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읍을 가로 질러 흐르는 동강. 그곳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영월 땅으로 유배를 간 후, 그것마저 부족해 수하들을 시켜 단종을 죽음으로 몬 수양의 슬픈 이야기가 전하는 정자가 있다. 단종이 죽고 난 뒤, 낙화암에서 동강 푸른 물로 몸을 날려 단종을 따른 시녀와 종인들의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사당이 있다.

 

그 사당 앞에 자리 잡은 정자가 동강 푸른물을 굽어보고 있는 금강정이다. 금강정은 세종 10년인 1428년 김복항이 처음으로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금강정을 찾은 날은 벌써 꽤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그 주변에서 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 금강정의 슬픈 이야기는 모르고 있는 듯하다.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해가 세조 3년인 1457년이었으니, 시녀와 종인들이 이곳에 와 동강 푸른물에 몸을 날렸을 때는, 이미 금강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마 시녀와 종인들은 단종이 머물던 동헌을 떠나, 이곳으로 와 이 금강정에서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을까? 동강을 굽어보고 있는 금강정은 대답이 없다.  

 

금강정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자삼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금강정이란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정면 네 칸의 팔작 정자

 

금강정은 이자삼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정자를 고쳐짓고 금강정이라 이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송시열이 숙종 10년인 1684년에 쓴 금강정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금강정은 처음으로 이 자리에 짓고 나서 벌써 60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금강정은 30cm 정도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둥근 기둥을 이용하여 정자를 지었다.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정자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머름형태의 평난간을 둘러놓았다. 화려하지 않은 금강정의 처마를 올려다보면 조금은 색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처마 밑 장식을 용이나 닭 등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금강정은 잉어를 조각한 듯하다. 아마 밑을 흐르는 동강 맑은 물을 상징이라도 하는 것인가 보다.

 

금강정은 30cm 정도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둥근 기둥을 이용하여 정자를 지었다.

잉어를 조각해 놓은 듯하다.

 

아름다운 금강정, 세월은 슬픔도 잊어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금강정. 그동안 수차례 보수를 하였겠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정자 뒤편에 있는 시녀와 종인들의 넋을 위하는 민충사와 함께 동강을 굽어보고 있어, 역사를 알고 나니 슬픔을 간직한 듯 보인다.

 

금강정 앞으로는 동강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조망대를 설치하였다.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니 멀리 흘러 남한강으로 이름을 바꿔 흐르는 동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모시던 임금이 사약을 받는 모습을 본 시녀와 종인들도 이렇게 동강 맑은 물을 내려다보았을까? 그 때 그들의 마음을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금강정에서 바라본 동강. 단종이 죽은 후 이곳에서 동강으로 뛰어 든 시녀와 종인들이 마음을 느껴보다.

 

 

금강정은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난간에는 여기저기 낙서를 해 놓은 것이 보인다.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서로의 사랑을 약속하면서 굳은 맹서라도 한 것일까? 역사의 슬픈 흔적은 그 낙서로 인해 다 지워지는 듯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을 다 잊는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하는가 보다. 여기저기 쓰인 낙서를 보다가 쓴 웃음을 짓고 만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낙서.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화가 나지도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할 뿐.

 

오늘도 금강정 앞으로 흐르는 동강은 그렇게 말이 없다. 600년 전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자에 올라 동강을 굽어보며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 찬 물로 뛰어들었을 시녀와 종인들이 넋이라도 위로를 할 생각으로.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슬픔을 안은 역사는 그리 계속되는 것인지. 

 

조망대 난간에 쓰인 낙서

젊은이들이 사랑을 확인한 것일까?
 

 

전북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이곳에는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작은 정자 하나거 서 있다. 정자의 이름은 ‘삼기정’이라 하는데, 삼기정은 당시 고산현감 최득지가 짓고, 삼기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지은 이는 하연으로 전해진다. 최득지는 세종 21년인 1439년에 고산현감이 되었다. 당시 정몽주의 문인이었던 하연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관내를 순시하는 도중, 고산읍에 들렀다가 소풍을 나간 곳이 삼기리였다.

