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경종 4년인 979년에 조형되었으니, 벌써 천년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연곡사 경내에 세워진 보물 제152호인 현각선사탑비. 임진왜란 때 몸돌인 비는 파손되고 현재는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남아있다. 고려 전기의 승려인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이다.

사라진 비의 몸돌에는 현각선사의 일대기를 적었는데, 비문은 학사 왕융이 짓고, 장신원이 글을 썼다고 한다. 비는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손상을 입은 것이 풍화로 파손이 되고, 그 뒤에는 구한말에 의병항쟁 때 일본군의 방화와 약탈 등으로 더 손상이 된 것을, 1970년에 떨어진 조각들을 모아 붙여 놓았다고 한다. 천년 세월을 지켜 낸 비가 일제의 만행에 의해서 두 번이나 화를 당한 셈이다.


커다란 몸통의 현각선사 비

우선 현각선사탑비의 받침인 귀부를 보면 그 크기가 매우 크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일반적인 귀부보다 상당히 크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여덟 마리의 용이, 앞면과 뒷면에 각 네 마리씩 새겨져 있다. 이 여덟 마리의 용은 구름 속에서 화염에 싸인 여의주를 다투는 것과, 바깥쪽을 향해 있는 것으로 나뉘어 있다.

거북의 몸통은 귀갑문을 등에 새긴 거북이의 형상이다 네 발은 사방으로 뻗쳐 납작하게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는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눈방울이 부리부리하다. 눈썹은 길게 위로 뻗쳐 있으며, 입 주위에는 수염이 길게 자라 목 뒤편까지 뻗어져 끝이 모여 있다. 두 개의 커다란 콧구멍은 금방이라도 강한 바람을 뿜어 낼 듯하다.



받침돌인 귀부의 열굴은 크고 웅장하다. 콧구멍은 바람이라도 나올 듯. 등에는 귀갑문이 새겨져 있는데 일제에 의해 판손이 된 것을 붙인 자국이 보인다.

이수에 조각한 여덟 마리의 용, 뿔이 없어 해괴한 모습

머릿돌인 이수에는 모두 여덟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서로가 여의주를 탐하기 위해 다투는 모습을 하고 있는 가운데의 용들은, 서로가 얽혀있어 힘이 넘치는 모습이다. 발가락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맹금류의 발을 닮았다. 밖으로 돌출이 된 용들은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었으나, 뿔이 없어 조금은 해괴한 모습이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용들을 표현한 이수는 흔하지가 않다.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몸통 위에 연결부분에는 안상과 귀꽃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빗물이 고이면 물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한 편에 배수구를 내 놓았다. 이렇게 세심하게 조각을 한 현각선사탑비의 비가 몸돌이 사라졌다는 것에 아쉬움이 더한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모두 여덟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밖을 바라보는 용들은 뿔이 없어 해괴한 모습이다. 용의 발은 맹금류의 발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다.

국보 2점과 함께 연곡사의 보물 중 하나인 현각선사의 탑비. 고려 초기에 형성이 된 이 거대한 조각품이 이렇게 몸돌을 잃은 체 서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우리 문화재의 아픈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해본다. 전국에 이렇게 비문이 사라진 문화재가 곳곳에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알게 모르게 문화재의 훼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도대체 반성이라고는 할 줄을 모르는 민족이란 생각이다.


 이질감에 의해서 부수어지고, 거기다가 행정당국에 의해서 나 몰라라 식의 훼파까지 이어진다. 언제까지 말로만 떠드는 문화재보호에 문화국가임을 주절거릴 것인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가슴이 아프다.


연곡사 동부도,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 조상님들의 예술혼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동부도를 보고 그 위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북부도가 있다. 국보 제54호인 북부도는 또 다른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런 부도를 만든 조상님들께 정말로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북부도, 산길에 호젓하게 서 있는 북부도의 주인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북부도는, 동부도와 비슷한 모양으로 조성이 되었다. 아마 동부도를 따라 북부도를 조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부도 보다는 조금 뒤떨어지기는 하지만, 나름 특징을 갖고 있는 북부도. 국보와 보물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걸작품이다.


