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시 북평동사무소는 동해에서 삼척으로 내려가는 7번국도 우편에 있다. 이 북평동사무소 맞은편으로 길이 있는데, 이 안으로 들어가면 동해와 만나는 막다른 곳을 <갯목>이라고 한다. 갯목이란 갯벌이 시작되는 목(입구)이라는 뜻인지, 혹은 포구가 열리는 목이라는 뜻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곳 갯목을 향해 가다가 보면 좌측에 동해 한가운데 커다란 공룡처럼 웅크리고 있는 시멘트공장이 있다. 공장과 길 가운데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바다를 매립하여 세운 듯하다. 시멘트 공장 중간쯤에 우측으로 만경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150m를 올라가라는 표시를 따라 나무로 흙을 받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그 등성이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동해를 굽어보고 있는 정자, 그러나 지금은 절경이 사라져

 

만경대(萬景臺). 동해시청에 전화를 걸어 설명을 들었으나 찾기가 쉽지가 않다. 북평동사무소에 들어가 정자 있는 곳을 물으니, 점심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친절히 길을 알려준다. 설명대로 어렵지 않게 찾아온 만경대. 그 위에 오르니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그 동해를 바라보기에는 지금은 쉽지가 않다. 커다란 공룡과 같은 시멘트공장이 시야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일 잘 아는 선조님들이 이곳이 이리 변할지는 모르셨나보다.

 

구미산 성산봉에 자리한 만경대는 조선조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삼척에 사는 신당(新堂) 김공훈이 창건한 정자다. 동해에 있는 정자들이 100여년이 안된 것들이 대부분인데 비해 이 만경대는 40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만경대는 동은 망망대해요, 북으로는 송림에 백사장이 10리에 걸쳐있고, 서편으로는 두타산(頭陀山)의 절경이 펼쳐지며, 절벽 아래로는 전천강이 동해로 흐르니 가히 관동 제일경이라 하는 죽서루와 쌍벽을 이루어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였다. 그동안 만경대는 고종 9년인 1872년과 1924년 갑자에 걸쳐 두 차례 중건을 하였다.

 

만경대 안에는 수많은 글들이 걸려있는데 그 중에 1872년 중수 때 한성부윤 이남식이 쓴 <海上名區>라는 현판은 가히 만경대가 얼마나 절경에 자리하고 있었는가를 알려준다. 절경에 자리 잡은 많은 정자들이 만경대라는 이름을 걸었으나 동해의 만경대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절경이었으리라.

 

 

 

또 한곳의 절경 호해정

 

아쉬운 발걸음으로 만경대를 뒤로하고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집 몇 채 되지 않는 해안가 마을이 보인다. 갯목이라 부르는 이 동네는 시멘트공장의 끄트머리와 나란히 있다. 아마 저 시멘트공장만 아니었으면 이 또한 절경이리라. 호해정(湖海亭),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최덕규 선생 등 39인이 계를 조직해 1947년 4월에 구미산 갯목 할매바위 옆에 18평의 호해정을 세웠다. 그동안 호해정은 1977년 5월과 1990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중수를 하였다.

 

갯목 끝자락에 자리한 호해정은 60년 동안 마을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할매바위와 나란히 서 있다. 할매바위는 동해를 바라보고 노송 몇 그루와 벗 삼아 있는데 그 풍광이 아름답다. 아마 저 시멘트공장과 1979년 동해항의 개항이 없었더라면 그 얼마나 운치를 더했을 것인가? 할매바위인 마고암(麻姑岩)에는 그 전설을 다해 최윤상이 쓴 글이 있다.

 

 

 

아래로는 바다를 진압하며

위로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광활한 천지에 높이 우뚝 앉아 있어

편안한 자취가 마치 마고와 같으니

선녀가 천년 뒤에 홀연히 나타나

돌이 되었구나.

 

갯목으로 가는 길에 만난 만경대와 호해정. 두 곳의 정자는 그렇게 다른 모습을 하면서 나그네를 맞이하지만, 그 안에 걸린 수많은 게판들은 제각각 자신이 최고라고 뽐내고 있었다. 그 자랑을 벗 삼아 나그네의 여정은 계속되고...

