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을 화장실에 대한 집념 하나로 살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30여 년간 살던 집을 헐어버리고 그곳에 화장실과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집 이름도 ‘근심을 풀어버린다’는 뜻인 사찰의 ‘해우소’에서 딴 ‘해우재’라고 지었다. 전 수원시장인 심재덕의 집이다.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186-3에 소재한다.

 

화장실 문화공원 개장식장에서 축사를 하는 염태영 수원시장

 

화장실 문화공원 개장기념식장 뒤에 보이는 것이 심재덕 전 수원시장의 집인 해우재이다. 해우재는 2007년 3월 건축가 고기웅의 설계로 그 해 11월에 완공이 되었다. 심재덕의 사후 유족들은 2009년 7월 이 집을 수원시에 기증하였고, 수원시는 이를 전시관으로 개장하고, 뒷편에 화장실 문화공원을 조성했다

 

7월 4일 오후 4시 해우재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화장실 문화공원 개장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수원시는 명실공이 세계화장실 문화를 선도하고, 화장실 문화를 꽃 피운 발상지이다. 오늘 개장을 하는 화장실 공원은 전 심재덕 수원시장의 화장실에 대한 집념 하나로 이루어졌다. 오늘 공원 가장에 앞서 해우재를 수원시에 기택해 주신 심 전 시장의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공원은 세계적인 명소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  

 

화장실 공원, 별개 다 있네

 

해우재 안에는 심 전 수원시장의 화장실에 대한 철학과 집념이 그대로 배어있다. 해우재 뒤로 마련한 화장실 공원은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우선 각 시대별 변기의 모습부터, 특별한 화장실의 모습을 재현시켰다. 거기다가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 변을 보는 모습들은 이곳이 얼마나 특이한 공원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개장식에 참석한 이아무개(남, 53세. 수원시 이목동 거주)는 '앞으로 우리 마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특별한 곳을 보기 위해 찾아들 것이다. 이렇게 특별한 공원을 조성해, 주민들의 쉼터로 열어준 수원시에 감사를 드린다'라고 했다.

 

통시변소 

돌을 쌓아 벽을 만든 제주도의 변소. 화장실을 높이 짓고 그 한편을 튼 후, 역시 돌로 벽을 쌓은 울타리를 조성해 그 안을 돼지를 키워 변을 처리하는 변소이다.

 

호자

백제시대에 사용하던 변기로 동물이 입을 벌린채 앉아있는 모형이다. 남자용 소변기로 이렇게 입을 벌린 동물에게 소변을 보게하여 해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위에는 손잡이를 만들어 모인 소변은 거름으로 활용하기도.

 

매화틀과 매화그릇

예전에 임금이나 왕비들이 휴대용으로 사용하던 변기이다. 매화틀은 추운 겨울에도 찬기를 느끼지 않도록 했으며, 그안에 매화그릇을 넣었다. 휴대용 이동식 변기이다.

 

 여성용 변기

백제시대 여성용으로 제작된 변기이다. 이 여성용 요강변기는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걸터앉기 편하게 만들어졌다. 뒷부분에는 양편에 귀를 달아 밭에 거름으로 붓기 좋게 했다. 선조들의 놀라운 지혜를 본다  

 

노둣돌

신라시대의 변기로 귀족여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뒤로 물길을 내어 흘러가게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세식 변기이다.


변기의 발달

좌측은 고대로마의 변기로 발달한 수도시설을 이용해 변기 밑에 물이 흐르도록 한 것이다. 가운데는 중세의 유럽변기로 걸상식의 변기를 성벽에 매달고 배설물이 하수와 함께 흘러가도록 했다. 우측은 현대 변기이다.


 

 

수원 해우재 뒤편의 화장실 문화공원에는 이 외에도 변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 예전에 똥을 퍼 나르던 똥지게와 똥장군, 그리고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뒷간과 울릉도에서 사용하던 움집형 화장실인 투막화장실 등 다양한 형태의 것들을 만날 수가 있다.

 

“뚫어라 뚫어라 물구멍을 뚫어라”

 

거북이를 몰고 나온 질라래비가 우물 앞에서 하는 덕담이다. 놀이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따라한다. “물주쇼 물주쇼, 사해용왕 물주쇼” 지금처럼 이 말이 간절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벌써 비가 오지 않은 지가 언제 적인지 모른다. 물론 일부지방에서는 소나기와 우박이 내리기도 했지만, 100년 이래 처음으로 맞는 봄 가뭄이라고 한다.

