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나라를 세울 뜻을 정한 이목대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인 이목대와 오목대는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1-3번지에 소재한다. 교동 한옥마을의 동편 언덕 위에 자리한 이 이목대는 조선 태조의 5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의 출생지로 전하여 오는 곳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 공 이후 목조에 이르기까지 누대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으나, 목조대에 이르러 관원과의 불화로 함경도로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러한 이목대에는 사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이성계와는 땔 수 없는 많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목대에서 밑으로 즐비하게 지붕을 맞대 잇고 있는 한옥촌들도, 그러한 이성계의 뜻을 정하는데 일조를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풍운가’에 건국의 뜻을 담아
이목대는 잘 지어진 정자로 언덕 위에 서 있다. 이목대의 누각에 오르면 밑으로 전주한옥마을의 지붕들이 펼쳐진다. 그 또한 멋스럽다. 정자 안에는 두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그 중 하나에는 '대풍가'라고 하여서 '풍운 속을 일어섰다. 위세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오니 모두 수그려 우러러 맞네'라고 적혀있다.
이는 오목대가 이성계가 고려의 3도순찰사로 있을 당시 군사를 이끌고,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금강으로 침입한 왜구가 퇴로를 찾아 남원으로 내려오자, 장군이 이들을 맞아 운봉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오목대에서 개선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하는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한 시문으로 보인다.
오목대는 누각 안에 고종황제의 친필로 썼다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필遺址)'라는 비석이 서있다. 이 비석은 고종황제에 의하여 광무 4년인 1900년에 건립된 것이다. 한옥마을을 돌아보고 나무로 만든 계단을 올라 찾아간 오목대. 비문을 촬영하려고 안으로 들어가니 경보가 울린다.
황당한 문화재 보호, 볼 수 있도록 해주어야
문화재를 답사하는 사람들이 안을 들어가 비문을 볼 수 없다고 하면, 그 친필을 확인조차 할 수 없는데, 그저 밖에서만 보라는 것인지. 요즈음 문화재를 과잉보호 하는 것을 보면 가끔은 짜증이 나기도 한다. 필요에 의해서 그것을 보려고 하면 복잡한 주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보지도 못하고 촬영도 못하게 한다. 시간을 내고 많은 경비를 들여가면서 하는 문화재 현장답사.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가끔은 막무가내로 촬영을 하다가 다투기도 한다. 보호를 한다고 무조건 막을 것이 아니라, 좀 더 노력을 하여 사람들이 충분히 보고 그 가치를 알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으면 좋을 듯하다.
이목대 누각 위에서 내려다본 한옥마을의 지붕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어져 있어 더욱 이곳이 아름답다. 긴 세월 이 근동은 전주이씨들의 터전이었다. 아마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이곳에서 깊은 뜻을 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밑으로 보이는 한옥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길을 누비고 즐거움을 느끼고 있지만, 정작 이 이목대에서 600여 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고는 있을까? 바람 한 점이 땀을 씻어간다.
임금들도 쉬어 간 아름다운 정자, 애련정
안흥지라는 크지 않은 네모난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물로 구만리 뜰의 논에 물을 대어, 천하제일미라는 진상미인 이천 자채벼를 생산했다. 진상미인 자채벼를 생산하는 논을 서민들이야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고려와 조선조의 대신들은 이 구만리 뜰 방죽 앞에 자채논을 갖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하니, 언감생심 서민들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여지도서』에는 이 방축의 둘레가 약 388m(1250척)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안흥지는 이천시 미란다호텔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만 연못이다. 애련정기에 따르면 조선 세조 때인 1456년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안흥지가 처음으로 있던 시기를 지역에서는 통일신라 이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 기록에 보이는 애련정
‘애련정기(愛蓮亭記)’에 따른다고 했으니, 이곳에는 ‘애련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애련정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는 임원준의 <애련정기>를 말한다. 또한 『이천읍지』에 보면 객사 남쪽에 정자가 있어, 그 창건 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종 10년인 1428년에 중건하고, 세조 12년인 1456년에 이천 부사로 취임한 이세보가 지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애련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천 객관 동쪽에 작은 정자가 있었으나 돌보지 않아 기울어져 있었다. 이세보가 이 정자를 수리하여 전보다 더 크게 세웠다. 정자는 낮지도 높지도 않고 사치스럽지도 않다. 정자 아래는 자연습지였는데,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역대에 왕들도 찾았던 유서 깊은 정자
결국 애련정은 그 이전부터 있었고, 자연습지였다는 것을 보아 방축의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애련정은 영의정 신숙주가 정자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연꽃이 핀 경치가 좋아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역대의 왕들이 이 애련정에 들렸음을 기록하고 있다.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 능인 영릉에 참배를 하고 돌아가던 중종은 이곳에서 노인들을 위한 연희를 베풀기도 했다. 이 외에도 숙종과 정조 등이 이곳에 들렸다. 중종 23년(1528), 숙종 14년(1688), 정조 3년(1779)에 영릉에 들려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왕들이, 이천행궁에 들려 연꽃이 아름답게 핀 애련정을 돌아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월산대군과 조선조의 대문호 서거정의 글도 보인다
이러한 애련정은 1907년인 순종황제 원년에 일어난 정미의병 때 일본군이 이천읍내에 483가구를 불태웠는데, 당시 애련정도 소실이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애련정은 1998년 이천시가 애련정기 등을 기반으로 복원한 것이다.
