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419 교룡산성 동문 안으로 들어가 산길을 10여분 정도 오르면 선국사를 만나게 된다. 선국사는 통일신라 당시에 지어진 절로 알려져 있으며, 경내에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114호인 대웅전이 서 있다. 이 대웅전은 교룡산성 안에 자리한 선국사의 중심 법당으로, 통일신라 신문왕 5년인 685년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선국사가 개창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 3년인 180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선국사의 대웅전은 산성의 안에 비탈진 곳에 절을 마련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돌로 단을 쌓고 그 위에 대웅전을 앉혔으며, 지금은 한창 전각을 짓느라 부산한 모습이다.



퇴락한 단청에 숨은 화려함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이 대웅전은 돌로 낮은 기단을 쌓고, 주추는 넓적한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기둥은 위아래의 변화가 없는 기둥을 사용했으며, 지붕이 밖으로 많이 돌출이 되어 사면에 바깥기둥을 대었다. 대웅전의 단청은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색은 오래되고 퇴락했지만, 그 화려함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선국사의 대웅전을 돌아보니 이상한 것이 하나가 있다. 작은 법당치고는 유난히 여기저기 용의 조각이 많다. 대웅전 앞이나 측면의 공포와 부연 등에서 용의 조각이 보이고 있다. 법당 안에 있는 닫집에도 끝에 용두가 조각되어 있으며, 대들보 끝에도 용이 있다. 대웅전에서 만날 수 있는 용만해도 10여 마리는 됨직하다.




대웅전 외부에서 보이는 용조각

임진왜란 때 승병이 주둔하던 곳

왜 이렇게 크지 않은 대웅전에 용의 형상이 많은 것일까? 대웅전 안에는 한편에 커다란 북이 매달려 있다. 이 북은 전북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또한 승병대장이 사용했다는 인장도 있다고 한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 북은 둘레가 269cm, 지름이 79cm, 길이는 102cm로 절에서 사용하는 법당용 북으로는 상당히 큰 편이다. 소나무 몸통에 쇠가죽을 씌워 만든 이 대북은, 그 제작시기가 조선조 말엽으로 추정한다. 이 대북은 언제 사용을 했던 것일까?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가 승병의 주둔지라고 한다면, 아마 이 북도 그와 관련이 잇을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안에 걸린 민속자료 대북

선국사의 옛 이름은 용천사였다.

북과 인장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이 선각사 대웅전에는 왜 특별히 용의 조각이 많이 나타나고 있을까? 선국사는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절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어떤 이름을 썼을까? 바로 ‘용천사’였으며, 승려가 300여명이나 기거하던 대규모 절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국사에 용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의 산성명칭도 교룡산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이곳이 특별히 용과 관련이 된 전설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용이 유난히 많은 선국사의 대웅전. 그 용들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본다. 대웅전 현판 옆에 있는 용은 입에 물고기를 물고 있다. 가끔 물가에 서 있는 정자 등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대웅전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용조각

사실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반야용선’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대웅전의 중앙에는 용머리를 항상 조각한다. 하지만 선국사처럼 중앙과 네 귀퉁이에 용을 조각하는 예는 그리 흔치 않다. 그리고 법당 안에도 용의 조각이 있다. 이는 교룡산성, 용천사 등과 이곳의 지세가 남다른 점으로 보아, 이곳에서 더 큰 대국의 꿈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다음번 이곳을 답사할 때는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겠다.


남원시 도통동 392-1 선원사 약사전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보물 제422호로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촘촘히 돋아 나있고, 이마 위쪽에는 고려시대 불상에서 유행하던 반달 모양을 표현하였다.

선원사(禪院寺)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다.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1,135년이나 지난 고찰이다. 원래 객산인 교룡산의 지기를 누르고, 주산인 백공산의 기운을 돋우어야 남원이 발전한다고 하여 지어진 절이다. 선원사는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되었다. 그 뒤 영조 30년인 1754년에 남원부사 김세평이 복원을 하였다.

보물 제422호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뛰어난 주조기법이 돋보이는 철불

선원사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남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람이 펼쳐 있으며, 앞으로는 주공 1, 2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도로변에 접하고 있는 선원사는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것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약사전과 문화재자료인 대웅전 때문인가 보다.

