후 비벼먹으면 절로 입맛이 돌아온다. 비벼먹는 것도 일품이지만 기름에 두릅을 튀기면 그 또한 별미다.
집에서 밥을 먹으면 한 가지 편한 것이 있다. 집에 있는 찬을 그대로 준비하면 되기 때문이다. 닐 밑반찬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알타리김치, 꼬막, 먕란젓, 황태무침 등을 비롯해 몇 가지는 늘 있는 편이다. 집에 있는 찬에 특별히 준비한 두릅만 있으면 맛있는 집 밥 한상이 차려진다. 편안하게 집에서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집 밥 한상. 그 계절에 별미리는 생각이다.
이 계절이 되면 ‘정자기행’을 하고 싶다
진안군 마령면에서 만난 수선루가 눈에 선해
난 이 계절이 되면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근 30년 가까이 전국을 돌면서 만난 많은 문화재와 절경 등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곳 중에 아직도 눈에 선한 몇 곳의 정자 등은 후에 책을 한권 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암굴을 이용해 중층누각으로 지은 수선루라는 조선 후기의 정자이다.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산57번지. 이곳에는 지은 지가 333년이 지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인 수선루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선루는 조선조 숙종12년인 1686년에 연안 송씨의 사형제인 진유, 명유, 철유, 서유 등이 힘을 합해 건립 하였다고 전한다. 선조의 덕을 기리고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 누각은, 그 뒤 고종21년인 1888년에 그의 후손 송석노가 중수하였고, 연재 송병선등이 재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안군지>에는 송병선이 지은 수선루 중수기가 게재되어 있다. 수선루 사변에는 '延安宋氏睡仙樓洞門' 이라는 아홉 자가 새겨져 있다. '수선루' 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이 이들 사형제가 우애와 학식이 두텁고 효심이 지극하며, 마치 신선이 노니는 것 같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들 4형제는 나이 80이 넘어서도 이 정자에 올라 학문을 논하고, 바둑을 두기를 즐겼다는 것이다.
바위 암벽을 이용해 축조한 정자 ‘수선루’
수선루는 자연암굴을 이용하여 2층으로 세워져 있고, 2층의 중앙에는 '수선루(睡仙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수선루를 오르는 길은 우측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고, 좌측으로는 섬진강 줄기가 흐른다. 돌 축대를 쌓은 곳을 오르다가 보면 절로 입이 벌어진다. 어떻게 이런 곳에 누각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2층으로 지어진 수선루는 1층의 문을 통하여 오르게 되어 있다.
이곳 수선루를 찾아갔을 때는 수선루 위에서 내다보이는 앞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어갈 철이었다. 앞으로는 나무들이 가려 밖에서는 수선루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이 누각을 찾아왔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그렇게 헛걸음을 친 덕에 이곳을 다시 찾았을 당시에는 사전에 수선루에 대해 조사를 하고 온 길이라, 머뭇거림 없이 수선루를 찾을 수 있었다.
자연암벽을 이용해 지은 수선루. 그 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지를 못한다. 밖에서 보는 경치만으로도 절경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암벽을 이용해 정자를 지을 수가 있었을까?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다가 열려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머리에 닿을 듯 누마루의 바닥이 위에 놓여있다. 바위를 주춧돌로 이용해 멋대로 늘어선 기둥들. 그 또한 세상 격식에 매이지 않은 송씨 4형제의 마음을 닮았다.
한 철을 이곳에서 머물고 싶다
정자의 보이지 않는 뒤편은 바위 면과 처마가 맞닿을 듯하다. 그래도 꾸밀 것은 다 꾸며놓았다. 비스듬히 깎아진 바위 면에도 ‘송씨수선루’라고 음각을 해놓았다. 그 밑으로는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고여 있다. 물을 떠 입안에 넣어본다. 싸한 기운이 목을 타고 흐른다. 이 물을 마시면서 4형제는 이곳에서 신선과 같은 생활을 한 것일까?