 

수수잎과 짚 등을 이용해 만든 거북놀이의 거북이와 거북이를 몰고 다니는 질라래비

 

6월 23일 수원시 영통구 청명단오제에 나타난 거북이 한 마리. 질라래비가 그 거북을 몰고 다니면서 간절하게 기원을 한다. 제발 비 좀 내리게 해 달라는 것이다. 마당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0호인 ‘이천 거북놀이’ 보존회 회원들이다. 이들이 영통구의 단오제 마당에 와서 비를 간구하고 있다.

 

정월 대보름과 추속에 즐기던 놀이

 

본인이 이천 거북놀이를 직접 이천시(당시 이천군) 전역과 근동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발굴을 해, ‘이천의 민속 거북놀이’라는 책을 펴낸 지가 벌써 30년이 지났다. 아마 이 조사보고서 형식으로 꾸며진 소책자가, 그동안 써온 20여권의 책을 엮게 된 기폭제가 되었는가 보다. 그러한 거북놀이를 이천이 아닌 수원시 영통구에서 만나보니 참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대문에서 문굿을 치고 마당 안으로 들어가면 우물굿을 한다(사진 위) 마당굿에서는 한바탕 신나는 풍물굿을 펼친다

 

거북놀이는 기원성민속이다. 가내의 안과태평과 풍농 등을 기원하는 놀이이다. 거북놀이는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날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짚과 수수깡으로 거북이 모양을 만들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즐기던 놀이이다. 이천지방에서는 대월면에서 이 놀이가 전승이 되어왔다. 거북이는 장수동물이요 부귀를 상징하기 때문에, 놀이의 주체가 되었을 것이다.

 

거북놀이는 대개 정월 대보름 밤이나 추석날 밤에 하는 놀이로, 수숫대와 짚 등을 이용해 거북이 모양을 만든다. 거북이의 앞에는 2~4명 정도가 안에 `들어가는데, 앞 사람이 주기능자가 된다. 거북이를 몰고 다니는 질라래비도 옥수수 잎과 짚 등으로 머리에 쓰는 모자와 허리에 두르는 치마를 만든다.

 

 

풍물패의 어린 무동들(위)과 풍물패 부쇠. 30도를 웃도는 더위에 연희를 감당해 냈다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는 놀이

 

거북놀이는 마을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연희를 하는데, 집 대문 앞에서는 문굿을 먼저 치고, 마당에 들어서면 우물굿(용왕굿)과 마당굿을 한다. 마당에서 굿을 하는 도중 거북이가 쓰러지면 사람들은 거북이 곁으로 몰려들게 된다. 이때 질라래비는 ‘이 거북이가 동해를 건너(지역에 따라서는 서해를 건넌다고도 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배가고파 쓸어졌으니, 먹을 것을 좀 주십쇼’ 하고 소리를 치면 주인이 먹을 것을 내준다.

 

그렇게 밤새도록 집집마다 다니면서 축원을 해준다. 대개 정월에 하는 거북놀이가 갖고 있는 내적사고가 풍농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한다고 하면, 추석에 하는 거북놀이는 풍농에 대한 감사로 행해진다.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초지리에서 전승이 되는 거북놀이는 한 때 중단이 되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재현을 하여 전승이 되고 있다.

 

 

마당굿을 하고 있을 떄 거북이가 쓸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거북이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위) 대청에서 하는 고사덕담에서는 누구나 참석을 하여 기원을 할 수 있다

 

기우제를 지내는 마음으로 연희를 해

 

이천거북놀이 조남걸(남, 58세)보존회장은

 

“우리 거북놀이는 한수 이남과 금강 이북의 마을에서 주로 연희가 되어왔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거북놀이는 풍농과 안과태평을 위한 놀이였지만, 결국에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대동의 놀이였습니다. 거북이를 놀이의 주체로 삼은 것도 알고 보면, 농사에 가장 필요한 물 때문은 아닌가 생각이듭니다. 거북이는 용왕의 심부름꾼으로 늘 등장을 하기 때문이죠. 오늘 이 거북놀이가 연희가 된 다음 비라도 뿌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농촌이 다 망가질 것 같습니다” 라며 간절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연희를 한다고 한다.

