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사직로에 소재한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경복궁은 왕도인 한양을 상징하는 계획된 궁으로, 북으로는 북악산을 기대어 자리를 잡고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현재의 세종로)가 펼쳐져 있었다.

 

경복궁은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것을, 고종 때인 1867년 중건을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의 중건은 전국에서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남사당패 등 많은 유랑집단이 노역장에서 마당놀이를 펼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경복궁 안의 휴식처 향원정

 

보물 제1761호인 경복궁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앞에 연못을 판 후,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지은 2층의 정자이다. 연못 가운데 인공섬에 있는 향원정으로 가는 길은, 나무로 만들어진 ‘취향교’라는 구름다리가 있었다.

 

향원정은 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향원정은 경복궁 후원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축조가 되었으며, 육각형의 초석과 육각형 평면 육모지붕 등 육각형의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향원정은 조선조 말의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미려하게 다듬은 모든 구성요소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비례감이 뛰어난 정자이다.

 

 

 

 

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향원지 내의 가운데 섬 위에 건립된 정자로, 향원지의 ‘향원’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이다. 향원지가 있던 곳에는 원래 세조 2년인 1456년에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자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세조실록」에 보인다. 향원은 북송 때의 학자인 주돈이(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말이다.

 

질병통을 얹어 치장한 지붕이 압권

 

향원정의 평면은 정육각형으로 아래와 위층이 똑같은 크기이다. 정자는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으로 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일층과 이층을 관통하는 육모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이층 기둥 위에 짜여 지는데,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일층 평면은 바닥 주위로 평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고, 이층 바닥 주위로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사방둘레의 모든 칸에는 완자살창틀을 달았다. 겹처마로 마련한 처마와 육모지붕, 그리고 중앙의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중심점에 절병통을 얹어 치장을 한 것은 가히 압권이다.

 

향원지는 4,605㎡의 넓이의 방형인데, 원지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다. 이 물을 건너 향원정에 들어가는 다리인 '취향교'는 본래 목교로, 1873년에 향원정의 북쪽에 건청궁 방향으로 설치되었다.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던 다리인데, 6·25전쟁 당시 없어진 것을 1953년에 남쪽에 다리를 놓아서 현재에 이른다. 본래의 취향교는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폭 165cm, 길이 32m 정도였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지었다. 그리고 건청궁의 앞에 연못을 파고, 가운데 섬을 만들어 세운 2층 의 정자이다. 향원정은 고종 4년인 1867년부터 고종 10년인 1873년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 안에 가장 아름다운 정자 중 하나라는 향원정. 다리를 건너면 남쪽에는 함화당과 집경당이 위치해 있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에는 고려 말인 1352경에 해경대사와 월산대사가 창건하였다 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해월암이라 부르는 암자가 있다. 그 암자를 오르는 길은 걷기에는 조금 가파른 산길이다. 그 산길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으로 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가 있다.

 

신포정. 앞으로는 오수면을 가르는 내가 흐르고 있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져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신포정에서 내려다보이는 개울에는 아직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아직은 이 내가 그래도 인간들로 인해 오염이 심하게 되지 않은 듯하다.

 

 

 

색다른 정자 신포정

 

개울가 벼랑위에 서 있는 신포정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정자와는 다르다. 정자의 출목에 돌출되어 있는 봉황의 조각이 세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일반 정자에서는 보기가 힘든 형태이다. 정자 안으로 들어가니 대들보 밑으로 청룡과 황룡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천정반자도 돌출되어 있어 특이하다. 그런데 황룡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청룡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신포정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정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어 아쉽다. 다만 정자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부재나 석물 등을 살펴볼 때 100여년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포정이라는 현판은 금산사의 현판을 쓴 사람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돌출된 천정반자를 보니 네 귀에 자라가 달려있다.

 

 

 

용과 자라가 주인인 신포정

 

물고기를 물고 있는 청룡, 그리고 반자에 달려있는 자라. 이것은 아마 이 앞을 흐르는 내가 예전에는 배가 드나들지는 않았을까? 누군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포구를 드나드는 배들과, 섬진강 줄기를 따라 오르내리는 수많은 뱃사람들의 사연을 즐겨 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외롭게 서 있는 정자 신포정.