아마 나라도 이곳에서 떠나기 싫었을 것이다. 누마루 위로 올라본다. 앞으로 보이는 섬진강과 누렇게 익은 벼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누각이, 그 위로 오르면 이런 아름다운 절경을 만들어 내다니. 이곳이야 말로 비경이 아니겠는가? 한 철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갑자기 수선루가 그리워진다. 그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돌아보지 못했던 전국의 정자와 고택, 문화재,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들. 그 오랜 세월 이런 것들을 찾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삶에 찌들어서였는지 나태해졌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 계절에 다시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가까운 곳을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절로 80수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겠나?
누각 안에는 수선루 중수기를 비롯한 게판들이 걸려있다. 작은 방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쪽마루를 내었다. 방은 천정이 낮아 서서는 들어갈 수 없다. 아궁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겨울철에도 이곳에서 사방 경계를 바라보며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신선이 노니는 곳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위에 서니 절로 신선이 되는 듯하다.
누마루에 철버덕 주저앉는다. 세상 모든 시름을 다 털어버릴 수 있는 곳이다. 인적 없는 이곳에서 한 철을 살면 안 되려나? 사람들은 어찌 이런 곳을 두고, 답답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이 수선루가 내 조상들의 것이 아님을 한탄한다. 떠나고 싶지 않은 수선루. 난 이 누각을 ‘호남제일암루’라고 이름하고 싶다. 아마 이곳에서 한 철을 난다고 하면, 절로 80수를 누릴 수 있으려니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수선루의 자료를 찾는다. 벌써 이곳을 다녀온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여행하기 닥 좋은 계절, 들판에 나무들도 푸른색을 띠고 있다. 이번 여행은 진안군을 한 번 다녀와야겠다. 마이산을 비롯해 많은 볼거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초가집도 이 정도면 대갓집 부럽지 않아
화성 서신면 정용래 가옥을 돌아보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오얏리길 56(궁평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5호인 화성 정용래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정용래 가옥은 초가집으로 1800년대 말에 지은 집이다.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와 행랑채가 모여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 'ㅁ'자형의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다.
요즈음은 주말만 되면 답사를 나간다. 그동안 무엇이 그리 바쁜지 제대로 답사를 하지 못해 늘 몸이 굼실거리는 것이 사는 재미도 잃어버린 듯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에는 가까운 곳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한 번 답사를 나서면 7~8곳을 돌아오는 빡센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그동안 게으름을 반성하는 뜻에서이다.
화성시는 일개 지역치고는 많은 문화재가 소재한다. 그래서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몇 주에 걸쳐 돌아보기로 한 곳이다. 7일 이른 시간 화성으로 향했다. 이번 답사는 화성시 서신면을 중점적으로 답사하리라 마음을 먹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선 것이다. 답사를 즐기면서 하라고 했지만 하루 만에 여러 곳을 돌아보려면 자연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초가도 이 정도면 대갓집 부럽지 않소
서신면 궁평리에 자리하고 있는 정용래 가옥은 산쪽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4호인 기와집인 정용채 가옥과 이웃하고 있다. 위쪽 정용채 가옥은 기와집이고 아래쪽 정용래 가옥은 초가집으로 조성되어 있어 한 곳에서 기와와 초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정용래 가옥은 항상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집 앞으로는 소로가 나 있고 대문 앞에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수령이 꽤 된 이 느티나무가 정용래 가옥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집 주변을 몇 바퀴 돌면서 밖에서 촬영을 하자니 산비탈까지 올라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며 대문의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가 세로로 길게 자리 잡고 있는 정용래 가옥은 초가이긴 하지만 구성이 잘 되어 있어 어느 대갓집이 부럽지 않다.
집 앞 도로에서는 안채와 마주하고 있는 사랑채가 보인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굴뚝이 나란히 두 개가 서 있는 것이 이곳 사랑은 부엌이 사랑과 안사랑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사랑채가 마주보이는 곳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꺾이는 왼쪽 아래로 찻방과 안방, 부엌을 두었다.
