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머 있어. 그냥 살다가 가는 거지 뭐"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그냥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가슴 속에 묻어 둔 말을 하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복 받은 인생이란 생각을 한다.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대고 살다가 보면, 깊은 병이 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인생이란게 머 있어. 그냥 사는 거지”

하긴 누구나 다 자신만의 소중한 삶이 있다고 하지만, 그 소중한 삶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다. 성공을 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는 부를 축적하거나, 아니면 명예를 얻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이 성공을 한 것일까? 사람들은 제각각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어떤 것이 성공한 삶일까? 늘 그것이 궁금하다.


인생살이에서 세 번째 스카우트가 되다

세상을 살면서 ‘스카우트’라는 말을 들어보았다. 이번에도 스카우트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려는 가는 모르겠다. 벌써 세상을 살면서 세 번째인 듯하다. 남들이 말하는 스카우트와는 좀 다르다. 하지만 있던 자리에서 ‘필요한 사람’이기에 데리고 왔다니, 이런 것도 스카우트라고 보아야 할까?

나이가 60이 넘어 이렇게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리를 옮겨놓고 나서도 조금은 걱정스럽다. 나를 필요로 하는 데서, 과연 나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죽어라고 일을 해보아도 결과가 나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기대를 했던 분들에게 더 실망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필요한 곳이 있다

사람마다 제각각 성정이 다르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능력도 다르다. 그 능력이라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능력을 발휘할 곳이라면, 기대를 해봄직도 하다. 하기에 사람마다 각기 필요한 곳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두고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보다.


자리를 옮겼다. 많은 고민을 하다가 옮겨 온 곳이다. 이곳에서 과연 내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으려는 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만 갖고도 행복하다. 아직은 처음 시작하는 것이라 몸이 피곤할 수도 있다.

인생은 60부터 라는데...

자리를 옮긴다고 하니 주변에서 걱정을 한다. 그리고 차분히 노후대책을 세우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아직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듯하다. 그래서 그냥 살다가 후에 어디 조용한 곳으로 들어가, 숨죽인 듯 살고 싶다는 말을 하고는 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세상 머 있어. 그냥 살다가 가는 거지” 이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참으로 세상 편하게 산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의 속이 과연 편안한 것일까? 아마도 그 누구보다도 속이 더 타버렸을 것만 같다. 그저 내색을 하지 않을 뿐이지.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인생은 60부터 라고” 그 말이 나에게는 적격인 듯하다.

모처럼 옮겨 온 자리에서 창밖을 보니 멀리 지리산이 바라다 보인다. 이렇게 날이 좋은 날 천왕봉이라도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다. 인생의 마지막 자리가 될지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는 ‘김개인의 생가지’가 있다. 김개인은 바로 주인을 구한 개인 ‘오수의견’의 주인이기도 하다. 오수의견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시대의 문인인 최자가 1230년에 쓴 『보한집』에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지사면 영천리는 고려시대 거령현에 속해 있었다. 김개인의 집에는 주인을 잘 따르는 충직한 개 한 마리가 있어, 주인은 어딜 가나 그 개를 꼭 데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어느 날 동네잔치를 다녀오던 김개인은 술에 취해, 그만 길가에 있는 풀밭에 쉬고 있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현재의 상리 부근에 있는 풀밭에 누워서 잠이 든 김개인. 그런데 갑자기 들불이 일어나 무서운 기세를 풀밭을 태우고 있었다. 들불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던 김개인. 들불은 김개인이 잠든 근처까지 번져왔다.

목숨을 버리고 주인을 구한 의견

불이 타고 있는데도 주인이 깨지를 않자. 주인을 따라갔던 개는 근처에 있는 개울로 뛰어들어 몸을 적신 다음, 주인의 곁으로 다가오는 불길을 향해 뛰어들어 뒹굴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를 했는지 모른다. 결국 주인이 불에 타는 것을 막았지만, 개는 온몸이 불에 그슬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개인의 생가지가 있는 영천마을 석비와 김개인의 생가지에 조성한 안채

이 이야기는 어릴 적에 책에도 실려 있는 이야기였다. 그저 만들어진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던 오수의견에 대한 이야기가, 오수에 있는 의견공원과 지사면 영천리에 있는 김개인 생가지를 찾아보면서 좀 더 아름다운 이야기로 다가온다. 이런 충직한 개라면 누군들 기르고 싶지 않겠는가?

김개인의 집을 돌아보다.