 

하연은 이곳이 앞으로 흐르는 만경강과 기암, 그리고 송림이 우거진 것을 보고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었다고 하여 ‘삼기(三奇)’ 라 송판에 써주었다. 당시 고산현감 최득지가 정자를 세우고 하연에게서 기문을 받아 정자에 거니 이것이 삼기정이다. 지금의 삼기리라는 명칭도 이 정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율헌 유허지에 서 있는 삼기정

 

삼기정을 축조한 최득지(고려 우왕 5년, 1379~ 단종3년, 1455년)는 본관은 전주, 호는 율헌이다. 태종 13년인 1413년에 장흥교수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환갑을 맞이하던 세종21년인 1439년에 고산현감이 되었다.

 

현 삼기정 건물의 상량에는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三年庚午重建世宗己未創建'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고산현감 최득지가 삼기정을 축조한 것은 세종21년인 1439년이고, 그 뒤 오랜 세월 퇴락과 중수를 거듭해 오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처음에 이 삼기정을 세운지 벌써 520년이나 지났다.

 

삼기정은 정면과 측면 모두 두 칸씩이다. 정자 안에는 하연의 ‘삼기정기문’이 걸려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이곳의 풍광에 얼마나 빠졌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고산현 동쪽 오리쯤에 자그마한 언덕이 있으니 절벽이 깎아질렀고 그 아래에는 긴 내가 맑게 굽어 흐르고 위에는 노송이 울창하여 푸르렀다. 그 서쪽에는 평평한 들이 펼쳐 있다. 임인년(1422년) 봄에 나는 고산읍에 간 일이 있어 이 언덕에 오르게 되었다. 연하 초목이 모두 아름답게 내 눈앞에 깔려 있는데 수석과 송림이 더욱 기이하게 보였다. 이에 삼기라 이름 하여 깎은 나무에 글씨를 써주었더니 이에 현감 최득지가 여기에 정자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니, 내가 처음 이름을 지어 준 것으로써 그러한 뜻에서 사양할 수 없이 되었다.

 

생각하건대 사람의 마음은 물건을 보고 감동되는 것으로 눈을 달리하여 보게 된 그 느낌은 더욱 간절했다. 맑은 물을 보게 되니 나의 천부의 본성을 더욱 맑게 하고 바위가 엄엄한 것을 보니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른 벌을 보게 되니 곧고 굳은 절개 뽑아낼 수 없는 확고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하며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른 벌을 보게 되니 곧고 굳은 절개를 더욱 높게 하여 이 언덕의 세 가지 물건이야말로 어찌 경치가 아름답거나 찌는 더위에 재미있게 논다는 것 뿐이리요.

 

내가 다른 사람과 소견을 달리하고 있는 것은 뒷날에 선비들이 이 언덕에 오르면 느끼고 뜻을 두게 될 것으로 생각 할진대 마음을 삼가 하고 뜻을 길러내는 기회가 족히 되어야 할지라. 또한 목욕을 하고 풍월을 하는 행락도 있을 것으로 전날에 내가 이름을 지은 뜻이 거의 같을지다.」

 

 

 

옛 선조의 마음을 읽어보다

 

정자에 걸려있는 삼기정이란 편액은 강암 송성용이 썼다고 한다. 작은 정자에 올라 주변을 들러본다. 옛날 선조가 느낀 삼기는 느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이곳의 풍광은 아직 옛 모습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바위가 있어, 아마도 과거에는 이곳이 꽤 큰 바위 등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크지 않은 정자 마루에 앉아 선조의 숨결을 느껴본다. 아주 오래 전 내 선대인 하연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이렇게 호흡을 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만, 이다음에 또 누군가 나의 후대도 우연찮은 기회에, 이렇게 나를 기억할 수도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옛 말씀에 ‘후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라’고 하신 것인지. 오늘 또 삼기정이란 작은 정자에서 또 하나의 공부를 한다.


