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5월 27일, 하루 종일 준비를 했다. 28일 김제 금산사에서 '모악청소년축제'에 참가하는 청소년 1,000명에게 자장면을 먹이려면, 20kg짜리 밀가루를 자그마치 10포대를 반죽을 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차지게 만들기 위해 15~16번 정도를 기계에 넣고 돌린다. 그리고 난 후에 보관을 했다가 행사장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1,000명분 야채를 준비하려면 손에 물집이 잡힌다.

‘스님짜장’ 버스에는 사람들이 타지만, 커다란 가마솥 두 개를 트럭에 실어 함께 길을 나선다. 봉사를 하는 인원만도 20여명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준비를 해야만 아이들에게 따듯하고 맛있는 자장면을 먹일 수가 있다.

김제 금산사 모악청소년축제에 참가한 청소년들

연이은 강행군으로 녹초가 되어도

‘스님짜장’을 찾는 곳이 점점 많아진다. 매일이라도 나가고 싶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무리이다. 인원이 많을 때는 준비를 하는데 만도 꼬박 하루가 걸리기 때문이다. 행사장으로 가면 자장을 볶으랴 면을 뽑으랴, 그야말로 여기저기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한편에서는 물을 데워야 하고, 가마솥에 가득한 자장을 젖느라 팔이 떨어질 지경이란다.

그래도 갈 데는 많다. 이런 축제는 이제 기본이 되어버렸다. 사실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어둡고 지친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곳을 항상 먼저 날을 정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따듯한 자장면 한 그릇을 먹이기 위해 시작을 했기 때문이다. 소외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그 자장면 한 그릇은 정말로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장면을 만들기에 앞서 잠시 의논을(위), 열심히 볶고(중) 또 뽑고(아래)

청소년 축제, 끝없이 이어진 줄

불교의 파라미타 청소년들이 전국에서 김제에 있는 금산사로 모여들었다. 말이 1,000명이지, 그 인원을 먹일 준비를 하려면 그야말로 온 봉사단원들 모두가 초비상이 걸린다. 자장을 끓여놓고 면을 뽑아 삶는다. 찬물에 식힌 면이 그릇에 담겨지면, 아이들은 자장을 한 국자씩 받아 자리를 잡는다.

여기저기 아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자장면을 먹는다. 젊은이들이라 아무데나 앉아 음식을 먹어도 그 모습이 아름답다. 한 그릇을 후딱 비운 녀석들은 은근슬쩍 줄 뒤에 달라붙기도 한다. 그래도 제가 먹은 그릇을 들고 오는 녀석은 양심이 있는 녀석들이다. 그릇을 치워놓고 안 먹은 척 줄 뒤에 붙는 녀석들도 보인다. 그것이 다 젊기 때문이다.



또 볶고(위) 그리고 배식이 시작되고(가운데) 줄은 점점 길어지고(아래)

줄은 줄어들지를 않는다. 어림잡아 30m는 넘게 늘어선 듯하다. 삶아내는 면이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게 야단법석을 떤다. 봉사단원들의 얼굴은 상기가 되고, 이마에는 땀이 맺힌다. 그렇게 힘이 들지만 청소년들의 한 마디가 피로를 잊게 한다. 이보다 더 즐거운 말이 있을 것인가?

“스님짜장, 정말로 짱이에요”

줄은 어느새 30m 가까이 길게 늘어섰다

아이들에게 스님찌장을 퍼 주는 운천스님 

여기도 먹고

저기도 먹고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예쁜 짓을...

그래도 마무리는 확실히 해야지. 친구들이 먹은 그릇을 닦는 학생들

‘스님짜장’은 요즈음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가는 곳마다 ‘스님짜장’을 찾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렇다고 자랑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자랑을 할 일도 아니다. 이렇게 버스를 몰고 전국을 다니는 것은, 우리 주변에 있는 헐벗고 외로운 사람들과 그저 맛있는 음식 한 그릇을 나누고 싶어서이다.