지사면 영천리에 있는 김개인 생가지. 현재 그곳에는 생가지에 재현을 한 집 한 채가 있다. 금산, 장수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생가지의 집. 낮은 돌담을 둘러친 곳 옆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돌담 안으로 들어가면 헛간채 한 채와 안채 한 채이 있다. 아마도 옛날 집이야 어떻게 꾸며졌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그려내느라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헛간채는 정면 두 칸을 반으로 갈라, 한 칸은 광으로 한 칸은 측간으로 꾸몄다. 안채는 모두 세 칸으로 집을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한 칸은 부엌이고, 중앙에는 안방 그리고 윗방을 놓았다. 안방의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으며, 그저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집 모양이다.

허물어진 벽 볼썽사나워

오수에 있는 의견공원은 몇 차례인가 찾아가 보았다. 아마도 처음으로 찾아간 날이 2006년 8월 31일이었나 보다. 임실군 오수 의견공원 안에 있는 의견비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의견공원을 찾아 가다가 보니,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려가는 도로가에 김개인과 의견의 동상이 서 있다. 공원 안에는 오수의견비와 그 앞쪽으로 의견상 등이 있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여가는 길목에 서 있는 김개인과 의견의 동상과 의견공원(아래) 2006년 8월 31일에 답사를 한 자료이다.

아마도 김개인이 개를 묻고 그곳에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 지팡이가 살아나 나무가 되었다고 하는데, 공원 안에 있는 고목 중 의견비 곁에 있는 나무가 그 나무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지난 5월 3일 김개인의 집을 찾은 것이다.



김개인의 생가지에 조성한 집을 돌아보니, 벽이 여기저기 떨어져 볼썽사납다.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아 온 한 부모가 푸념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관리를 제대로 해주지 못했음을 탓하는 것이다. 기대를 걸고 찾아간 의견의 주인 김개인의 생가지. 무조건 복원이니 조성이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후 관리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지. 구경을 하던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저 아이들이 의견에 대한 생각마저 잘못되지나 않으려는지.


가끔 바닷가를 지나다가 보면, 해안가에 작은 집이 있는 것이 보인다. ‘당집’이라고 하는 이 집들은 풍어와 바닷길의 안전을 비는 제의를 하는 곳이다. 대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딴 곳과 달라, 바다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불행을 막기 위한 당고사를 지내거나 풍어제는 지낼 때, 아무래도 일반적인 마을의 동제(洞祭)보다 더 많은 금기를 지키게 된다. 바닷길의 무사고와 풍어를 위한 마을의 제의는 3일간이나 하는 것도, 모두 살아가는 동안 평안을 바라기 때문이다. 서천군 서면 마량리 동백나무숲 안에도 당집이 있다.


500년 역사의 마량리 당집

마량리 당집은 그 역사가 500년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당집에는 서낭을 5분이나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서낭을 모신 것은 500여 년 전 이 마을에 일어난 불행한 일 때문이다. 500년 전 이 마을의 주민들은 뗏목을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풍랑이 몰아쳐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단다.

이 마을에 사는 한 노파의 남편과 자식이 그렇게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를 못했단다. 그러던 중 바다에서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용왕을 모셔야 마을이 편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 노파는 용왕에게 지극정성으로 빌었나보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해안가에 가보라고 했는데, 그 해안 백사장에서 널을 하나 발견했다.


두 가지로 전해지는 전설

그 널 안에는 서낭 5분과 동백나무의 씨가 들어있어, 서낭은 당집을 지어 모셔놓고, 씨는 해안가에 뿌렸다고 한다. 그것이 현재의 동백 숲이 되었으며, 마량리 당집 안에 모셔진 서낭이 그 다섯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전설은 두 가지로 전해진다. 그 하나는 동백 숲을 조성한 것은 수군첨사라고 하며, 그 조성시기도 300여 년 전이라는 것이다. 서천군의 소개에는 300년으로, 마량리 동백 숲과 당집에는 500년으로 기록이 되어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아마도 그저 지역에 전해지는 전설이기 때문에, 그렇게 다른 것인가 보다 하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마을의 안녕과 풍어, 뱃길의 무사고 등을 기원하는 것이라면, 그 추정연대를 같게 소개를 해야 할 것이다. 마을 노파의 전설은 500여 년 전, 수군첨사의 전설은 300년으로 되어 있어,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어야할지 난감하기도 하다. 아마도 수군첨사의 300년 보다는, 노파의 500년이 당집과 더 어울린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뱃길의 안녕과 풍농을 위한 당제

마량리 당제는 마을주민들이 제가 있기 며칠 전부터 집집마다 쌀 한 되씩을 거두어 들인다. 이렇게 집집마다 쌀을 걷는 이유는 모든 가정이 다 편안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그렇게 걷어 들인 쌀을 이용해 제물을 마련하는데, 화주와 선주의 일을 도와주는 화장, 그리고 당제에서 대를 잡는 당굴 등을 선정한다.



