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저금통’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꽤나 의아해 할 것만 같다. 하지만 말 그대로이다. 빗물을 저금해 두었다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빗물관리 시설을 말하는 것이다. 수원시에서는 극심한 가뭄과 물 부족 현상을 이겨내기 위하여, 새로운 빗물 저장고를 제작해 가정에 설치를 해주고 있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가끔 뉴스를 통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지고 있는 논밭이나, 말라버린 하천의 물길을 보면서 애를 태우기도 한다. 지자체에서는 이러한 물 부족 현상을 이겨내기 위해서 다각도로 노력을 하고 있다.

 

사진은 수원시 화서1동 소재 한 주택 지붕에 설치된 빗물저금통의 모습

 

물부족 해소와 물의 재활용

 

수원은 예전 정조임금 때부터 물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정조임금은 축만제와 만석보 등을 설치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을 만들기에 많은 노력을 했다. 현재도 수원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저수시설이 있어, 딴 곳보다는 물의 부족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봄철 가뭄이나 등에 대비해 미리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빗물저금통은 빗물을 저장할 수 있는 빗물저장탱크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 수원시는 연중 기존의 건축물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는다. 신청을 하면 빗물저금통 설치전문가들이 지붕의 상태, 홈통 등 현장을 실사하는 등 선정과정을 거쳐 총 공사비의 90%, 최대 1천 만 원까지 지원해 빗물저금통을 설치해주고 있다. 

 

광교산에서 발원하는 수원천(위)과 정조임금 당시에 조성한 축만제

 

차츰 시 전체로 확대 실시 할 예정

 

수원시는 빗물저금통의 시설을 관내 농가와 주택 등, 주민들의 신청과 선정의 과정을 거쳐서 설치를 했다. 우선은 화서1, 2동과 입북동의 농가를 비롯해, 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 및 어린이집 등 총 12곳에 설치를 했다. 빗물저금통은 내년에는 공공기관 및 일반주택을 대상으로 빗물저금통의 설치를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수원시 담당자는 “우선 송죽동 주민센터와 권선동 고가차도 등에 추가적으로 빗물탱크를 설치할 예정이며, 주민센터에서는 건물옥상으로 떨어진 빗물을 모아, 낙엽 등 이물질을 제거한 후 빗물관리시설에 모아둔다. 이 빗물은 건물의 청소용수나 조경수, 생활용수 등으로 활용하고, 도로에도 뿌려 도심 열섬현상을 완화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한다.”고 밝혔다. 

 

상광교 사방댐과 (위) 하광교 소류지

 

수원시는 빗물의 재활용을 통해 물 부족을 해소하고 하수도 부하를 경감시키며, 상수도 사용량을 감소시켜 공공요금을 줄이는 것은 물론 재난방지에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수원시는 또 빗물재활용을 위한 빗물저금통의 설치를 점차 확대할 방침이며, 주민센터의 경우 시설을 전면 개방해 센터 인근 주민들도 언제든 이 빗물을 받아가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빗물저금통을 설치한 화서1동 주택의 한 주민은 “이렇게 빗물저금통을 설치해 버려지는 빗물을 이용함으로써, 상수도 사용료 등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면서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물 부족 현상이 일어날 것을 미리 대비한다는 것은, 일찍 화성 주변에 많은 수리시설을 조성한 정조대왕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면서 수원은 물에 관한 한 최고라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물레방아라고 하면, 무엇인가 애틋한 사랑이야기 한 대목쯤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레방아는 우리의 재래농기구 중 탈곡이나 정미 또는 제분 등에 이용되었던 도구이다. 물레방아는 돌확이나 맷돌, 절구, 디딜방아, 연자방아· 등과 함께 사용이 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늦게 생겼다고 본다. 또한 물레방아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마을을 흐르는 하천 등의 옆에 자리하게 된다.

