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에서는 2011년 「문화훈장」과「대한민국 문화유산상」을 포상하기 위한 후보자 접수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 상은 문화유산 보존ㆍ관리ㆍ활용에 현저한 공로가 있는 자에 대하여, 시상을 하는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포상내용을 보면 모두 3개 부문으로 구분된다.
존ㆍ관리부문 : 문화재의 보존ㆍ관리, 훼손ㆍ멸실 예방, 보호 분야
학술ㆍ연구부문 : 문화재의 학술적과학적 조사․연구 분야
봉사․ 활용부문 : 문화재에 대한 봉사홍보․교육ㆍ활용 분야


의 후보를 접수받는다. 포상인원은 문화훈장 3명과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5명이며, 상장 및 부상은 문화훈장의 경우 각 공적에 해당하는 문화훈장이며, 대한민국 문화유산상은 대통령 상장 및 부상으로 각 1,000만원의 상금과 트로피를 수여한다.

후보자의 수상자격을 보면 문화훈장의 경우, 시상부문에서 공고일로부터 20년 이상의 수공실적이 있는 자여야 한다. 이는 국적과 생존에 관계없이 대한민국문화재분야에 있어,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를 선정한다.

대한민국 문화유산상은 시상부문별로 공고일로부터 5년 이상의 수공실적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공적이 현저한 개인 또는 단체를 선전하게 된다. 후보자의 추천은 본인을 포함한 개인이나 기관, 단체 등 제한이 없으며, 제출서류는 추천서(소정양식) 1부와 공적 증빙서류(사본 제출)를 한글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하여 출력물 원본(추천자 날인)을 이메일((ghsin2000@korea.kr)로 제출하면 된다.

포상일 및 장소는 2011년 12월 8일(목) 15:00~17:00 에 정부대전청사 대회의실에 거행한다. 후보자를 추천할 때의 주의 점은 한 사람을 문화훈장과 문화유산상에 중복 추천할 수 없으며, 행안부 포상지침에 의하여 동일공적으로 이미 훈장을 맏은 자, 대한민국문화유산상을 받은 자, 훈, 포장을 받은 지 5년이 경과되지 않은 자, 대통령 표창이나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지 2년이 경과되지 않은 자, 형사 처벌을 받은 자 등이다.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자들도 이 상에서 제외가 된다. 즉 수사 중이거나 각종 언론보도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정부포상이 적합지 않다고 판단되는 자도 포상에서 제외가 된다.


후보자의 서식배부는 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 - 새소식 - 공지항)에서 다운받아 작성(추천서, 정부포상에 대한 동의서)을 할 수 있고, 접수처는 대전광역시 서구 선사로 139, 문화재청 정책총괄과(우 302-701)로 방문접수 또는 우편접수(접수 마감일까지 도착분에 한함)를 하면 된다.

접수기간은 2011. 6. 7.(화) ~ 8. 5.(금)(공휴일 제외)까지이고, 수상자의 발표는 2011년 12월초에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통해서 하며, 개별통지도 한다. 주변의 문화유산에 대한 업적을 쌓은 사람들이 있으면, 문화훈장과 대한민국문화유산상에 추천을 하기 바란다.


고려시대에는 지방마다 많은 장인들에 의해 석불이 조형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불교를 그 어느 때보다 앞장세운 고려이기 때문에, 그만큼 석불이나 석탑 등 불교의 조형물이 많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불교석조물은 지방에서도, 그 지역의 장인들에 의해서 많은 작품들이 조성되었다.