애련정의 이야기를 되살려
지금의 애련정은 안흥지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안흥지의 중간에 인공 섬을 만들고 양편에 구름다리를 놓았다. 예전의 애련정은 어떠했는지 모습을 찾을 길이 없으나. 지금의 애련정을 보면 연못에 핀 연꽃이며, 유유히 유영을 즐기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경치가 남다른 풍광을 자랑했을 것이다.
당시 이곳에 들린 월산대군 이정(성종의 형) 서거정, 조위 등이 애련정에 올라 글을 남겼다고 했고, 임원준과 김안국의 애련정기와 애련루기는 지금도 전해진다. 애련정을 처음 찾아간 것은 2002년 10월이었나보다. 당시에도 아름답다고 느낀 애련정이었지만, 찾아갈 때마다 애련정에 대한 마음이 남다르다.
이천 시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애련정은 주변이 잘 정리가 되어있었다.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유영을 즐기고 있고, 사람들은 이런 애련정에 올라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고 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한 곳을 여러 번 찾아가는 것은, 달라진 점이 있지나 않을까해서다.
애련정처럼 보기 좋게 달라져 기분이 좋은 곳도 있으나, 어떤 문화재는 훼손이 되어 안타깝기도 하다. 두세 번 반복해서 찾아가는 것도 우리문화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인공 섬 위에 올라앉아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애련정. 그 정자에 전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가지 못함이 아쉽다. 언젠가는 정자이야기를 책으로 쓰면서, 그 많은 이야기를 다 풀어내고 싶다.
아주 작은 정자에 깃든 큰마음이 보이는가?
정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좁다. 그렇다고 볼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 눈에도 참으로 고졸한 정자란 느낌이 든다. 정자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말끔히 단장이 된 정자는 어디 한 곳 흠 잡을 곳이 없다.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에 소재한 택풍당. 양동에서 여주 북내면으로 나가는 길목 우측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마을 끝에 자리하고 있는 택풍당을 만날 수가 있다.
택풍당은 광해군 11년인 1619년에 이식 선생이 제자와 자손들을 가리키고,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정자는 이층 누각형태로 지어졌으며 사방에 난간이 없이 누마루를 놓고 중앙에 작은 방을 드렸다. 그저 조촐하고 고졸한 멋을 풍기는 택풍당은, 뒤숭숭한 정국을 뒤로하고 이곳으로 내려온 이식 선생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바람따라 흘러온 것일까?
이식 선생은 조선시대의 한문사대가이자 대문장가로 알려졌다. 자는 여고이고 호는 택당(澤堂)이다. 누각의 이름도 자신의 호에 바람풍(風)자를 넣어 지었다. 아마 자신이 바람을 따라 이곳에 왔음을 뜻하거나,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말라는 뜻으로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 및 선전관 등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10년인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곳에 낙향하여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택풍당은 선생이 낙향한 이듬해에 지었다. 가을 단풍이 온 산하를 물들이고 있을 때, 지나던 길에 우연히 찾아들어 간 택풍당.