제관을 선출할 때는 생기복덕을 가리고, 집안에 산모가 있거나 환자가 있는 집은 가려낸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3일간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당제는 선창제를 시작으로 독경, 대잡이, 마당제, 용왕제, 거리제로 이어지며, 수십 개의 만선기와 풍어기를 당 주위를 꽂아놓는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당집 안에는, 선반에 남녀 각 두 분씩의 모형을 모셔놓았다. 아마도 다섯 분을 모셨다고 했는데, 한 분은 위패로 모신 듯하다. 아직 마량리 풍어제를 보지 못해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는지가 궁금하다. 오랜 세월 풍어와 바닷길의 무사고를 위해 서낭에게 빌던 마량리. 아마 오늘도 뱃길을 지켜주는 서낭님들이 있어, 마을이 풍요로운가 보다.

동백은 그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추백(秋栢), 동백(冬栢), 춘백(春栢) 등으로 구분이 된다. 난 개인적으로는 추백이나 동백보다 봄철에 꽃을 피우는 춘백이 좋다. 겨우내 꽃을 피우고도 모자라 5월까지도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많은 나무가 함께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보면, 그 꽃에서 민초들의 어우러진 삶을 연상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내가 서천군 서면 마량리 산 14번지 일대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69호인 ‘마량리 동백나무 숲’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우선은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동백 숲도 있지만, 당집과 동백정, 그리고 서해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볼거리가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은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5월을 아름답게 꾸미는 마량리 동백

지난 5월 4일 서천군 마량리 동백나무숲을 찾았다. 이곳은 80주가 넘는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100주도 채 안 되는 동백나무 군락이지만, 주변을 덮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장관이 따로 없다. 이곳의 나무들은 강한 해풍으로 인해 키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옆으로 퍼져나간 나뭇가지들은 오히려 무성한 숲을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다.

요즈음은 작은 나무들을 키워 더 넓은 지역에 동백 숲이 조성이 되고 있어 그도 볼만하다. 이곳에 동백나무를 처음 심은 것은 약 5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전설에는 마량리에 주둔하던 수군첨사가 꿈에 바닷가에 있는 꽃 뭉치를 많이 증식시키면, 마을에 항상 웃음꽃이 가시지를 않을 것이란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수군첨사는 진감인가 하여 바닷가에 나가보니, 정말로 꽃이 있었단다. 그것을 증식시킨 것이 바로 현재의 마량리 동백나무숲이라는 것이다. 동백나무숲 옆으로는 해송이 자라고 있는데, 이 두 숲이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서해를 내려다보는 동백정의 정취

사람들은 동백나무가지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계단을 오르며,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소리가 그치지를 않는다. 아마도 500여 년 전 이곳에 동백을 심은 수군첨사의 꿈대로,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를 않기 때문인가 보다. 동백꽃이 땅에 떨어져 그림처럼 아름답다. 떨어져 내린 꽃도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오르면 누각으로 된 동백정이 있다. 지난해인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보수공사 중이라 미쳐 정자에는 오르지를 못했다. 정자에 올라 서해를 내려다본다. 5월의 시원한 해풍에 몸을 맡긴 채, 한 없이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이 절경에 세월이 가는 것을 모르고 머물지 않았을까?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나이 지긋한 연인들도 이곳을 오면 젊은이가 되나보다. 젊은 연인들보다 오히려 나이가 든 부부들이 더 많이 찾는 듯하다. 아마도 동백나무숲과 동백정의 정취 때문은 아닐는지. 동백나무숲만으로도 족하거늘, 동백정이 그 풍취를 더하고 있다.



멀리 작은 배 하나가 지나간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글 한자 남길 수 없는 마음이 안타깝다. 정자에서 내려 동백나무숲 안을 들여다본다. 가지가 이리저리 서로 맞물리며 자라고 있다. 그저 이곳을 오면 민초들의 얼크러진 삶이 연상되는 것도, 이렇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가지 때문이다.

늘 찾아오는 곳이지만, 늘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 마량이 동백나무숲은 주변 절경과 어우러져 늘 미소를 머금게 한다. 아마도 500년 전의 이 전설은 앞으로도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힘들고 지쳤을 때 이렇게 찾아와 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뒤돌아 오는 길에 누군가 동백꽃 세 송이를 울타리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바라다보며 괜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저 것만 보고도 글 하나는 쓸 수 있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남원시 산곡동에 소재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은, 참으로 슬픔이 많은 산성이다. ‘교룡산성’이라는 산성 명칭은 아마도 이 산성이 물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룡산성에는 모두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5월 12일, 비가 뿌리는 날 찾아간 교룡산성은 이번 답사가 두 번째였다.