 

물레방아는 바퀴를 가로지르는 방아굴대 양쪽에 있는 눌림대가, 바퀴가 물의 힘으로 돌아갈 때 살개목을 눌러 방아공이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 찧는 것이다. 대개 물레방아의 양편에 방아공이를 연결하기 때문에, 두 개의 방아공이가 번갈아가면서 방아를 찧게 된다.

 

 

너와로 꾸민 신리 물레방아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3호인 신리 너와집이 있다. 이 집을 찾아 들어가다가 오른쪽에 길 밑으로 보면, 냇가에 너와지붕을 올린 물레방아가 보인다. 일반적으로 물레방아는 방아의 기능을 갖고 있지만, 신리 물레방아는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작은 공간과 외양간, 그리고 물레방아와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하천 쪽으로 내려가면 방앗간을 들어가는 문이 있고, 우측으로는 외양간이 마련되어 있다. 문의 좌측으로는 반 칸 정도의 작은 방이 하나 딸려있으며, 이곳의 앞부분만 흙벽으로 바르고, 나머지는 모두 판자로 벽을 처리하였다. 두 개의 방아공이가 방앗간 안에 놓여 있는 신리물레방아. 뒤편으로 돌아가면 수차가 있고, 위에는 말라버린 물길이 나 있다. 물레방아 뒤편에 내를 건너는 쇠다리가 놓여있으며, 물은 한참 위편에서 끌어들인 듯 하다.

 

 

 

사람이 살았던 물레방아

 

신리 물레방아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어서, 주변을 살피는데 마을 주민 한 분이 밭을 갈고 계시다. 물레방아에 대해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잠시 곡괭이질을 멈춘 마을 분은 물레방아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신다.

 

“여기 물레방아가 멈춘 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한 15년 전만 해도 물레방아를 사용을 했죠.”

“그런데 요즈음은 사용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어르신 한 분이 사셨는데, 연세가 들고 힘이 벅차니까 그만 두신 것 같아요. 그 어르신도 10여 년 전에 돌아 가셨구요.”

“그 이후에는 사용을 하지 않았나요?”

“아무래도 그 어르신이 생활을 하시는 것이 힘이 드셨으니까요. 원래는 어르신이 생활을 하기 위해 지은 집이었는데, 물레방아를 만든 것이니까 마을 사람들도 사용을 했죠.”

“물이 다 말라버렸네요”

“물길을 막아놓아서 그래요. 물길만 터놓으면 지금도 물리 흘러들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물레방아를 본 적은 많지만, 이렇게 사람이 기거하는 물레방아는 보지 못한 것 같다. 이곳에서 혼자 사셨다는 어르신의 생활이 그리 편치 않았다는 것은 한눈에 보아도 알만하다. 좁은 방은 어른 한 사람이 발을 펴고 눕기도 버거울 듯하다.

 

물레방아를 여기저기 살펴보면서 생각을 한다. 보수를 한다고 해도 이대로 놓아두면 물레방아의 기능도 사라질 판이란 생각이다. 물길을 다시 열어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정겨운 소리를 들을 수는 없을까? 그저 형태만 보여주는 많은 민속자료들. 그러나 신리 물레방아는, 어느 물레방아도 따를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다. 물레방아도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물길을 방아로 보내는 수로를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도 특이하다.

 

 

평생을 물레방아 간에서 혼자 외롭게 보내신 어른의 체취가 묻어있는 신리 물레방아. 너와집으로 꾸몄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그보다는 물레방앗간 안에 생활공간이 있었다는 점이 더욱 특이하다. 신리 물레방아를 그냥 마른 채 보존할 것이 아니라, 물을 다시 흘려 정겨운 방앗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물레방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에 보인다. 당시 세검정에 구릉성 산지에서 떨어지는 낙차를 이용한 물레방아가 있었음을 적고 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물레방아하면, 20세기가 시작될 때 서울에서 태어나 25살 이라는 피지도 못한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요절한 불우한 작가 나도향이 먼저 떠오른다.

