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 산 59에는 전서공 임난수 장군의 부안임씨 가묘가 있다. 연기군 향토유적 제4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가묘는 고려 말 최영 장군과 더불어 탐라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임난수 장군을 기리는 가묘이다. 임난수 장군은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우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현 남면 양화리에 은거하였다.

연기군 나성리에 있는 문화재를 답사하는 중에, 마을주민들이 가묘 뒤에 석불입상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연기군 홈페이지에서는 석불입상에 대한 문화재 정보가 전무하다. 그래도 혹 모른다는 생각에 길을 물어 찾아보기로 했다. 답사 증에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답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전설을 갖고 있는 석불입상. 30분이 넘게 덩굴을 헤치고 찾아다녔다.
 
환삼덩굴을 30분이나 헤집고 다니다

가묘 뒤라고 해서 찾아보았다. 그러나 가묘 뒤로 길이 보이지를 않는다. 주변은 여름내 자란 풀들이 허리까지 차오른다. 거기다가 환삼덩굴은 가시가 있어 맨살에 스치면 금방 살이 부르트기 일쑤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았으나, 석불입상은 보이지가 않는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는데, 옷은 살에 감겨든다.

30여분을 길도 없는 덩굴을 헤치면서 다니다가 보니, 저만큼 무엇인가가 보인다. 거미줄과 덩굴더미를 헤치고 가보니 정말로 석불입상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서 있었다는 주민들의 말처럼, 석불입상은 보기에도 범상치가 않다. 뒷면은 그냥 돌을 쪼아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높이는 2m 정도가 되는 이 석불입상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풀숲에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다.


낮은 곳은 무릎까지 깊은 곳은 가슴까지 덩굴이 우거져 있다. 아래사진 가운데 흰 것이 석불입상이다.

지방의 장인에 의해 제작된 듯

석불입상은 눈썹이 굵게 표현하였다. 눈은 가늘고 길게 옆으로 -자로 팠는데, 쪼아낸 흔적이 보인다. 코는 뭉툭하게 표현을 하였다. 입은 작고 양끝이 약간 위로 치켜 올려졌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한 것으로 보아, 석불입상이 틀림이 없다. 경기 남부와 충청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고려 때의 거대석불과 같은 형태로 제작이 되었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가슴에는 손의 형상을 조각하다가 만듯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미완성인 석불입상과 같은 모습이다. 머리는 이마위로 잘려나갔다. 아마 그 위에 보개석이라도 얹을 생각이었나 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석불입상이 이런 곳에 서 있게 되었을까? 혹 전서공 임난수 장군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이런 형태로 보아 고려 시대에 재작하다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마을 주민들이 이야기로 들려주는 이 석불입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 이곳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하여 대가 끊길 것을 생각하고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백발 노승이 찾아와 시주를 달래서 후히 대접하고 가정 이야기를 하였더니, 노승이 그 석불입상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며 정성껏 예불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단다. 그 부부는 음식을 차려놓고 한 달 동안 정성을 다해 예불을 드리자, 어느 날 저녁 그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그대들의 지성이 지극해서 아들을 점지하니 잘 길러서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날 찾아라.”라고 말을 했다. 꿈을 꾸고 난 뒤 태기가 있어 열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아기가 자라서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단란하게 살던 노부부가 모두 병으로 죽게 될 처지가 되었다. 지난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라.”라는 꿈에서 본 부처님을 회상하고 아들에게 그 말을 하였더니, 아들은 곧 석불입상을 찾아가 부모님의 병이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내일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가 보면 둥근 바위가 있는데, 그 밑에 큰 더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캐서 부모님께 달여 드리면 병이 곧 나을 것이다. 만일 내일이 지나면 그 더덕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니 날짜를 어기지 말라.”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들이 산에 올라가 바위 밑을 보니 정말로 거기에 커다란 더덕이 있었다. 아들이 그것을 캐어 부모님께 달여 드리자 곧 완쾌되었다.(자료 / 연기실록)



맨 아래 사진이 부안 임씨의 가묘이다.