 

 

이천거북놀이 보존회 조남걸 회장(위)과 최 고령 연희자인 이종철 옹의 비나리 모습

 

대청 앞에서 가내의 안녕을 위해 축원을 하는 ‘고사덕담(告祀德談)’에서 비나리를 하는 최고령 회원인 이종철옹(80세)도, 비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전한다. 30도를 웃도는 더위의 햇볕 아래서 개인놀이를 하는 풍물잽이들 역시, 비를 기다리는 마음은 한 가지였을 것이다. 그렇게 땀이 흐르듯, 비라도 뿌려 대신 빗물이라도 흘렀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풍농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위해 축원을 하는 기원성민속인 ‘거북놀이’. 영통구 청명단오데 행사장에서 한 바탕 땀을 흘려낸 이천거북놀이 보존회원들의 바람이 하늘에 닿기만을 바랄 뿐이다. 거북이를 몰고 가는 질라래비(성정섭. 남, 45세)의 소리가 절규가 되어 돌아온다.

 

두손을 모우고 비손을 하는 이천 거북놀이 연희자. 이들의 바람처럼 비라도 쏟아 부었으면 좋겠다

 

“인간이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법. 이렇게 오랜 가뭄에 사람도 농작물도 다 죽어 가는데 오늘 우리 물이나 한 번 뚫어봅시다. 뚫으세 뚫으세 물구멍을 뚫으세.”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는 동주막리, 마근동, 술골, 용적골 등의 자연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곳이다. 옛 주곡리 앞으로 큰 길이 나 있었는데, 이 길가에는 술집이 많이 모여 있어서 '주막거리' 또는 '주곡(酒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이름을 따서 현재의 주곡리가 생겼다.

 

500년 역사의 주곡리 장승

 

주곡리에는 큰 장승들이 서있다. 마을 입구 좌측에는 '천하대장군'이 우측 건물 담벼락에 가까이에는 '지하여장군'이 있다. 주곡리 장승의 특징은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솟대와 함께 집단으로 모여 있다는 점이다. 매년 새로 장승을 깎아 솟대와 함께 새로 세우는데, 집단으로 뭉쳐있어 넓은 면적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주곡리의 장승이 처음 세워진 것은 연산군 4년인 1498년이다. 청주 양씨 9세손인 첨정공 춘건이 낙향을 하여 이 마을에 정착을 한 후,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목적으로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매년 정월 14일 밤에 장승제를 지내고 있으니, 500년이 지난 전통을 지닌 마을이다.

 

마을주민을 살린 장승

 

이 주곡리의 장승은 임진왜란 때 마을주민들을 살렸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야습을 획책한 왜병들이 주곡리에 들어섰는데, 마을입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총을 쏘아도 물러서지를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간 총소리에 놀라 잠을 깬 주민들은 왜군의 침입을 알고 서둘러 피신하였다. 아무리 총을 쏘아도 물러서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사람들을 괴이하게 여긴 왜병들이 다가가 확인을 해보니, 사람이 아니라 장승이었다. 결국 장승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지성으로 정성을 드린 마을주민들의 목숨을 장승들이 지켜낸 것이다.

 

 

 

선조 32년인 1599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 선조는 '마을을 지킨 장승을 수호신으로 삼으라'고 했다. 그 후 논산지역에서는 각 마을마다 입구에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 주곡리의 장승은 논산시 향토유적으로 지정이 되었다.   

 

'로표장승' 역할을 하는 주곡리 장승

 

길을 가는 행인들이 먹을 것을 해결하고 피곤한 몸을 쉬기도 했던 주막거리에서 유래된 주곡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은 자연스레 길을 안내하는 로표장승의 역할을 했다. 주곡리의 장승은 남장군인 천하대장군과 여장승인 지하대장군으로 구분이 되어 있으며, 아래에는 동방 신도내 20리, 서방 논산 30리, 남방 연산 20리, 북방 공주 40리라 적혀 있다.

 

 

 

 

주곡리의 남장승은 사모를 쓰고, 여장승은 족두리를 섰다. 나무의 면을 깎아 얼굴을 조성했는데 눈과 코는 돌출을 시키고 주변을 깎아냈다. 솟대도 매년 새로 깎아 장승군에 함께 묶어세우는데, 끝에는 새를 한 마리 올린다.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곡리 마을을 지켜 온 수호신인 장승. 장승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는 장승의 내력이 적힌 안내판을 세워 후손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 장승으로 인해 마을의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전통이 한낱 시시콜콜한 옛 풍습으로 치부 되어가고 있는 요즘, 바람직한 마을의 모습을 본 듯하다.

사람이 집단을 이루어 살다가보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단순히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마을의 이야기는, '아주 오랜 옛날'이라는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전설 속의 실체가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증평시내에서 충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사곡리 이정표가 나온다. 이 이정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면 사곡2리 사청마을이 나온다. 마을회관을 지나면 마을 안 길가에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이 '말세를 알리는 우물'이다.

