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5월 18일일 개관한 석탄박물관은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리 114-4에 소재하고 있다. 지난 1989년부터 석탄의 수요 감소에 따른 석탄산업의 합리화조치로, 다수의 비경제 탄광이 폐광이 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에 국민의 주된 연료로서 근대 산업발전의 원동력으로 크게 공헌한, 석탄산업의 역사성을 보존하고 후손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보령석탄박물관은 특수공법을 사용, FRC 재질로 산을 상징한 건물형태로서 입구는 갱을 나타내었고 전시실은 크게 내부전시관과 외부전시장으로 구분하여 석탄의 생성과정, 굴진, 채탄, 이용과정 등의 각종 장비를 전시하고 있다.

 

 

지하로 내려가는 효과를 낸 케이지

 

또한 모의갱도는 국내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이용, 수직갱에서 사용하는 승강기(케이지)를 재현하여 지하 400m까지 내려가는 듯한 효과와 지하 400m에서 올라오는 효과를 내어 실감나게 하였고 폐광에서 나오는 찬바람을 이용하여 냉풍터널을 시설하였으며, 터널벽면에 광산관련 사진을 전시하고 모형갱도 내에는 굴진, 채탄, 운반, 과정을 실물 크기로 하여 알기 쉽게 하였다.

 

석탄박물관을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천안 IC → 아산 → 홍성 → 보령을 택하든지, 유성 IC → 공주 → 청양 → 보령을 들어가 성주면에 있는 박물관으로 가면 된다. 보령시청에서 박물관까지는 승용차로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서울 → 포승 IC → 아산 → 홍성 → 보령으로,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시는 연무대 IC → 논산 → 부여 → 보령으로 이도이 가능하다.

 

 

모두 다섯 부분으로 구분

 

 

보령석탄박물관의 전시실은 다섯 부분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 탐구의 장 - 석탄의 기원으로부터 석탄의 생성과정을 전시하고 또 종류별로 분석한 자료와 에너지발전 단계에서 석탄의 위치, 그 사용 방법 등을 보여준다.

☞ 발견의 장 - 석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목표로 석탄이 근대사에 기여한 공로와 가치를 평가하고자 이러한 목표에 근접하기 위해 석탄의 분포와 석탄산업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진단하고 분석하였다.

☞ 참여의 장 - 광산갱도모형, 광산촌모형, 탄전이 많은 보령시와 부여군을 중심으로 한 충남지역의 모형을 나타내었으며, 광산의 갱도모형은 영보탄광 대본갱을 선정하여 탄광과 주변 환경을 보여준다.

☞ 확인의 장 - 관람객이 석탄의 생산과정을 확인할 수 있게 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땀을 흘리는 광부들의 모습을 가슴으로 느끼게 하고자 계획 하였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석탄이 생산되는지를 인식시켜 석탄자원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위한 장이다.

☞ 체험의 장 - 수갱엘리베이터 및 굴진, 채탄, 운반 과정을 보여준다.

 

 

 

관람시간 : - 하절기 (3월 ~ 10월) 09:00 ~ 18:00 (매표시간 : 17:30)

                - 동절기 (11월 ~ 2월) 09:00 ~ 17:00 (매표시간 : 16:30)

관람소요시간 : 약 30분 ~ 1시간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매년1월1일, 설날연휴, 추석연휴, 관공서 공휴일다음날

입 장 료 : 개인 1,000원 단체(20인 이상) 800원

어린이 청소년 군인 500원 단체 400원 

※ 단체는 20명 이상

※ 무료 : 5세 이하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베트남 관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땀꾹이다. 땀꾹은 낮은 천연동굴과, 가고 오는 길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인 바위산이 서 있어 경치가 좋다. 다만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일은 자칫 함석으로 만들어진 배의 노를 저어야 할지도 모르니,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이 좋다.

 

땀꾹을 관람하는 배들은 작은 소형이다. 노를 저어 땀꾹으로 가는데, 적게는 2명 정도 많게는 4명 정도가 탄다. 순전히 노를 저어가야 하지만, 워낙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배를 타고 감으로 심심하지는 않다.

