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에는 ‘삼한(三寒)’이 있다. 세 곳의 찬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하나는 전주천 가에 자리하고 있는 ‘한벽당(寒碧堂)’이요, 또 하나는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이다. 그리고 남은 하나가 바로 무주에 있는 ‘한풍루(寒風樓)’라고 한다. 세 곳 모두 물에 가까이 있어 시원한 바람을 맞기에 적합하다.

한풍루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한풍루가 언제 지어졌는가는 정확지가 않다. 다만 14세기경에 지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국여지승람』무주 누정조에는 ‘한풍루재객관전’이라고 적고 있어, 한풍루가 객관에 달려있는 건물임을 밝히고 있다. 한풍루는 선조 25년인 1592년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현감 임환이 다시 지었다.


한풍루의 수난, 그러나 당당한 자태로 남아

한풍루는 누마루 밑으로 어른들도 지나갈만한 높이로 지어졌다. 정면 세 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정자는, 이층 누각을 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한풍루의 주초는 네모난 모형으로 돌을 다듬어 사용하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전체적으로 보면 당당한 자태가 남아있어 ‘호남제일루’라고도 부른다.

한풍루는 수난의 역사를 당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임환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에도 몇 차례 중수를 하였다. 이러한 한풍루는 한 때는 일본인의 소유로 넘어가 불교포교당으로 사용이 되기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금호루’란 명칭으로 바뀌기도 했다. 수난의 역사를 당한 한풍루는 1971년에야 제 이름과 옛 모습을 찾았다.




아름다운 우물천정, 그러나 굳게 닫힌 문

밖에서 올려다 본 한풍루는 아름다웠다. 주심포계로 지어진 누정은 우물천정을 하고 화려한 색채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기둥 밖으로 뺀 누마루에는 난간을 둘러 멋을 더했다. 이층으로 올라가 한풍루의 풍취를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누각으로 오르는 출입구에는 널판으로 짠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도대체 문화재 보호를 한다고 하면, 이렇게 문을 달아 잠가버리다니.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 찾아간 곳이지만, 가는 곳마다 이렇게 문을 달아 닫아놓기가 일쑤다. 문화재보호라는 것이 문을 닫아야 가능한 것인지. 물론 화재 등 위험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겠지만,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개방을 할 수가 없는 것인지.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문이 잠긴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참으로 난감하다. 같은 문화재인데도 불구하고 문을 잠그지 않아도 보존이 잘 되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문을 잠근다고 해서 문화재 보존을 잘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잠가버리고 나서 제대로 간수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최선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각에는 글귀가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그러나 오를 수 없는 누각 위에 있는 글귀를, 아래에서 읽을 수는 없는 일이고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위로 올라 주변 풍광을 볼 수가 있다면, 더 아름다운 모습을 적을 수 있을 텐데.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그저 꽁꽁 닫아버린 문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가면 계곡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한 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곳이 있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 소(沼)가 있어, 이 소를 ‘용소(龍沼)’라 부른다. 소 옆에는 ‘장수 양악탑’이라고 부르는 5층 석탑이 서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세운 시기가 2천 년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탑이 서 있는 주변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이 탑을 ‘심방사 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심방사라는 절이 언제 적에 이곳에 있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양악리 일대에는 향고 터, 동헌 터 등의 자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고려 말기에 이 부근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로 만들어진 탑

이 양악리 탑은 높이가 2m 정도로 크지 않은 탑이다. 주변에 많은 암반이나 석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은 석탑을 조성했다는 것은, 이 탑이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탑은 장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파손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탑의 원형을 알아 볼 수가 있다.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있으며, 누군가 탑 위에 둥근 강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탑은 그 생김새가 딴 지역의 석탑과는 다르다. 1층의 몸돌은 사다리꼴로 만들어졌으며, 2층부터 4층까지는 각 측의 지붕돌인 옥개석 위에 몸돌을 붙여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몸돌 밑에는 아래 단의 지붕돌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탑의 모양은 소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심방사 탑을 찾아 양악리를 맴돌다

5월 20일 오후에 잠시 들린 장수군. 몇 번인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들린 곳이지만, 20일 낮에 들린 양악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날 수가 있었다. 양악리는 애국지사요 한글학자인 건재 정인승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마을에는 건재 기념관과 재실, 동상 등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심방사 탑의 이정표를 보고 들어갔지만,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마을을 돌다가 만난 주민에게서 탑의 위치를 파악하고서야 탑을 찾을 수 있었다. 탑은 마을 반대쪽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소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탑이기에 마을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전설로 남아있는 심방사

양악리 오층석탑은 양악마을과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마을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격전지였던 흔적이 있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는 옛날에 한 도사가 살고 있어, 학을 길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마을이름을 양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앞에 산을 ‘학산’이라 부르고, 이웃마을로 가는 고개를 ‘학고개’라고 부른다.

