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폭포의 소리 음미하면 그 또한 더위 잊게 해

 

여름철이 되면 사람들은 피서를 떠난다. 누구는 바닷가를 선호하고, 어떤 이들은 산을 좋아한다. 바닷가를 가거나 계곡을 찾아가거나 그것은 즐기는 사람들 취향이다. 바다가 좋다! 아니다 계곡이 더 좋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내기 좋으면 그곳에 가서 즐기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난 개인적으로 여름에 피서를 가라고 하면 산을 더 좋아한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바닷가에 가서 바가지를 쓰고 온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바닷가에 다녀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볼멘소리를 한다. 바가지를 썼다는 것이다. 그럴 것을 뻔히 알고서도 굳이 바닷가를 찾는 이유는 나름의 즐거움이 있어서일 것이다.

 

산을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이미 알만한 계곡은 장사꾼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자릿세다 무엇이다 하면서 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심사가 틀리는 피서는 정말 즐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기에 내가 좋아하는 여름 피서는 장사꾼들이 자리를 잡고 있자 않은 그런 깊은 산을 찾아가길 좋아한다.

 

 

폭포에서 하는 피서, 정말 바람직해

 

대개 폭포라고 하면 사람들은 거기서 무슨 피서를 해라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폭포라는 것이 찾아가기 힘들어서 그렇지, 찾아가기만 하면 어느 피서지보다도 좋다는 생각이다. 우선을 폭포는 산에 있기 때문에 푸른 숲이 있다. 거기다가 폭포가 있는 곳의 물은 거의가 깨끗한 곳이다.

 

더욱 폭포 밑에는 물이 고여 있어 깨끗한 물에서 시원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가 있다. 물놀이라야 발을 담그고 앉아 포폭에서 떨어지며 나르는 물보라를 즐기는 것이지만 말이다. 위에서 천둥치듯 떨어지는 물줄기도 사람을 시원하게 만들지만, 물이 낙하를 하면서 뿜어져 나오는 물보라 또한 일품이다.

 

폭포를 찾아가 여름을 즐겨보지 못한 사람은 폭포의 진가를 모른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폭포를 찾아 여름을 즐긴 사람은 딴 곳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어느 폭포, 다음에는 또 어디에 있는 폭포, 이렇게 폭포만을 찾아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난 여름이면 한 곳이라도 폭포를 찾아가는 것으로 피서를 즐기지만 올 여름에는 그도 의의치 않을 듯하다.

 

 

올 여름 이런 폭포 어때요?

 

우리나라는 산이 많기 때문에 크고 작은 폭포들이 많다. 작은 내에도 폭포라고 이름을 붙여 사람들이 즐겨 찾기도 한다. 물론 폭포가 많은 물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도 장관이지만, 작고 아기자기한 폭포들도 나름 재미있다. 폭포는 그야말로 물이 깨끗하고 숲이 근처에 있는 곳이 제일이라고 한다.

 

거기다가 근처에 볼거리가 많다거나,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또한 많은 발품을 팔지 않고, 그저 가족들이 산책을 하듯 찾아갈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올 여름에는 이렇게 복잡하지 않아서 좋고, 맑은 물과 숲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폭포를 찾아 피서를 해보기를 권유한다.

 

내가 여름철 폭포를 찾아가는 것에 재미를 붙은 것은 방송을 할 때 어느 선생님에게서 들은 일화 때문이다. 명창이 득음(得音)을 얻기 위해 폭포를 찾아가 그곳에서 연습을 하다보면 목에서 피가 넘어오고 그 고통이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고된 수연기간을 거쳐 득음을 얻게 되고 명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폭포를 찾아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보면 그 소이라 어느 명창의 소리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생각 때문에 나름대로 소리가 다른 폭포의 정취에 빠져들게 되었다. 올 여름 더위는 날마다 폭염(暴炎)’이라는 무더위로 표현한다. 문자가 들어오는 것을 열어보면 폭염주의보와 폭염경보라는 글이 보인다. 이런 무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폭포, 올 여름은 폭포를 찾아가보자.

