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행위 자체를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종교를 갖던지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종교행위로 인해 남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적 제414호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소재한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 및 태실을 말한다. 태실이란 아이가 태어난 뒤 나오는 탯줄을 보관하는 곳을 말한다. 이 일대는 사적지로 조성을 한 후 한참 주변 정비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가야사람 김유신은 왜 진천 땅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내막을 알면, 이해가 간다.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라는 계양리에 세워진 유허비

김유신의 탄생지 상계리 계양마을

김유신이 태어난 곳은 만노군(현 진천군) 태수로 부임한, 김유신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집무를 보던 상계리 계양마을이다. 김유신은 진평왕 17년인 595년에 이곳에서 태어나 나이 15세가 되던 진평왕 31년인 609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의 군주가 되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유신은 선덕여왕 때는 상장군이 되고, 무열왕 7년인 660년에는 상대등이 되어 당군과 연합, 백제를 멸망시켰다. 8년 뒤인 668년에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태대각간이 되었다. 나이가 먹은 김유신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되찾은 후, 673년 음력 7월에 병이 악화되어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신이 죽은 후 한참 후인 835년에 김유신은 ‘흥무대왕’으로 추존이 되었다.



사적 안에서 종교집단의 부흥회가 웬 말.

지금의 계양마을 입구인 장군터라 불리는 태수 관저가 있던 곳에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이 일대에는 장군의 역사가 많이 남아있다. 김유신과 관계가 있는 태실과 투구바위 등을 돌아보기 위해 찾아갔다. 그런데 무슨 약장수를 방불케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한창이다. 시끄럽게 스피커 볼륨을 높여 놓고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있다. 어림잡아 수백 명은 되는 듯하다.

유허비를 돌아본 후 전각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스피커에서는 연신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연사의 뒤편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 ○○ 기도회>인가하는 글을 쓰여 있다. 순간 참 어이가 없다. 모처럼 맞는 휴일에 자녀들과 함께 사적지를 찾은 사람들도,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하고 돌아선다.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인 옛 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

그렇게 기도회를 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일까?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을 보니 ○○교회, △△교회 라는 글이 보인다. 여러 곳의 교회에서 장소가 넓은 이곳을 택해 합동기도회를 하는가보다. 그런데 어떻게 사적지 안에서 이런 종교행위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음 날 진천군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혹 종교집회를 허락해 준 사실이 있는가를. 전혀 모르는 일이란다. 그렇게 사적지에서 시끄럽게 집회를 하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사적지. 그것도 공휴일에 이런 대책 없는 행동을 한 종교인들을, 과연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사적지 안에서 종교적인 집회를 하는 모습과 줄지어 선 차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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