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모악산 중턱에 소재한 대원사는, 백제 의자왕 20년인 660년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대원사 대웅전에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215호로 지정된 대웅전 삼존불이 있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왼쪽에는 아미타부처님, 그리고 오른쪽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이 자리한다. 목조로 조성된 이 삼존불은 조선후기의 불상 양식을 따른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삼존불은 1670년에 조성된 것으로, 회감 보혜스님 계보의 맥을 잇고 있는 스님들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약사여래부처님은 중생의 병을 치료해주고, 생명을 연장해주는 의왕부처님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안락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모악산 대원사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 좌측부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이다 

약사여래부처님 손은 약손

어제(9, 17) 오후 모악산 산사에 볼일이 있어 산을 올랐다. 잠시 밖을 나가기만 해도 카메라 하나는 꼭 지참을 한다. 지난 번 산에 오르다가 렌즈를 박살내고 나서, 가급적이면 산에 오를 때는 작은 동영상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를 지참한다.

산을 올라 산사에 도착을 했는데, 대웅전 지붕 위에 벌떼가 까맣게 날고 있다. 무슨 일일까? 올 해는 한봉을 치는 분들이 모두 망했다는 소리를 한다. 날이 너무 뜨거워 벌들이 다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절집에도 10여개의 벌통이 있었는데, 모두 다 비인 상태였다. 그런 차에 저렇게 벌이 날아왔으니 반갑기도 하다.

약사여래불 오른손 목안으로 벌떼들이 까맣게 드나들고 있다.

그런데 그 벌들이 연신 대웅전 안으로 날아 들어간다. 궁금하여 따라 들어갔더니, 이게 무슨 일일까? 세분의 부처님 중 오른쪽에 좌정한 약사여래 좌상의 오른편 손의, 손 목안으로 벌들이 들락거린다. 그 안에 새롭게 집을 지은 것인가 보다. 이런 일이 있을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른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몇 놈이 공격을 한다.

벌침은 약이라는데, 따갑기는 해도 동영상으로 촬영을 하였다. 예전 어릴 때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가 손으로 배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엄마 손은 약손, ○○배는 똥배’라고 하시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하면 희한하게도 살살 아프던 배가 가시고는 했다. 약사여래 부처님 손 목안으로 들어가는 벌들을 보면서 그 생각이 난다.



저 벌들도 올해 무더위에 많이 아팠던 것일까? 그래서 약사여래부처님 손 안으로 들어가 치료를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괜한 생각을 하면서 키득거리고 웃고 있는데, 갑자기 뒷덜미가 따끔하다. 헛된 망상 버리고 정신 차리라고 벌이 한 대 쏘았나보다. 이래저래 약사부처님한테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만 같다.

오층석탑 한 기에 12지신상과 사천왕상, 인왕상, 팔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탑에 조각된 수많은 조각들은 모두 뛰어나다. 보물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구례 화엄사 경내 보제루 앞에 서있는 화엄사 서오층석탑. 통일신라 때의 탑으로 1997년 여름에 탑을 보수 할 때, 부처님 진신사리 22점과 수저 2점, 칼 3점, 금동제방울 1점, 수정염주 1점. 소탑 3점, 금속편 31점등 총 16종 72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서 오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방형탑신을 올렸으며, 기단과 탑신부에 조각으로 장식이 가득하다. 서 오층석탑은 2층의 기단위에 5층의 몸돌을 올렸으며, 여러 장의 돌로 지대석을 놓고, 하대석과 중대석을 하나의 돌로 구성했다. 지대석의 각 면 안상 내에는 12지신상을 우수한 솜씨로 조각하였다. 이러한 조각기법은 화엄사 서 오층석탑이 보이는 특징이다.


몸돌에 돋을새김한 우수한 조각기법

기단석 위층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뜬 우주와 탱주를 새겼으며, 한 면에 두 명씩의 8부신중을 조각하였다. 팔부신중은 금방이라도 탑을 뛰쳐나올 만큼 역동적이다. 이 서 오층석탑의 탑신인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이며, 1층 몸돌의 4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 배치하였다. 탑신의 지붕돌은 각 층마다 밑면에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처마 밑은 수평이 되게 하였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2층의 단이 있는 받침 위로 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가 놓여 있다.


기단석에는 12지신사이 새겨져 있다.

이 서 오층석탑에 이렇게 많은 12지신 상이나 팔부중상, 그리고 사천왕상을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탑의 복원 시에 발견이 된 사리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즉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탑 안에 두었기 때문에, 그 사리를 지키기 위한 수호적 기능을 갖고 있는 사천왕상 등을 조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가 이 탑 안에 복장물은 하나도 도난을 당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발견이 되었다. 