 

정조대왕이 부친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을 다니는 길목에 식재한 나무

 

내가 소나무에 빠져든 것은 전국을 돌면서 우리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부터이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소나무에 넋을 뺐기고, 몇 시간이나 한 자리에서 소나무만 바라본 적도 있다. 또한 오래된 석탑이나 석불과 함께 어우러진 소나무를 바라보다가 버스시간을 놓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소나무는 내가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숱한 나무 중에서도 가장 귀히 여겼던 나무들이다.

 

소나무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다. 눈이 쌓인 겨울에도 그 푸름을 잃지 않고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소나무를 보면 나 스스로가 그 나무가 된 양 착각을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소나무길이 있다. 그만큼 소나무는 우리의 목조주택의 자제는 물론, 궁궐이나 사찰 등 많은 건축물에서 사용하는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가지 못하도록 황장금표비를 세워 황장목을 보호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나무길 중 내가 가장 의미를 두는 곳이 있다면 치악산 국립공원 안에 구룡사 금송길, 양산 통도사의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에 소재한 천년고찰 은해사 금강소나무길인 금포정, 그리고 수원시에 소재한 경기도기념물 제19호인 노송지대 소나무길이다.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은 지지대비가 있는 지지대고개 정상에서부터 옛 경수간 국도를 따라 펼쳐진 5km의 도로변에 식재된 소나무들을 말한다. 정조대왕이 내탕금 1,000량을 현릉원 식목관에게 내주어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나무들이 사라지고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이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의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현재의 융릉)을 다니는 길목에 식재한 것으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주는 길이다.

 

 

무더운 중복에 노송지대를 돌아보다

 

물론, 소나무길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찬연기념물들 중에도 소나무만 만나면 길을 떠나지 못하고 몇 시간씩 그 앞에서 나무만 바라다보기 일쑤였다. 언젠가 함께 문화재 답사에 나섰던 지인이 선생님은 예전에 소나무를 심던 식목관이었나 봐요. 소나무만 만나면 온통 정신을 빼앗기는 것을 보니..”라고 한 적이 있다.

 

이상하게 소나무를 만나면 바로 길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나무그늘에 앉으면 코끝을 간질이는 소나무향이 좋아서인가도 모르겠다. 그런 소나무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수원 노송지대이다. 소나무들은 자라면서 솔씨를 퍼트려 새로운 종자를 키워내기 때문에, 200년이 지난 세월이라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38(효행기념관 부근 9, 삼풍가든 부근 21, 송정초등학교 부근 8) 정도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다.

 

22, 중복이다. 무덥지 않다고 하지만 복중에 햇볕아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녹녹치 않다. 노송지대라는 푯말이 걸려있는 곳에서 천천히 노송지대 안으로 발길을 옮긴다. 비라도 한줄기 퍼부었으면 더 없이 좋으련만 햇볕만 따갑다. 중복 오후에 내리쬐는 햇볕은 우리가 흔히 복중기온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듯하다.

 

 

우리가 가꾸고 보존해야 할 노송지대

 

중복은 다르다. 소나무 길을 걷고 있는데도 숨이 턱에 닿는다. 일기예보에서 소나기가 내린다는 바람에 우산까지 준비했는데 비는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천천히 걸어 사진을 촬영하면서 소나무를 돌아본다.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을 빼면 모두 화초를 심어 온통 초록색이다. 아무리 더워도 그런 길을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수원시는 그동안 노송지대 곳곳에 들어서 있던 건물을 매입해 주변을 정비했다. 20165월엔 노송 지대를 통과하는 도로를 폐쇄했으며, 우회도로를 개설하고 노송공원 일대(2734)에 소나무 33주를 심었다. 2017년부터 최근까지 노송 지대 주변 토지를 사들여 도로포장을 걷어내고 녹지를 조성했다.

 

 

녹지에는 소나무와 풍해나 수해를 방지해 주는 식물을 심는 등 12085에 이르는 노송지대를 복원했다. 수원시 관계자는 "앞으로 2020년까지 복원 구간에 초화류를 추가로 심고, 이목지구 내 남은 노송길(340m)도 정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때가 되면 노송지대도 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중복 더위에 찾아가 돌아본 노송지대. 지천으로 심겨있는 맥문동을 비롯하여 한편에는 코스모스가 벌써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앞으로 노송지대는 수원시가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대로 시민의 훌륭한 힐링공간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와 변화된 노송지대를 만끽해야겠다.