 

하연(1376∼1453)

선조 하연은 경상도 진주(지금의 산청)에서 태어났다. 고려왕조 최후의 충신이었던 정몽주(1337∼1392)로부터 학문을 사사한 하연은, 조선 태조 때인 1396년 과거시험 병과 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 뒤 많은 요직을 거친 하연은 태종 이방원 시절에는 ‘사헌부 간관(諫官)’으로 일하면서, 항상 흐트러짐이 없이 의연한 태도를 보여 임금이 직접 손을 잡고 치하할 정도로 인정받은 관료였다.

 

1423년 대사헌, 1425년 경상도관찰사, 1431년에는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1436년 예조와 이조 판서를 거쳤다. 70세인 1445년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영의정 황희(1363∼1452), 좌의정 신개(1374∼1446)와 함께 ‘조선의 빛나는 삼정승 시대’를 연 주역이기도 했다. 당시 세자 섭정을 하고 있던 문종의 스승으로도 활동한 하연은, 좌의정을 거쳐 세종 39년인 1449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농촌진흥청을 끼고 서호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축만제 쪽으로 가다가 보면, 서호가 시작되는 곳 좌측에 정자 한 기가 서 있다. '항미정(杭眉亭)'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 이 정자는 조선조 순조 31년인 1831년, 당시 화성유수 박기수가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건립한 지 180년이 지난 이 항미정은 현재 수원시 지정 향토유적 제1호이다. 항미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중국시인 소동파의 시구 중 '서호는 항주의 미목 같다'고 읊은 내용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하지만 '항미'라는 말 그대로를 풀어보아도 미인의 눈썹이요, 물의 가장자리라는 뜻이니, 굳이 중국의 시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는지.

 

 

항미정에 오르다

 

토요일 오후. 그동안 항미정을 몇 번이고 찾아가려 했으나, 번번이 시기를 놓쳤다. 항미정과 축만제를 한 바퀴 돌아볼 심산으로 길을 나선다. 농촌진흥청 정문을 바라보고 우측으로 조금 담을 끼고 가면, 축만제로 들어가는 냇가 옆의 길이 보인다. 항미정은 그 길 끄트머리 서호가 시작되는 곳에 있다.

 

 

 

항미정에 오르면 축만제인 서호가 한눈에 보인다. 아마도 이 축만제의 풍광을 보기 위해 지은 듯하다. 축만제는 조선 정조 23년인 1799년 농업용 저수지로 축조됐다. 당시에 만석거와 만년제, 축만제 세 곳에 저수지를 조성했는데, 그 중 서쪽에 있어서 서호라고 불렸다.

 

예전부터 서호는 낙조와 겨울철새 들이 찾아드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잉어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명성을 얻었다. 아마 화성유수 박기수도 이곳 서호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넘어가는 해를 보면서 시 한 구절을 짓지는 않았을까?

 

 

정자 뒤편에 달아낸 것은 무엇일까?

 

항미정은 정면 네 칸에 측면 한 칸 반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정자를 바라보면서 우측 한 칸은 두 칸으로 지어져 'ㄴ'자 형태의 정자로 보인다. 홑처마 목조건물로 지어진 항미정은 기둥 위에 사각형의 도리를 얹은 납도리집이다. 정자를 보면서 우측 세 칸은 누마루를 깔고, 좌측 한 칸은 마루를 높여 반 칸을 앞으로 더 달아냈다.

 

주추는 모두 마름모꼴의 사각형 주추를 사용했으며, 좌측 끝은 주추를 높인 장초석을 이용하였다. 뒤편에는 판문을 내었는데, 좌측에도 측면에 판문을 달아냈다. 그저 평범한 정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정자 뒤편으로 돌아가니 흡사 통로를 만든 듯한 구조물이 보인다. 두 칸을 덧달아 낸 이곳은 무엇일까? 그곳을 바라보면서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정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다. 혹 이곳을 통로로 해서 그 뒤편에 건물과 연결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도 아니면 혹 유수를 비롯한 사대부가들이 정자를 차지하고 앉아있을 때, 그 밑에 육방관속이라도 편히 쉬기 위한 장소는 아니었는지.