 

 

1456년에 판 사곡리의 우물 '영천(靈泉)'

 

우물에 다가가니 우물 옆 집 벽쪽에 커다랗게 '말세를 알리는 우물'이라는 돌로 만든 안내판이 걸려있다. 그 내용을 보니 우물의 깊이는 5.4m인데, 수심이 2.8m 정도 된다는 것이다. 조선 제7대 왕인 세조(1455∼1468)가 조카인 단종(1452∼1455 )을 폐하고 왕위를 빼앗은 후 나라에는 가뭄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장삼을 길게 늘어트린 한 노승이 지나다가 물이 마시고 싶어 한 집에 들려 물을 한 그릇 마실 수 없느냐고 청을 넣었다.

 

"집에 길어다 놓은 물이 없으니, 툇마루에서 좀 기다리시면 마실 물을 길어오겠습니다."

 

그릇을 들고 집을 나선 아낙네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노승이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으려니, 해질녘이 되어서야 땀을 뻘뻘 흘리며 아낙네가 돌아왔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아낙네는 물을 떠 노승에게 건넸다. 노승이 물을 마신 후 늦은 사연을 물으니, 아낙네는 20여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물을 길어왔다는 것이다.

 

 

 

노승이 잡아 준 우물터, 말세를 예고한다

 

마을에 전하는 전설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아낙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이 든 노승은 지팡이로 땅을 몇 번 쳤다.

 

"허허, 이곳 땅은 층층이 암반이로다. 초목인들 제대로 자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선인들이 터를 잘못 잡았도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이 나지 않아 지금도 마을장정들이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물이 나는 곳을 알려드리리다. 자, 여기를 어서 파시오. 겨울이면 따뜻한 물이 솟을 것이고, 여름이면 찬 물을 얻을 것이오. 여기 우물을 파기만 하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장마가 닥쳐도 물이 더 이상 늘지 않을 것이외다."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지팡이로 여기저기를 두드려보던 노승이 정해준 곳은 큰 고목이 서 있는 곳이었다. 그러고 나서 노승은 마을을 떠나기 전 한마디를 더했다는 것이다.

 

"이 곳에 우물을 파면 넘치거나 줄어들지는 않겠지만, 꼭 세 번 넘칠 날이 있을 것이오. 넘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날 것이고, 세 번째 우물이 넘치는 날에는 말세(末世)가 될 것이니 그때는 지체 없이 이 마을을 떠나시오."

 

 

말을 마친 후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고목을 베어내고 그곳을 팠는데, 노승의 말대로 맑은 물이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이 넘치면 세상에 말세가 온다는 노승의 말이 있어 주민들은 이 우물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빠져도 가라앉지 않는 영천, 벌써 두 번 넘쳐

 

이 사곡리의 우물은 사람이 물에 빠져도 가라앉지 않는다고 한다. 물을 긷다가 몇 명이 빠졌으나, 그대로 다 물에 떠 있어 생명을 건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우물 옆 안내판에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장옥분(당시 16세 부인), 연기남(13세, 소녀), 연규인(14세, 소녀), 연경세(11세, 소녀) 등 4명이다. 그러나 1947년 음력 2월 경 우물 하부 석축이 우그러들어 재공사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보릿고개에 시달려서 명샘에 고사도 못 올리고 지내던 중, 연규성씨 딸 10세 소녀가 물을 긷다가 변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용왕님의 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경악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가가호호 촛불을 밝히고 무녀를 들여 굿을 하였다.

 

이러한 우물이 벌써 두 번이 넘쳤다고 한다. 이제 한 번 더 넘치게 되면 말세라는 것이다. 첫 번째로 넘치던 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라고 한다. 어느 날 우물에 물을 길러간 한 아낙이 우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마을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 소문은 인근에도 퍼져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던 며칠 후, 왜병이 쳐들어 왔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노승의 말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정초에 우물이 처음으로 넘쳤다.

 

 

두 번째로 우물이 넘친 것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때의 일이다. 그 후 6·25 때는 우물이 지면 1m 내·외로 불어나 전쟁발생을 예고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우물을 시멘트로 바꿔 간이 상수도로 사용했으나, 마을에 액운이 잦아 원상복구를 했다고 한다. 1995년 11월에는 2 ∼ 3일간 우물이 불어났다 줄었다 하기도 했고, 마을에서는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 물을 퍼내 청소를 하는 등 관리에 정성을 쏟고 있다.