약사전 안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전통적인 고려 철불의 형태로 주조 되었다. 삼각형의 얼굴은 일반적인 불상에서 보이는 인자함이나 유연함은 보이지 않는다. 날카로운 코와 꽉 다문 입, 조금은 앞으로 내민 턱 등에서 보이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얇게 표현이 되었는데, 넓은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민 것은 마치 한복을 입은 것처럼 표현되어 매우 독특하다.



철조여래좌상을 모신 선원사 약사전(좌측)과 대웅전(우측) 맨 위사진 

팔과 다리에 나타난 옷 주름은 V자 모양으로 간략하게 처리를 하였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반듯해 당당한 느낌을 주며, 잘록한 허리에는 두 팔이 붙어 있다. 현재 철조여래좌상의 손은 최근에 다시 만들어 붙인 것이라고 하는데, 팔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오른손을 무릎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가지만 서원을 빌어야 해요”

남원을 답사한 이유도 바로 이 선원사 철조여래좌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주변의 절을 다니시는 많은 불자들이 선원사의 철조여래좌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딱히 무슨 효험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과다하게 소문을 내고는 하지만, 이상하게 선원사 철조여래좌상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말을 피하고는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것이 더 궁금해서 찾아간 선원사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지 않는 절집이다. 그러나 약사전 안으로 들어가니, 철조여래좌상의 표정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고려시대의 불상이라면 이미 천년 세월을 훌쩍 넘었다. 그 많은 세월동안 철불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원을 했을까? 아마 그 기운만으로도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을 듯하다.




“세 번만 찾아와 엎드리면 알음이 있다”
“한 가지 서원을 빌어보세요. 딱 세 번만 와서요. 그러면 정말로 그 서원이 이루어져요”

멀리서 일부러 신원사 약사전을 찾았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다. 정말일까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약사전에 좌정하고 계시니,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데 영험함이 있는 것일까? 그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지성으로 빌어본다면, 그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근엄한 부처님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기운이 뻗쳐 나오는 것만 같다.


천년세월을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 속에서 지켜 낸 신원사 철조여래좌상. 고려 시대에 주조가 된 철조여래좌상, 그 소중함이야 어디다가 비길 것인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마음속으로 빌어보는 것은, 이 땅에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인가 보다. 세 번만 찾아가면 정말로 마음 아픈 사람들의 그 아픔이 가셔질 수가 있을까?

얼마나 어머니의 정성에 감복을 하였으면, 직접 탑을 조성하고 스스로 어머니에게 공양을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조성하였을까?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있는 ‘효대’는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한 연기조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으로 인해 효를 상징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국보 제35호인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연기조사가 화엄사에 조성한 것으로 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72과를 봉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사자 삼충석탑은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화엄사 서북쪽의 제일 높은 대지에 조성을 했으며 이 석탑이 있는 효대에는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공양을 올리는 형상이라는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다. 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신라 최고의 걸작품 3층 석탑

2단으로 꾸며진 기단의 아래층에는 각 면에는 천인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한 면에 3구씩 모두 12구의 천인상이 새겨져 있으며,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며, 공양물을 들고 있다. 이 기단석만으로도 뛰어난 걸작품이다. 그 위에는 사방에 암수 사자가 입을 벌리고 밖을 향해 앉아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자들에 둘러싸인 스님의 입상이 서 있다. 이 스님상이 연기조사의 어머니를 형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 앞에 석등을 머리에 이고 한 무릎을 세워 앉아있는 공양상은, 손이 공양물을 받쳐 들고 있다. 연기조사 스스로가 어머니를 위한 공양을 올리는 것을 상징하였다고 하며, 공양물은 차로 어머니에게 향한 연기조사의 효심을 알아볼 수 있는 조각상이다. 이 두 가지의 조각품을 합해 사사자 삼층석탐이라 하며, 국보 제20호인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석탑의 쌍벽을 이룬다고 한다.