 

여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피서를 한다는데, 나그네들은 이 신포정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 알고는 있을까? 정자의 형태나 여러 가지 조각기법, 그리고 앞으로 흐르는 내를 보아 이 신포정은 또 다른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야기조차 해 줄 수 있는 이웃을 만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주변에 물어보아도 신포정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없다. 그저 오래전부터 그곳에 서 있다는 것 외에는. 정자 밑을 흐르는 내를 보니, 예전에는 꽤 큰 물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외롭게 길가에 서 있는 신포정은 찾는 이들 조차 없이, 무심한 바람만이 골을 휘감아 돈다.

‘해가(海歌)’는 신라 때부터 전해진 노래로 구지가와 같은 계통의 향가이다. 이 노래의 시원은 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이 동해의 해룡에게 잡혀 가자 남편인 순정공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불렀다고 하는데서 전해진다.

 

김해에 전하는 가야국의 구지가가 건국 신화 속에서 창출된 신군을 맞이하는 주술적 요소가 강한데 비해, 해가는 신라시대 민간에 널리 전승이 되어, 액을 막고 소원성취를 비는 기원성이 짙은 노래였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두 노래 모두 집단가무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불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로 보아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모여 부르는 이러한 노래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곳의 구지가, 서로 달라

 

그런데 이 해가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가락국기에 보면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강림 신화 속에 삽입된 노래인 <구지가>가 있다. 이 구지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龜何龜何(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구워서 먹으리)

 

이와는 달리 삼척지방에 전하는 해가사는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憲)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라고 되어있다. 해가사의 창출근거를 보면 삼국유사 기이 제2 수로부인조에 전하는 내용으로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명주(지금의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곁에 바위 산봉우리가 있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렀다.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뒤에 철쭉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인 수로가 좌우를 향해 "누구 꽃을 꺾어 올 사람이 없느냐?" 하였다. 모시던 사람들은 그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침 그 때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절벽을 타고 올라가 꽃을 꺾어,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는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부인에게 바쳤다. 일행은 명주를 향해가다가 그 이틀 뒤에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문득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서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순정공도 허둥지둥 발을 구르나 계책이 없었다.

 

그 때 또 한 노인이 말하되 ‘옛날 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고 하니, 이제 바다 속의 미물인들 어찌 여러 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경내의 백성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공이 말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치었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으니 부인이 말하기를 ‘칠보(七寶)로 꾸민 궁전에 음식이 맛이 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하여 속세의 요리가 아니다.’ 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는 세상에서 일찍이 맡아보지 못한 특이한 향기가 풍기었다. 수로부인은 절세의 미인이라 깊은 산과 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 용이 아닌 거북이를 구워먹는다고 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도 용이고, 노래를 듣고 다시 수로부인을 놓아준 것도 용인데, 왜 거북이를 구워먹는다고 했을까? 난 속 좁은 소견으로 이렇게 유추해본다. 첫째는 우선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을 구워먹는다는 것은 곧 임금을 해하려는 음모로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둘째로는 우리 설화 등에 보면 거북이는 용왕의 사자로 많이 표현이 되고 있다. 별주부전 등을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잡으러 거북이가 뭍에 오른다. 즉 용왕의 충실한 사자인 거북이를 해하는 것이 두려운 용왕이 수로부인을 다시 되돌려 보냈다는 생각이다. 이런 향가 한수에도 당시 사람들의 심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 선조들의 올곧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동해시에서 삼척을 향해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삼척MBC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증산해수욕장과 수로부인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고가도로 밑을 통과해 좌회전을 하게 된다,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에 성황당사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시원한 동해가 펼쳐진다. 사기에 적힌 ‘임해정(臨海亭)’은 2004년 동해를 바라보는 자리에 조그맣게 꾸며져 신라 때 이곳을 지나던 수로부인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미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가는 곳마다 신물들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취하려 했을까? 작은 임해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다보니, 마침 바람이 부는 날이라서 동해의 작은 파도들이 앞 다투어 밀려든다. 백사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갈매기 떼들은 한 곳을 바라보며 파도가 밀려들어도 요동도 하지 않고 있다. 흡사 당시 막대기로 언덕을 치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저 편에 서 있는 추암해수욕장의 촛대바위는 그 때 수로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 용의 화신은 아닐는지.

