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스님’으로 유명한 남원 선원사 운천스님이 자장면 봉사단과 여고 댄싱팀, 각설이 패 등과 함께 남원 대산면에 있는 103연대(백마연대)를 찾았다. 5월 14일(토) 아침부터 준비를 하여 찾아간 부대에는 군장병들과 마을 대산면과 왕정동의 주민들, 그리고 남원사암연합회 스님들과, 옥율교회 목사님과 신도 10여명 등 모두 65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0시 30분부터 103연대 연대장인 김종태 대령의 인사말에 이어, 35사단 군악대의 타악 퍼포먼스, 판소리, 대금연주 등으로 흥을 돋우기 시작한 공연은, 전라북도 여고 댄싱 팀의 공연이 펼쳐지자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일먼저 전주영상미디어고등학교의 ‘유카’의 춤으로 시작하여, 전주중앙여고의 ‘프리디’ 등이 무대에 오르자 군인들의 흥은 절정으로 치솟았다.

 

 

사진 위로부터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 음식을 준비하는 남원 선원사 자원봉사자, 주민과 장병들에게 인사를 하는 103연대 김종태 연대장

역시 끼리끼리는 통하다

춤이 끝나고 인사를 할 때마다 군인들은 “가지 마 동생들아, 다신 한 번만 더”를 연호하면서 일어서서 소리를 치고는 했다. 세 번째로 무대에 오른 익산지역 남녀연합팀인 ‘E-lady'가 무대에서 춤을 추고 난 뒤 단 아래로 내려가자, 일제히 일어선 군인들은 환호를 하면서 뛰쳐나왔다.

그런 모습을 보니 역시 젊음은 젊음끼리 통한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여고생들이 무대 위에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동안 장병 두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왔으나, 부끄러움을 타는지 자리로 돌아가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연신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손뼉을 쳐주는 마을 주민들도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35사단 군악대의 타악퍼포먼스와 대금연주(아래)

각설이 타령에 흥이 난 주민들

장병들이 젊은 고등학교 댄싱 팀에 열광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103연대 인근마을 주민들은, 각설이 타령이 시작되자 절로 어깨춤이 추어지는 듯하다. 대산면에 사신다는 한 어르신은 “이렇게 103연대와 선원사에서 우리들을 초청해 좋은 구경도 보여주고, 맛있는 음식까지 대접을 해주니 정말로 고맙다”며 군부대 막사까지 돌아보셨다고 자랑을 하신다.

한편에서는 부대를 방문한 어린이들이 서바이벌 게임에 사용하는 총을 쏘아보면서 즐거워한다. 군이 주민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구경을 하던 한 장병은 “부대에서 이런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즐겁습니다. 토요일에 이렇게 부대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하면서 환하게 웃는다.

 

 

 

사진 위로부터 전주영상미디어고 댄싱팀 '유카'.  전주 중앙여고 댄싱팀 '프레디'. 익산연합댄스동아리 '이-레이디'의 공연 중 일어나 달려나오는 장병들. 각설이 타령을 하는 김병철
 
푸짐한 음식에 마을주민들도 감사를

‘짜장스님’의 정성이 가득 담긴 자장면과 과일, 그리고 떡 등 푸짐한 음식상을 접한 마을 주민들과 장병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주민 이 아무개씨(남, 51세)는

“우리 아들도 군에 가 있는데 군인들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막상 군부대에 들어와 보니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고 한다. 짧은 시간에 준비한 잔치치고는 즐거운 잔치가 되었던, 103연대의 마을경노잔치 및 장병 위문공연. 모든 공연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 떠나는 댄싱 팀을 향해 누군가가 소리를 친다.



사진 위로부터 순천에서 장병들을 위해 달려온 밸리댄싱팀. 줄지어 배식을 가디리는 장병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있는 주민들

“가지마라. 다음에 꼭 다시 한 번 와라. 기다릴게”


장수군의 산서면은 태백정간 중 소백산맥의 일맥이 무룡궁재에서 시작하여, 장안령봉을 병풍처럼 펼쳐 놓고 있다. 다시 서쪽으로 뻗어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인 수분치를 이룬 뒤, 줄곧 서쪽으로 뻗어내려 성적산을 이룬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노령산맥)에서 남북으로 뻗은 양 줄기가, 마치 암탉이 양 날개로 알을 품은 듯한 분지가 있어, 옛 부터 명당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 산서면의 오산에서 임실군 성수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침재로 가다가 보면 마을이 나타난다. 초장마을이라고 하는 이 마을은 산서면 오산리의 안마을로 입구 길가 양편에 두 개의 돌탑이 서 있다. 마을을 바라보면서 우측에 있는 탑은 할아버지 탑인 남탑이고, 좌측 소나무 아래에 장승 곁에 있는 탑은 할머니 탑인 여탑이다. 탑 위에 뾰족한 돌을 세워 놓은 것이 할아버지 탑인 남탑이다. 맨 위에 돌은 남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권이종이 태어 난 초장마을

오산리 초장마을은 교육자학인 권이종 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권이종 박사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독일에 파견한 광부 2기에 지원을 했다. 소를 팔아 여비를 마련해준 가족에게 보답하고자, 연장 근무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공부를 한 권이종 박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마을 앞 석비에는 ‘초장마을’ 이란 글씨 밑에 권이종 박사가 태어난 곳이라고 써 놓았다. 권이종 박사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귀국하여 전북대 교수가 됐고, 1985년부터 한국교원대에 재직하다 2006년 정년퇴직했다.