‘헐벗은 이에게 옷을 주어 의복공덕을 하였느냐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주어 급식공덕을 하였느냐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어 해갈공덕을 하였느냐
깊은 내에 다리를 놓아 월천공덕을 하였느냐‘


상여가 나갈 때 부르는 상여소리의 한 구절이다. 이 소리는 ‘무가 회심곡’의 사설에서도 보인다. 사람들은 그저 이 소리를 듣고 흘려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 몇 가지 공덕을 논하는 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도 ‘스님짜장’이 먹고 싶어요.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자장면을 좀 해 줄 수 없느냐는 질문이다.

“저희가 한 600명 정도를 매일 무료급식을 하고 있는데, 자장면을 한 번 해주고 싶어서요.”
“언제쯤 필요하신데요?”
“가급적이면 빨리 했으면 해서요. 그런데 저희는 거리가 좀 멀어요”
“거리는 관계없습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라도 저희가 필요하면 달려가니까요”

요즈음 인터넷을 통해 스님짜장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5월 한 달만 벌써 9곳을 다녀왔으며, 이 달에만 7,000 그릇의 자장면을 급식한다. 가격으로 따져도 한 그릇에 4,000원이면 28,000,000원의 금액을 무료로 급식을 한 셈이다. 왜 이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자장면을 만들어 무료급식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땅에 아직도 스님짜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봉사를 다니다가 보니, 그 경비 또한 만만치가 않다. 그뿐 아니라 연일 봉사를 하느라 사람들도 힘이 들어 하기도 한다. 준비를 하고 먼 길을 달려가 봉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준비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아

스님짜장이 찾아가는 곳은 복지관에 계시는 어르신들, 군장병들과 전경, 장애우들, 그리고 무료급식소 등이다. 전국 어디나 전화가 걸려오면 날을 잡아 준비를 한다. 말이 그렇지 한 달에 10번이면 3일에 한 번은 이동을 해야 한다. 먼거리는 새벽부터 눈을 부비며 차에 오른다. 연이어 이틀이 걸리는 날은 쉬지를 못한다. 다녀와서 바로 다음 날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님짜장은 현장에 가서 자장을 볶아야 한다. 그러다가 보면 커다란 솥 두 개를 항상 차에 싣고 다녀야 하는데, 그 무게가 상당하다. 거기다가 100명분의 면을 준비하려면 20kg짜리 밀가루 한 포를 다 반죽을 해야 한다. 1,000명이면 자그마치 열 포대를 반죽을 해야 한다. 시간으로 따져도 반죽을 하는 데만 10시간 이상이 걸린다. 거기다가 자장면에 들어가는 각종 야채와 콩고기 등도 준비를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준비하는 데만 하루가 걸린다. 연이틀 봉사를 나가려면 그야말로 비상이 걸린다. 한편에선 밀가루를 반죽하고, 한편에서 야채를 썰어댄다. 그러면서도 연신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몸에 밴 봉사정신 때문이다.


곳은 많은데, 정말 많은데’

‘스님짜장’의 차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신기한 듯 바라다본다. 그리고 바로 웃음을 터트린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스님짜장이다.

“여보세요. 여기는 광주에 있는 장애우 복지관인데요. 이곳도 와 주실 수 있나요?”
“당연히 가야죠. 이렇게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더 고맙죠.”

갈 곳은 정말로 많다. 그러나 아직은 봉사하는 인원도 부족하고, 그 많은 곳을 모두 다니기에는 역부족이다. 우리 주변에 정말로 아픔을 당하고 있는 분들에게, 정성이 가득한 자장면 한 그릇을 대접하고 싶다. 갈 곳은 많은데, 정말로 좋은 방법이 없을까?