노송 몇 그루가 만들어 내는 멋진 풍광. 그리고 주변으로 흐르는 물과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빼어난 주변경관과 무슨 이야기 하나 있을 듯한 분위기. 바람과 물, 송림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만들어 내는 곳. 이런 곳이 바로 누정를 짓는데 꼭 필요한 요건이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 입구를 들어서 송림 사이를 지나는 길, 하늘 높게 자란 노송들이 즐비하다. 열을 맞추어선 노송 사이를 지나면서 깊은 호흡을 한다. 솔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런 좋은 송림에서 사람들은 노송의 자태를 닮아 푸른 마음을 가졌던 것일까?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 건너다보니, 내를 건너 노송 몇 그루와 함께 어우러진 정자가 보인다.

 

 

500년 세월 고고한 자태를 지니다


취한대, 조선조 명종 5년인 1550년, 당시 풍기군수이던 이황선생이 처음으로 지은 정자다. 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고, 소수서원의 원생들이 시를 지으면서, 청운의 꿈을 키우도록 한 것이다. 누구인들 이 아름다운 풍광에 젖지 않았을까? 아마도 이런 곳에 지은 이 취한대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풍운의 끔을 안고 큰 발걸음을 옮길 수가 있지 않았을까?


취한대를 오르기 위해 내를 건너간다. 물살이 흐르는 곳에 시멘으로 넓적하니 징검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내를 건너 천천히 취한대를 향한다. 그저 바쁜 일이 없다. 이 절경에 나를 맡겨본다. 그것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길이다. 바쁜 걸음을 걷다가도 이런 곳을 만나면, 그저 시간을 붙들어 놓은 듯 여유를 부릴 수가 있다.

 


바쁠 길 없는 여정, 서낭에 돌을 놓다


가는 길에 보니 서낭이 있다. 예전 이 내 곁으로 난 길을 따라 걷던 사람들이, 여정의 평안함을 위해 돌 몇 개를 올려놓고 안전을 빌었을 것이다. 서낭 주변에는 금줄이 처져있는 것을 보니. 주변 마을에서 이곳에 제라도 지내는 모양이다. 아마도 오랜 시간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 


주변에 구르는 돌 하나를 집어 서낭에 던진다. 돌과 돌이 부딪치며 내는 "딱" 소리가 경쾌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서낭을 만날 때마다 돌 하나라도 더하고 간다. 그 숱한 여정의 무탈을 위하는 마음에서이다.

 

 


정자는 보수를 하였는지 말끔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맨살을 드러낸 나무들이 소수서원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주변의 소나무들이 오히려 이 맨살의 나무들을 더 아름답게 치장을 해주는 듯하다.


호연지기를 키우는 정자, 취한대


‘취한’이란 맑은 물 푸른 솔과 함께 호연지기를 키우라는 뜻이다. 이렇게 맑은 물이 흐르고 노송이 푸르른 자태를 자랑하는 곳이라면, 그 누군들 호연지기를 키우지 않으리오. 아마 젊은이들이 이 취한대를 자주 찾아드는 것도 그런 꿈이 있기 때문인가 보다.


취한대를 보고 있는데 젊은 남녀들이 앞을 질러간다. 취한대 마루에 앉아 담소를 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세월은 지나고 사고는 달라져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나보다. 젊은이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옛 소수서원의 원생들도 이들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시를 짓고 세상을 논하고 자신을 알아가고, 아마 그런 꿈을 만들었을 것이다.

 


취한대의 모습에 녹아본다. 저 대들보 위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젊음의 이야기가 쌓여있을까? 그 이야기를 훌훌 털어내어 한 아름 엮어내고 싶다. 그 이야기들을 오늘 꿈을 잃어버리고 대학이라는 문을 향해 달려가고만 있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해 집을 짓는다는 것은, 요즈음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축방법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범하지 않고 건물을 지음으로써,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언젠가 어느 지인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다. “환경, 환경하고 말들만 하고 입으로만 떠들 줄 알았지 과연 그런 사람들 정말 환경을 얼마나 생각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어느 나라에서는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차를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하더라. 차에서 배출되는 유독가스를 줄이려고 불편을 감수하는 그 정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이 정말 환경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바위가 그대로 기단이 되다

 

예전에는 자동차가 없었으니 매연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처럼 기반공사를 한다고 마구 파헤치지도 않았다. 암벽을 깨내고 그것을 이용해 축대를 쌓거나, 자연석을 옮겨 정원석을 만드는 과시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집을 지을 때는 지반이 단단한 바위 위라면 오히려 고마워했고, 흙이 단단하지 않으면 <지경다지기>라고 하는 작업방법을 통해서 땅을 단단하게 다져나갔다.