산성 입구에서부터 길이 미끄럽다. 돌계단을 따라 좌우로 길게 뻗어있는 산성은 그 높이가 5~8m 정도로 단단한 석축 쌓기를 하였다. 이곳은 해발 518m인 험준한 교룡산을 에워 쌓고 있는 산성이다. 산은 그리 높지가 않지만 밀덕봉과 복덕봉 등의 봉우리를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일부만 남아있는 성곽으로 추정하다

교룡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빗방울이 뿌리는 가운데 천천히 교룡산성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성 입구에는 양편으로 성이 쌓여있고 가운데 계곡부분에는 끊어져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저곳에 수문을 두었을 것이다. 99개나 되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면, 그만큼 수원이 풍부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성의 입구 좌우로는 산성이 남아있는데, 그 길이는 고작 200m 정도일 뿐이다. 원래 교룡산성의 전체길이는 3.1km 정도가 되는 제법 큰 성이었다. 아직도 군데군데 성곽이 남아있다고 한다. 성문으로 다가가니 반월형으로 조성한 성문이 나타난다. 안쪽으로 보니 문을 달아냈던 툴이 보인다. 그런데 한편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외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외문을 달아냈던 흔적이나, 성문의 규모로 보아 아마도 암문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성문은 모두 장대석을 이용해 아치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한 장의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틀을 만들었다. 성문 안으로는 비석군이 서 있다.

옹성은 후에 쌓은 듯

성문 앞에는 옹성을 쌓아놓았다. 옹성이 있다는 것은 이 문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옹성은 임진왜란 당시 쌓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대장 처영이 성을 고쳐 쌓았다고 하는데, 그 때 이 옹성을 축성했으리란 생각이다. 남원은 임진왜란 때나 정유재란 때 일본군과 심하게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일본군이 남원성을 지나 한양으로 올라가려면 아무래도 이곳 교룡산성의 아군과 교전을 하여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있는 이 문이 가장 먼저 공격을 해야 할 곳이다. 하기에 비탈이 진 성이지만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옹성을 쌓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작은 문이지만 견고함을 갖추고 있다.



교룡산성의 슬픈 역사

비에 젖은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오르니, 선국사가 보인다. 아마도 승병들은 이 절을 거점으로 활동을 했을 것이다. 선국사는 3.1 독립만세를 주도한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 조사가 처음으로 출가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 곳을 지나 좀 더 오르니 대밭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그 대밭 사이에 석비 하나가 보인다.

‘군기 터’라고 쓰여 있다. 선국사 뒤편에 이런 군기터가 있었다는 것이 승병들이 선국사를 거점으로 삼고 활동을 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교룡산성은 백제를 거쳐 조선조에 들어서 두 번의 일본과의 교전, 그리고 나중에는 동학군의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도 이 산성을 방어선으로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결국 교룡산성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산성이었다는 생각이다.




동학군의 지도자 김개남의 피에 젖은 역사

김개남(1853년 ~ 1894년)은 조선 말기의 전라북도 태인의 대접주이다. 전라북도에서는 전봉준 다음가는 동학의 실력자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남원을 기반으로 삼고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일대에서 활동을 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과는 달리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전라북도의 실력자로 스스로 ‘개남국왕’이라 사칭했다는 설도 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군의 봉기 때, 김개남은 처음부터 김낙삼과 김문행 등 1,300여 명의 농민군과 이끌고, 백산에 모인 뒤 남원을 점거하여 전라도를 통할하였다. 같은 해 4월 에는 고부 백산에서 농민전쟁의 본부격인 호남창의소를 설치하였다. 전봉준을 동도대장으로 추대한 김개남은, 전봉준을 능가할 만큼 위세를 떨치며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해 갔다.

동학혁명군의 토벌 책임자인 홍계훈과 협상을 벌인 김개남은, 동학도를 박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전주성을 관군에게 내주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간섭하게 되자, 다시 5 ~ 6만 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이끌고 남원에서 전주까지 진격하였다.


10월 14일 남원에서 전주로 진격해 새로 부임하는 남원부사 이용헌을 처단하고, 자신이 그곳의 책임자가 되어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는 등 남원에서 강력한 실력자가 되었다. 아마도 이때에 스스로 ‘개남국왕’이라 칭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김개남은 전주 수비군 5천명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한 다음 야산에 은신하였다. 12월 27일 매부인 서영기의 집에 숨어 있다가 태인에서 체포된 김개남. 전라감사 이도재는 그를 전주에 압송한 뒤 남원부사 이용헌의 원수를 갚는다며, 서울로 이송하지 않고 가두었다가 1895년 1월 8일 전주 감영에서 처형하였다.

처형을 당한 김개남의 수급은 한성부로 이송, 1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수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졌다. 농민군을 모아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하였던 김개남.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처형을 당하고 난 후, 서소문 밖에 목만 매달린 채 피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교룡산성의 역사는 그렇게 피의 역사로 끝이 나고, 슬픈 역사를 알리 없는 5월의 비만 추적거리며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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