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춤(杖鼓舞)은 타악기의 하나인 장고를 비스듬히 어깨에다 둘러메고 여러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키며 추는 춤이다. 원래는 풍물놀이 등 개인놀이로서, 혼자 또는 두 사람(때에 따라 많을 수도 있음)이 추는 것인데, 요즈음에는 새로운 형태로 안무하여, 농악이 아닌 완전한 무용으로 발전, 독특하고 장쾌한 멋을 풍기고 있다.(위키백과사전)

위의 장고춤에 대한 설명은 인터넷에서 ‘장고춤’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설명이다. 지금 우리는 장고춤을 ‘풍물에서 파생한 춤’, 혹은 ‘신무용’ 등으로 정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장고춤의 역사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무용화한 장고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미술과 고분 벽화 등에서 나타나는 장고춤에 대한 모습으로 장고춤에 대한 변화를 추론해 본다.

전북 완주군 송광사 대웅전 벽에 그려진 비천장고무. 조선조에 그려진 것이다.

불교미술에 나타난 장고춤의 변화

불교미술에서 장고를 이용한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지가 않다. 석탑이나 부도탑 등의 비천인이 연주를 하는 모습에서,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을 쉽게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비천인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이다. 연기조사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는 화엄사.

그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비천인상 중에,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이 있다. 아마 이 때는 장고가 춤이 아닌 단순한 악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뒤에 나타난 보물 제85호인 강릉 굴산사지 승탑에도, 연화대 위에 앉아 장고를 치는 비천인의 모습이 보인다.


국보인 구례 화엄사에 소재한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장고비천인

이 굴산사지 승탑은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중간받침돌에는 8개의 기둥을 세워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비천인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새기고 있다. 조각되어 있는 상은 8구 모두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악기는 장고를 비롯해 훈, 동발, 비파, 소, 생황, 공후, 적 등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소재한 보물 제294호 승안사지 삼층석탑에도 장고를 치고 있는 비천인상이 있다. 이 승안사지 삼층석탑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한 탑이다. 위층 기단에 새겨진 이 비천인상을 보면 앞서 열거한 비천인상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장고를 치는 비천인이 앉은 형태였는데 비해, 승안사지 삼층석탑의 장고를 치는 비천인은 무릎을 꿇고 있다. 이때는 단순히 연주가 아닌, 일종의 변형된형태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굴산사지 승탑의 장고비천상과 승안사지 석탑의 장고비천인상


고려 고분 벽화에서 장고춤의 형태가 보여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 있는 사적 제239호 둔마리 고분은 고려시대의 고분이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고분에는, 동서로 석실 두 개가 구분되어 있다. 이 고분 안에 동실의 벽면에는 천녀들이 구름위에서 연주하며 춤을 추는 ‘주악무도천녀도’가 그려져 있다. 당시의 현실적인 종교적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 천녀도 중에는 장고춤을 추는 그림이 있다.


이 둔마리 고분의 주악인물상의 악기 등은 고려시대에 사용하던 악기들이며, 주악도상은 고대주악비천상과 맥락을 같이한다. 후대에 후불 및 무속화의 인물표현 등과 악기의 소재 등이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동벽 남단에 그려진 주악무도천녀도의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장고춤을 추고 있다.

이 장고춤을 추는 인물을 설명하고 있는 형태를 보면, 지금의 장고춤을 추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인물은 빗어 올린 얹은머리에 둥근 테 모양의 관을 쓰고, 그 옆에 깃 같은 장식꼬리가 뻗어 날리고 있다. 상의는 둥근 깃에 소매 끝을 팔목에서 잘록하게 묶었다. 바지는 전반적으로는 헐렁하지만 발목도 묶었다.」


둔마리 고분의 벽화에는 장고춤을 추는 비천주악도가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인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종성된 고분이다.