 

 

아치형 동굴을 지나는 재미

 

땀꾹의 상류로 가다가 보면 아치형 동굴을 몇 개 지나게 된다. 동굴 폭은 10 ~ 20m 정도이고 천정은 손을 들면 닿을 듯하다. 그 곳을 빠져나오면 다시 출발을 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인 베트남은 자연환경과 옛 모습 그대로 가직한 생활풍습,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관광자원이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가 탄 배를 젓는 아가씨는 힘이 든 것처럼 보인다. 교대로 노를 젓는다. 땀꾹으로 오가는 배위에서는 누구나 한번쯤은 노를 저어야 한다.

 

 

승려가 되기 전에는 머리를 다 못 깎아

 

돌아오는 길에 들린 사찰. 이곳에 들리니 어린 아이들이 있다. 그런데 머리가 일부분만 남아있다. 이유를 물으니 정식으로 승려가 되기까지는 머리를 이렇게 한쪽만 기른다는 것이다. 예불에 참석하는 아이들은 장난을 치기도 한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니 뛰어놀고도 싶을 것이다. 베트남을 여행하게 되면 꼭 한번 땀꾹으로 가는 작은 배에 올라 땀을 흘리며 노를 저어보기를 권한다.

 

세상은 나라마다 풍속이 다르고, 풍광이 달라 재미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유가 조금만 생기면 우리나라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가 보다. 요즈음은 며칠간 줄 연휴가 되면 공항은 그야말로 만원을 이룬다. 해외로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 때문이다. 물론 견문을 넓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난 그것과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우리나라에도 아직 기보지 못한 숱하게 많은 아름다운 곳들. 그리고 아직 돌아보려면 멀기만 한 문화재들. 내 머릿속에는 우선 그런 것들이 먼저이다. 언제나 다 돌아보게 될지 모르겠다. 아마 남은 생을 다 돌아본다고 해도, 극히 일부분일 수도 있지만.

 

지난 자료를 정리하다가 보니 땀꾹 사진과 영상이 들어있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은 야심한 밤에 재미를 주기도 한다. 혹 가보지 못한 이웃 분들을 위해 소개를 한다.

 

줄다리기는 풍년, 풍어의 기원

 

줄다리기는 여러 사람이 두 편으로 갈라, 줄을 마주 잡아당겨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줄다리기는 한 해의 길흉을 점치고 풍년·풍어 등을 기원하는 뜻에서 시작한 마을 행사였다.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점점 이웃마을로 합세를 하면서 대보름이 되면 거대한 줄로 변한다. 새끼줄이 중줄이 되고, 그것이 다시 모여 쌍룡이라는 암수의 줄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줄은 주로 음력 대보름을 기해 행해졌으며 마을 단위로 편을 갈라 장정들이 하거나 또는 남녀노소가 함께 줄을 마주 잡아당겨 승부를 겨루었다. 줄다리기를 삭전(索戰)·조리지희(照里之戱)·갈전(葛戰)이라고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줄다리기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온다. 주로 중부지방 아래에서 성행한 것으로 보아 벼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줄다리기는 대개 정월 대보름날 행하지만, 곳에 따라 단오나 한가위에 하기도 한다. 줄은 암줄과 수줄을 각각 만든다. 예전에 여주 흔암리 일대의 줄다리기는 수천 명이 달라붙어 줄다리기를 하였다. 일부 지방에서는 줄의 길이가 한편이 80m 정도의 큰 줄에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기 때문에 일대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줄은 암수줄을 만들어 그 용두(줄머리) 부분을 암줄은 넓게, 숫줄은 좁고 위로 오르게 만든다. 숫줄의 용두를 암줄의 용두에 넣은 후 비녀라는 나무빗장을 걸게 된다. 용목의 너비가 1m에 이른다고 했으니 그 줄의 위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줄의 용두 부분. 굵은 줄은 용목이 1m 나 되었다

 

줄다리기는 공동체의 구심점

 

줄다리기는 단순히 줄을 당기는 놀이가 아니다. 그 안에는 공동체를 창출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내적 사고를 지니게 된다. 마을에서는 정월 초이틀이 지나고 나면 마을마다 작은 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줄을 갖고 이웃마을과 줄다리기를 한다. 진 마을에서는 이긴 마을에 줄을 넘기게 되고, 이긴 마을에서는 그 줄을 합해 조금 굵은 줄을 만든다. 이처럼 처음 만들어진 줄이'새끼줄'이다. 마을마다 이렇게 줄다리기를 하며 새끼줄을 모으고, 이긴 마을끼리 또 다시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날이 갈수록 줄은 점점 굵어지는데, 이때 줄을 '중줄'이라고 한다.