 

 

이곳을 경주에서 명주(강릉)로 가는 길목 중에 해가사의 장소로 여기는 것은 설화를 배경으로 유추한 것이다. 삼국사기 어느 곳에도 헌화가와 해가를 불렀던 장소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임원해수욕장 근처에는 마을 사람들이 수리봉, 혹은 수로봉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앞으로 지역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지면 그때는 좀 더 근접한 장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수로부인과 해가의 장소인 임해정은 그렇게 동해를 바라보며 다소곳 자리하고 있었다.

천혜의 신비를 간직한 무릉계곡은 국민관광지 제77호로 1977년에 지정이 된 곳으로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계곡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무릉계곡은 호암소로부터 시작하여 약 4km 상류에 있는 용추폭포가 있는 곳까지를 말한다. 넓은 바위 바닥과 바위 사이를 흘러서 모인 넓은 연못이 볼만한 무릉계곡은 수백 명이 앉을만한 무릉반석을 시작으로 계곡미가 두드러지며 동해시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10㎞ 지점에 있다.

 

산수의 풍경이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시의 동쪽에 솟아 있는 두타산(1,353m)·청옥산(1,404m)·고적대(1,354m) 등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계곡을 흘러 전천을 이룬다.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 선녀탕 등을 지나 쌍폭, 용추폭포에 이르기까지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금란정과 수많은 글들이 적혀있는 무릉반석(아래)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곳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고려 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살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선전기 4대 명필가의 한 분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1,500여 평의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다.

 

이 무릉반석이 있는 곳에 정자 하나가 서 있다. 금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정자는 무릉반석 곁에 노송 몇 그루와 바위들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란정은 조선조 말 향교인 명륜당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고 향교가 폐지되자, 그 분을 이기지 못한 유생들이 모여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란정을 이곳에 짓기로 하였으나 일본의 관헌들에 의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명승 무릉계곡

그 후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해 당시 유림선비들의 자손들이 모여 선대의 뜻을 기리고자 이 정각을 세우고 금란정이라 현판을 걸었다. 지금도 매년 봄, 가을에 계원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새롭게 선경에 조성한 금란정

 

깨끗하게 정리가 된 금란정은 근자에 들어 새롭게 조성한 정자다. 아마 1945년에 지은 것을 부수고 다시 조성한 것처럼 보인다. 옆에 맑은 물이 흐르는 무릉반석에는 깊게 판 많은 글자들이 사람의 눈길을 끈다. 한문으로 된 문구들을 바라보며 학식이 없음을 탓한다. 어찌하랴, 워낙 재주가 없다보니 그냥 바라다 보고만 있어야지.

 

누가 같이 동행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반석의 넓이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장관에 취해 잠시 정자는 잊었다.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해가 간다. 이 절경을 보고 시 한수 읊지 않는다면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움에 취해 흥얼거리지 않는다면 어찌 묵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잃은 울분을 이곳에 와 정자를 지어 풀어버리려고 했던 분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니 그분들도 그런 심정이지나 않았을까.

 

 

금란정을 찾아가는 길은 동해시 무릉계곡을 찾아 계곡 입구에서 삼화사 쪽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일주문 전에 정자가 있다. 무릉계곡을 찾아가는 길은 동해시 효가 사거리 - 우회전 - 4.4km - 삼화동3거리 - 좌회전 - 5.3km - 무릉계곡 주차장으로 들어가 매표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 현지교통을 이용하려면 동해시외버스터미널-무릉계곡으로 30분 간격으로 운행을 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에 있는 사선대는, 예전에 신선이 놀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을 ‘사선대(四仙臺)’라고 하는 이유는, 옛날 진안의 마이산과 임실 오원산의 네 산신들이, 오원강 기슭에서 까마귀 떼와 함께 목욕을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신선들을 모시고 올라갔다고 전한다. 그 후 해마다 선녀와 신선들이 이곳에 내려와 놀았다고 전한다.