이 탑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조성한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조각상을 각 부분에 새긴 점 등이다. 또한 지붕의 조형이 보다 유연한 느낌을 주고 있고, 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에 보이는 기단석에 안상이 보인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석탑의 남쪽으로는 안상과 연꽃이 조각된 배례석이 놓여 있다. 이 배례석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미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 면에 두 명씩의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의 몸돌
 
한나절 만에 돌아본 화엄사

화엄사에는 국보와 보물들이 많다. 초가을로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한 낮의 날씨는 아직 따갑다. 구례에 볼일이 있어 길을 나섰다가(2010, 9, 16. 오후 3시 경) 화엄사를 들렸다. 그동안 수차례 다녀 온 화엄사다. 그러나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조금은 문화재에 대한 눈을 떴다고 할까? 지금까지 보아오던 문화재와는 또 다른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층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힘이 있어 보인다.
 
화엄사 중심영역에는 국보 제67호 각황전을 비롯하여, 보물 제299호 대웅전, 국보 제12호 각황전 앞 석등, 보물 300호 사자탑 등이 있다. 그리고 보물 제132, 133호인 동, 서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각황전 뒤 계단으로 오르면 국보인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다.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자리한 화엄사. 그 중에서 제일먼저 눈에 띤 것이 바로 서 오층석탑이다.

시간이 없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돌아본 화엄사. 서 오층석탑 하나만으로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듯하다. 그저 바람처럼 지나친 석탑이 못내 아쉬워지는데, 걸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그렇게 야박할 수가 없다. 시간이 되면 다시 한 번 찾아가, 하루 종일 그 문화재들을 붙들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혼자 웃고는 한다. 특히 전국의 사찰에서 만날 수 있는 석불 등, 불상을 볼 때 그렇다. 어떻게 시간에 따라 그 표정의 느낌이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구는 그 때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즉 내 마음이 편하면 불상의 표정이 편하고, 내가 화기가 있으면 불상도 찡그린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공감이 가는 것은, 같은 불상을 보면서도 수시로 그 표정이 변하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고, 어느 때는 준엄한 얼굴이기도 하다. 때로는 노여움을 탄 얼굴이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자비로운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불상의 표정을 보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추스르고는 한다,


진리의 상징, 비로나자불좌상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호저면 중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이곳은 칠봉이라는 계곡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봉우리를 지나 들어가는 막다른 마을이다. 마을 끝에는 탑과 불상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용운사지 석불 좌상과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용운사지 석조비로나자불 좌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고려 전기인 11세기경에 조성된 불상이다. 최근에는 불상 뒤편에 세우는 광배가 발견이 되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을 보면 늘 기분이 좋아진다. 매끄럽지 못한 조각이지만, 그 얼굴은 늘 웃음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불의 얼굴은 광대뼈가 두드러지게 표현을 하였다. 입은 약간 앞으로 튀어 나왔으며, 입 끝이 처져있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큰 편이고 약간 앞으로 구부정한 모습이다. 코는 한쪽이 떨어져나갔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왔는데, 한쪽 끝은 파손이 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례가 잘 맞지 않고 조각 기법은 세련되지 못하였지만, 고려 초기에 이 지역에서 보이는 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렇게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석불의 손은 가슴께로 모아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왼손의 둘째손가락을 오른손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수인을 지권인이라고 하며, 이는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상의 모습이다. 대좌는 밑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마련하였는데, 아래위로 연꽃을 큼지막하게 조각하고, 중간의 돌에는 안상을 하나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 조각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투박하고 세련미는 없지만 우직한 모습으로 편안함을 주는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난 언제나 마음이 울적하거나 결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이곳을 찾는다. 항상 안면에 미소를 띠우고 있는 이 석불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가 치밀 일이 생겨도 이곳이 와 이 석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노여움이 눈 녹듯 사라지기 때문이다.

늘 이 용운사지 석불좌상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한다. ‘부처님, 세상이 그리 즐거우세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언제나 한가지이다. ‘그럼 즐겁지 않으면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나?’ 그 대답을 들으면 모든 노여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갖가지 표정으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불상들.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그런 문화재를 보고 어찌 생명이 없는 조형물이라고 할 것인가? 오늘도 답사를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당야한 표정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어릴 적에 ‘은진미륵’이라는 사진을, 교과서 등을 통해 한 번쯤은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거대한 화강암 석재로 제작이 된 은진미륵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보물 제218호로 지정이 되었다. 이 관촉사 은진미륵의 공식 명칭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입상의 높이는 l8.12m나 되며, 고려 초기의 거대석불에 해당한다.

은진미륵은 커다란 불상이라는 점과, 불교적이기 보다는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 당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이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과 넓은 코, 일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고리형으로 매달린 느낌을 준다.


후천세계에 중생을 구제할 미륵불

미륵불은 56억 7천 만 년이 지난 다음에, 그 때까지도 구제가 안 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나타날 부처님이다. 흔히 부처와 보살로 불리어지는 미륵불은 미래불이다. 미륵불은 일반적으로 산이나 들 같은 바깥에 세워진다. 관촉사 미륵입상은 몸은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들었다.