 

줄을 이긴 마을에 넘겨줄 때는 사람들도 함께 그 편이 된다. 이웃과 이웃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저절로 공동체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줄이 보름이 가까워지면 커다란 암줄과 수줄로 형태가 변한다. 즉 암용과 수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마을도 강을 사이로 강북과 강남이 암숫룡을 이고 줄다리기를 할 강변으로 모여든다. 마을마다 들고 나온 깃발에, 마을의 풍물패가 한데 어우러지면 그야말로 한바탕 난장이 벌어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마음으로 풍농을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을 염원하였던 것이 바로 우리 줄다리기의 근본이다. 또한 겨우내 움츠려진 몸을 줄다리기를 하면서 길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낸 것이다.

 

  
거대한 줄로 보를 막으면 그 줄을 이용해 많은 어종들이 알을 낳기도 했다.

 

'줄보'는 생명의 근원

 

줄다리기를 마친 후 줄은 마을마다 사용법이 다르다. 어느 곳에서는 줄을 당산에 쳐놓기도 하고, 어느 마을에서는 얼음이 언 강에 갖다 놓기도 한다. 새끼줄을 잘라 지붕에 던지면 집안에 액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잘라가기도 한다. 또는 기자속(祈子俗)으로 줄을 이용하기도 하는 등, 줄을 이용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바로 <줄보>라는 줄의 사용법이다. 마을에 내가 흐르면, 줄을 당긴 후 내를 막아 보를 만든다. 이 짚으로 만든 줄보는 생명의 근원이다. 또한 자연을 보호하고 물을 정화시킨다. 수많은 어류들이 이곳에서 생명을 잉태시킨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어장이 되는 것이다.

 

물속에 많은 먹이를 만들어 배부른 강을 만들고, 여름 장마철이 되면 떠내려간다. 이때쯤이면 농사를 지을 물이 부족하지 않다. 생명을 잉태하고 자연을 보호하며, 물을 가둘 수 있는 줄보.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하면 스스로 떠내려가 물의 흐름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 다음 해에는 또 다른 생명의 줄보가 물을 막는 것이다.

 

  
줄을 이용해 보를 막은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자. 강을 오염시키지 않고 수 많은 생명을 잉태한 생명의 줄이다

 

이런 줄보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들의 논란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조상 대대로 이용해 농사를 지을 물을 가두고, 많은 생명을 잉태시킨 줄보.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선조들의 자연사랑과 공동체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저마다 잘났다고 침을 튀기는 사람들. 이 줄보를 과연 알고는 있었을까? 그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서 저곳을 줄보로 막을 수만 있다면 굳이 이런 논란은 하지 않아도 될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생명의 보 <줄보>, 이 줄보를 만들어 썩은 물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장치기' 또는 '얼레공치기', '짱치기'라는 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193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연희가 되어왔던 놀이니, 중단된 지가 그리 오래지 않다. 이 장치기를 시합으로 할 때는 '장치기'라 하고, 놀이로 할 때는 '장채놀이'로 부르기도 한다.

 

1931년 2월 1일자 <동아일보>는 서탄면 황구지천에서 전국의 32개 남여 팀이 참가한, '전 조선 얼레공대회'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또 <동아일보> 사보 1월 24일자부터 30일자까지에는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얼레공대회를 개최한다는 예고가 실렸으며, 참가할 각 팀의 선수는 5명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장치기는 우리 민속 중 유일하게 나타난 구기종목이기도 하다. 장치기는 놀이방법이나, 놀이를 할 때 사용하는 기구 등이 간단하다. 놀이를 하기 위해선 짚이나 나무공이를 이용해 만든 '공'과, '장'이라고 하는 나무로 만든 채만 있으면 된다. 공은 짚을 엮어서 만드는 방법을 택했으며, 장은 물푸레나무 등을 이용해 길이가 3~5자 정도에, 끝이 45도 앞으로 휘어져 10~15cm 정도 되는 것을 사용한다.