 

지경다지기란 커다란 돌이나 굵은 나무를 이용해 줄을 여러 가닥 묶어 그 줄을 잡아채 하늘 높이 올랐다가 떨어지면서 땅을 다져나가는 방법이다. 물론 거기에는 서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 한사람이 북을 치면서 선창을 하면, 줄을 잡은 사람들이 뒷소리를 받아가며 일을 하는 멋까지 곁들인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자연과 친화적인 삶을 영위했던 것이 바로 우리네 선조들의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입으로 환경을 떠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환경을 지키고, 자연과 하나로 동화되면서 살아오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자연친화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 바로 보물 제213호인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오십천 가 벼랑 위에 세워진 관동 제일루라는 죽서루이다.

   

'이 건물은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이상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죽서루에 대한 설명 첫 부분이다 

 

 

자연암석을 그대로 기반으로 사용한 죽서루는 관동제일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자연을 최대한 이용한 뛰어난 건축기법

 

죽서루는 절벽 위 암반을 기초석으로 이용해 건물을 지었다. 누 아래의 17개의 기둥 중에서 아홉 개는 자연적인 바위를 그대로 이용을 했다. 하기에 그 기둥의 길이가 다 다르다. 나머지 여덟 개의 기둥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처름 죽서루를 보는 사람들은 왜 기둥이 그렇게 길이가 다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친환경적인 건물을 지었다는 놀라운 점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죽서루는 자연주의 전통 건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관동제일루>라 하여도 이의를 달수가 없다.

 

규모는 앞면 7, 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운데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 칸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편에 기둥은 그 배열이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죽서루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1662)에 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1711)에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이 밖에도 숙종, 정조, 율곡 이이선생 등 많은 분들의 시가 누각 안에 걸려 있다.

 

죽서루 아래로 흐르는 오십천

 

죽서루, 그 보존상태도 관동 제일

 

고성부터 강원도 7번 국도 남쪽인 삼척까지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찾아 본 많은 정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보존상태를 자랑하는 것도 역시 죽서루였다. 죽서루는 누각 주변 선사암각화와 신라 30대 문무왕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다가 어느 날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고 하는 용문바위 등을 포함해 담장을 둘러놓았다.

 

 

용이 지나갔다고 전하는 바위의 구멍

 

죽서루 경내는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어 보는 이들의 기분도 좋아진다. 여기저기 심어놓은 대가 바람에 나부끼며 잎이 부딪쳐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죽서루 밑을 흐르는 오십천, 그리고 암석 위에 자연스럽게 키 재기를 하고 있는 누각의 기둥, 이 모두가 관동제일루 죽서루의 멋을 더하고 있었다. 지금은 양양 하조대나 강릉 경포대보다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하지만 이것은 죽서루가 바닷가가 아닌 내륙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서루는 관동제일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을 돌아보면, 가장 눈에 띄는 전각이 있다. 밑으로 흐르는 물을 굽어보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정자 한벽루. 정자를 보지 않고도 '한벽루'란 말 한 마디로도, 이 정자의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있다.

 

고려 충숙왕 4년인 1317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그 역사는 700년 가까이 되었다. 당시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다. 1972년 대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을 하였다. 현재는 보물 제52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익랑을 달고 있는 한벽루

 

 

한벽루가 특이한 것은 정자의 오른편에 익랑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익랑은 대문간에 달아 만든 방을 말한다. 이 계단식 익랑을 통해서 한벽루에 오를 수가 있다. 익랑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어졌다. 익랑 하나만 갖고도 충분한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가 있다. 거기에 한벽루가 더하여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단지 안편을 바라보고 있는 현판

 

강쪽을 바라보고 있는 현판

 

익랑은 뒤로 가면서 한 단계를 높였다. 누마루를 깐 익랑은 난간을 놓고, 한벽루에 오르기 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맛 볼 수 있는 예비 공간이다. 익랑의 주추는 1단의 주추 위에, 또 다시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석축을 사용했다. 주추가 이단으로 되어있는 익랑은 보기가 힘들다.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특이함을 보이는 것이 한벽루의 축조형태다.

 

한벽루는 익랑을 달고 있다. 익랑은 대문간에 덧내어 들인 방이다.

 

익랑의 주추는 특이하다. 일단의 주추 위에 마름모꼴 주추를 더 올렸다.