대청의 뒷벽에는 왼쪽으로 뒷창을 내고 오른쪽으로 벽장을 만들어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용래 가옥. 이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는 민가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바깥마당은 사랑방 앞으로 터져 있으며 왼편에 헛간채가 있다. 정용래 가옥은 전체적으로 민가의 격식과 쓰임새를 갖추었던 부유한 농민의 집으로 추정된다.
볼썽사나운 문화재 안내판, 문화재명 바꾼 지가 언제인데
대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그저 집 주변만 이리저리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집의 모습을 이곳저곳 꼼꼼히 촬영을 마치고나서 문화재 안내판을 보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안내판은 색이 다 흐려져 글씨를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거기다가 ‘중요민속문화재’로 문화재 명칭이 바뀐 지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요민속자료’라는 안내판과 안내 석물에 적혀 있다.
화성시 몇 곳을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문화재 명칭이 바뀐 것을 교체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아다니기도 하는데 이렇게 문화재명칭 하나 제대로 적은 안내판을 세워놓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문화재는 민족의 자랑이다. 중요민속문화재는 국가에서 지정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중요민속문화재라고 해도 관리는 해당 지자체에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화성시 모든 곳의 민속문화재는 ‘민속자료’라고 쓴 안내판을 교체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이유는 문화재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작은 정성이다. 문화재의 잘, 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보존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것을 지적하기 보다는 좋은 것을 칭찬해주고 문제가 있는 것은 시정을 요구하려고 노력한다. 작은 힘이나마 후손들에게 온전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물려주기 위함이다. 문화재 안내판을 정정하고 깨끗한 글씨로 교체한다고 해서 화성시의 재정이 휘청거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화성시 문화재 담당부서에서는 관내의 문화재 안내판을 조속한 시일 내에 일제정비를 해주기 바란다.
중종의 왕명으로 지은 정자 기영정
장성에서 734번 도로를 따라 영광IC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가 나온다. 이 도로변 우측으로 키 큰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정자가 서 있다. 기영정, 이 정자는 1543년 처음으로 왕명에 의해서 지어진 정자이다.
지지당 송흠(1459-1547) 은 세조 5년인 1459에 참봉 송가원의 아들로 출생했다. 명종 2년인 1547년에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만고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노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하여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전임한 뒤, 광주 나주의 목사, 담양과 장흥의 부사를 지냈다.
153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지만, 노모와 떨어져 사는 것이 죄스럽다고 하여 왕의 특허를 받고 집에 돌아갔으며, 101세를 산 모친을 봉양하였다. 7회에 걸쳐 효렴으로써 상을 받은 송흠은 1538년 청백리에 녹선이 되고, 1696년에는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기영정은 1543년 당시 전라도 감찰사인 규암 송인수가 송흠을 위하여 왕명을 받들어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키 큰 소나무들이 늘어선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용암천이 흘러 경치가 뛰어나다. 중종이 송흠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던 것 같다. 중종은 전라감찰사로 부임을 하는 규암 송인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송흠을 위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기영정이라고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사람이 올바른 생활을 하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면, 세상 누구인들 그 사람을 우러러보지 않겠는가? 아마 송흠도 천하에 효자로써 어머니 모시기를 정성을 다하였으니, 당연히 중종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기영정은 전쟁으로 소실이 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송인수의 10세손인 송겸수가 영광군수로 부임을 하면서 철종 7년인 1856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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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숲길을 따라 기영정에 오른다. 방도 없이 사방이 탁 트인 정자가 시원하다. 앞으로 흐르는 용암천가에 아직 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가 노랗다. 정자 앞에는 잎을 다 떨어트린 백일홍이 서 있다. 기영정이란 다른 글씨의 현판이 좌우에 걸려있는 정자는 주춧돌도 자연석이다. 그저 자연을 닮아 평생을 효로써 마친 정자 주인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아마 뒤로 난 도로가 없었다면, 그리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없었다면 소나무 가지에 앉은 새들의 지저귐만 남았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요직을 거쳤으면서도, 노모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송흠. 그에게 내려진 중종임금의 사랑이 깃들어서인가 마음부터 숙연해진다. 수많은 정자를 돌아보면서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 기영정에 올라 효심(孝心) 하나를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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