 

천연기념물 제487호로 지정된 1,800여개의 공룡발자국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백아로 2080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487(2007119일 지정). 화순 공룡발자국 화석지는 1999515일 화순온천지구를 답사하던 중 채석장 공사현장에서 발견되었다. 공룡발자국화석은 주로 해남, 보성 등의 해안지역에서 발견 되었는데 전남 내륙에서 발견되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화순 서유리 공룡발자국 화석지에는 중생대 백악기(85백만 년 전)의 육식공룡(수각류)의 발자국이 많은데, 최소한 5마리 이상의 활동흔적이 관찰되었다.

 

이곳에서는 날렵한 육식공룡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어간 흔적이 단일지역 안에서 매우 길고도 집중적으로 나타나있다. 또한 1마리의 보행렬이 40m거리로 규칙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것이다. 이곳에서 공룡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중생대 백악기 후반기(1억 년 전)로 추정되며, 공룡의 종류는 발자국의 크기가 20~22, 보폭 90로 키가 4~5m로 추정되는 코알라 시우루스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두발이나 네발로 걸어 다닌 초식공룡인 조각류 발자국, 목이 긴 초식공룡인 용각류 발자국 등 1,800여 개의 공룡 발자국과 70여 개의 보행렬이 확인되었다. 이 화석지에는 공룡발자국화석과 함께 식물화석, 생흔화석(동물이 기어다닌 흔적) 등의 화석이 함께 산출되며, 물결자국, 건열 등의 다양한 퇴적구조는 공룡들이 살았던 당시의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를 잘 알려준다.

 

 

다양한 공룡발자국을 만나다

 

서유리 공룡발자국화석 산지는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서유리 산 147-5번지 일대에 속하는 곳이다. 광주광역시에서 국도 15호선을 따라 동광주 톨게이트에서 호남고속도로 하행선으로 이동하다, 호남고속도로 옥과 인터체인지에서 국도 29호선으로 들어선다. 다시 지방도 887호선으로 타고가면 오른쪽에 화순 서유리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가 나타난다. 광주에서 화순 서유리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까지는 1시간 이네의 시간이 소요된다.

 

공룡은 영어의 'dinosaur'는 무서운 도마뱀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부터 유래했다. 이 용어는 일부 공룡이 매우 거대한 몸집을 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공룡은 백악기의 마지막 시기까지 번성하였으며, 그 후 약 100만 년 이후에는 지질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 그 다음의 지층에서는 공룡화석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공룡들이 집단으로 화순지역인 내륙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우리나라의 공룡발자국이 대개 전라남도나 경상남도, 해남, 화순, 보성, 여수, 고성 등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유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에는 많은 공룡 발자국이 있다. 종류가 다른 크고 작은 공룡 등이 이곳에서 서식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움직인 보행렬도 발견되어 공룡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화성에는 공룡알 화석산지가 있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날은 후텁지근한데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 한다. 먼 길을 떠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비로 인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대신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로 향했다. 2000년도에 15,900,000라는 넓은 면적을 지정한 천연기념물 제414호인 화성 고정리 공룡알화석 산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2014년도에 이곳을 들려보았으니, 벌써 5년 가까이 지난 셈이다.

 

2004년도에 이곳을 들렸을 때는 차로 공룡알 화석이 있는 바위 앞까지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곳을 출입을 통제시키고, 관람로를 따라서만 공용알 화석을 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방문자 센터 주차장에 차를 두고, 왕복 3km 정도를 걸어야 공룡알 화석을 볼 수가 있다.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의 공룡알 화석 산출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83008500만년 전으로 추정)으로 밝혀졌다. 이곳은 1999년 시화호 간석지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섬이었던 삼한염, 중한염, 하한념, 한염, 개미섬, 닭섬 등 67개 지점에서 공룡알화석 및 알둥지가 발견되었다.