자연암반 위에 허리부분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이 보살입상은 정교하지는 않다. 몸통에 비해 얼굴이 강조되어 아름다운 균형미는 반감되고 있으며, 손의 모양이나 전체적인 꾸밈이 매우 투박하다. 오른손은 가슴께로 끌어올려 손을 안으로 향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을 보아 관음보살로 생각이 든다.





어깨에 걸쳐 입은 가사는 어깨에서 양쪽으로 길게 내리고 있으며 가로무늬가 있고, 몸 중앙 부분으로 몇 개의 U자형 옷 주름을 돌렸다. 가슴께는 매듭을 묶고 있어 고려시대에 보이는 이 지역 특징인 거대불상의 초기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큰 돌을 어떻게 올렸을까?

관촉사 사적비에 의하면 이 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 19년인 96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목종 9년인 1006년에 완성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륵보살입상을 제작하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38년이나 걸린 셈이다. 이렇게 거대석불을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하반신의 몸체 위에 어떻게 저 큰 상반신을 올린 것일까? 지금처럼 대형 중장비로도 버거운 무게이다. 그런데 어떻게 상반신을 올릴 수가 있었을까?


거대석불을 조성하는 혜명대사가 석불의 상반신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걱정을 하던 차에, 사제촌에 나타난 동자들이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자들이 커다란 돌을 놓더니, 그 돌의 주변에 모래를 쌓고 딴 돌을 경사진 모래비탈을 굴려 올라가 위에 놓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혜명대사는 크게 기뻐하여 바삐 돌아와 동자들이 하던 그 방법대로 상반신을 올렸다는 것이다.

결국 그 동자들은 누구였을까? 아마 혜명대사가 석불의 상반신을 올리지 못해 속이 타는 것을 알고, 동자들을 보내 깨우침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거대한 석불의 상반신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보았을까? 아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이렇게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늘이 깨달음을 주는 것만 같다. 이렇게 큰 거대석불은 충청도 지역에서 보이는 지역적 특색이기도 하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은진미륵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그 미래불인 미륵이 도래하는 시기가 어서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비가 오는 날 답사란 반갑지가 않다. 우선은 장비가 빗물에 젖을까봐 신경이 쓰이기도 하지만. 바짓가랑이를 척척하게 감겨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루를 그냥 포기하고 일요일 일찍 길을 나섰지만, 지난 토요일 내린 비로 인해 걸음을 온전히 걸을 수가 없다. 무작정 걸어야 하는 문화재 답사란 늘 곤욕을 치르게 마련이다.

왜 문화재는 꼭 그렇게 산이나 골짜기에 있나?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하지만 숨은 듯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은, 스스로 내세우지 않기 위함이다. 석불이건 마애불이건 아니면 석탑이 되었든지, 장인 스스로가 남에게 자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숨을 죽이고, 하나의 대단한 작품을 완성을 하는 그런 겸손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요즈음처럼 내놓고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을 하지 않아서 좋다. 그것이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려니 한다.


부처님, 몸은 어디에 두시고

원주에서 횡성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소초면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다. 소초면 소재지를 지나 횡성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소초면 교항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길가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밑에 보면 자연 암석 위에 불두(佛頭)가 한기 모셔져 있다. 바위 위에 올려 진 석조 불두.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4호이다.

바위에는 이끼가 가득 끼어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높이 1.05m 정도나 되는 커다란 불두가 올려져 있다. 이 석조 불두는 원래 이곳의 자연 암석위에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바위에는 선각으로 옷 주름등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지만, 그 돌이 매몰되어 알 수가 없다. 왜 이렇게 자연 암석 위에 불두만 조각을 하여 올려놓은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천안시 삼태리마애불 등과 같이, 자연 바위 위로 머리 부분만 솟아나게 제작한 불상과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불상은 고려 시대의 형태로, 이 지역에서 보이는 거대석불과 같은 종류로 볼 수 있다.

이끼가 낀 자연 암석, 그리고 고목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 그 그늘아래 놓인 석조불두. 그저 예사롭지가 않다.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에 눈은 수평으로 굳게 그려져 있다. 코는 폭이 넓고 두터워 전체적인 얼굴의 형태에서 과하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입은 두툼하게 표현을 해 과묵한 형상이다. 머리 위는 평평하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서, 그 위에는 평평한 사각형의 판석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고려시대 석조불의 형태를 지녀

옆으로 돌아 귀를 보니, 두텁게 표현을 해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뒷면은 조각을 하지 않고 쪼아낸 그대로 놓아두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토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석조불두는, 고려 시대 이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거대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머리 위에 평평한 돌을 얹어두는 형태도 고려시대 석불의 특징이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석조불두만 자연암석 위에 올려 진 교항리 석조불두. 그러나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느티나무 곁으로 돌아가 불두를 본다. 그 모습이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꿈속에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이다. “몸조차 무거워 버리셨습니까?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석조불두의 귀에 대고 떠들어보지만, 굳게 다문 입이 열릴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세상사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어느 장인이, 천 년 전 이미 이 시대를 보고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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