 

나도향의 물레방아는 방원의 아내가 신치규와 물레방아 깐에서 정분을 통하고, 결국은 남편인 방원에게 물레방아 깐에서 살해를 당한다는 줄거리이지만, 당시의 물레방아는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물레방아 마을이 있어

 

이러한 물레방아는 가물어 물이 모자라게 되면 방아를 찧을 수 없게 되자, 1920년대부터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대신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아가 보급이 되면서, 자연 추억속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물의 힘을 이용한 물레방아가 있다고 하여 찾아 나섰다. 일반적으로 물레방아 하면 물의 힘을 이용한 디딜방아 형태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와는 달리 거대한 동력구조의 방아가 오로지 물만 갖고 돌렸다는 것이다.

 

진안군 백운면 운교리에 있는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36호 백운면 물레방아는 1850년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는 물레방아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어진 이 물레방아는 물을 막은 보가 61m에, 보에서 물레방아에 이르는 수로가 252m이다.

 

 

수로의 넓이가 2m나 되는 이 물레방아는 소나무로 제작이 되었으며, 지름이 310cm에 폭이 130cm나 되는 큰 물레방아다. 기존의 물레방아가 ‘ㅡ’자 형을 갖고 있는데 비해, 도정력을 높이기 위해 ‘ㄱ' 자 형으로 특수 제작된 47개의 날개를 갖고 있다. 더욱 이 운교리 물레방아 인근에는 11개 정도의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하니, 아마 물레방아 집단지였던 것 같다.

 

민속문화재로 지정

 

큰길가에 안내판 하나가 없어, 몇 번이나 길을 물어 찾아간 백운면 물레방아, 최근까지도 사용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변에 말라버린 잡초만 무성하다. 물레방아의 문이 열려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아의 형태가 지금껏 보아오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크기도 그렇거니와 물레방아 깐의 구조가 상당하다. 세 칸으로 나뉘어져 있는 물레방아는 풍구와 도정기, 그리고 기계를 돌리기 위한 바퀴들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고, 낡은 피댓줄들이 이 물레방아를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풍구 옆 기둥에는 1995년 3월 27일 진안군수가 발행한 양곡가공업 등록증이 붙어있고, 그 밑에는 정미소 주인이 적어 붙인 도정효율표가 있다. 효율표에는 백미 80kg 한 가마에 4kg을 현물로 받으며, 운반료는 별도로 받는다고 적어 놓았다. 이 물레방아는 얼마 전까지도 사용을 했다고 한다.

 

 

물레방아 한편에는 곡식을 쌓아두었던 곳인 듯 너른 공간이 있다. 그곳을 보면서 갑자기 나도향의 물레방아가 떠 오른다. 저런 곳에서 신치규와 방원의 처가 밀담을 나눈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물레방아의 밑은 물이 빠져 나가는 물길인데, 아직도 물의 고여 있다. 한때는 부의 상징이었던 물레방아. 이제는 먼지만 쌓여가고, 물이 마른 물길은 옛 영화가 그리운 듯 마른 잡초만 가득하다.

돈황 막고굴의 문화재는 일체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막고굴은 모두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으며. 안내자의 인도에 따라서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막고굴에는 비천상의 그림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범종에 새겨진 그림들과 흡사한 모습이다.

 

오대산 동종과 흡사한 비천상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국보 제36호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입구에서 막고굴의 비천인상을 팔아

 

돈황 막고굴에서 입장권을 끊어 안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돈황의 문을 들어가기 전에 상점이 한 동이 있다. 그곳에서는 돈황 막고굴에 그려진 비천인상의 모습을 그려서 팔기도 한다. 그런데 그 비천인상의 그림이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아마 우리나라 절 어느 곳을 가도 볼 수 있는, 비천상을 보아왔기 때문인가 보다.

 

 

돈황은 불교의 성지로, 중국 역대 불교의 집산지다. 그리고 불교의 신앙 속에 나타나는 여러 세계를 조각과 조소, 회화 등을 종합적으로 시각화한 박물관이기도 하다. 2,5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눈으로 불교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막고굴의 불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불교도나 승려뿐이 아니었다.