팔각형의 탑신, 그 아름다움

네모꼴의 지대석 위에 구름무늬가 조각된 탑신을 놓은 연곡사 북부도. 중대석은 연꽃의 결이 그대로 표현을 하였다. 거기다가 아름다운 귀꽃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팔각면에는 천상의 새라는 가릉빈가를 조각하였다. 그런데 이 가릉빈가는 동부도와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동부도의 가릉빈가가 몸체에 비해 날개가 작은 것에 비해, 북부도의 가릉빈가는 큰 날개를 갖고 있어 체형의 균형이 잡혀 있다.

몸은 작고 날개가 크게 표현이 되어 있어 안정적이다. 그 위에 올린 팔각의 몸돌 문비에는 문짝, 향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불집(화사석)은 창이 없으며 그 위에 옥개석인 지붕돌은 나무로 만든 지붕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한편이 약간 파손된 것을 빼고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지붕돌은, 기왓골 등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표현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부연과 처마 등이 우리가 흔히 보는 한옥의 모습을, 작은 소형의 모양으로 축소를 해 놓은 듯하다. 어떻게 이렇게 세세하게 하나하나 표현을 하였는지, 그 모양에 넋을 잃을 정도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북부도, 국보는 남다른 점이 있다.

동부도가 섬세하고 여성적이라면 북부도는 조금은 거친 듯한 남성적이다. 그래서 연곡사의 동부도와 북부도는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으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동부도보다 조금 더 거친 듯한 북부도. 머리 위에 올린 노반과 복발, 보개와 보주는 동부도에 비해 조금은 단순하게 표현이 된 듯하다. 동부도에서 보이는 사방에 새를 북부도에도 그대로 만들었지만, 동부도와 마찬가지로 파손이 되어있다.




동부도와 북부도의 보개에 조각을 한 새들이 왜 모두 파손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 새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사방에 조각이 된 새를 모두 파손을 했을 때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만 같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 새의 머리가 잘려진 것이 기자신앙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나로서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기자신앙에서는 새의 머리를 이렇게 잘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굳이 이 새의 머리를 잘라간 것이 기자신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 아무리 기자신앙이라고 해도 우리의 정서에는 머리를 통째로 잘라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부도에 비해 더 깊이 잘려나간 북부도. 그 앞에 서서 부도를 떠나지 못함은, 이 새의 잘려나간 머리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시작한지 어언 20여년이 지났다. 숱한 문화재를 보고 다녔지만, 연곡사 동부도와 북부도와 같은 아름다움을 본 적은 흔하지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파손된 이 부도의 상처가 더 마음이 아프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연곡사에서, 마음속의 눈물을 흘리고 뒤돌아서는 것을 저 부도는 알고 있을까?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에 소재한 사적 제104호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고려 말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이곳에는 1573년에 다시 만든 비가 있는데도, 대첩비지라고 한 것은 두 가자의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이곳에 비만 있던 것이 아니라, 보호각과 외삼문, 그리고 비를 보호하던 별장청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론을 할 수 있다. 처음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싸움인 황산전투의 승리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조선조 선조 10년인 1577년에 대첩비를 세웠다. 그 후 현종 8년인 1677년에 보호각을 세우고, 고종 19년인 1882년에는 보호각을 고쳐지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대첩비가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었다. 이 파괴된 비를 ‘파비각’을 지어 보관하였기 때문에, 원래의 비가 사라져 대첩비지라고 볼 수도 있다.



조선 개국의 태동이 된 황산전투

지금의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을 새겨 자시 세울 때, 원래의 좌대인 귀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1973년에는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과 홍살문, 삼문과 담장 등을 새로 조성을 하였으며, 파비각 등을 조성하여 일제에 의해 파손이 된 원래의 대첩비를 보관하고 있다.

운봉읍 화수리를 찾아갔다가 들려 본 대첩비지. 이곳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성계는 전주 이목대에서 전주 이씨 문중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나라를 세울 것을 은연중에 비친다. 결국 이 황산의 전투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한 곳이니 역대의 왕들이 이곳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선조의 명에 의해서 대첩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비 받침인 귀부, 정말로 기이하네.

대첩비를 돌아보는데, 그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귀부를 제작한 것일까?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귀부의 형태는 많이 달라진다. 신라 때까지만 해도 거북의 형태를 본 딴 귀부가 성행을 하였으나, 고려에 들어오면서 머리는 용에 몸이 거북이인 형태로 변화가 되었다.