 

모두가 즐겨하던 전통 공놀이

 

 

. 얼레공은 짚을 꼬아 둥굴게 만들고. 장은 물푸레 나무 등으로 만든다

 

 

 

장치기는 1950년대만 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놀이였다고 한다. 어른들은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넓은 논바닥에서 마을끼리 대항을 하기도 했단다. 장치기 놀이에는 특별한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몇 명이라도 모이면 편을 갈라 하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치기가 꼭 놀이로서만 전승되어 온 것은 아니다. 장치기는 겨울에 운동량이 부족할 때, 몸을 움직여 원활한 신진대사를 돕기위해 하는 '운동'이 되기도 한다. 또 일부 마을에서는 얼레공을 자신의 마을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마을로 복을 끌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얼레공을 짚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것이 풍농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간단한 도구를 갖고도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놀이. 장치기는 그저 공터만 있으면 연희가 가능한 놀이다. 1932년 전국에서 남녀 32개 팀이 모였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전역에서 보편화 된 놀이였음을 방증한다.

 

장치기는 어떻게 전해졌을까?

 

 
장을 이용해 짚을 꼬아만든 장을 쳐낸다
 
 
장은 끝이 구부러져 얼레공을 몰아가기에 편하다. 필드하키와 흡사하다.

 

어떠한 놀이든지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다. 장치기도 예외는 아니다. 장치기의 원조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진 '격구'로 본다. 고려 태조 1년인 937년 기록에 격구장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격구는 그 이전부터 성행한 놀이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때는 여자들이 말을 타면서 하는 마상격구를 할 때, 그 치장의 화려함이 지나쳐 한 때 금지시키기도 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태조와 정종이 격구를 즐겼으며, 세종 7년인 1425년엔 무예연습의 필수과목으로 격구를 선택하기도 했다. 정조는 격구를 24기 무예의 한 종목으로 택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안에 수록하였다. 이러한 반가의 대표적 놀이인 격구가, 언제부터 민간으로 전해져 장치기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조선조 중기 이후에 급격히 쇠퇴한 반가의 놀이인 격구가 이때를 전후해 민간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본다.     

 

우리 놀이를 되살릴 수는 없을까?

 

 
양팀의 사람들이 서로 얼레공을 빼앗기 위해 채로 얼레공을 쳐내고 있다.

 

나는 오래 전에 수원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장치기를 가르쳐 재현시킨 적이 있다. 경기도민속경연대회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까지 참가를 시키기도 했는데, 장치기는 누구나 손쉽게 배울 수가 있어서, 청소년들의 놀이로 장착을 시켜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드하키와 비슷한 놀이인 장치기는 장이라는 나무막대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때로는 격한 몸싸움으로 부상을 입기도 한다. 그러니 그런 부상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만 보완한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우리 전통의 놀이다.

 

연세가 80세 이상이신 분들 중에는 아직도 장치기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장치기 놀이에는 별도의 골문이나 골키퍼가 있진 않다. 그저 넓은 공터 양편에 돌을 놓아 문을 만들고, 편을 갈라 얼레공을 몰고 가 그 문 안으로 들여보내면 된다. 사라지는 우리 전통놀이인 장치기.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아이들의 체력을 위할 수 있는 우리 전통놀이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좀 더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갖게 되지 않을까?

 

일 년 내내, 계절에 구애를 받지 않고 들에서 뛰어놀던 장치기. 우리의 전통 공놀이인 장치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쳐, 예전과 같이 전국의 남녀 팀이 모여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았더니, 기사 제보를 하겠단다. 무슨 이야기냐고 물으니, 오산에 ‘마등산’이라고 있는데 그 정상 부근에 ‘선바위’라는 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바위야 산에 가면 얼마든지 있는 것인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물으니. 한 마디로 그 바위가 정말 영험하기도 하지만 그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어딜 가나 전설이야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들려주는 이야기에 솔깃해진다. 사실은 이 마등산이라는 산의 지명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마등산은 모두 5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1봉으로 가는 능선의 모양이 말의 등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은 노적산, 배꼽산, 달맞이산, 선바위산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마등산의 딴 이름은 왜 붙었을까?

 

마등산이라는 명칭은 2004년 오산시 지명위원회에서, 여러 가지 전해지는 명칭 중에서 가장 적합한 명칭으로 정해놓은 이름이다. 그 외에도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산은, 당말의 뒤편 산봉우리가 마치 노적을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노적산’이라고 했다. 또한 이 산 봉우리 가운데, 마치 사람의 배꼽처럼 생긴 곳이 있다고 하여 ‘배꼽산’이라고도 불렀다.

