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가야산에 있는 삼보사찰 중 하나인 법보종찰인 해인사에는 볼 것이 참 많다. 물론 내가 볼 것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문화재를 말한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 석등과 석탑을 열심히 찍고 있는데, 대적광전 안에서 들리는 염불소리에 정신을 빼앗기고 만다. 강원에 있는 학인승 등 백여 명이 함께 하고 있는 염불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장관이다.

그런데 그 예불을 하는 동안 법고를 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보니 사시예불 후미에 종각에 있는 사물을 울려 공양을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장관을 놓친 것이다. 사시예불의 소리 공양을 올린다는 사물은, 범종과 법고, 그리고 목어와 운판을 울려 소리를 내는 것이다.


벼르고 갔는데, 소리공양을 놓치다니

법고 소리가 난다는 것은 이미 목어와 운판의 소리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허겁지겁 사진을 찍고 종각 쪽으로 가니, 사람들이 모여 있다. 소리공양을 보기 위함이다. 이미 법고도 끝날 때가 되었다. 사실은 이것을 찍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정발 필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그나마 아직 학인승 한 분이, 법고 앞에 발을 나란히 딛고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북을 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으로 얼른 다가가 카메라에 담았다. 절을 들어서면 그 입구에 종루나 범종루, 범종각 이라 쓴 누각이 있다. 어느 곳에는 종만 달린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곳에는 사물을 다 달아놓은 곳도 있다. 물론 해인사에는 사물이 다 걸려있다. 그런데 그 사물공양을 하는 것을 놓쳐버린 것이다.



사물의 의미는 하늘과 땅, 물을 상징해

사물을 울려 공양을 하는 것은, 그 소리를 통해 세상의 모든 생명을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을 울림으로써 잠든 영혼을 깨우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다.

범종을 울리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음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 세상의 모든 생명이 깨우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침에는 28번을, 저녁에는 33번을 울린다. 법고는 군중을 모으는 불구로 이용을 하던 것이다. 북소리가 울려 퍼지듯 땅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법고를 치는 것은 북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 듯,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불법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라고 있다. 발을 팔자로 딛고 두 손에 잡은 채를 이용해 법고놀이를 하는 학인승의 뒷모습이 반듯해 보인다. 아마도 이렇게 반듯한 마음으로 학업에 정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언제나 그 사물의 모든 것을 깨우치려나?

그나마 소리조차 놓친 목어와 운판은 물과 하늘에 사는 생명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목어는 물고기 모양으로 조각한 것인데, 복판을 파내어 그곳에 채를 집어넣고 친다. 구름모양의 철로 만든 운판은 하늘에 사는 생명을 위하여 치는 것이다. 목어는 물고기가 눈을 감지 않듯, 언제나 잠이 들지 않고(물론 정신을 말한다), 용명정진하라는 뜻도 갖고 있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결음을 멈추어라


현인 선생의 노래이다. 이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바로 사찰의 종소리이다. 그 은은함에 빠져들면 세상 모든 고뇌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공양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마지막 부분만으로도 귀가 깨끗해진 듯하다. 세상 모든 생명이 다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소리공양을 들었으니. 하지만 또 다시 돌아서면 세상의 소리에 젖고 말 것을. 언제나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려는지.


가끔 바닷가를 지나다가 보면, 해안가에 작은 집이 있는 것이 보인다. ‘당집’이라고 하는 이 집들은 풍어와 바닷길의 안전을 비는 제의를 하는 곳이다. 대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딴 곳과 달라, 바다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불행을 막기 위한 당고사를 지내거나 풍어제는 지낼 때, 아무래도 일반적인 마을의 동제(洞祭)보다 더 많은 금기를 지키게 된다. 바닷길의 무사고와 풍어를 위한 마을의 제의는 3일간이나 하는 것도, 모두 살아가는 동안 평안을 바라기 때문이다. 서천군 서면 마량리 동백나무숲 안에도 당집이 있다.


500년 역사의 마량리 당집

마량리 당집은 그 역사가 500년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당집에는 서낭을 5분이나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서낭을 모신 것은 500여 년 전 이 마을에 일어난 불행한 일 때문이다. 500년 전 이 마을의 주민들은 뗏목을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풍랑이 몰아쳐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단다.

이 마을에 사는 한 노파의 남편과 자식이 그렇게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를 못했단다. 그러던 중 바다에서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용왕을 모셔야 마을이 편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 노파는 용왕에게 지극정성으로 빌었나보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해안가에 가보라고 했는데, 그 해안 백사장에서 널을 하나 발견했다.