(주)밀가루와 야채 등을 후원하시고 싶으신 분은 연락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063)631-0108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7호인 윤영채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5월 22일 찾아간 집은, 일반적인 고택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집의 구조가 일반 양반집이나 민초들의 형태가 아닌 특이한 형태로 꾸며져 있다. 집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많은 옛 고택을 나름대로 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생소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 집은 원래 사람이 생활을 하는 고택은 아니었다. 현재 안채와 중문채, 문간채를 겸한 사랑채 등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 형태로 꾸며져 있다. 이 집은 원래 남원을 ‘방(坊)’이라는 작은 행정구역으로 나누면서 48개의 방을 조성했는데, 그 중 ‘이언방(伊彦坊)’에 속하였던 곳이다. 이언방이란 아마도 선비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48방 중 최고의 명당에 자리해

이 이언방이 선비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옆에 서원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집은 중종 6년인 1511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돼, 5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집이다. 이 이언방은 48방 중 가장 명당에 속한다고 한다. 이 건물은 이언방이라는 마을에 있던 집으로 ‘동대(東臺)’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아, 관청의 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에는 이 건물이 남원 수령의 별장이었다고도 한다. 건물은 중앙에 안채인 듯한 세 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편에 부속건물을 붙여지었다. 현재는 개인 소유로 되어있는 이 집은, 그 형태가 남다르다. 우선은 집의 전체적인 구성은 일반적인 고택과 그리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중간에 살림집으로 개조를 하면서 약간의 형태가 달라진 듯하다.



전체적인 구성으로 볼 때 현재의 문간채에 붙은 사랑채는 후에 다시 붙어 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청의 옆에 붙은 날개채 역시 근자에 들어서 사람이 살림을 할 수 있도록 고쳐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 높임마루가

윤영채 가옥의 사랑채는 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대문을 마주하고 좌측으로는 방으로 꾸몄다. 그리고 그 끝에는 판자문을 달아낸 툇마루를 두고 있다. 이 사랑채를 나중에 꾸몄다는 것은 집의 구조로 보아 알 수 있다. 낮게 막힌 담이 사랑채에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 안에 중문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이 중문은 안채의 뒷마당으로 출입을 할 수 있는 문으로만 사용이 가능하다.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방이 한 칸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사이를 두고 한 층이 높은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이 중문에서 대청까지는 모두 세 단으로 높아진다. 두 개의 방과 안채 건넌방 사이에는 높임마루가 있다. 일반적인 높임마루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뒤로는 벽을 막아 판문을 달고, 마루 밑으로는 아궁이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어느 집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 집의 특성상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듯하다. 이곳이 명당이기 때문에 지형을 건들이지 않고, 그대로 지형에 맞게 축조를 한 것이란 생각이다.



활주조차 색다른 윤영채 가옥

넓은 대청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관청의 동헌을 보는 듯하다. 뒤로는 세 칸 모두 판문을 시원하게 달아냈으며, 마주보고 우측으로 부엌과 안방, 윗방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이 살림을 하기 위해 꾸민 집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런 집을 후에 살림을 할 수 있도록 여기저기 개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부엌의 바깥 지붕은 활주를 따로 주추를 놓지 않고, 기둥에 기대어 건물 주추위에 올려놓았다. 윗방의 뒤편에는 벽을 돌출시켜 다락의 용도로 사용했다. 전체적인 집의 모습은 예전과 달라졌다고 하지만, 중문채와 안채의 사이에 특이한 형태의 높임마루와,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꾸밈새 등이 특이하다. 옛 고택은 아무리 돌아보아도 새로운 것은, 바로 이런 색다른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남한강, 참 아름다운 강이다. 예전 기억으로는 이 남한강에서 잡히는 장어를 갖고 요리를 해 파는 집들이, 지금 신륵사 입구에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팔당댐이 막히고 나서 물길을 이용해 신륵사 앞으로 올라오던 장어들은, 높은 벽에 막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1973년 이후 다시 30년. 이제는 남한강에 세 개의 보를 막는다고 난리법석이다.