 

자연적 주초석 위에 서 있는 배부른 기둥

 

한벽루는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배가 부른 기둥을 세워 운치를 더했다. 누마루를 깐 정자는 정면 4칸, 축면 3칸이다. 멀리서보면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밑의 기둥을 지나면서 마루를 올려다보면, 참으로 꼼꼼히도 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복원을 했다고 하지만 기존의 자재를 그대로 이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벽루의 가치를 새삼 느낄 수가 있다. 하나의 전각이 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중히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아름다운 정자가 한 번의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만일 홍수로 인해 무너지지만 않았다면,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운 한벽루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자연석 주추 위에 배가 부른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마루를 놓았다

 

사방이 트인 아름다운 정자

 

한벽루는 모두 3단으로 보인다. 앞에서 바라보면 익랑이 2단으로 차이 있게 만들었으며, 본 정자는 조금 더 높게 난간이 설치가 되어있다. 돌계단을 올라 익랑을 들어서면, 조금 높아진 익랑의 마루가 있다. 그리고 한벽루의 마루는 익랑보다 한 계단 높게 만들어졌다.

 

한벽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의 도도함과,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들이 아름답다. 이러한 곳에 서 있는 한벽루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히 일경이라 할만하다. 육각형의 기둥들이 나란히 줄을 맞추고 있다. 이곳에서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하는 것은 이 아름다운 주변 경관 때문이다. 아마 우리 선조들도 이곳에 올라 이렇게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돌계단을 올라 익랑을 들어서면 계단식으로 된 마루가 있다

 

익랑에서 본 정자로 오르는 마루는 또 다시 계단으로 되어있어 운치를 더한다

 

봄에서 겨울까지 한벽루의 아름다움은 어느 계절에도 빠지지 않는다. 누안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인 한벽루. 예전 같으면 이곳에 올라 글 한자 남기든지, 아니면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풍취에 젖어 찬바람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한벽루의 또 다른 흥취려니.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274에 소재한 송강정은, 송강 정철(1536∼1593)이 조정에서 물러난 후 4년 동안 지내던 정자다. 고서면 원강리 유신교차로에서 봉산초등학교 양지분교 쪽으로 조금 가다가보면 좌측으로 주차장이 보이고, 숲 위쪽에 자리를 한 송강정이 보인다. 이 정자는 원래는 '죽록정(竹綠亭)'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송강 정철이 지냈다 하여 송강의 호를 따서 송강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송강정은 1955년에 고쳐지었는데, 송강 정철이 선조 17년인 1584년 대사헌을 지내다가, 1585년 양사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하여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였다. 송강정은 정철이 이곳에 내려와 지었다고 하니, 처음 송강정을 지은 것은 벌써 4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셈이다.

 

 

소나무 향이 짙은 송강정

 

계단을 따라 오르니 솔향이 코를 간질인다. 천천히 뒷짐을 지고 걸어 올라본다. 숨을 들이키자 폐부 한 가득 소나무의 향이 가득 차는 듯하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란 듯 날아간다. 계단 위에 자리한 정자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평범한 모습이다. 그저 어느 고졸한 학자 한 사람이 이곳에서 쉬어갈 만한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이 그 유명한 <사미인곡>이 지어진 것이라는데 대해, 다신 한번 정자를 훑어본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철은 명종 16년인 1561년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글을 지으며 조용히 지냈다.

 

 

 

그는 고향인 창평에 내려와 머물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을 지어냈다. <사미인곡>은 조정에서 물러난 정철이,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여인이 남편과 이별하여 사모하는 마음에 빗대어 표현한 노래라고 한다. 이곳 송강정에서 정철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고졸한 송강정은 숲을 해하지 않아

 

송강정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규모로 꾸며졌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앞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아마 송강정이라고 하기 이전에 죽록정이라고 했다고 하니, 그 이름을 잊고 싶지가 않았는가 보다. 주추를 보니 동그렇게 다듬은 돌 위를 평평하게 만들고 기둥을 올렸다. 예전에도 이랬을까? 그저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정자의 정면에서 보면 중앙 뒤편으로 한 칸의 중재실을 달아냈다. 아마 이곳에서 4년이란 세월을 묵으면서, 송강은 사미인곡을 집필 한 것이 아니었을까? 마루에 걸터앉아 본다. 앞으로 난 길을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들린다. 아마 예전에는 저곳으로 소를 끈 농부가 지나고, 급하게 말을 몰아 달리던 파발이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송강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임금을 더 그리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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