전설은 여기서 그치지를 않는다. 마을에 사는 불효자가 그 말을 듣고 석불입상에 빌러 큰 돌을 얻었는데,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돈이 모두 뱀이 되어 불효자의 온몸을 감아 질식해 죽였다고 한다. 나성리 마을 뒤편에 서 있는 미완성인 석불입상. 지정은 되지가 않았지만 그보다 더 큰 아름다운 지니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덩굴을 헤치면서 찾아낸 석불입상. 그런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채, 말없이 오랜 시간을 주민들과 무언의 대화를 하며 그 곳에 서 있었다.

비란 어느 인물의 행적을 적어 후대에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에 비문이 없다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뛰어난 조각기법을 보이는 비의 머릿돌을 갖고 있고, 비 머리에는 제목을 적어 넣는 네모난 부분을 마련했으면서도 정작 비에는  단 한 자의 비문이 없는 비. 이러한 비를 '백비'라 부르는데, 이 비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5 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이 비는 뛰어난 조각기법이나 그 솜씨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비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거북이의 몸으로 되어있으나, 귀두가 깨어져 나간 것인지 말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조로 넘어오면서 비를 받치는 귀부는, 대개 몸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를 형상화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연곡리의 귀부는 말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연곡리 석비를 보호하고 있는 전각과 비의 받침인 귀부

말머리에 백비, 누구의 비인가?

보물 제404호로 지정이 된 연곡리 석비는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와 몸돌인 비, 그리고 아홉마리의 용을 조각한 머릿돌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받침돌인 귀부는 등의 무늬는 거북 등의 무늬와 같이 정교하게 조각이 되어 있어, 상당히 조각기법이 뛰어나다. 거북이의 앞발은 파손이 되었으며, 머리의 형태는 마치 말머리와 같은 모습이다. 이 귀두가 처음부터 이렇게 생긴 것은 아닌 듯하다. 앞부분이 절단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귀두를 보면 머리의 옆에 지느러미와 같은 형태의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보이는 귀두인 용머리인 것으로 처음에 조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귀두는 앞부분이 어떻게 이런 형태로 남아있는 것일까? 그 외에 귀두부분은 용머리 형상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해서 이런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받침돌의 거북은 그 문양들을 볼때 상당히 기능이 뛰어난 장인에 의해서 섬세하게 조각이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태의 귀두라면, 당연히 중간에 누구가에 의해 훼손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겠다.

비문이 없는 백비, 누구의 비일까?


비에는 전, 후면을 비롯해 측면에도 글자 한 자가 없다. 

찬찬히 돌아보면 여기저기 금이 가기는 했어도, 전체적인 비의 모습은 뛰어나다. 등 무늬인 귀갑문은 정교하며,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비몸을 받치고 있는 받침부분은 연꽃을 조각하였는데, 잎은 작고 양감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귀부로 꾸며진 받침돌과 옆으로 긴 네모꼴의 비머리 형채 등은 고려 초기의 비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비의 위에 얹은 머릿돌에는 모두 9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그 용들은 서로 몸을 꼬아 뒤틀고 있는데, 정교한 그 조각은 가히 뛰어난 작품이다. 아홉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물기 위해 다투는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이렇듯 뛰어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연곡리 석비. 도대체 그 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단 한 자의 기록도 없는 비만을 갖고는 그 주인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다.

말머리에 비문이 없는 백비. 그리고 전체적인 조각기법이 뛰어난 이 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일부러 비문을 적지 않았는지, 혹은 누군가에 의헤 훼손이 되어 비문이 사라진 것인지 궁금하다. 혹 이 비에 어느 인물의 일대기를 적으려고 마련을 했다가, 갑자기 폐사가 되는 바람에 적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백비로 남아있는 뛰어난 연곡리의 석비는 그렇게 사람의 애간장을 태운다. 

전북 남원시 왕정동 482-1에 소재한 사적 만복사지. 만복사지 한편에는 전각이 한 채 있다. 이 전각 안에는 보물 제43호인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만복사지를 세 번이나 찾아갔는데, 이상하게 이곳을 찾을 때마다 해가 떨어질 시간이다. 그래서 항상 전각 안에 있는 석불입상의 사진은 늘 그늘이 드려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만복사 절터 전각 안에 서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 정도의 석불입상이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창건된 사찰인데, 이 석불입상도 창건 당시 조형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만복사에는 동쪽에 5층의 전각, 서쪽에 2층의 전각이 있고, 그 안에 35척의 금동불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창건 당시 만복사의 사세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손과 발이 없어진 채 발견돼

이 석불입상은 민머리의 정수리에 상투 모양의 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다. 얼굴은 자연스럽게 살이 오른 타원형으로, 눈과 코, 입의 형태가 자연스러워 원만한 인상을 보여준다. 법의는 둥근 칼라와 같은 독특한 옷깃이 보인다. 신체의 굴곡은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며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유려하게 처리하였다. 1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뛰어난 작품이다.