 

 

일반적인 정자와는 조금은 다른 항미정. 마루에 잠시 올라앉아 본다. 서호의 주변을 걷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저들도 이 항미정의 풍취를 알고는 있을까? 이렇게 항미정의 마루에 앉아 옛 선인들의 숨결을 느껴본다. 아마도 옛 분들도 이렇게 마루에 올라앉아 서호의 낙조를 보면서, 세상 시름을 잊지는 않았을까? 이곳에 세상 시름을 내려놓는다.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될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명으로 빗물 한 가족이 대지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 가족은 한반도 등마루인 이곳 삼수령(三水嶺)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삼수령만이 전해주고 있다.」 이곳에 떨어진 빗줄기는 그렇게 흘러 세 곳의 물길로 합류가 된다.

 

 

양대 강의 발원지 태백

 

강원도 태백의 해발 935m인 삼수령 마루에 적혀있는 글이다. 삼수령의 고개이름은 큰 피재로 알려져 있다. 이 길은 태백시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낙동강, 한강, 오십천의 3대강이 발원하고, 민족의 척추인 태백산을 상징하는 삼수령이기도 하다. 태백에서 분출되는 낙동강은 남으로 흘러 영남 곡창의 질펀한 풍요를 점지하고, 공업입국의 공도들을 자리하게 했다.

 

한강 역시 동북서로 물길을 만들면서 한만족의 수도를 일깨우고, 부국의 기틀인 경인지역을 일으켜 세웠다. 오십천도 동으로 흘러 동해안 시대를 창출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삼수령 고개에서 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남자 분은 이곳에 비가내리거나 눈이 내려 녹아 물이 흐르면, 남으로는 낙동강으로 스며들고, 동북으로는 한강으로 스며들며, 동으로는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로 빠진다고 이야기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강의 발원이란 끊임없이 물이 나오는 곳을 그 발원지로 삼기 때문에 삼수령에 떨어지는 비가 발원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떨어지는 비가 3대 강과 천으로 스며들어 그 물과 합류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삼수정에 오르다.

 

삼수령 분기점에는 탑이 서 있다. 해발과 이곳이 오십천과 한강, 낙동강의 시원지가 되는 곳이기 때문에 삼수령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이 삼수령은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길이다.

 

 

삼수령 탑이 서있는 곁에는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정자가 서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정자는 누각으로 지어졌는데, 삼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자에 오르니 밑으로는 깊은 골이 보이고, 저 멀리 백두대간의 봉우리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깊은 숨을 쉬어본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가 상쾌하다.

 

누구라 이곳에 올라 글 하나 적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이 정자가 오래 전에 지어졌다고 한다면,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올라 글 몇 수 남겼을 만한 그러한 정취다. 나라도 글을 잘 쓴다면 짧은 글 한토막이라도 남기고 싶다. 하지만 그런 시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참으로 역부족한 인사이니 어찌하랴. 능력이 없음을 탓할 수밖에.

 

 

삼수령은 차로 오를 수 있는 길이다. 태백시내에서 이곳을 지나면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로 갈 수가 있고, 이곳을 넘어 태백으로 들어가면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를 만날 수가 있다. 삼수정 위에서 주변 경치를 돌아본다. 걸어서 이곳을 올랐다면 그대로 선계가 아닐까?

 

지금 이렇게 차로 오른 삼수령이 조금은 서운한 것은, 그런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어서인가 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는 삼수령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오늘도 하늘에서 내려선 가족들은 또 이렇게 세 곳으로 헤어져 물길을 만들려나?