 

‘달맞이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말 사람들이 이 산에 올라 달맞이를 했던 것에 연유한다. 이 중에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이름이 있다면, ‘선바위산’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선바위란 마등산 정상부근에 마치 돌이 선(=立)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짧은 산행에서 만난 선바위, 그 참 희한하네.

 

제보를 한 박아무개가 거주한다는 오산시 원동 721-1에 소재한 마등사를 찾았다. 이곳은 절이 아니고, ‘마등산 역말굿당’이라는 곳이다. 요즈음은 집에서 굿을 할 수가 없어, 전문적으로 이곳에 들어와 굿을 하는 곳이다. 한 편에 조성한 허궁기도터를 지나 산으로 올랐다. 몇 m 쯤 오르니, 발밑에 토종밤들이 즐비하게 떨어져 있다. 작은 토종밤들이 윤기가 흐른다. 몇 알을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시간이 벌써 5시가 다 되어 가는데, 밤을 줍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다. 산봉우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보니 무슨 초막 같은 것이 하나 보인다. 그 밑으로는 병풍처럼 둘러친 바위가 있고, 그 위로는 몇 개의 바위들이 서 있다. 말 그대로 바위들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바위들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이 바위 중 하나가 보는 방향에 따라, 참 묘하게도 남녀를 상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양성바위(=兩性岩)’라고나 할까? 이곳을 소개한 박아무개의 말마따나, 이 바위가 영성이 아주 강하다고 한 말이 이해가 된다. 한 마디로 내림을 받는 사람들이 말문이 안 트이면, 이곳 선바위에서 빌면 말문이 터진다는 것이다.

 

 

 

소금 배 세 척을 먹어치운 선바위

 

사실 이 선바위에는 지역에는 전하는 전설이 하나 있다. 아주 오래 전에 당말에는 제물포에서 소금을 떼어 와서 파는 소금장수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날도 이 소금장수가 제물포로 갔다는데, 소금장수들에게 소금을 파는 구두쇠 영감이 유독 이 소금장수에게 못되게 굴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딴 사람보다 가격도 비싸게 팔았다는 것.

 

당말에서 소금을 사러 간 이 소금장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구두쇠 영감을 골탕 먹이기로 결심하고, 구두쇠 영감이 비싼 값을 부른 것을 알고서도 그 값을 쳐주겠다고 했다는 것. 그는 구두쇠 영감에게 “내 이름은 당말에 사는 선바위요. 지금은 그렇게 큰돈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내가 소금을 싣고 돌아가서 바로 돈을 보내 드리리다”라고 했다.

 

 

구두쇠 영감은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소금 배 세척을 내주었다. 그러나 바로 돈을 갖고 오겠다는 소금장수는 영 소식이 없었다. 구두쇠 영감은 화가 나 당말로 선바위를 찾아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선바위라는 소금장수의 사는 곳을 물었지만, 아무도 알지를 못했다. 다만 “저기 노적산 꼭대기에 있는 것이 바로 선바위요”라고 알려주었다는 것.

 

남을 골탕 먹이려고 했던 구두쇠영감은, 노적산 꼭대기에 소금더미처럼 생긴 바위만 바라보며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이 바위에 전하는 전설 때문인지, 이 바위들이 얼핏 바라보면 소금덩이처럼 생기기도 했다. 참 전설이란 그 안에 이런 속 깊은 뜻이 있어서 좋다. 남을 해하려고 하면, 반드시 자신이 그만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오래된 상여가 있다고.

 

선바위를 돌아보고 내려오니, 굿당의 당주인 박아무개가 산자락에 있는 상여막으로 데리고 간다. 아주 오래 된 상여가 있다는 것이다. 원래는 역말에 있던 것을, 주민들이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1970년 초에 이 상여를 손보아 사용했다는 것이다. 분리가 된 상여는 보기에도 100년은 훨씬 지났을 것 같다.

 

“이 상여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이렇게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제대로 맞추어 한 번 사용해 보려고요.”

 

 

오산에는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상여막이다. 전화 한 통을 받고 달려간 곳에서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땀을 식히느라 차 한 잔을 마시고 돌아 나오는 내내, 그 양성바위가 눈에서 아른거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바위기운이라도 좀 받아올 것을.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