두 가지로 전해지는 전설

그 널 안에는 서낭 5분과 동백나무의 씨가 들어있어, 서낭은 당집을 지어 모셔놓고, 씨는 해안가에 뿌렸다고 한다. 그것이 현재의 동백 숲이 되었으며, 마량리 당집 안에 모셔진 서낭이 그 다섯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전설은 두 가지로 전해진다. 그 하나는 동백 숲을 조성한 것은 수군첨사라고 하며, 그 조성시기도 300여 년 전이라는 것이다. 서천군의 소개에는 300년으로, 마량리 동백 숲과 당집에는 500년으로 기록이 되어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아마도 그저 지역에 전해지는 전설이기 때문에, 그렇게 다른 것인가 보다 하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마을의 안녕과 풍어, 뱃길의 무사고 등을 기원하는 것이라면, 그 추정연대를 같게 소개를 해야 할 것이다. 마을 노파의 전설은 500여 년 전, 수군첨사의 전설은 300년으로 되어 있어,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어야할지 난감하기도 하다. 아마도 수군첨사의 300년 보다는, 노파의 500년이 당집과 더 어울린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뱃길의 안녕과 풍농을 위한 당제

마량리 당제는 마을주민들이 제가 있기 며칠 전부터 집집마다 쌀 한 되씩을 거두어 들인다. 이렇게 집집마다 쌀을 걷는 이유는 모든 가정이 다 편안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그렇게 걷어 들인 쌀을 이용해 제물을 마련하는데, 화주와 선주의 일을 도와주는 화장, 그리고 당제에서 대를 잡는 당굴 등을 선정한다.



제관을 선출할 때는 생기복덕을 가리고, 집안에 산모가 있거나 환자가 있는 집은 가려낸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3일간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당제는 선창제를 시작으로 독경, 대잡이, 마당제, 용왕제, 거리제로 이어지며, 수십 개의 만선기와 풍어기를 당 주위를 꽂아놓는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당집 안에는, 선반에 남녀 각 두 분씩의 모형을 모셔놓았다. 아마도 다섯 분을 모셨다고 했는데, 한 분은 위패로 모신 듯하다. 아직 마량리 풍어제를 보지 못해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는지가 궁금하다. 오랜 세월 풍어와 바닷길의 무사고를 위해 서낭에게 빌던 마량리. 아마 오늘도 뱃길을 지켜주는 서낭님들이 있어, 마을이 풍요로운가 보다.


성주신(成主神)은 집안에 있는 가신 중에서는 가장 상위신에 속한다. 집안의 대청 대들보나 안방의 문 위에 좌정하는 성주신은, ’상량신(上樑神)‘, 혹은 ’성조(成造)‘ 등으로도 불린다. 성주는 남신으로 집안의 대주라고 하는데, 성주를 맞이할 때는 안택굿에서 올리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따로 성주맞이굿을 하면서 성주를 받기도 한다.

경기도 지방의 성주신은 그 형태가 세 가지가 있다. ‘대성주’는 대나무에 성주의 신위를 한지로 오려 만들어 대청의 대들보 등에 올려놓는다. 또 한 가지 ‘무성주’는 한지로 만든 종이봉투에 대주의 나이만큼, 동전이나 쌀 등을 넣어서 안방 출입문 위에 붙인다. 끝으로 ‘떡성주’는 한지를 막걸리에 적셔 덩이가 지게 문 위에 붙이는 방법이다.


가신의 으뜸인 성주신

성주신은 가장을 상징하는 신격으로, 가신 중에서는 가장 으뜸이다. 하기에 집안의 가장 높은 곳인 대들보나 가장이 묵는 방의 문 위에 걸어 놓는다. 4월 27일 수원시 인계동 손아무개네 집에서는 안택굿이 열렸다. 요즈음은 주변에서 반대가 심해 집에서는 굿을 할 수가 없다. 하기에 이렇게 집안에서 하는 안택굿을 도심 한 복판에서 보기란 여간 어렵지가 않다.

그런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 집안에서 열리는 안택굿이다. 경기도 지방은 원래 강신무와 세습무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세습무는 도당굿을 중심으로 마을의 굿을 주로 담당해 왔으며, 강신무의 경우에는 안택굿이나 지노귀굿 등을 담당해왔다. 경기도의 안택굿은 그 재차가 달라 나름대로의 지역적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 안택굿에서 성주맞이굿이 행해진다. 성주대는 미리 만들어 굿 상 옆에 쌀을 붓고, 그 곳에 모셔놓는다. 성주를 맞이할 때는 굿을 진행하는 무격이 성주대를 들고 축원을 한 다음, 집안의 가장에게 넘겨준다.



부정이 끼면 성주신이 나간다는 속설이

성주신은 집안의 가신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다. 성주신은 단 한 개의 신위만이 존재한다. 이 성주신은 집안에 부정한 일이 있으면 나가버린다고 한다. 성주신이 나가면 다시 성주맞이굿을 해서 성주를 모셔 들이게 된다.