권이종박사가 태어난 초장마을 석비(위). 위에 뾰족한 돌을 새긴 것이 바로 할아버지 탑이다.
   
길가 양편에 있는 누석탑은 오랜 흔적이

초장마을은 마을의 형상이 ‘초중반사형’이라고 한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곳이다. 이는 풀숲에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름을 ‘초장마을’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이 마을 인근에는 고인돌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로 이 마을에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약 5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원주이씨와 상산이씨가 들어와 살다가 상산이씨는 모두 이주를 해버리고, 현재 원주이씨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안동권씨들이 마을에 이주를 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 있는 누석탑이 언제부터 전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마을 안에 있는 정자인 ‘만취정’ 앞에서 만난 어르신은 “저 탑은 우리 어릴 적에도 있었는데 오래된 것인지만 알지, 언제 적부터 있었는지는 몰라” 라는 대답이시다. 첫눈에 보기에도 남탑은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탑은 아마 최근에 새롭게 쌓아 올린 듯하다.

마을 공동체를 창출하는 돌탑

돌로 탑을 쌓아 마을 어귀에 놓는 탑은 누석탑, 혹은 할아버지·할머니 탑이라고 부른다. 누석탑이란 돌을 쌓아올려 봉분처럼 만든 것을 말하는데, 이 탑은 강원도 일대서부터 태백산맥을 따라 내려가면서 많이 보인다. 처음에는 어떤 목적으로 쌓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돌탑 앞에서는 정월 초에 길일을 택해 마을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거나, 정월 대보름에 제를 올리기도 한다. 대개는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가려 제관을 뽑아 제를 올리게 한다. 이 돌탑은 원시형의 신앙물로 추정하고 있다. 돌을 쌓을 때는 시멘트 등은 섞지 않으며, 단순히 돌만 갖고 위로 올라 갈수록 뾰족하게 쌓아올린다.

명당이기에 명사가 배출된다는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초장마을. 산림청과 유한킴벌리가 주관한 녹색마을 찾기에서 선택이 된 것도 다 돌탑 덕분이라고 한다. 마을주민들은 돌탑이 있는 한 마을에는 어떠한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선돌은 고인돌과 더불어 대표적인 ‘거석문화(巨石文化)’에 속한다. 선돌은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상당수가 있는데 비해, 많이 분포되어 있지는 않다. 선돌의 분포지역은 함경도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이다. 선돌은 돌을 세웠다는 뜻으로, ‘삿갓바위’나 ‘입암(立岩)’이라고도 부른다.

이 선돌은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구지바위, 수구맥이, 수살맥이, 수살장군, 석장승, 할머니·할아버지 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선돌의 형태는 위가 뾰족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하는데, 대개는 선돌에 구멍을 파거나 줄무늬를 그려 넣기도 한다.


기자속이나 자손창성과 연결이 되

선돌은 그 형태에 따라 암돌과 숫돌로 구분이 된다. 끝이 뾰족한 것은 숫돌이고, 뭉툭한 것은 암돌이다. 이는 이 선돌이 기자속과 연관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선돌에 일곱 개의 구멍을 뚫은 것은 칠성의 믿음과 연관이 되는 것으로, 이는 자손창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성혈인 구멍이 뚫린 것은 모두 기자속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선돌은 아들을 바라는 기자믿음으로 보여진다. 선돌은 마을의 어귀나 구릉지대, 논이나 밭 등에 서 있다. 그러한 선돌은 선사시대 신앙물로 이어지면서, 신성한 지역을 알리거나 기자속까지 연결이 된다.


전주에서 남원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남원 못 미쳐 장수, 금산 방향으로 가는 길이 좌측으로 나온다. 그곳에서 조금만 가면 지사면 영천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 길가에는 커다란 선돌 한 기가 서 있다.

빨래판으로 사용했던 선돌

이 선돌은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돌에 새겨진 성혈로 보아 아마도 선사시대의 입석으로 보인다. 이 선돌은 마을 사람들이 냇가에 갖다놓고 빨래판으로도 사용을 하였고, 개울을 건널 때 다리로도 사용을 한 돌이라고 한다. 2009년 까지는 버스정류장 부근에 서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이 선돌은 특이한 면이 있어 TV에 방영이 되기도 했다. 길게 일렬로 조성을 한 성혈 12개가 나란히 돌의 한 쪽 면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이렇게 12개의 성혈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12지를 뜻하는 것으로도 본다. 이렇게 12개의 성혈이 나란히 조형이 되어있는 형태는, 우리나라 전체의 선돌이나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 중 매우 희귀한 경우이다.