지방에 장인들에 의해 조성이 된 불교작품들은, 그 나름대로 독창적인 지방색을 띠우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들어 불상 등은 거대불로 변화를 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이 또한 당시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석불의 경우 섬세함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장중하고 간략화 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고려석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선스님이 창건한 고찰 선원사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만행산에 자리한 선원사는, 도선스님이 신라 헌강왕 1년인 875년에 창건한 고찰이다. 사적비에 의하면 도선이 남쪽의 산천을 유력하다가 남원에 이르러, 주변을 두루 살펴본 끝에 남원의 지세가 강해 진압 사찰로 이 절을 창간하고 약사여래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선원사는 초창기에는 당우가 30동이 넘었다고 전한다. 그 뒤 수차례의 흥패를 거듭하다가 조선조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왜군에 의하여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영조 30년인 1754년에 부임한 부사 김세평이 노계소ㆍ신도계 등과 협의하여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고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



깨지고 갉아먹은 석불좌상

선원사에는 ‘선원문화관’을 개관하기 위해 분주하다. 선원문화관은 남원을 비롯한 인근 문화의 산실로 자리를 잡기 위해 ‘겔러리 선’과, 어린이와 어머니들이 함께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다. 그 이층으로 올라가면 사무실이 있고, 그 안에 높이 110cm, 무릎넓이 90cm 정도의 석불 한 기가 있다.

고려석불로 알려진 이 석불좌상은 전체적으로 보면 그 풍채가 당당하다. 양편의 귀는 목까지 흘러내렸고, 목은 두터우나 삼도는 지워졌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 안면은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깨어지고 갉아진 모습이다.



이 석불은 원래 경내 밖에 있던 것을 안으로 들여 놓았다고 한다. 아마 밖에 있을 당시 이렇게 심하게 훼손이 된 듯하다. 선원사에 오래도록 다녔다는 어르신 한 분은, 이 석불은 아이를 잘 낳게 하는 효험이 있어서 사람들이 코를 갉아간 것 한다고 하신다. 현재는 여기저기 시멘트로 발라놓아 처음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있다. 법의는 희미하게 그 선이 보이고 있으며, 양편의 어깨에서 타원을 그리며 가슴께로 흘러내린 듯하다. 양팔의 소매에는 넓은 소매 끝을 알아볼 수 있다. 그나마 이 소매 끝으로 인해 법의의 형태를 유추할 수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로 볼 때 장중함이 배어있는 석불이다.




이 석불은 특이하게 양손을 가슴께에서 마주하고 있다. 이런 지권인은 ‘공양인’에서 나타난다.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표시이다. 공양인은 두 손을 마주 잡아서 연꽃 봉오리처럼 만든다. 이러한 지권은 보살이나 제자들, 혹은 부처님을 예배하는 자와 협시불이 부처님을 찬탄하고 숭배할 때 나타내는 동작이다.

선원사 석불좌상, 천년 세월을 그렇게 비바람에 씻기고, 사람들에게 훼손이 되면서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석불좌상의 수인이 ‘공양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수인의 표시인지 궁금하다. 천년세월을 그렇게 앉아 공양을 드리고 있다면, 아마도 선원사를 찾아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 모든 이들의 아픔을 가시게 해 달라는.


금산사는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600년대 창건되어, 신라 혜공왕 2년인 776년에 진표율사가 다시 고쳐 세우면서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는 고려 935년에는 후백제의 신검이 아버지인 견훤을 유폐시켰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금산사 경내에는 보물 제22호로 지정이 된 ‘노주’가 있다.

이 금산사에 있는 석조물은 그 이름을 노주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처럼도 보인다. 이 석조물은 석등과 대좌, 불탑의 부분을 모아 놓은 듯하다.


석등롱일까? 노주일까? 아리송한 형태

이 노주라 명칭을 붙인 석조물은 대적광전 오른쪽 앞에 있는 석련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노주가 본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 노주는 미륵전 정중에 있었는데, 1922년에 대장전의 이전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노주는 『금산사지(金山寺誌)』에는 ‘석등롱(石燈籠)’이라는 설명되어 있다.