그 보 공사를 하기 위해서 신륵사 맞은편에 있는 금모래은모래의 아름다운 풍광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금모래은모래는 자연 퇴적층을 이룬 곳이다. 위에서 흐르는 남한강의 물길이 돌아치면서 흙을 날라다가 쌓은 곳이, 바로 여주사람들이 자랑하는 금모래은모래 밭이다. 이곳에서 하늘을 찌르는 숲이 우거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휑하게 파헤쳐진 곳, 슬픔이 밀려와

5월 19일 찾아간 신륵사. 그 곳에서 건너다보이는 금모래은모래는 예전의 정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숲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듬성듬성 조경을 해 놓은 나무들이 눈에 거슬린다. 그리고 아름답던 모래톱은 그저 평평한 볼품없는 꼴로 바뀌어 버렸다. 물이 굽이치는 곳에는 채취한 골재가 산을 이루고 있다.

저 모래산이 바로 남한강의 속살을 다 빼낸 것이려니 생각하니, 한숨만 쉬어진다. 신륵사 전탑을 오르는 길에 만난 수령 600년이 지난 은행나무에게 묻는다.

 


“과연 저것이 강을 살리는 길일까요?”
“.......”
“저렇게 해 놓으면 이 강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이 다 잘들 살까요?”
“.......”
“강을 지키겠다고 노심초사 하시던 분들은 다 어디로 가셨을까요?”
“......”


2010 2, 2의 남한강 금모래은모래(신륵사에서 바라본) 아래사진은 2011, 5, 19 의 모습. 숲이 사라졌다

한 마디의 답도 없다. 그저 입을 다물고 살라는 것인지, 아니면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600년이 넘는 시간을 신륵사 앞을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서있는 은행나무. 이 나무는 나옹선사가 덕이 높은 스님들을 찾아 마음을 닦고 불도를 배우고, 중국에서 돌아와 짚고 온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나옹스님은 지팡이를 꽂으면서 ‘이 나무가 살면 후일 내가 죽어도 살 것이고, 만일 이 나무가 죽으면 나는 아주 죽은 것과 같다’는 말을 남겼다. 이 나무는 전쟁 통에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600년이 넘는 세월을 잘 자라고 있다.

산처럼 쌓인 남한강에서 채취한 골재더미. 속살을 다 빼앗긴 남한강이다.

여강, 금모래은모래.. 이젠 다 옛 이름이 되다

남한강이 흐르면서 여주를 지나면 이름을 ‘여강’이라고 했다. ‘여(麗)’란 곱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주를 가로 질러 흐르는 남한강은 아름다운 강이다. 그 강을 정비를 한다고 꽤나 자연스럽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직강으로 조성을 하면서 한편에는 돌 축대를 쌓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다고 밑에서 오르지 못하는 물고기들이 올라와 산란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강은 흐르고 싶은 데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많은 생명들은 다 이 혼란함 속에서 어디로 간 것일까? 생명이 살 수 없는 강에서 우리 후손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강의 속살을 파내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골재들이, 눈앞에 거대한 공룡처럼 보인다.


2010, 3, 28 여강선원에서의 수경스님과 파헤쳐지고 있는 여강선원 자리(아래)

달라진 여강, 이제는 금모래은모래도, 여강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수경스님’이 강을 지키겠다고 건강을 해치며 지키고 있던, ‘여강선원’의 자리도 다 파헤쳐지고 있다. 이제는 무엇에 마음을 담고 살아야할지.


‘사지’란 옛 날에 절이 있던 곳을 말한다. 사지에는 많은 문화재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도 있지만. 흔적조차 없이 기록에만 존재하는 곳도 상당히 많다. 지난 5월 20일에 찾아간 사지 두 곳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사지였다. 한 곳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죽전리에 소재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67호인 ‘원통사지(圓通寺址)’ 였다.