아마도 격한 장고춤을 추기에 편하도
록 하였을 것이다. 「허리에는 띠가 감겨있는데 그 한쪽 끝이 왼쪽 다리위로 드리워져 있다. 상반신은 가느다란 끈으로 장고를 목에 감아 앞으로 늘어뜨리고, 왼팔은 높이 올리고 오른팔은 장고를 치면서 구름 위에서 춤을 추는 형태를 하고 있다. 신발은 형태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끝이 뾰죽하다」

벽화에 나타난 장고춤

이렇게 석탑이나 부도탑, 혹은 고분의 벽화 등에서 보이는 장고춤을 추는 비천인상을 보면, 이미 장고춤은 고려시대에 완전한 춤의 형태로 전승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장고춤을 실질적으로 묘사한 사찰의 벽화가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에 그려져 있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송광사의 대웅전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인 1857년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대웅전 상단 벽에 보면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비천인상에는 무당춤을 비롯해, 장고춤, 북춤, 승무, 바라춤 등의 그림이 보인다. 이 모든 춤들은 당시에 추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들은 단순히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세속화된 풍물을 그린다는 점으로 볼 때, 고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난 장고춤은 조선조에 들어서 상당히 격화되고 빠른 동작을 필요로 하는 경쾌한 춤으로 변화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을 보면 작은 소장고를 이용해 춤을 추면서 군관모자와 같은 관을 썼다. 화려한 장식에 힘이 있는 모습의 장고춤을 역동적으로 추고 있다.

이런 불교미술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장고비천인상에서 볼 때 장고춤은 농악놀이에서 파생한 춤이 아닌, 정형화된 장고를 이용해 추는 독자적으로 발생한 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신무용이 아닌 고려 때부터 전해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전통춤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술비소리’라는 것이 있다. 술비소리는 ‘술비통’이라는 기구를 사용해 새끼줄을 꼬면서 하는 소리를 말한다. '술비통'이란 새끼줄을 굵게 꼬는 기구를 말하는데, 지역마다 이 기구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다. 어느 곳에서는 나무를 X 자로 세우고, 그 위에 가로대를 지른 후 줄을 넘기면서 꼬아 나가기도 한다, 또 어느 곳에서는 술비통이라 하여, 넓은 판자에 구멍을 세 개를 뚫은 후, 그곳에 새끼줄을 넣고 앞에서 돌리며 꼬기도 한다.

이렇게 줄을 꼴 때 ‘줄이 술술 비벼진다’고 해서 술비라고 한다는 것이다. 술비란 짚을 이용해 가는 새끼를 꼬는 것이 아니다. 이미 꼬아진 가는 새끼줄을 몇 가닥을 합하여, 굵게 꼬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다.

 


손쉽게 줄을 꼬는 술비통

에헤야 술비야
(에헤야 술비야)
술술술 술비야
(에헤야 술비야)
달이뜨네 달이뜨네
(에헤야 술비야)

술비소리를 하면서 흥겹게 춤을 추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작업요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흥겹게 숭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술비소리를 하면서 술비통을 돌리다가 보면, 줄은 어느새 저만치 길어진다.

 


 


 

술비통은 널판지를 받치고 그곳에 구멍을 세개를 뚫는다. 그리고 그 구멍에 새끼줄을 집어 넣는다.(위) 새끼줄을 꼬을 수 있도록 고리가 달린 물레를 만든다(중, 하) 이 물레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줄이 꼬아진다. 


술비는 새끼줄을 합해 굵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작업이다. 굵은 줄을 만드는데 손으로 꼬아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술비통이다. 굵은 줄을 꼴 때는 나무를 X자로 세우고, 그 위에 가로대를 지른다. 그리고 줄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가로대에 홈을 파, 그 홈에 세 가닥의 줄을 넘겨 사람이 서로 엇갈려가며 고게 된다.

술비통을 사용해보니 줄 꼬기 너무 쉽다.

굵은 줄이 아닐 때는 술비통을 만들고, 그곳에 새끼줄을 세 가닥 집어넣을 수 있는 구멍을 뚫고, 그것을 합하기 위해 물레를 만들어 새끼를 꼬아 나간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대로 술비통과 물레를 만들어 새끼를 꼬아보았다. 얇은 새끼줄을 세 구멍으로 뽑아내고, 그것을 물레 끝에 달린 쇠말뚝에 묶어 돌려보았다.

 

술비통을 이용해 순식간에 꼬아 낸 줄. 힘들이지 않고 줄을 골 수 있는 선조들의 놀라운 지혜이다. 