이 서책을 보면 노주와 석등롱은 별개의 것이라고 한다. 노주는 불전의 정면 양우에 서 있는 2개의 번간(속칭 갯대)으로써 탑상찰간의 전명이다. 탑상찰간은 ‘구륜지간’이라 하여 줄여서 윤간이라고도 하고 ‘노반지주(露盤之柱)’라 하여 노주라고도 약칭하였다. 구륜이란 불탑 꼭대기의 수연 바로 밑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아홉 층의 원륜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석등롱은 노주의 상대물로써 미륵전의 불상에 공양하던 것이며, 그러한 이유로 속칭 ‘광명대’라고도 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현재 노주라고 하는 석조물은 제 형태를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상과 복련의 조각이 일품

이 석조물은 땅 위에 지대석인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상, 중, 하로 나누어 받침돌을 순서대로 얹어놓았다. 지대석은 4각형으로써 하나의 석재에 2단으로 조각되었는데, 아랫단의 1변의 길이는 121㎝이다. 각 단의 높이는 아랫단이 13㎝, 위단이 9㎝ 정도이다. 하대석은 위의 모서리 부분을 약간 둥글게 다듬어 16변의 복연을 조각하였고, 각 면의 수직 부분에는 2개의 안상을 선각해 놓았다.



이런 조각의 형태로 볼 때 이 석조물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나, 그 여러 가지 조각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중대석에는 특별한 문양 없이 다만 우주만을 양각해 놓았다. 1변의 길이는 50㎝이며, 높이는 55㎝이다. 상대석에는 16변의 커다란 앙연이 조각되어 있다. 1변의 길이는 94㎝이고, 높이는 37㎝이다.

제일 위에 얹혀 있는 석조물도 하나의 석재로 되어 있으며, 그 형태는 탑의 상륜부에 올리는 보륜과 흡사하다. 이 석조물은 한쪽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상륜부에 놓인 보주만 없으면 방형의 대좌와 흡사한 형태의 금산사 노주. 과연 그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처음 그 형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도 있는 그 형태가, 오늘 발길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서당은 기본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항교 등과는 달리, 서당은 지방의 선비나 백성들이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의 장소로 설립을 한다.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295호로 지정이 된 ‘갈천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서당은 대개 7 ~ 8 세의 어린 학동들인 남자 아이들이 입학을 하여, 15 ~ 16세가 될 때까지 공부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현재 초, 중급 정도의 학습과정인 유교 경전을 주로 공부하게 된다. 19세기에 들어 근대교육이 도입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던 서당은, 그 기원을 삼국시대부터로 보고 있다.



임훈이 세운 갈천서당


서당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시기는, 사림파가 등장하여 향약을 보급하고 마을마다 지역민의 교화에 힘쓰던 16세기 초반부터이다. 갈천서당은 선조 6년인 1573년에 갈천 임훈이 처음 문을 연 서당이다. 임훈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이곳 갈계리로 내려와, 아우인 임운과 함께 갈천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치는데 여생을 바쳤다.


처음으로 갈천서당이 문을 연 것은 1573년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고종 15년인 1878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지난 5월 20일 무주, 거창의 답사 길에 만난 갈천서당. 옆으로 내가 흐르는 곳에 세우진 갈천서당은 참으로 단아한 모습이다. 크지 않은 이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학동들은 자연을 만끽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마도 공부를 하다가 머리라도 식히고자 했다면, 냇가에 발을 담구고 앞으로 펼쳐진 갈계숲을 거닐지는 않았을까? 강당과 대문으로 구성된 이 서당은 참으로 아담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절로 학습의 효과가 뛰어날 것만 같다.


조선시대 서당연구에 좋은 예


갈천서당은 조선시대 서당연구에 좋은 예로 꼽힌다. 정면 다섯 칸, 측면 한 칸 반의 크지 않은 맞배지붕으로 꾸며진 서당은, 앞으로 솟을대문을 두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두 개의 비가 보인다. 임훈과 임운 두 형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후손들이 세운 신도비이다.





서당을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한 칸의 방을 드리고, 두 칸 대청과 두 칸의 방이 이어진다. 집은 참으로 간소하고 장식을 하지 않아 겸손함이 배어있다. 자연석 주초를 이용하고 사각의 기둥을 세운 건물은, 역시 자연석으로 몇 단의 기단을 쌓았다. 지금은 주변이 너른 평지에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찾기에 용이하다.