조각예술의 극치라는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

3층의 몸돌에도 뛰어난 조각이

3층으로 구성된 몸돌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을 조각했다. 사면에 각각 조각을 한 상들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은 5단씩의 받침으로 평평하게 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만 살짝 치켜올려 여유로움을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과 엎어놓은 그릇과 같은 복발만이 남아있다.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몸돌의 위에 올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엄사를 찾아갈 때마다 오르는 효대. 이곳을 찾을 때마다 지난 날 어머니께 효도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이 효대를 찾아 무릎을 꿇을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차라리 이 잎 석등 안에 쪼그리고 앉은 연기조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삼층석탑의 석탑부와(위) 석탑 앞 석등의 공양상(가운데) 공양상은 연기조사 본인이라고 전한다(아래)
 
전국을 다니면서 수 없이 많은 석조물들을 보아왔지만, 이 효대에서 만나는 사사자 삼층석탑은 늘 고개를 조아리게 만든다. 공양상인 석등 뒤편에 마련한 자리에서 고개를 떨어트리고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부끄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게 이런 대단한 조각품을 조성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 옛날 손으로 일일이 돌을 다듬어 만든 사사자 삼충석탑. 기단부에 돋을 새김한 비천상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고, 1층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들은 바로 문을 열고 박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다. 넋을 뺐기고 보고 있는데 저녁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보니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동행한 일행의 재촉하는 소리에 석탑을 뒤로하고 떠나면서도, 마음은 그곳에 두었나보다. 조금이라도 그 모습을 더 보려는 안타까움에.

석탑 앞에 있는 배례석. 배례석 하나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만복사지는 사적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만복사는 김시습의 단편소설인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처음으로 세워졌다.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만복사를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갈 때마다 사지가 잘 정리가 되어있어, 기분 좋게 돌아보고는 했다.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될 때까지,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 서, 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 식 배치를 보이고 있었다. 경내에는 네 점의 보물(당간지주, 석불입상, 오층석탑, 불상대좌)과 많은 석재들이 있다.

사적 만복사지. 우측에 석인상이 서 있다.

새로 선보인 석인상 일기

이번 답사 때 찾아간 만복사지(2010, 9, 18). 그런데 입구 쪽을 보니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석조물 1기가 서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석인상은 만복사지 당간지주의 남쪽 4m 정도 떨어진 도로변에, 2기가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도로를 운행하는 차량들로 인해, 훼손의 우려가 있는 1기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 석인상은 처음 본 것이다. 두 번이나 이곳을 답사를 했으면서도 보지를 못했다. 아마 4점의 보물을 중점적으로 찾아보는 바람에 놓친 것 같다. 그런데 이 석인상을 보는 순간, 참으로 자신이 참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가 이런 형태의 석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흡사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조각한 목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보지 못한 형태의 석인상

이 석인상은 그 모습이 괴이하기까지 하다. 부정형의 사각형 장초석의 3면에 조각을 하였는데, 사람 모양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얼굴은 노여움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으며, 팔은 몸에 붙인 채로 구부려 무엇인가를 꽉 잡고 있는 형태다. 팔에는 두터운 팔과 근육을 표현 한 듯한 선이 나 있다. 주변을 돌면서 보아도 정확한 모습은 아니다. 자연석인 돌을 이용을 하느라 그랬는지, 팔과 기타 신체의 부분이 제대로 갖추지를 못하고 있다.

얼굴은 눈을 돌출시킨 것이 민속 석조물에서 보이는 석장승의 형태를 닮았다. 눈썹은 두텁게 처리하고 눈은 불거졌으며, 볼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코는 뭉툭하다. 석장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인상은 상반신이 반나로 서 있다. 허리부분에 옷을 묶어 매듭을 내었으며, 옷 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로 선명하다.


팔의 조각한 형태는 괴이하다. 한 팔은 뒤로 돌아갔다.

하반신은 특별한 조각이 없으며, 늘어트린 옷 주름으로 가렸다. 전체 길이는 550cm이며, 머리부터 다리까지의 길이는 370cm 정도이다, 나머지 부분은 뾰족하게 깎았으며 땅 속에 묻혀있다. 도대체 이 석인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석인상을 찬찬히 훑어보지만 금방 그 용도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뒷면에 있는 구멍이 용도를 알리는 열쇠?