 

 

지금은 이상한 돌로 땅위에 솟아오른 이 섬들은 많은 공룡알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그동안 세계적으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은, 대부분 중국과 몽고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곳 시화호처럼 많은 공룡알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더욱 이 곳에서는 공룡의 뼈 조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도 해, 전문가들은 시화호 일대가 약 1억 년 전 공룡의 주요 서식지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동안 영화나 책을 총해서만 만났던 공룡들. 그들이 살던 공룡서식지를 돌아본다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다. 올 여름에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공룡관련 서식지를 돌아보아야겠다. 공룡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화재

 

장군들이 위엄을 보이기 위해 상아로 만든 장식을 한 호화스런 깃발인 아기(牙旗)’. 임진왜란 당시 그 아기를 꽂은 전선이 당포에 도착을 하였다고 하여, ‘달아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곳. 이곳의 지형이 코끼리의 어금니와 닮았다고도 하지만, 지금은 달구경하기가 좋은 곳이란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남리에 소재한 달아전망대는 앞으로 아름답게 펼쳐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장관이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두미도, 추도, 고장두도, 가마섬, 대장두도, 곤리도, 사랑도, 쑥섬 등이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대매물도, 비진도, 학림도, 오곡도, 소지도, 송도, 국도, 연대도, 저도 등의 섬들이 보인다.

 

그 절경에 넋을 빼앗기다 보니 한편에 이곳이 간첩선이 침투한 지역이라고 적혀있다. 사건개요를 보니 19731216일 잠수정으로 침투를 했으며, 1974216일에는 여간첩 채수정이 침투한 지역이라고 적혀있다.

 

 

박무로 몽환적인 한려해상공원

 

통영시 산양면 연화리 산 7-1에 소재한 달아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걸어 올라가니 섬 주변에 박무가 끼어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이 된다. 그 아름다움이란 선경이 따로 없다. 우측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관해정(觀海亭)’이란다, 절경인 바다의 경관을 구경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관해정을 지나 전망대에 오르자, 한려해상국립공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1968년 우리나라 최초의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한려해상국립공원은, 범위가 남쪽 거제 지심도와 전남 여수 오동도에 이르는 300리의 아름다운 바닷길로 연결된다. 전체 6개 지구인 거제와 통영, 사천과 하동, 그리고 남해와 여수오동도로 나누어진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은 전체 면적이 535.676, 해상면적이 76%를 차지한다. 해양과 도서, 육지가 빚어내는 아기자기한 지형경관이 뛰어나, 매년 100만 명 이상의 탐방객이 즐겨 찾고 있는 곳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마치 옛이야기를 하듯,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있다.

 

 

문화재의 보고 한려해상국립공원

 

한려해상국립공원 안에는 사적 5개소<한산도 이충무공유적(113), 관음포 이충무공전몰유허(232), 남해 충렬사(233), 사천 늑도유적(450), 통영 연대도패총(335)>를 비롯해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절경을 자랑하는 명승도 3곳이나 된다. 명승 제2호인 거제 해금강, 명승 제18호인 소매물도 등대섬, 명승 제39호인 남해 금산 등이다.

 

이곳에는 중요민속문화재인 삼덕리 마을제당이 있으며, 천연기념물도 10종이나 서식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63호 통영비진도팔손이나무자생지를 비롯하여, 204호인 팔색조, 215호 흑비둘기, 227호 거제연안아비도래지, 233호 거제학동동백림및팔색조번식지, 323호 매류, 323-2호인 붉은배새매와 제323-4호인 새매, 327-7호 매와 제323-8호인 황조롱이, 327호인 원앙과 제330호 수달, 447호인 두견과 제474호인 사천아두섬공료화석산지 등이다. 이 외에도 시도유형문화재와 기념물, 문화재자료와 등록문화재 등이 산재해 있어, 가히 문화재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해정에 다리를 펴다

 

바다를 보는 정자라는 이름을 가진 관해정. 사방 한 칸으로 꾸민 이 정자는 한산대첩과 당포승첩을 이룩한 유서 깊은 곳을 좌우에 두고 있다. 눈길을 주는 곳마다 크고 작은 섬들이 조화롭게 펼쳐지고 있어, 관해정이란 말이 부끄럽지가 않다. 이곳 관해정에서 바라보는 섬들도 아름답지만 달맞이는 더욱 장관이라고 한다.