두 칸 대청의 뒤로는 판문을 달아냈으며, 몇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대청 좌측 위에는 향약과 서책 등을 보관하는 나무로 짠 보관함이 보인다. 방 정면 밑으로는 연도를 내고, 굴뚝이 없는 연기구멍을 내었다. 아담하고 선비의 모습처럼 단아한 갈천서당. 아마도 이곳에서 글을 읽던 학동들의 마음도 이처럼 단아하지 않았을까?





서당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본다. 바쁜 농사철이라 그런지, 앞으로 지나는 경운기의 소리가 마치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처럼 들린다. 예전 이곳에서 학습을 하던 학동들은 솟을삼문 앞 들판에서 모심기를 하던 농부들을 바라보며, 절로 글이 떠올랐을 것만 같다. 처음 문을 연지 450년, 지금의 서당이 지어진지 130여년. 갈천서당은 지금도 아이들이 공부를 하기에 딱 어울릴 듯한 장소이다.


김제 금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금산사 경내에는 국보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바로 대적광전 앞에 자리한, 보물 제27호인 육각다층석탑이다. 이 다층석탑은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을 현재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 탑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아쉬움이다.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탑일까를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의 석탑이 대부분 화강암으로 조성을 한데 비해, 이 탑은 기단은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몸돌과 지붕돌은 흑색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으로 조성한 다층석탑이다.


육각으로 조성한 탑, 놀라움으로 다가와

화강암이 아닌 점판암을 이용해 탑을 조성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기단부는 또 다른 색을 지닌 돌을 이용해 흑백의 조화를 이끌어 냈다는 것에 대해서도 경이롭기만 하다. 이 탑은 조선조 인조 1년인 1633년 금산사 재건 시에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원래의 층은 알지 못한다. 현재는 11층만이 남아있는데, 그 외형이 육각으로 되어있어 ‘육각다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화강암으로 된 기단은 3단으로 되어 있는데, 각 단의 1변의 길이는 아래층부터 각각 80㎝, 70㎝, 65㎝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용과 풀, 사자상 등이 새겨져 있다. 이 위에 점판암으로 된 2개의 판석이 있는데 아래의 판석에는 복연이, 위의 판석에는 앙연이 각 면에 5변씩 양각되어 있다.



현재 11층이 남아있는 탑신부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현재 10층과 11층이 남아있는 몸돌은, 각 귀퉁이마다 기둥모양인 우주를 새겨 넣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을 선각으로 새겨 놓았다. 그 모습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 육각다층석탑의 조형이 얼마나 정성을 들인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은 낙수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있다.

상상만으로도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현재 남아있는 옥개석의 처마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보인다. 각층의 끝마다 달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 것을 상상하면, 가히 그 아름다움을 어디에도 비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현재 꼭대기의 머리장식인 싱륜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훗날 화강암으로 만든 연꽃봉우리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돌이다. 이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남은 옥개석은 각 층의 줄어드는 체감비례가 아름다우며,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1변의 길이가 1층부터 차례로 46㎝, 46㎝, 41.5㎝, 41㎝, 39㎝, 37㎝, 35㎝, 33㎝, 31㎝, 29㎝, 27㎝로 줄어들고 있으며, 현재 몸돌이 남아있는 10층과 11층은 각각 18cm와 17cm이다.

이렇게 줄어들고 있는 비율로 볼 때, 현재의 9층과 10층 사이에 또 다른 층이 있고, 몇 개 층의 옥개석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9층과 10층의 줄어듦의 차이가 급격하기 때문이다. 이 탑은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짐작된다.

벌써 몇 번이고 돌아본 육각다층석탑이다. 5월 28일 찾아 본 다층석탑 앞에서 눈을 감고 상상을 해본다. 사라진 몸돌의 각 면에도 선각으로 조각을 한 좌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층마다 다르게 새겨진 또 다른 형태의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찾아갈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그 원래의 모습이 어떤 형태였는지, 그리고 그 전체적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알 수가 없어, 늘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이렇게나마 남아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그 앞에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는 것은, 아직도 그 아름다움의 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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