이 석불입상은 발견 당시 발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었으며, 광배도 후에 발견이 되었다. 최근 묻혀있던 부분을 들어내고, 깨어진 광배도 복원작업이 이루어져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 석불입상은 오른팔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팔은 아래로 내려서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이 석불입상의 얼굴은 원만하게 조형이 되었으며, 목 뒤에는 칼라와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끼울 수 있도록 제작된 손은 사라져버렸다.

석불입상의 뒤편에 붙인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되어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머리광배에는 활짝 핀 연꽃잎과 연꽃줄기가 새겨져 있고, 몸광배에는 연꽃줄기만이 새겨져 있다. 바깥쪽으로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작은 화불을 새겨 넣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뒤편에도 선각이 된 불상을 새겨

손과 발이 사라진 만복사지 석불입상. 얼굴 부분에서도 눈 부분이 조금 손상이 되었으며, 끼울 수 있도록 제작된 팔이 보이지가 않아 불편해 보인다. 아마 팔과 다리가 제대로만 있었다고 해도, 이 석불입상의 가치는 더 있었을 것이다. 발밑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팔각형의 납작한 돌을 놓고, 그 뒤에 연꽃으로 장식한 둥근 돌을 얹었다.


받침돌과 광배에 새겨진 화불
 
이 석불입상의 뒷면에도 선각으로 처리한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한 손에 약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불로 추정이 된다. 이렇게 바위의 양편을 이용한 석불의 조형은 매우 드문 형태이다. 두 손이 사라진 만복사지 석불입상. 그 손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름다움을 위해 손을 끼울 수 있도록 제작한 석불입상이, 오히려 두 손을 잃는 계기가 되었나 보다.



뒷면에 선각처리한 불상은 약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불로 추정한다.

이번 답사에도 석양에 그늘이 드리운 석불입상을 찍는 바람에, 제대로 된 사진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실력이 있는 블로거라면 당연히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어 내었겠지만. 그저 자료 정도를 찍는 실력밖에 없으니 어찌하랴. 다음에는 오전에 찾아가 보아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 그늘을 길게 끌며 만복사지를 떠난다.

 

진천군 지역을 답사하다가 답사하는 중에, 길가에 서 있는 아주 작은 전각이 하나 눈에 띤다. 앞에는 오래되어 바란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곁에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가 그래도 이 전각이 역사적인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무슨 전각일까? 궁금한 것도 있으려니와, 이런 길가에 서 있는 전각에 우리가 모를 슬픔이라도 있을까보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775-1에 해당하는 작은 전각. 앞으로는 사석삼거리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우측으로는 청주와 오창으로 향하는 17번 도로이고, 좌측으로는 진천읍과 진천IC로 나가는 21번 도로이다. 전각 앞으로 가니 ‘일문사충(一門四忠)’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말 그대로 한 집에서 네 명의 충신을 배출했다는 뜻이다.



쇠스랑충신의 충혼을 배우다


사각형으로 마련한 전각에는 일문사충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그 안에는 충신들의 정려가 걸려있다. 위와 아래로 두 개의 정려에 걸린 4명은 바로 이 지역에서 충혼을 불태운 분들이다. 조선조 영조 4년인 1728년에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청주와 진천을 함락시키고, 이지경이란 자가 자칭 진천현감이 되어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때 사석리에 거주하던 김천주는 이들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동생 천장과 아들 성추, 그리고 조카 성옥 등이 마음을 합해, 이인좌의 무리들에게 대항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무기도 없이 이인좌의 무리들과 혈전을 벌였다. 맨손으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라, 쇠스랑과 괭이 등으로 무장을 하고 진천을 탈환하기로 했다.