세상에, 사람이 꼰다고 하면 그리도 어렵고 시간이 걸릴 것이, 단숨에 굵은 새끼줄로 변했다. 이렇게 간단한 도구 하나로 새끼를 쉽게 꼴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선조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할 수밖에. 어떻게 이런 작은 것 하나를 만들더라도, 이렇게 손쉽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연구를 한 것일까?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이 걸릴 것이 뻔한데.

직접 선조들이 생각해 낸 새끼를 굵게 꼬는 술비통. 집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보면, 선조들의 지혜를 알 수가 있다. 아마 아이들에게도 이런 체험을 하게 한다면, 더 많은 것을 느낄지 않을는지. 가족과 함께 할 수도 있고 아이들과 체험을 할 수도 있다니, 이것이야 말로 아이들에게 선조들의 지혜를 알려줄 수도 있어 일석이조란 생각이다.

놀라움으로 다가 온 선조들의 작은 지혜 하나. 그저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면서,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던 선조들. 우리에게는 정말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요즈같은 가을철에 농촌에서는 새떼와 들짐승들 때문에 곤욕을 치루고 있다. 잘 익은 열매와 곡식의 나락을 시도 때도 없이 훼손을 하기 때문이다. 별별 수단을 다 써 보지만, 그렇게 큰 효과를 보지 못한다고 울상이다. 오직하면 밭 전체를 그물로 막아놓기 까지 할 것인가? 그런 짐승들과 새떼들에게서 열매나 곡식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탈구’라고 하면 나이가 지긋하신 촌에서 생활을 하신 분들은 아~ 하고 탄성을 낼만하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새를 쫒기 위해 깡통을 두드려 소리를 내거나, 총을 쏘거나 하지 않았다. 아마 새들도 지금처럼 영악하지 않았는가 보다. 탈구는 짚을 꼬아 만든 기구이다. 간단하지만 그 효과는 놀라웠다고 한다

짚을 꼬아 만든 새쫒는 기구인 '탈구' 끝은 가늘게 해서 큰 소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한다.


탈구로 소리를 내는 방법

탈구를 돌려 소리를 내는 방법은 간단한 듯하다. 짚으로 꼬아 만든 탈구를 머리위로 돌리다가 손목에 힘을 주어 줄을 내리치면, 꺾인 부분의 줄과 줄이 마주쳐 총소리와 같이 ‘땅’ 하는 소리를 내게 된다. 그러면 곡식이나 열매를 쪼아 먹으려고 덤벼들던 새들이 놀라 도망을 간다는 것이다. 우리 실생활에서 조상님들이 만들어 낸 탈구. 간단한 원리로 곡식을 보호하는 탈구를 보면서, 선조님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한다.

1. 탈구를 손에 잡고 머리위로 돌린다


2. 머리 위에서 한두 번 힘차게 돌린 다음


3. 손목을 이용해 줄을 당기면서 세차게 내리친다


4. 줄이 꺾이면서 맞부딪쳐 '탕'하는 소리를 낸다


탈구로 소리를 내는 동영상

지난 토요일인 8월 27일. 남원시 주생면에 소재한 주생초등학교 교정에서는 '주생면민 체육대회 및 경노잔치'가 열렸다. 개회식에 이어 여러가지 마을 단위별 시합이 있었는데, 요즘 들어 이런 축제 구경을 못한 탓인지 신기하기만 하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역시 농촌답게 새끼꼬기 시합이었다.

남여 2인 1조로 새끼를 누가 더 길게 꼬느냐에 따라 순위가 정해진다고. 그런데 무조건 짚을 두 가닥 이상씩 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마을은 남자가 꼬고, 어느 마을은 여자가 꼬기도 한다. 그 중 한 분, 새끼를 꼬는 표정이나 자세가 일품이다. 밑에서 부터 꼬아나가기 시작한 새끼줄이 길어지면, 점점 위로 올라간다. 이 표정과 자세, 진정한 달인이 아닐까?

이것이 진정한 달인의 자세...



한편에선 짚을 집어주고, 한편에선 짚을 꼬아나가고...


말없이 경기에 임하는 달인의 표정...


그 외에도 여러가지 경기가 있었다. 그 중 재미있는 것은 한 마을에 5명씩 나와서 축구공을 차는 것. 마음 같아서는 공을 잘찰 수 있겠지만, 이런 세상에 공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버린다. 골키퍼는 가만히 있어도 절반은 막았다는 것.