이 오층석탑은 원래 백제의 심방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전화로 심방사가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탑을 옮기거나 없애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에서 보존을 하고 있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특이한 양악탑. 심방사라는 절이 어떤 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암벽을 흘러 소로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린다. 그 물소리를 들으면서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 온 석탑. 지금은 그 위로 저수지 공사를 하느라 중장비의 굉음만 시끄럽다. 그렇게 또 다른 소리를 들어가며 탑은 묵묵히 오늘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주군 북내면 중암리와 강천면 도전리에는 ‘라파엘의 집’이 있다.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이유는 운영하는 단체(사회복지법인 하상복지회, 원장 정지훈)가 같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우들이 묵고 있는 이 두 곳은, 중암리에는 20세 미만이 도전리에는 20세 이상의 장애우들이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을 들린 이유는 ‘스님 짜장’ 봉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곳을 둘러보고 난 후, 참으로 부끄러웠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도전리에 있는 라파엘의 집을 찾아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난 후, 이들의 생활에 오히려 내가 위안을 받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라파엘의 집에는 170명 정도의 장애우들이 묵고 있다. ‘시각중복 장애인의 재활과 교육의 메카’라는 슬로건을 걸고 생활하는 라파엘의 집을 돌아보았다.




이른 아침에 떠난 길

아침 6시 30분. 채 잠도 깨지 않은 상태에서 남원을 출발했다. 3시간 30분을 달려 라파엘의 집에 도착을 했다. 그리고 도전리에 있는 라파엘의 집을 찾아가, 김정식 시설부장의 안내로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말끔히 정리가 된 경내는 여기저기 장애우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한 곳을 들어가니 스태플 작업을 자원봉사를 하는 학생들과 장애우들이 열심히 하고 있다. 눈이 보이지가 않는다고 하는데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저들에게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우문을 해본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가 시각중복장애우 들입니다. 모든 분들은 각자 통장을 갖고 있어 이렇게 일을 하고 받은 수당은, 모두 당신들의 통장으로 바로 입금이 됩니다. 사회인들과 똑 같이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 것이죠.”




다음 칸으로 가니 구슬 꿰기, 머그컵 만들기 등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 판매를 하기도 한다. 함께 동행을 한 도자 작가들도 그들의 작품을 보고 감탄을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이렇게 아름다운 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가는 당신들, 내가 정말 부끄럽다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살이를 하면서 불평을 한다. 살기가 어렵다. 누가 보기 싫다 등. 이런 말을 수도 없이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라파엘의 집 사람들은 오직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같은 시각장애우면서 지도선생이라는 분이 찬찬히 안내를 시작한다.



“우리는 등록상표가 천사 라파엘입니다. 이곳은 도자기를 만드는 곳이고, 저쪽은 컴퓨터실입니다. 컴퓨터를 켜면 화면을 읽어주는 시스템이 개발되어 편리합니다. 노래도 듣고, 책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 중 음악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 조직한 밴드도 있다는 것이다. 라파엘의 집 경내에는 각종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시설까지 마련이 되어있다. 점심시간이 되자 선생님들과 자원봉사 학생들의 손을 잡고, 식당에 모인 라파엘의 집 가족들. 그들이 자장면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 우리가 다녀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외롭고 소외된 곳에서 생활하는 수많은 사람들. 지원이 부족해 늘 안타깝다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고 있단다. 말로만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직접 찾아와 그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것 하나에도 이렇게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당신들. 당신들이 정말 부럽다. 그리고 힘껏 박수를 치고 싶다.


경기도 여주군에 소재한 고찰 신륵사를 사람들은 ‘벽절’이라고 부른다. 신륵사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탑이 있기 때문이다. 신륵사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로도 유명하지만, 판소리 중고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명창 염계달이 이곳에서 득음을 하고 ‘경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륵사 경내에는 전탑 외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바위 위에, 심하게 마모가 된 체 서 있는 석탑 한기가 있다. 옆에는 강월헌이 자리하고 있어, 남한강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이 삼층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나옹화상을 화장을 한 자리

기록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을 신륵사 경내 남한강 가에서 화장을 했다고 한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석탑은 대웅전 앞에 많이 세우는데, 이렇게 동떨어진 강가에 서 있기 때문에, 기록에 보이는 화장을 한 장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석탑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화강암을 깎아 조성한 이 삼층석탑은 현재 3층의 몸돌은 멸실된 상태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탑은 기단부 밑에 기단부를 한 장의 넓적한 돌로 조성을 하고, 그 밑으로는 자연 암반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강가의 암반에서 나옹화상을 떠나보냈는가 보다.