그런데 이 귀부는 도대체 지금까지 보아오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한 나라를 태동하게 한 전투지에 세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조금 부족한 듯한 이유이다. 이 귀부를 보면 고려시대의 귀부와는 또 다른 힘이 느껴진다. 머리 부분은 용의 머리인 듯 뿔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있다. 그런데 그 뿔 속이 비어있었던 것처럼 구멍이 나 있다.




용의 발을 가진 귀부와 콧구멍의 비밀

거북이 등의 문양은 같으나 그 다리부분을 보고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귀부의 머리 부분이 용이라고 해도, 다리는 거북이의 다리를 조각하는 것이 통례이다. 하지만 이 거북이의 몸은 다리가 용의 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뒤로 돌아보니 정말로 혀를 찰만큼 대단한 조각이다.

앞뒷발은 모두 용의 비늘로 덥혀있다. 그런데 뒷발을 보니 안쪽 발가락 하나가 위로 솟아있다. 왜 이렇게 발가락 하나만을 위로 추켜세웠을까? 반대편으로 돌아가 보니 그곳은 나란히 있다. 이렇게 추켜세운 발가락 하나가 이 조각이 어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알게 해준다. 그 뿐만 아니라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입모양도 특이하다.




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콧구멍이 있던 곳이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 안이 움푹한 것을 보면, 콧구멍 안이 비어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떻게 돌 안을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파낼 수가 있었을까?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 대첩비의 귀부. 1시간여를 들여다보았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만 했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세계에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을 하면서.


남원 선원사에는 약사전 뒤편으로 조금 비켜선 곳에 자리한 칠성각. 칠성각에 모신 칠성은 수명과 재복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보통 아이들의 수명을 관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칠성은 원래 도교에서 발달하였으나, 조선조에 들어 불교와 습합이 되면서 불교에서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칠성각은 대개 경내의 위편에 자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신, 칠성, 독성(혹은 용왕)을 모신 삼성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호법신의 일종으로 대부분 칠성각을 건립한다.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두고 칠원성군을 그 아래에 둔다. 혹은 칠여래를 함께 모신 탱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선원사 칠성각 문 위에 조각된 거북이와 토끼

가신신앙에서도 중요한 칠성

우리 무속에서도 칠성은 중심적인 신격 중의 하나이다. 굿거리에는 칠성굿이 있으며, ‘칠성풀이’나 ‘칠성본풀이’ 등의 무가가 전해진다. 집안에서는 주부가 주체가 되어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칠월칠석날 밤에 집 뒤편의 장독대에 백설기와 정화수를 떠 놓고, 촛불을 밝힌 다음 북두칠성을 향해 절을 하며 비손을 한다.

이렇게 비는 이유는 집안에 자손들이 병이 없이 무탈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장수를 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칠성이기 때문에 절 안에 자리한 칠성각에는 항상 주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느 집이나 아이가 있으니, 당연히 자식이 무탈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선원사 칠성각은 세 칸 팔작집으로 150~200년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선원사 칠성각에는 왜 별주부가 있을까?

선원사 칠성각은 건축을 한지가 150 ~ 2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 칸 팔작지붕으로 꾸며진 칠성각 양편 문 위에 보면 이상한 것이 보인다. 벽 밖으로 무엇인가 돌출이 된 것이 있다. 다가가 보니 밑에는 자라가 있고, 그 위에 토끼가 타고 있는 형상이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이 칠성각 문 위에 있는 것일까? 양편에 똑 같이 만들어 놓았다.

주지스님께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칠성각에 별주부가 왜 있는 것일까? 자라를 거북이로 생각한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수명장수를 비는 칠성각에 장수동물인 거북이를 표현하였을 것이다. 십장생인 해와 달, 산과 물 그리고 돌과 소나무, 불로초와 거북, 학과 사슴 중에는 거북이가 포함된다.

문제는 그 위에 올라타고 있는 토끼의 존재다. 그 토끼가 왜 거북이의 등에 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물론 이 칠성각에 거북을 형상화해서 벽에 올린 것은 장수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토끼가 그 등위에 올라타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토끼는 장수동물도 아니고, 칠성각과 뚜렷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문 위 문틀에 붙인 거북이와 흙벽에 돌출된 토끼

판소리의 고장이기 때문은 아닐까?