 

사선대 위에 아름다운 정자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신선이 놀던 자리에 지었다는 운서정. 운서정은 아래쪽으로 흐르는 내를 내려다보면서, 절벽 위에 솟구치듯 서 있다. 1928년부터 김승희가 부친 김양덕의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에 쌀 3백석이라는 비용을 들여 6년여에 걸쳐 지은 정자다.

 

 

절로 바뀐 운서정

 

운서정은 전주 - 남원 간 17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관촌 입구 대원주유소 삼거리를 지나쳐서 오원교를 건너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진안 방면으로 진입하면 된다. 남원 방면으로 가다가 보면 사선문이 서 있는데, 사선문 곁으로 난 진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사선사라는 이정표가 있다.

 

아니면 사선문에서 차를 내려 좌측 등산로를 따라 들어가면 백제 무왕 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미산성(城嵋山城)에 이르는 등산로를 따라서도 운서정에 도착할 수 있다. 현재 운서정은 대한불교 조계종 사선사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운서정의 출입문인 가정문과 운서정, 그리고 현판


원래 운서정은 정각과 동, 서재, 그리고 가정문 등으로 이루어진 전각이었다고 한다. 일제 치하에서는 우국지사들이 모여 망국의 한을 달래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운서정은, 조선조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운서정은 좋은 목재와 돌기둥 등을 이용하여 지은 건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절로 감탄을 하게 만드는 운서정

 

운서정 앞으로 걸어가다가 보면, 가정문을 보면서부터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날렵하게 서 있는 솟을대문에 ‘가정문(嘉貞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좌측 벽에는 <사선대 사선사>라 쓴 현판이 부착이 되어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운치 있는 돌계단 위에 운서정이 자태를 뽐낸다.

 

 

 

 정자에 사용한 치목이나 조각들을 보면 이 정자가 뛰어난 조형미를 갖춘 정자임을 알 수 있다


하늘 닿게 높다라니 솟아 뒤로 구름을 배경삼은 운서정.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좌우로는 사선사의 인법당과 요사가 보인다. 운서정에는 동, 서재가 있다고 했는데 이 건물들이 동, 서재인 듯하다. 그러나 동서재의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듯 그 자태를 찾아볼 수가 없다. 운서정은 돌계단을 올라 자리하고 있다. 돌계단을 오르면서 보면 거대한 돌로 주추를 놓았는데, 주추에도 조각을 해 놓았다.

 

오원천과 함께 어우러진 이 정자, 신선이 놀만하네

 

운서정은 정말 운치가 있는 정자이다. 아래로는 오원천이 흐르고 있어 절경에 자리 잡고 있다. 운서정을 보니 지금은 문이 없으나, 문을 올려 걸어놓을 수 있도록 전각을 빙 둘러 고리가 달려있다. 전각의 단청이나 조각 등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듯하다. 중앙에는 두 마리 용이 양편에서 전각의 천정을 휘감고 있다.

 

 

 

 

다양한 조각으로 장식한 운서정. 정자 외부에도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처마를 받치고 있는 활주의 주추가 특이하다(아래)


밖으로도 입을 딱 벌린 용머리를 조각해 그 멋을 더하고 있다. 어디서 바라보아도 흐트러짐이 없는 정자의 모습에 그저 감탄이 절로 나올 뿐이다. 운서정을 나와 오원천을 밑으로 난 길을 걸으면 가칭박달나무 등 천연기념물을 만날 수도 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걸어볼 수 있는 길. 아마 신선들이 이곳을 찾은 이유도 이러한 경치 때문이란 생각이다.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 정자 운서정은, 그렇게 절집으로 변해버렸지만 그 멋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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