첫눈에도 참으로 조촐한 누각이란 생각으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지 않은 담장을 둘러치고 작은 문을 낸 택풍당은, 중층 누각의 형태로 지어졌다. 아래를 막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곳에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한 것이나 아닐까? 창호도 가장 흔한 것으로 했다. 주인은 어디 하나 검소하지 않음이 없다.
주인의 심성을 그대로 간직한 작은 집
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담 밖에서 집주위를 돌며 들여다 본 작은 정자 하나. 그 안에서 큰마음을 읽어낸다. 그것은 그저 평범한 가운데서도 고졸한 멋을 풍기고, 반듯하면서도 화려함을 피한 택풍당의 모습 때문이다. 폐모론이 일자 모든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이곳 쌍학리 촌마을로 찾아 든 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지금도 택풍당 주변에는 몇 집 되지 않는다. 400여 년 전에는 이곳에 몇 집이나 있었을까? 아마 이곳에 내려와 세상 인연을 끊고 후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낙을 삼았을 것만 같다. 많은 정자를 찾아다녔지만 이처럼 조촐하고 고졸한 누각은 쉽게 만날 수가 없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따라 들어간 곳에서 만난 작은 집. 그 곳에서 큰 교훈 하나를 얻어간다. 세상 시류에 물들지 말고 초연하라는.
자규루에 올라 피눈물을 흘린 단종
비가 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누각이 있다. 바로 영월 영흥리 시내 한복판에 있는 관풍헌의 자규루다. 이상하게 영월에 답사를 갈 때마다 비가 쏟아졌다. 자규루에 올랐을 때는 비바람이 심해 답사를 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자규루는 영월의 동헌이었던 관풍헌에 속해 있는 누각이다. 이 자규루는 원래 세종10년인 1428년에 영월군수 신숙근이 창건한 누각으로 ‘매죽루’라 불렀다고 한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청령포가 홍수를 인해 침수가 되자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단종임금은 이곳에서 생활을 할 때 이 누각에 올라 ‘자규사’와 ‘자규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달 밝은 밤에 두견새 두런거릴 때(月白夜蜀魂啾)
시름 못 잊어 누대에 머리 기대니(含愁情依樓頭)
울음소리 너무 슬퍼 나 괴롭네(爾啼悲我聞苦)
네 소리 없다면 내 시름 잊으련만(無爾聲無我愁)
세상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니(寄語世上苦榮人)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愼莫登春三月子規樓)
단종임금은 누각에 올라 자신의 신세를 이렇게 한탄했다. 『장릉지(莊陵誌)』에 전하는 자규사다. 단종임금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이렇게 슬픈 나날을 보냈다. 장릉지에는 또 한 수가 전한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孤身隻影碧山中)
밤이 가고 또 다시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假面夜夜眠無假)
해가 가고 또 가도 한은 끝이 없구나(窮恨年年恨不窮)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산봉우리 달빛만 흰데(聲斷曉岑殘月白)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血流春谷洛花紅)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고(天聲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내 귀만 홀로 밝은고(何奈愁人耳獨聽)
통한의 시다.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통했으면 이런 시를 남겼을까? 비가 쏟아지는 자규루에 올라 앞에 보이는 관풍헌을 바라다본다.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은 조선조 태조 7년에 건립이 되었다. 이곳으로 옮겨 온 단종임금은 이듬해인 세조 3년인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금부도사 왕방연을 시켜 내린 사약을 마시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관풍헌은 신라 문무왕 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매죽루였던 이 정자는 단종임금으로 인해 자규루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후 선조 38년에 큰 홍수로 인해 허물어진 것을, 정조 15년에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쏟아지는 비는 단종임금의 눈물인지. 관풍헌 앞마당에서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른다. 세상사 다 그런 것이라지만, 권력 앞에서는 숙부와 조카도 없는 것인지. 지금의 돌아가는 나라꼴을 생각하니 불현듯 자규루가 생각이 난다.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날 찾았던 자규루. 그곳에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권력의 아픔이 있었다
비오는 날 답사하는 내 꼴이 우습소?
비가 오는 날 찾은 울진 평해. 솔향이 짙은 해송 숲에 자리한 정자.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절로 시 한 수가 나올듯한 곳이다. 정철의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경이라고 하는 월송정은 고려시대에 창건이 되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퇴락하였던 이 정자는 조선 중기 연산군 때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다.