성주굿을 하는 무격은 연신 집안의 가내 평안과, 가장이 하는 사업이 번창하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자녀들이 모두 성공하기를 빌어준다. 굿에서는 이렇게 무격의 입을 빌어 축원을 해주는 ‘신탁’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말만 들어도 기운이 난다고 한다. 아마도 성주를 맞이하는 것도 그렇게 믿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아침 11시 정도부터 시작한 굿은, 오후 8시 반이 되어서야 성주굿이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무격을 손을 떠난 성주대는 가장에게로 옮겨져 안방의 문 위에 좌정을 했다. 이렇게 자리를 잡은 성주신은 집안의 가장 높은 상위신으로 모든 가신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집은 무슨 일이 있어도 3년에 한 번은 집안에서 안택굿을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안택굿을 하면서 성주님을 맞아들이면, 그저 별 탈 없이 잘 지나가는 것 같아요”

안택굿을 한 당주인 무격 고아무개(남, 55세) 말처럼, 그렇게 편안히 지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안방 문 위에 좌정을 한 성주님은 잘 아시는가 보다.


조선시대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조선조 말기의 우리의 모습을 사진 등으로 보면서 늘 궁금하던 차다. 그런데 전라북도 정읍의 한 마을에 조선시대의 마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곳이 있다. '송참봉 조선동네'라는 곳이다. 이 마을은 조선 말기의 마을 형태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조선동내'라고 부르고 있다. 2월 17일 눈이 하얗게 쌓인 송참봉 마을 을 찾아가 보았다.

눈이 쌓인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20여 채의 초가집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서당도 있고 주막집도 있다. 엣날식으로 외부를 꾸민 변소가 있는가 하면, 외양간에는 어미소와 송아지가 한가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마당에는 토종닭들이 돌아다니고, 한편에는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 아궁이에는 잘작불이 타고 있는데, 겨울의 경치를 그대로 만끽할 수가 있다. 그야말로 조선시대의 풍취를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50여년 전에 마을이 있었던 곳

송참봉 조선동네는 50여년 전에는 큰 마을인 '월송동'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그런 마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곳이 논밭으로 변했다. 1995년 부터 이곳에 전통마을을 재현하기로 생각을 한 '송참봉'는 2005년 8월 부터 사업에 착수를 하여, 2008년에 들어서야 부분으로 완성을 하였다고 한다. 아직도 계속 조선 동네를 키워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이렇게 100년 전의 우리의 민초들이 살아가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송참봉 마을은 옛 생활을 체험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주말이 되면 집집마다 옛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찾아든 사람들로 빈 집이 없다고 한다. 2월 17일은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눈이 쌓인 겨을날 뜨끈한 온돌방의 정취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눈이 내려 질퍽한 황토길은 흙에 신발에 달라부터 보행을 하기가 어렵다. 예전에는 호롱불을 켜고, 방안에는 요강을 들여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화재의 위험도 있고, 요강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그런 것은 조금 개선을 했다는 것이다. 100년 전 우리네 조상들의 생활이 지금과 얼마나 달랐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체험의 장소로 소문이 나면서, 주말이 되면 제주도에서까지 학생들이 온다는 것이다.

새로운 명소로 자리를 잡아가

송참봉 조선동에는 정읍시 이평면 청량리 375-5에 해당한다. 1만 5천평의 대지에 20여 채의 초가가 모여있다. 그저 잊고 살아갈 모습들이 이곳의 모습이다. 송참봉 마을에 들어가려는데 마침 송기중(63세) 촌장이 사람들을 배웅하러 마을 어귀로 나온다. 잠시 목례를 하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방을 열어보니 옛 시골집에서나 맡을 냄새가 난다. 정겨운 냄새이다.




여기저기 집집마다 문패가 달려있다. 이 송참봉마을을 조성하는데는, 마을 주민들의 힘이 컸다고 한다. 잠시 둘러보아도 모든 것이 불편할 듯하다. 그러나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다고 생각하면, 하루 저녁쯤 이곳에서 지내 볼만도 하다는 생각이다. 아이들과 함께 조심은 불편한 체험이 되기는 하겠지만, 살아있는 공부가 아닐는지 생각을 한다.
    
옛 모습을 잃어버리기 보다는 남겨 놓아야

송참봉 조선동네를 돌아보다가 잠시 송기중 촌장과 이야기를 한다. 알고보니 '갑장'이라는 말에 조금은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이런 마을을 조성하게 된 것도 우리 것을 너무 급작히 잃어버리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우리의 옛 선조들의 사람의 모습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시작을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동네에서는 먹거리의 전체가 우리 농산물이다. 마을 전체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을 덮힌다.