혹 이런 생각을 해볼 수가 있다. 남원은 명창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운봉에서는 가왕이라는 송흥록이 태어났고, 그 뒤를 이어 송광록, 송만갑 등 명창과 여류명창인 박초월 등이 바로 남원출신이다. 그런 명창들 때문에 남원은 어디서나 소리 한 대목을 들을 수 있었을 테고, 그 소리를 들은 대목이 칠성각을 짓다가, 수궁가(별주부전)에 나오는 한 대목을 형상화 한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도심에 자리하고 있는 선원사는 이래저래 많은 이야기꺼리를 간직하고 있는 고찰이다. 절집을 찾아 문화재 외에도 이런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그래서 이런 재미에 절집을 찾아들어가는 것이지만.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를 들어가다가 그 입구에 보면 좌측에 작은 전각이 하나 서 있다. 얼핏 보기에도 꽤 오래됨직한 이 전각 안에는 돌미륵이 한 기 서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을 주민들의 말로는 천지가 개벽할 당시부터 있었다고 한다. 천지개벽이란 말에 조금은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금산사의 개산대제를 보기 위해 들어가는 길에 미륵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다년 간 듯, 여러 개의 촛불들이 커져있다. 그리고 지나는 행인 한 사람이 절을 하더니 돌미륵에 손을 대고 한참이나 기도를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상당히 효험을 보았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금산사 입구에 있는 할머니당과 안에 모셔진 돌미륵입상

‘예전에는 이곳이 바다였지’

마을에 사시는 분들에게 미륵당에 대해 물어보아도 잘 모르시겠다는 이야기다. 하기에 이곳이 상업지역이 되다보니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기 때문인가 보다. 올해 연세가 79세가 되셨다는 토착민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미륵당을 마을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르세요?”
“그냥 돌할머니라고 불러”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세요?”
“잘 모르지 내가 어릴 적에도 있었고, 그 이전 할아버지 때도 보았다고 하니 상당히 오래 묵은 것은 알지”
“그런데 왜 할머니라고 하세요?”
“그러니까 저 할머니가 뱃사공이라는 거야. 내가 보기엔 할아버지 같은데. 뱃사공이 바다에 나가서 죽었는데, 그 넋이 저 돌이라는 거지”
“할머니가 뱃사공 노릇을 했나요?”
“나도 그것이 이상해. 남자도 아닌 여자가 뱃사공을 했다는 것이. 그래도 어른들이 그렇게 불렀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그냥 흘러 온 이야기로 할머니이고, 예전에 뱃사공이었다는 것이다. 금산리 금산마을은 얼마 전까지도 땅을 파면 땅속에서 배가 썩은 나무 조각들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이 바다였기 때문이란다.

“돌미륵이 정말 영험합니다.”

한 칸으로 마련된 전각의 창호로 안에 켜놓은 촛불의 불빛이 흘러나온다. 문을 열고 보니 한 분이 열심히 절을 하고 난 후, 미륵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고 있다. 사진을 찍기도 죄스러워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다가 물어보았다.

“이곳에 자주 오시나요?”
“아닙니다. 저는 처음인데요. 소문을 들어보면 이 돌할머니가 상당히 영험하다고 해서요”
“무엇을 빌고 계시던데...”
“예, 아픈 사람이 있어서 얼른 낫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미숙한 솜씨를 보이고 있어,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가 1m 80cm 정도 되는 돌미륵의 머리는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목 부분에 새로 얻은 머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시멘으로 발라놓은 흔적이 있다. 오른 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렸다. 법의는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께서부터 주름이 잡혀있다. 그러나 왼손으로 옷을 잡아 올린 듯, 허리 아래쪽에서는 주름이 -자로 표현이 되었다.

아래는 바닥에 시멘으로 발라놓아 자세히 알 수가 없어, 발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전체적인 조각의 형태로 볼 때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생김새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빌고 갔으면, 그것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었을 텐데.

석불입상 앞에 켜 놓은 촛불.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있다.

많은 곳에 마을에서 섬기는 미륵이 있다. 미륵골, 미륵당, 부처울, 부처골 등의 지명이 있는 곳이 바로 돌미륵들이 서 있었던 곳이다. 후천세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상향이라는 돌미륵. 어쩌면 금산마을의 미륵 역시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표현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타고 있는 수많은 촛불들이 있어 마음 한편이 따스해 지는 것도, 나 역시 이상향을 기다리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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