어제 하루 비가 왔다고는 하지만, 8월 13일은 아직 여름이다. 한 낮의 수은주가 31도를 넘었다. 이런 날 점심을 먹고 나면 괜히 나른해진다. 그런 나른한 마음을 바로잡는 데는 땀을 한 번 흘리는 것이 제일이란 생각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만석공원으로 달려갔다. 땀 한번 쏟아보자고.

 

만석거는 일왕저수지, 교구정 방죽, 북지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가뭄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정조 19년인 1795년 이 만석거를 축조하였다. 이 만석거로 인해 황폐했던 땅에서 쌀 만석을 더 생산하였다고 하여, 그 명칭을 ‘만석거’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만석거 일대는 현재 ‘만석공원’으로 조성하여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위치한다.

 

 

만석거를 바라보는 정자 영화정

 

저수지 조성 후 쌀 만석을 더 생산했다고 해서 ‘만석거’라는 명칭을 붙인 이 저수지를 일제는 ‘일왕저수지’로 개명을 했다. 1920년대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한다는 이유로, 우리고유의 지명을 말살시키려는 음모였다. 그렇게 생겨난 명칭이 바로 일왕저수지이다. 그러나 이곳을 아직도 그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일제의 잔재가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만석거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가 있다. 지금은 ‘영화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이 영화정의 원래 이름은 ‘교귀정’이었다. 이 교귀정은 시구관의 부사와 유수들이 거북이 모양의 관인을 주고받은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원래 교귀정은 사라지고 만석공원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교귀정 자리에서 200m 정도 동북쪽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영화정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원래는 8칸 정도의 정자이며 북쪽으로 난 날개채 2칸은 온돌이고, 남쪽으로 난 세로로 두 칸은 포판인데, 3면과 온돌 뒤쪽은 모두 퇴를 반 칸씩 달아내 하엽난간을 두르고 있다고 하였다. 정자 서쪽에는 대문을 내고, 남쪽으로는 작은 문을 냈는데 둘레는 네모꼴 단장이라고 소개를 한다. 1796년 병진년 행차시에 영화정이란 편액을 달도록 했다는 것이다.

 

복원한 영화정, 만석거를 바라볼 수 있도록 담장을 낮춰

 

현재의 영화정은 1996년 10월에 신축, 복원한 건물이다. 영화정의 형태는 화성성역의궤에 기록이 되어있어 그 모습을 따랐을 것이다. 더운 날 찾아간 영화정. 한 옆으로는 하늘 높게 자란 소나무들이 서 있고, 앞 만석거에는 연잎들이 파란색을 띠고 있어 더위에 지친 마음들을 달래주고 있다.

 

 

 

전국의 정자를 답사하면서 느끼는 것은, 역시 그 정자의 누마루에 앉아 경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야 과거에 그 정자에 앉아있던 선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정을 돌아보면서, 참으로 어이가 없다. 대문이고 작은문이고, 건물 안에 방문이고 모두가 다 꽁꽁 잠겨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 누마루에 앉아 저수지쪽으로 낮게 조성을 한 담장너머로 보이는 만석거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가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가끔 이런 건물이나 정자들을 만나면 울화가 치민다. 관리를 하기 싫어서 이런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정자들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올라가 경치를 즐기고는 한다. 가까운 곳에 있는 수원 화성의 아름다운 정자 ‘방화수류정’ 역시 보물이다. 화성의 많은 전각들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올라가 쉬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직 그런 곳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그저 잠가놓고 사방에 감시 센서를 세워놓으면 관리가 제대로 되는지 아는가 보다. 이런 사고는 참 모자람의 극치란 생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는 이런 처사, 하루 속히 그런 사고가 바뀌기를 고대한다.

 

 

 

문화재란 사람들이 직접 그곳을 느끼고 더 감사를 할 때 제대로 된 보존이 이루어진다. 문마다 잠가놓고 정작 울안에 수북이 자라고 있는 풀조차 정리가 되지 않은 영화정.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만석공원에 볼만한 전각 하나가, 잠가놓는 것이 능사라는 생각으로 서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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