이렇게 괴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복사지 석인상의 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뒤로 돌아가 보니 뒷면에 둥근 구멍이 아래위로 나 있다. 위쪽의 구멍은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122cm, 그리고 그 밑에 구멍은 318m 정도 내려온 곳에 있다. 땅 위로 솟아있는 석인상의 높이가 370cm 정도이니, 아래 구멍은 땅에서 52cm 정도 위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위에 있는 구멍은 248cm 정도 위에 있다.

이 구멍의 용도는 무엇일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혹 이 뒤편에 있는 구멍이 당간지주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당간이나 석인상의 높이가 있어 그 정확한 구멍의 차이는 알 수가 없지만, 어림잡아 구멍의 높이가 비슷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석인상은 당간의 용도로 쓰였을까? 아니면 당간의 바깥에 세워 더 많은 당을 걸게 했던 것은 아닐까?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그 이상의 내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두 주먹을 꽉 쥔 것으로 보아, 절의 입구에 서서 액을 막아내는 사천왕은 혹 아니었을까? 아니면 절의 신성한 장소의 양편에 세워, 뒤에 난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그곳의 출입을 제한하던 문지기는 아니었을까? 긴 시간을 생각해보지만, 그 정확한 용도를 알지 못한 체 만복사지를 뒤로한다. 저 석인상의 용도를 알 수 있는 날까지, 꽤나 속을 썩일 것만 같다.


소중한 문화재 중에서 가장 그 가치가 뛰어나서 지정을 하는 국보, 이 국보와 국보가 만나면 그 아름다움이 과연 배가가 될까? 아마 이렇게 국보와 국보가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국보의 숫자도 적으려니와, 야외에서 한 자리에 두 점의 국보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구례 화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가,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는 3천여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화엄사 경내에 세워진 국보 각황전과 국보 석등

자장율사로 인해 신라 때 절로 알려져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신, 사사자 삼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각황전 뒤편에 세웠다. 원효대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를 거쳐 원효, 의상 등의 스님들이 화엄사에 중창을 하였으므로, 화엄사가 신라시대 절이라고 하는가보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국보 제67호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조선 숙종 28년인 1702년에, 이층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전각의 명칭을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국보 각황전, 밖에서 보면 2층의 전각이지만, 안으로는 퉁층으로 꾸며져 있다.

각황전 앞에 감히 서질 못하다.

각황전 앞에 서면 사람이 압도당한다.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의 기단석 위에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전각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각황전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되어있으며, 세분의 여래불과 네 분의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일까? 쉬지 않고 예를 올리는 여인에게.

밖에서 보면 이층인 전각으로 꾸며졌으나, 안을 보면 단층이다. 워낙 전각의 규모가 크다보니 중간에 기둥을 세워 받쳐놓았다. 그 안의 공포의 장식 등이 화려하다. 각황전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각황전 동편 출입구 앞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다. 누군가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예불을 올린다. 걷기도 더운 날에 저리 온 마음을 다한다면, 여래불과 보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듯하다.

최대의 석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였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이라고도 부른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를 하였다. 통일신라 때인 헌안왕 4년인 860년에서, 경문왕 13년인 873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팔각의 지대석 위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배가 불룩한 장고 모양의 기둥을 세웠다. 이런 배가 부른 기둥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형태이다.



국보 석등은 아름답다. 기단석과 중간의 장고형 기둥

배가 부른 기둥 위로는 돋을새김을 한 연꽃무늬를 조각한, 위 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팔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큼직한 창을 뚫어 놓았다. 팔각의 지붕돌은 귀꽃이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며,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석등과 국보 각황전. 이 두 점의 국보가 만들어내는 정경은 말로 형용하기가 힘들다. 어디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려나. 해가 짧아진 오후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쉽게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모습에 취했음이다. 저녁나절 국보와 국보가 만나며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쉽게 만나지 못할 멋진 모습이다.


화사석에는 네 곳의 창을 내고, 머리 위에는 귀꽃이 아름다운 머릿돌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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