 

말세를 알려주는 우물, 벌써 500년 가까이 마을사람들이 '영천'이라고 생각하는 이 우물은 이제 두 번이 넘쳐나고, 마지막 한 번이 남았다고 한다. 우물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에도 어르신 한 분은 곁에서 떠나시지 않는다. 행여 우물에 나쁜 짓이라도 할까보아 걱정이신지. 우물을 뒤로하면서 속으로 기원을 한다. 세 번째로 넘쳐나는 일이 절대로 없었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 중에서 다음과 같은 그림 하나를 볼 수 있다. 즉 겨울철 행랑방이나 여름철 대청에 앉아, 호롱불을 하나 켜놓고 새끼를 꼬는 모습이다. 주로 집안에 머슴들이 맡아하던 새끼를 꼬는 일은 우리 농촌 생활에서는 흔히 보는 모습이다. 이렇게 밤을 이용해 새끼를 꼬는 것은, 그만큼 새끼를 꼬아두면 그 용도가 많기 때문이다.

 

힘들게 짚으로 꼬아 만들던 새끼. 그러던 작업이 기계 하나가 농촌의 일손을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바로 새끼를 꼬는 기계가 농촌에 나타난 것이다. 이 새끼 꼬는 기계를 이용하면 사용의 용도에 따라 가는 새끼, 보통 새끼, 굵은 새끼 등으로 그 굵기를 마음대로 조절을 할 수가 있다. 이 기계는 또 두발식과 외발식 등 그 디딤판의 구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두발식의 불편함을 덜어내기 위해, 외발식은 후에 개조가 된 것이라고 한다.

 

 

간단한 원리로 만들어진 기계

 

새끼 꼬는 기계의 원리는 간단하다. 새끼를 꼬기 위해 축을 돌리는 발판이 밑에 있고, 그 위에 톱니로 물려 돌아가는 기계 뭉치가 있다. 이 기계뭉치의 끝에는 짚을 투입하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의 크기가 새끼의 굵기가 되는데, 구멍의 크기를 조절하는 여러 개의 구멍을 뚫은 쇠가 있다.

 

새끼가 꼬아져 나오면 그것을 감는 나무로 만든 물레가 있다. 디딤판을 번갈아 디디면서 양편에 있는 투입구에 짚을 넣으면 새끼가 꼬아져 나온다. 바쁜 농촌에서 이 새끼 꼬는 기계는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1950년대부터 농촌에 보이기 시작한 새끼 꼬는 기계

 

새끼 꼬는 기계가 언제 처음으로 나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기계가 처음으로 농촌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정도였을 것이라고 한다. 현재 70세 정도 되신 어른들이 어릴 적부터 보았다는 기억을 하기 때문이다.

 

이 기계가 마을에 한 대씩 보이기 시작하자, 온 마을의 구경꺼리였다고 한다. 아마 힘들게 졸린 눈을 비벼가며 새끼를 꼬던 사람들은, 이 기계의 출현이 더 없이 반가웠을 것이다. 쉽게 다리품만 팔면 얼마든지 많은 새끼를 손쉽게 꼬아 낼 수가 있었으니.

 

 

 

"이 기계가 언제쯤 나왔나요?"

"한 60년쯤 되었나 봐요. 저희가 어릴 적에 마을에 들어왔으니."

"이 기계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꽤 인가가 좋았겠네요?"

"인기 정도가 아니라 지금으로 치면 커다란 농사용 농기구 하나 들어온 정도였죠. 아마 이 기계가 더 빨리 있었으면, 사람들이 졸면서 새끼를 꼬지는 않았을 텐데."

"새끼 꼬는 일이 많이 힘이 드셨나 봐요?"

"힘만 들어요? 하루 종일 논밭에 나가 일하고, 밤에 되면 불을 켜 놓고 새끼를 꼬아야 하는데. 정말 새끼 꼬느라 손바닥이 다 닳을 정도였다고나 할까."

 

명성황후 생가 옆 민가마을에서 근무를 하시는 어르신들이 들려주시는 새끼 꼬는 기계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가 있다. 옛날 이 기계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새끼를 꼬는 일은 그만큼 농촌의 작업 중에서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웃으시면서 이야기를 하시는 어르신들이지만, 아마 당시에 손바닥이 다 닳았다는 표현이 적합하단 생각이다. 침을 뱉어가며 손바닥으로 짚을 비벼 새끼를 꼬았으니 말이다. 그런 시골생활에 이 새끼 꼬는 기계는 몇 사람의 몫을 해댔다고 한다.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풍물인 새끼 꼬는 기계. 그 기계를 이용해 꼬아져 나오는 새끼를 보고 있노라니, 옛 농촌의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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