사진 1 : 차긴 찼는데
사진 2 : 이 정도면 자세 괘안아?
사진 3 : 얼라, 그런데 저 공 어디로 가냐?
사진 4 : 봐라 봐라, 공은 이렇게 차는것이제

옛날 마을에 망나니가 있으면 사람들이 관청에 끌고 가는 대신, 멍석에 말아놓고 뭇매를 가하던 ‘사형(私刑)’이 있었다. 이를 흔히 ‘멍석말이’라고 한다. 전라남도나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이를 두고 '덕석마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멍석을 덕석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멍석말이는 멍석으로 감은 사람을 때리는 형벌로 주민들에 의해 행해진다.

멍석말이는 한 집안이나 동네에서 못된 짓을 저지르거나 난폭한 행동을 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자가 있으면, 문중이나 동네의 회의를 거친 뒤 어른 앞에 끌고 간다. 그리고는 멍석을 펴서 눕히고 둘둘 말거나 뒤집어놓고, 온 집안 식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뭇매를 가해 버릇을 고쳐주는 습속이다.


합천에 멍석말이 터가 남아있다.

이 멍석말이는 관청에 신고하는 대신 이 같은 방법을 썼으므로, 오히려 문중의 형벌이나 ‘동리법(洞里法)’이 더 무섭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으며, 마을의 사회규범을 유지시키는 방식으로 사용을 했다.

8월 20일(토), 오전 근무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합천으로 들어서 영암사지를 찾아가는 길에,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은 듯하다. 차가 하염없이 좁은 산길로 접어든다. 이런 경우 조바심이 난다. 비가내리는 날은 오후 5시를 넘으면 답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산길로 들어서 가는데, 길 좌측 편에 안내판 같은 것이 보인다. 곁에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축대가 쌓여 있는 것 같다. 안내판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어 가까이 가보니, ‘선도대(善導臺)’라는 곳이다. 직사각형으로 네모나게 돌을 쌓고 위를 평평하게 만들어 놓았다.

멍석으로 둘둘말아 이 네모난 단 위에 올려놓고 매를 친 듯하다.

‘선도대’가 도대체 무엇일까? 말대로라면 사람을 선도하는 곳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사람을 훈계한다니, 왜 이곳에서 했을까? 선도를 어떻게 한 것일까? 하고 자세히 보니, 바로 이곳이 멍석말이를 행하는 곳이란 설명이다.

‘물산(勿山)마을 관이’인 멍석말이는 누구에게 가했을까?

옛 마을 규약인 향약에 이르기를 마을의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벌을 주게 하였는데, 모두 8가지의 죄목을 나열해 규범을 삼았다고 한다. 그 여덟 가지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一曰 불효지형이오(효를 행하지 않은 불효자를 벌하다)
二曰 불목지형이오(친척 간에 화목하지 못함을 벌하다)
三曰 불인지형이오(남녀사이(부부를 말하는 듯)에 화목하지 못함을 벌하다)
四曰 불제지형이오(윗사람에 대해 공경하지 않음을 벌하다)
五曰 불임지형이오(책무와 소임을 다하지 못함을 벌하다)
六曰 불휼지형이오(불쌍한 사람을 돌보지 않음을 벌하다)
七曰 조언지형이오(거짓말을 하는 자를 벌하다)
八曰 란민지형이라(주민을 괴롭히는 자를 벌하다)




이렇게 여덟 가지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이곳 선도대에서 멍석말이를 하고 죄를 고지하여 부끄럽게 만든다고 적고 있다.

이 선도대의 멍석말이의 조건을 읽어보다가 생각을 한다. 어찌 보면 이 멍석말이가 지금 가장 필요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말로만 듣던 멍석말이. 이런 사람이 정말로 멍석말이를 당해야 할 사람들은 아닌지.

백성을 돌보아야 하는데도 책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
백성에게 거짓 약속을 하는 사람.
혼자만 잘 살겠다고 밑에 사람을 마구 부리는 사람.
국민이 내는 세금을 마구 사용하는 사람.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는데 반대하는 사람.
그 반대하는 사람에게 동조하여 같이 떠벌리는 사람,
자연을 마음대로 휘저어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
그리고 마음 같으면 문화를 업신여기는 사람까지 포함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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