성혈의 크기는 직경이 8~10cm 정도에, 깊이가 2~5cm 정도나 된다. 돌의 한편에 나란히 새겨진 이 성혈의 의미를 두고 많은 해석을 하는 것도, 이러한 경우가 거의 발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빨래판 선돌’이라고 부르는 이 선돌은 아마도 신성한 지역을 알리는 표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돌은 삼한시대 소도나 솟대 등으로 변했다고 하는 학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사면의 빨래판 선돌의 경우도 그러한 경우가 아니었을까? 누군가에 의해 간절한 염원을 담고 조형을 한 것으로 보이는 12개의 성혈. 많은 선돌들이 뒤늦은 연구로 인해 훼손이 되었지만, 이런 희귀한 선돌은 그 가치가 매우 높아 좀 더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나이를 먹다가 보면(연세가 많으신 분들께는 참으로 죄스럽지만) 옛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어릴 적에 함께 놀던 친구들이나, 같이 하던 놀이가 생각이 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늘 먼 산을 바라보다가 눈시울을 적신다. 아주 친한 친구 녀석이 하나 있었다. 국민학교(우리 때는 초등학교를 이렇게 불렀다.)를 다니는 내내, 녀석과 나는 우리 집 너희 집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 모든 가족들이 한 식구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 녀석이 이사를 가고 난 후, 연락이 끊기더니 벌써 5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몇 년 전인가 그 녀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참으로 속이 미어지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 녀석이 다시 생각 난 것은 서천에 있는 도자기 공방에 가서이다.


어릴 적 보던 풍경이 그대로

그곳에는 마당 한 편에 조형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옛날에 놀던 친구 녀석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이 놓여 있다. 썰매타기며 윷놀이, 말타기 등등. 그 모습을 보다가 그만 왈칵 서러움이 복받쳐 온다. 뒤 늦게 소식을 접한 친구 녀석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과 늘 함께 하던 모습이다.



녀석과 함께 냇가에 가서 물장구를 쳐가며 물고기를 잡는다고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도 했다. 한 겨울에 썰매를 지치다가 넘어져 ‘메기’를 잡기도 했다. 마을에 사는 형이(사실은 아저씨뻘이었지만) 장가를 간다고 하는데, 그 뒤를 따라가면서 괜히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도 색시가 너무 예뻐 보여 괜한 심통을 냈는가 보다.



그런 모습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나는, 그런 흙으로 만든 토우가 즐비하다. 그 주변을 돌면서 녀석과의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다가 보니, 괜히 코끝이 찡해온다. 소식이라도 주고받았으면 좋았을 것을. 녀석의 누나를 통해 들은 소식은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더욱 더 그리운 녀석이다.



이제는 그만 생각을 하자고 마음을 달랬는데, 아직도 녀석이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었는가 보다. 토우를 보는 순간 그만 또 한 번 울컥하고 말았다. 사진을 하나하나 담아내면서도, 녀석이 못내 그립다. 아마도 옛날 그 모습들이, 그래도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인가 보다. 그런 기억을 하나하나 다시 새겨보면서, 녀석과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은 것인지.



서천에 있는 월하성이라는 마을이 있다. 달이 떠오른다는 이곳은 서천 동백숲이 있는 곳과 가까운 곳이다. 이곳에 도자기 공방을 하는 아우가 산다. 아주 가까운 지인들과 일 년이면 두 세 차례 이곳에 모여 거나하게 달빛에 술이 취하고는 한다.

그런데 이 공방을 찾아가던 날 정말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보았다. 옆에는 불과 몇 개월 밖에 안된 강아지가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녀석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니 작기는 어지간히 작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길이가 한 15cm 정도나 됨직하다.


그런데 이 녀석 낯을 가리는지 여기저기 숨어다닌다. 나무 뒤에도 숨고, 독 뒤에는 숨는다. 그런 여석이 차 한 잔을 마시려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더니, 따라 들어가 문 앞에 앉아있다. 사진을 찍고 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이 녀석 발을 두드려가며 박장대소를 하다니.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발을 구르는 폼이 장관이다.

옆에 있는 누렁이도 이제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녀석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이다. 이렇게 작은 녀석이 눈치를 보며 주위를 겉돈다.

 

주위를 돌며 눈치를 보는 녀석. 아마도 낯을 가리는 듯하다




그러던 녀석이 작업실 안으로 따라 들어와 문 앞에 앉았다.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길래 쳐다 보았더니, 이런 세상에 이 포즈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말 그대로 박장대소를 하는 폼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