잠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마을을 찾아 온 객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저 오래 같이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것도 이곳에서는 호사라는 생각이다. 후일을 기약하고 돌아나오다가 벽에 붙은 안내문을 본다. 대인은 하루 저녁에 만원, 초등학생은 5천원이다. 그 아래 어린아이들은 무료라는 것이다. 음식 값도 백숙만 3만원이고 참봉밥, 두부, 전, 막거리 등은 5천원 씩이란다.   

옛 담벽을 그대로 닮은 집들이며 아궁이, 그리고 방문을 열어보면 금새 초가의 처마에서 떨어진 노래기들이 기어 다닐 것만 같은 집들이다. 주막집에서는 우리 농산물로 지은 먹거리와 막걸리 등이 사람들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그저 당장 그 자리에 앉아 한 잔 막걸리라고 마시고, 펄펄 끓는 아랫목에서 늘어지게 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그럴 수 없음이 못내 안타까워 후일을 기약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음력 정월 보름을 대보름이라고 한다. 정월 대보름은 우리의 풍속에서는 설날과 추석 다음으로 치는 큰 명절이다. 이렇게 정월 대보름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정월의 모든 놀이문화가 이 대보름을 기해 마무리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정월 대보름은 입춘이 지나서 맞이하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일 년의 시작을 준비하는 때이기도 하다.

정월 대보름 하루 전날은 다리밟기, 달집태우기 등 각종 놀이가 행해진다. 이 중에서 달집태우기는 정월 15일이 아닌, 하루 전인 14일에 행해진다. 달집태우기는 전국을 통해 연희가 되었던 놀이이다. 그만큼 우리들에게는 정월 대보름 전에 하는 달집태우기가 상당한 의례에 준하는 놀이였다.


달집태우기는 겨울을 녹인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광지원리에서는 ‘해동화(解冬火)놀이’라고 달집태우기를 부른다. 이 말은 ‘겨울을 녹이는 불’이란 뜻을 갖고 있다. 혹은 ‘해동홰놀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 역시 ‘겨울을 녹이는 홰’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홰’란 막대나 짚을 이용해 만든 불을 말하는 것이다. 즉 짚을 길게 묶어 불을 붙이는데, 그것을 홰라고 부른다.

광지원리의 해동화놀이는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어졌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루를 즐기는 놀이로 발전을 하였다. 이러한 달집태우기는 그 외에도 ‘액을 태운다’는 속설을 갖고 있다. 정월 열나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소나무와 대나무 등을 갖고 달집을 만든다. 이 달집에 생대나무를 이용하는 것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생대가 타는 소리에 놀란 잡귀가 달아나

우리 풍습에는 섣달 그믐날 생대를 태우는 습속이 있다. 이것은 일 년 동안 집안에 묻어 든 잡귀를 쫒아내기 위함이다. 즉 대나무가 불에 탈 때 ‘탁탁’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에 놀란 잡귀들이 도망을 간다는 것이다. 정월 대보름에 달집을 만들 때도 소나무와 대나무를 사용하는데, 바로 그런 속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이에 자신이 필요한 기원을 적는다. 그리고 달집에 묶어놓은 새끼줄에 그 길지를 달아 놓는다. 달집이 타면 그 기원지가 함께 타면서 서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달집태우기는 달맞이에 이어서 하게 된다. 손에 작은 홰를 들고 달맞이를 하는 사람들은 가장 먼저 달을 본 사람이 ‘망월(望月)이요’를 외치면서 달집으로 달려가, 손에 든 홰를 이용해 불을 붙이는 것이다.


서로가 연결되는 정월의 민속

정월의 민속의 특징은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져 있지만, 그 내용은 모두가 연관이 지어진다.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 달을 바라다보면서 가장 먼저 소리를 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처녀가 먼저 보면 그 해에 시집을 가고, 총각이 먼저 보면 그 해에 장가를 가게 된다는 것이다.

임신부가 먼저 보고 소리를 치면 아들을 낳을 수가 있으며, 몸이 아픈 사람이 먼저보고 소리를 치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다. 하기에 저마다 홰를 손에 들고, 먼저 달맞이를 하려고 애를 쓴다. 이렇게 다양한 정월의 큰 대동놀이는 사실 달집태우기로 막을 내리게 된다.


요즈음은 대보름의 놀이가 점차 확대되는 추세이다. 달집태우기 등 많은 대보름 놀이가, 올해는 구제역으로 인해 취소가 되었다. 하지만 달집이라는 것이 그리 어렵게 만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조그맣게 만들어 놓고 개인놀이라도 해보는 것이 어떨지. 겨울을 녹이고 일 년 간의 액을 막는다는 사고는, 꼭 집채만 한 달집이라야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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