이인좌는 남인의 명문출신이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남인들이 정계에서 소외된 것을 불만을 삼은 이인좌는 남인명문가들의 후광을 업고,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728년 3월 15일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에 이르러 도순문사 오명항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패하였다.


이 와중에 진천에서 이지경이란 자가 스스로 현감이라 칭하고 백성들을 괴롭히자, 동생과 아들, 숙질과 힘을 합하여 반란군을 섬멸하자고 뜻을 모은 것이다. 쇠스랑과 괭이 등으로 무장을 한 이들은 진천을 탈환하기 위해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족으로 패배하여 모두 전사를 하였다.


네 분의 충혼 앞에 머리를 숙이다.


정려에는 위편 우측에는 <충신 가선대부 김천주 지려>라 쓰고, 그 옆으로는 <충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김천장 지려>라고 적혀있다. 형제가 나란히 정려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뒤 늦게 이들의 충심을 알게 된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향제케 하였다. 그 뒤 고종 22년인 1885년에 아들 성추와 조카 성옥도 정려를 내려 함께 병정케 하였다.





밑의 정려에는 우측에 충신 김성추를, 좌측에는 김성옥을 배향하였다. 일문에서 네 명의 충신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을 알려주는 작은 전각이다. 이 전각은 안내판에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화재 지정은 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어디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야만 소중한 것일까? 이 네 분의 나라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마음이란 생각이다.


길가에 서 있는 외로운 작은 전각하나. 쇠스랑과 괭이를 들고 무장을 한 반군들과 혈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죽음을 당한 이분들의 그 충정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새롭게 조명을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이 땅 한 귀퉁이 한 뼘이라도, 이런 충혼들의 뜨거운 피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종교행위 자체를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종교를 갖던지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종교행위로 인해 남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적 제414호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소재한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 및 태실을 말한다. 태실이란 아이가 태어난 뒤 나오는 탯줄을 보관하는 곳을 말한다. 이 일대는 사적지로 조성을 한 후 한참 주변 정비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가야사람 김유신은 왜 진천 땅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내막을 알면, 이해가 간다.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라는 계양리에 세워진 유허비

김유신의 탄생지 상계리 계양마을

김유신이 태어난 곳은 만노군(현 진천군) 태수로 부임한, 김유신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집무를 보던 상계리 계양마을이다. 김유신은 진평왕 17년인 595년에 이곳에서 태어나 나이 15세가 되던 진평왕 31년인 609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의 군주가 되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유신은 선덕여왕 때는 상장군이 되고, 무열왕 7년인 660년에는 상대등이 되어 당군과 연합, 백제를 멸망시켰다. 8년 뒤인 668년에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태대각간이 되었다. 나이가 먹은 김유신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되찾은 후, 673년 음력 7월에 병이 악화되어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신이 죽은 후 한참 후인 835년에 김유신은 ‘흥무대왕’으로 추존이 되었다.



사적 안에서 종교집단의 부흥회가 웬 말.

지금의 계양마을 입구인 장군터라 불리는 태수 관저가 있던 곳에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이 일대에는 장군의 역사가 많이 남아있다. 김유신과 관계가 있는 태실과 투구바위 등을 돌아보기 위해 찾아갔다. 그런데 무슨 약장수를 방불케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한창이다. 시끄럽게 스피커 볼륨을 높여 놓고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있다. 어림잡아 수백 명은 되는 듯하다.

유허비를 돌아본 후 전각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스피커에서는 연신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연사의 뒤편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 ○○ 기도회>인가하는 글을 쓰여 있다. 순간 참 어이가 없다. 모처럼 맞는 휴일에 자녀들과 함께 사적지를 찾은 사람들도,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하고 돌아선다.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인 옛 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

그렇게 기도회를 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일까?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을 보니 ○○교회, △△교회 라는 글이 보인다. 여러 곳의 교회에서 장소가 넓은 이곳을 택해 합동기도회를 하는가보다. 그런데 어떻게 사적지 안에서 이런 종교행위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음 날 진천군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혹 종교집회를 허락해 준 사실이 있는가를. 전혀 모르는 일이란다. 그렇게 사적지에서 시끄럽게 집회를 하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사적지. 그것도 공휴일에 이런 대책 없는 행동을 한 종교인들을, 과연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사적지 안에서 종교적인 집회를 하는 모습과 줄지어 선 차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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