짜임새가 간결한 고려 후기의 석탑

남한강가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기단부는, 아래기단은 2단의 형태로 조각하였다. 그리고 위기단은 양 우주와 탱주를 조각하였다. 위에 탑신에는 양편에 우주를 새겨 넣었다. 그러나 몸돌의 끝 부분이 마모가 심하여 양 우주를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몸돌 위에 얹은 지붕돌인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하다. 옥개석은 심하게 훼손이 되어, 일반적으로 석탑에서 보이는 처마가 날렵하게 솟아오른 모습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기단의 위에 덮은 지붕돌에는 앙련을 크게 새겨 넣었다.




옥개석 아랫부분에 새긴 층급받침은 3단과 4단으로 일정치가 않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부는 사라져 버렸으며, 맨 위의 옥개석 위에는 둥근 구멍이 나 있다. 아마도 상륜부를 고정시키기 위해 철골로 된 구조물을 얹었던 것 같다.

나옹화상을 기억해 내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牙)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럴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이렇듯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화상이 입적 한 후 화장을 한 장소에 세웠다는 삼층석탑.

아마도 그 탑의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나옹화상의 성정을 닮은 것은 아니었을까? 4대강 개발이라는 허명아래 파헤쳐지고 있는 남한강을 보면서, 나옹화상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글을 지었을까? 5월 19일 찾아간 신륵사 삼층석탑 앞에서 깊은 상념에 잠긴다.


남원시 산동면 식련리 221번지에 있는 승련사는 원래 ‘금강사지’라는 폐사지였다. 이 금강사지는 문수보살의 성지로 전해진다. 이곳의 삼성각 뒤편에는 높이 2m 정도에 길이가 10m 정도 되는 바위들이 있다. 여러 개의 조각으로 된 바위들이 줄을 지어 있는데, 이 바위에 희한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를 마을 사람들은 ‘기차바위’라고 부른다. 길게 늘어선 것이 기차와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이 바위의 넓적한 면에는 밀교의 문양인 유가심인 2점과, 그 옆에 내려 쓴 ‘옴마니반메훔’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런 밀교의 문양이 왜 이곳 옛 사지 인근 바위에 새겨진 것일까?


우주의 이치를 상징한 유가심인도

유가심인도는 우주의 이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높이가 70cm 정도로 음각한 유기심인은, 극락 만다라의 세계를 표현했다고 한다. 이는 깨달음의 최고 경지를 공으로 표시를 했으며, 그 위쪽은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는 것이다.

승련사 주지인 경헌스님은 이곳 폐사지에 들어와 처음으로 절을 중창하고, 이 유가심인도를 보고는 무당들이 이곳에 와서 부적을 파 놓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처음 이곳에 들어와 저 바위에 있는 그림을 보고는 무당들이 이곳에 부적을 파 놓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오대산 적멸보궁 뒤에도 같은 그림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알아보니 밀교의 문양이라는 것이죠. 고려시대에 이곳이 밀교의 수행도량으로 유명했나 봅니다.”



그러면서 이 유가심인도를 찾아보기 위해 여러 곳을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이 유가심인도에 대해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이런 밀교의 문양인 유가심인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옛 스님들이 이곳 폐사가 된 금강사에 거처를 정하시고, 저 그림을 부처님의 고행상으로 알고 정진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가심인은 얼핏 보면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처럼 보인다. 마치 팔과 몸 다리를 어느 지방의 장인이 조각을 하다가 완성을 하지 못한 듯하다.

“저 유가심인은 머리가 없어요. 아마도 부처님을 상징할 때 저기까지만 조각을 하고, 그 위는 우주를 머리로 삼았다고 볼 수 있죠”

마치 머리가 없는 마애불을 조성한 듯한 유가심인도. 그 위에 머리는 우주가 된다고 하니, 그 깊은 깨달음을 알 수가 없다.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가심인

삼성각 뒤편으로 돌아가 바위를 유심히 살펴본다. 이곳은 고려 때 절이 있었다고 하는 곳이다. 금강사라는 절이 어느 시기에 무슨 이유로 사라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 때의 절이라고만 전해질 뿐이다. 남원지역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수많은 절들이 화재로 인해 폐사가 되었다. 혹 금강사도 그 당시에 소실이 된 것이나 아닌지.

바위에는 유가심인도 2점과 옴마니반메훔이란 글씨 말고도,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조성한 흔적들이 보인다. 잘못 본 것인지는 몰라도 안상과 같은 형태로 파 들어간 듯도 하다. 아마도 이 절이 고려시대의 절임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밀교의 상징인 유가심인. ‘비밀불교’라는 뜻으로 해석을 하는 밀교가, 고려시대에 이 지역에 들어와 수행을 한 흔적이다. 밀교는 중생에서 부처를 향해 깨달아가는 수행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이미 깨달음을 성취한 보리의 세계를 말한다. 아마도 승련사 뒤편 바위에 새겨진 유가심인도 그러한 깨달음의 성취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유가심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그 결과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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