 

막고굴의 불사에는 조각가, 화사, 역경사, 석공, 도공, 칠공, 목공까지 수많은 그 분야의 거장이라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낸 작품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조성된 돈황 막고굴은 한나라 서하, 원, 명, 청대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보존해 왔다는데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오아시스 안에 숨겨진 막고굴

 

돈황 막고굴은 돈황 시가지에서 25km 떨어진 사막 속의 작은 오아시스에 숨겨져 있다. 492개소의 석굴로 되어있으며, 4세기경부터 14세기경까지 1,000년 동안에 하나 둘 씩 뚫은 것이다. 기록에는 1,000여개의 굴이 있다고 하나, 현재는 492개소의 굴이 정리되어 보존되고 있다. 현재 굴속에 소상되어 있는 소상수는 3천여 점이며, 전면을 세로로 연결하면 그 길이가 45km에 달한다고 한다.

 

막고굴은 각 시대별로 특색이 있다. 막고굴은 사방 벽면에 벽화로 메워져 있으며, 대체로 서역취향적이다. 인도의 여러 형식을 갖고 있으며, 벽화속의 불상이나 비천상들이 많은 것도 특색이다. 이렇게 세계 최대의 불교의 보고라는 막고굴은 엄격하게 보호가 되고 있어, 그 외형만 담을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태국 북부지역인 치앙마이에 가면 태국과 라오스의 접경인 산악지대에 사는 카렌족을 만날 수가 있다. 이 카렌족은 미얀마에서 이주를 했다고 한다. 미얀마정부와 17개 소수민족 간의 내전은 1948년부터 시작을 했다. 그 소수민족 중 하나가 바로 카렌족이다.

 

목에 긴 링을 장식한 여인들이 있는 이들을 카렌족 중에서도 파다웅족(빠둥족)이라고 부른다. 이 여인들이 목에 긴 링을 감고 다니는 것은 목이 약해 링을 벗으면 목이 부러진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여인들 중에는 목에 링을 풀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대신 천으로 목을 감싼 여인들도 있기 때문이다.

 

 

링을 벗기면 죽는다고 전해지는 속설

 

구전에 의하면 죄를 지은 여인들은 이 링을 벗기면 목이 부러져 죽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전해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카렌족의 여인들이 목에 링을 하고 다니는 이유를 보면, 첫째는 맹수들이 여자들을 물어가서 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다음으로는 다른 부족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는 소수민족인 카렌족의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소문일 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카렌족의 조상은 바람과 아름다운 여자 드래곤의 열애에 의해서 태어난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목에 고리를 두르는 것은 조상인 드래곤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선뜻 납득이 가지는 않는다.

 

 

미얀마 정부에 대한 불신

 

백과사전에서 카렌족을 찾으면

「시노티베트어족의 언어를 사용한다. 인종적인 측면에서 단일한 집단이 아니며, 언어·종교·경제에서도 서로 다르다. 일부에서는 이들을 백(白)카렌족과 적(赤)카렌족의 두 집단으로 분류한다. 이중 백카렌족은 스가우족·푸오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적카렌족은 브레족·파다웅족·인바우족·자예인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얀마 동남부 살윈 강 하류의 양쪽 기슭, 타이 접경지역, 하(下)미얀마의 페구 산맥, 미얀마 남쪽 해안의 이라와디 강 삼각주 등에 사는 이들은 미얀마에서 2번째로 큰 소수민족이다. 1948년 미얀마가 독립한 후 카렌족으로 자처하는 집단들과 정부군 간에 산발적인 내전이 일어났다. 카렌족을 묶어주는 공통된 요인은 미얀마 정부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는 것이 미얀마 정부의 과제로 남았다.」라고 적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제작을 한 수공예품과 관광객들과 사진촬영 등을 하고 받은 돈을 갖고 생활을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여인들은 이제는 그런 광관상품으로서의 생활이 자신들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외국의 관광객들에 의한 수입원으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으니, 목에 낀 긴 링으로 인해 더욱 슬퍼 보이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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