 

관해정에 올라앉아 피곤한 다리를 쉬어본다. 저 멀리 보이는 섬들아 박무 속에 아련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지만, 옛날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중고혼이 되었을까? 잠시 눈을 감는다. 슬픈 마음에 더 이상은 앉아있을 수가 없을 듯하다. 짧지 않은 여정에 재촉해본다. 언젠가는 이곳 관해정에 올라 둥그렇게 떠오르는 보름날의 달맞이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문화재는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문화재는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 자리에 서 있다고 해도 언재나 같은 모습으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문화재 중에서도 천연기념물은 항상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다. 일기에 따라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중에는 재난을 당해 지정 해제가 된 것들이 많다. 그것은 나무가 수명이 있기 때문이다.

 

백송은 흔치 않은 나무다. 중국 북부가 원산지이고 동남아에 퍼져있는 소나무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몇 그루만이 생육하는 희귀종이다. 하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은 지나칠 때마다 돌아보곤 한다. 백송은 그 껍질이 약재가 된다는 속설 때문에 사람들에게 수난을 당하기도 해 그만큼 보존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253호 이천 신대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천 신대리 백송’ 16일,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신대리에 생육하고 있는 백송을 찾아 나섰다. 몇 번인가 신대리 이천 백송을 만났지만 늘 궁금하다. 잘 자라고 있는지? 생육에 문제는 없는지? 혹 주변에 이상한 건물이라도 들어서 나무에 피해를 주지는 않고 있는지 온갖 생각이 다 든다.

 

 

 

 

 

봄날 만난 백송, 당당함이 깃들다

 

이천에서 여주 금사면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좌측으로 신대리 이정표가 나온다. 마을 안길로 조금 들어가면 이천 백송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백송을 만날 수가 있다. 하지만 초행길인 사람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벌써 몇 번이나 찾아본 백송이지만 갈 때마다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는 했다.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면서 흰빛으로 변하기 때문에 백송 또는 백골송이라고 부른다. 이천 신대리 백송은 마을 한편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보면 마치 우산처럼 생겼다. 위는 좁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우산처럼 퍼져있다. 이 나무는 조선시대 전라감사를 지낸 민정식의 할아버지인 민달용의 묘소에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수령은 약 23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신대리 백송은 다니면서 본 백송 중 생육상태가 가장 좋은 나무로 보인다.

 

이천시 백사면 신대리 산 32에 소재하고 있는 신대리 백송은 나무의 높이는 16.5m 정도이고 가슴높이의 둘레는 2m 정도이다. 이천 백송은 언제 보아도 참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는다. 백송의 중간 가지들은 구불거리면서 자라고 있어 마치 용이 승천하기 위해 용틀임을 하는 것 같다. 멀지 않은 곳에 자라는 이천 반룡송의 나뭇가지도 마치 용처럼 휘감아 뻗었는데 이 백송 역시 가지가 많이 구불거리고 있어 이천이라는 곳이 나무가 생육하기에 적합한 토양인 듯하다.

 

 

 

 

 

용틀임이 일품인 이천 백송

 

이천 신대리 백송을 찬찬히 살펴본다. 밑동은 조금 위로 올라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나무의 줄기는 번성하여 어느 백송보다도 힘찬 모습이다. 위로 오르면 나무의 줄기가 점점 더 하얗다. 눈이라도 온 듯 맑은 흰색에 검은 무늬가 옅게 드리워져 있다. 봄날 만난 나무의 솔잎도 싱싱하다. 밑동 쪽에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이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더욱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희귀종이기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아래쪽으로 난 가지도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꽤나 신령스럽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한 때는 백송의 껍질이 약재로 사용된다고 해서 나무껍질을 사람들이 벗겨가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고도 한다.

 

모처럼 찾아간 백송의 주변은 철재 울타리를 쳐놓았다. 보호를 하기 위한 방편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던 몇 그루의 백송들이 지정 해제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이천 백송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몇 년 만에 만난 이천 신대리 백송. 천연기념물치고는 수령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소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지정을 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들려보아야겠다. 문화재란 늘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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