그 후 낡고 무너져서 유적만 남았던 곳을 1933년 이곳 사람인 황만영, 전자문 등이 다시 중건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월송에 주둔한 해군이 적기 내습의 목표가 된다 하여 철거하였다. 1969년에는 사연을 안타깝게 여긴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가, 2층 철근콘크리트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을 살필 길 없어 1979년에 헐어 버리고, 1980년에 고려시대의 양식을 본떠서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제일경이란 곳이기에 그만큼 많은 수난을 당했는가 보다.
비가 오는 날은 답사를 하면 안 되는지?
비가 추적거리고 온다. 지난 한 해, 이상하게 맑던 날이, 답사 길에 오르기만 하면 비가 뿌린다. 한번 길을 나서면 2~3일을 돌아오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계획을 세우고 떠난 길이 무색하다. 그래도 어찌하랴, 내딛은 발길이니 다는 못 다닌다고 해도, 쉴 수는 없지 않은가?
월송정을 찾은 날은 딴 날마다 비가 더 내린다. 치에서 내려 한창을 망설인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그래도 입구까지 왔는데 길을 돌릴 수는 없다. 천천히 숲길을 걸어 들어가니 소나무 숲에서 뿜어 나오는 향내가 코를 간질인다. 아마 이 월송정을 찾았던 수많은 사람들도 이 소나무의 향기에 취하지는 않았을까?
화랑의 이야기는 동해안으로 이어지고
해송 숲에 둘러싸인 월송정. 월송정은 신라 때 사선(四仙)이라고 하는 영랑, 술랑, 남속, 안상이라는 하는 네 화랑이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달을 즐겼다 해서 ‘월송정’이라고도 하고, 월국에서 소나무 씨를 가져다 옮겨 심었다 하여 ‘월송’이라고도 한단다. 아름다운 곳은 전설이 만들어지고, 그 전설은 아름다움을 오래 기억에 남게 하는 것이 우리네의 조상들이었다.
그만큼 멋과 여유를 즐겼다는 뜻일 게다. 그리고 보면 위에 네 화랑은 강원도로 길을 잡아 금강산까지 갔다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속초에서 한 호수에 반했다. 그 중 한 명인 화랑 영랑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는데, 그가 반한 호수가 바로 설악산을 품고 동해와 맞닿은 석호인 ‘영랑호’이다.
영랑은 결국 그곳에서 공부를 하다가 속초 보광사 뒤편의 관음바위라는 곳에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도 있다. 동해 안에는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겨울 설화가 아름다운 곳
월송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니 이층 누각으로 된 누정답게 시야가 확 트인다. 그래서 이곳은 동해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겨울 경치가 더 아름답다고 하는 월송정. 아마 해송에 가지에 부러지게 쌓인 겨울눈인 ‘설화(雪花)’때문이란 생각이다.
정자를 내려 소나무 숲을 걸어본다. 비가 잠시 멈춘 듯 해 우산을 접는다. 해송가지에 맺혔던 물방울이 탁탁 소리를 내며 주변에 떨어진다. 그 소리가 더욱 경쾌하다. 신라의 사선인 영랑 등이 이곳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월국에서 소나무 씨를 가져다 심었다는 전설도 다 그랬을 것이란 생각에 혼자 미소를 머금는다.
이곳을 찾은 딴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아니면 조금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할까? 그것은 여유의 차이일 듯하다. 아마 비가 오는 날 월송정을 찾았다면 누구나 다 수긍을 할 것만 같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비가 오는 날 그럼 험한 꼴로 정자를 누비고 다니느냐고. 글쎄다. 아직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리지를 못했다. 이제 돌아본 정자가 불과 100여 개. 전국에 얼마나 많은 정자가 있는 줄 모른다. 한 고장에만도 100여개가 넘는 정자를 가진 곳도 있으니 말이다.
사연도 참 많다. 정자마다 그 안에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바람이 늘 머무는 곳이다. 그 바람들이 세상이야기를 전해주는 곳이 바로 정자이다. 그래서 난 정자를 찾을 때마다 수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바람이 전해주는 세상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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