또 한 곳은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소정리에 소재한, 현재는 전통사찰 제57호인 송계사가 서 있는 ‘송계사지(松溪寺址)’이다. 현재 원통사지에는 원통사라는 절이 서 있으며, 송계사지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해인사의 말사인 송계사가 서 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옛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어 안타깝다.


나라를 구한 의병의 요람 원통사

무주군 안성면 죽전리에 소재한 원통사지. 이 절은 1949년까지만 해도 원통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순사건 때 옛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985년 이후에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통사는 신라 대 처음으로 짓고, 조선조 숙종 24년인 1698년에 고쳐지었다고 하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덕유산 깊은 계곡에 자리한 원통사. 가파른 길을 돌아 오른 절 마당에서 앞을 바라다보면, 덕유산에서 뻗은 산자락이 아름답다. 이 산 중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걱정하다가 피를 흘린 것일까? 원통사지는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의병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싸웠다는 의병의 요람이라고 한다.



송계사 여기저기 널린 돌들이 옛 절터임을 알리는 것인지

원통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돌계단을 올라가니, 정면에 원통보전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명부전이 좌측으로는 요사가 있다. 이 세 전각은 모두 정면 세 칸씩이다. 그리고 원통보전 좌측 뒤편으로 한 칸의 산신각이 서 있다. 전각 모두를 다 합해도 열 칸 밖에 안되는 절이다. 옛 흔적은 찾을 길이 없는데, 여기저기 널려있는 돌에서 그나마 이곳에 옛 절터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과 1907년의 정미칠조약 때, 문태서. 신명선, 김동신 등의 의병장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벌였다고 하는 원통사. 이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는다.

송계사에서 바라본 덕유산 자락이 아름답다

원효와 의상이 이룩한 송계사, 세월의 아픔만 남고

무주에서 도계(道界)를 넘어 경남 거창군으로 접어들었다. 덕유산 수리봉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 송계사. 절을 올라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바위돌이 계곡을 덮고 있는데, 맑은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른다. 아마도 이러한 깊은 골에 찾아든 원효와 의상 두 분은, 이 맑은 물소리에 취했는가 보다.

 

송계사를 오르는 길에 만나는 약수터와 영취수를 해체하여 이루었다는 송계사 문각


신라 진덕여왕 6년인 652년에 원효와 의상 두 분의 고승이, 북상면 소정리에 영취사를 창건한 후 5개의 암자를 지었는데 그 중 하나가 송계암이라는 것이다. 그 뒤 영취사가 폐사가 되면서 송계사가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송계사는 조선조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5개의 암자가 모두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폐허로 남아있던 송계사는 조선조 숙종 때 진명스님이 송계암을 복원했으나, 6.25 한국전쟁 때 또 다시 전소가 되고 말았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문각에는 종루가 있다. 대웅전은 신축을 한 것이다

계곡 물소리를 뒤로하고 송계사로 올랐다. 기울어진 영취루를 해체하여 복원한 문각이 저만큼 보인다. 문각으로 향하는 흙길 좌우에는 커다란 노송들이 가지를 아래로 처트리고 있다. 약수 한 그릇으로 목을 축인 후 송계사 경내로 들어갔다. 공양주인 듯한 여자분 한 분만 보일뿐 인적이라고는 없다.

안으로 들어가 삼성각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바람에 대나무 잎이 부딪치며 바스락거린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크지 않은 절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내려오다 보니 스님 한분이 나와 계신다. 송계암의 옛 흔적을 물으니 알 길이 없다는 대답이다. 하루에 두 곳의 사지를 돌았지만, 기록에만 전할 뿐,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세월은 그렇게 많은 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 그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 두 곳 모두 마음에 멍울을 남겨놓는다. 그저 눈여겨 볼만한 것들만 돌아본 사지탐방. 어디 한 곳 흔적이라도 있지나 않을까 했지만, 남은 것은 바람소리와 물소리뿐. 가슴 한편이 허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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