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또 하나의 사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일부 훼파가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령전 안에 있는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운한각(위)과 현판

 

생전에 어진을 가장 많이 그린 정조

 

어진이란 역대 왕들의 모습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을 말한다. 어진제작은 모두 세 종류로 도사(圖寫)와 추사(追寫) 그리고 모사(模寫)가 있다. 도사란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바라보면서 그린 것을 말한다. 추사란 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 수용을 그리는 경우이다. 모사란 이미 그린 어진이 훼손됐거나,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때 원본을 범본(範本)으로 해 신본을 그린 것을 말한다.

 

왕의 모습을 지칭하는 어진은 진용(眞容), 진(眞), 진영(眞影), 수용(晬容), 성용(聖容), 영자(影子), 영정(影幀), 어용(御容), 왕상(王像), 어영(御影) 등 다양하게 불렸다. 모두 왕을 높이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숙종 39년인 1713년 숙종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것을 이이명(李頤命)의 건의로 ‘어진’이라 했는데, 이후 이 명칭을 따라 어진이라고 주로 일컫는다.

 

 정조의 어진을 봉안한 운한각의 내부

 

정조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어진을 그렸다. 정조의 어진은 즉위년과 즉위 5년, 즉위 15년에도 어진 제작이 이어졌다. 하지만 현존하는 정조의 어진은 선원보에 있는 간단한 스케치 말고는 남아있지 않다. 현재의 어진은 최근에 새로 그렸는데 할아버지인 영조와 닮았다고 하여, 경복궁에 남아있는 영조의 어진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한다.

 

화령전 둘러보기

 

원래 화령전에는 어진을 모신 운한각을 비롯하여, 일이 있을 때 어진을 피난시켰던 이안청과 풍화당, 그리고 제정과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원래 건물 그대로 남아있던 운한각과 풍화당, 그리고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제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조선조 후기의 대표적인 건물인 운한각의 멋

 

사람들은 운한각을 단순히 정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어진봉안각’으로만 알고 지나친다. 하지만 운한각을 자세히 돌아보면, 이 전각을 지을 때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쓴 것인지 알 수 있다. 운한각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명장들이 모여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이다.

   

 살창으로 꾸민 외삼문과(위) 운한각 앞에 마련한 넓은 월대(아래)

 

11월 3일과 4일 수원에는 8도에서 파워소셜러들이 모였다. 미디어 다음의 주관으로 1박 2일 수원 팸투어에 참가한 소셜러들은, 둘째 날인 4일 오전 행궁을 돌아본 뒤에 화령전으로 향했다. 운한각은 우선 외삼문부터가 남다르다. 외삼문은 솟을삼문으로 판자문을 달고 있지만, 그 위편은 살창으로 꾸몄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외삼문을 왜 살창으로 꾸몄을까? 그것은 순조가 아버지인 정조의 효심을 따랐기 때문이다. 즉 어진을 모셨지만, 평소 살아있는 정조를 대하 듯 한 곳이 바로 운한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이 곳 운한각에서 길 밖으로 지나는 백성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월대를 넓게 하고, 외삼문의 위를 살창으로 꾸민 것이다.

 

  위는 운한각 조성 당시 걸어 놓은 방로 200년이 지났다. 아래는 제향 때 차일을 치기 위한 도르래(붉은 원 안)

 

운한각, 이래서 아름답다

 

아버지 정조대왕의 효심을 어려서부터 보아 온 순조임금은, 운한각을 정조가 살아계신 처소 처럼 꾸며 놓았다. 평소 백성들을 생각한 정조가 달을 보고 거닐 것을 생각해, 악사들이 앉는 월대를 넓게 꾸몄다. 그리고 어진봉안각이긴 하지만 정조가 그곳에서 생활을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생전의 기억을 더듬어, 방에는 아궁이를 놓아 늘 불을 때고는 했다.

 

겨울철에도 따듯한 곳에서 쉬시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 아궁이는 장마철에도 운한각이 눅눅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또한 정면의 문 위에는 발을 늘일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현재 문 위에 있는 발은 운한각 조성 당시 것이니, 이미 200년이란 세월이 지난 것이다.

 

위는 운한각 측면에 있는 아궁이. 그 위로 통풍장치가 보인다. 아래는 운한각의 뒷벽. 특이하게 벽돌로 쌓았다

 

운한각의 정면 기둥 위를 가로지른 부분에는 도르래가 달려있다. 이것은 제를 지낼 때 차일을 치기위한 것이다. 그만큼 이 운한각은 하나하나 세심한 신경을 써서 지은 전각이다. 측면으로 돌아가면 바닥이 눅눅치 않게 환기를 시키는 통풍구가 있고, 운한각의 뒷벽은 벽돌담으로 조성을 해 멋을 더했다.

 

이러한 내용을 모르고 돌아보는 운한각은 그저 정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단순한 전각으로만 보일 뿐이다. 우리문화재에는 그것을 조성한 이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문화재를 대할 때 언제나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라는 것은, 그런 정신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다

사찰에 불이 났다고 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이번에는 정읍시 내장동 590, 내장산에 소재한 내장사 대웅전에 불이나 전소가 되었다. 10월 31일 정읍시 소방당국에 의하면, 오전 2시 10분께 내장사 대웅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신고를 받은 소방당국은 14대의 소방차와 경찰 및 시청직원 등 90여명이 현장에 출동해 진화를 했으나, 두 시간 만에 전소되었다는 것.

 

이번 화재로 목조건물인 대웅전이 전소되고, 대웅전 안에 모셔졌던 탱화 3점과 불상 1점, 소북 1점이 완전히 소실이 되었다. 다행히 내장사에는 당시 사부대중 10명이 있었으나, 대웅전에서 떨어진 곳에서 잠을 자는 바람에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내장사 대웅전의 과거 모습

 

백제 때의 고찰인 내장사 대웅전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인 636년 영은조사가 백제의 신앙적 원찰로 삼아, 처음에는 ‘영은사’란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다. 그 후 고려 숙종 3년인 1908년 행안선사가 전각과 당우를 중창하였고, 조선 명종 22년인 1567년에 회묵대사가 법당과 요사를 중창하였다.

 

대웅전은 조선조 정조 3년인 1779년 영은대사가 시왕전과 함께 중수하였고, 요사를 크게 증축하였다. 이러한 대웅전은 1951년 한국동란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던 것을, 1958년에 정읍시 입암면에 있던 보천교의 보화문 건물을, 다천스님이 그대로 옮겨 대웅전을 중건한 것이다.

 

  전소된 대웅전 - 사진제공 정읍소방서

 

화재로 전소한 대웅전, 아직 원인 규명 못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픔을 당한 내장사의 대웅전은, 최근에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내장사 대웅전 전소와 관련해 소방당국의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내부 CCTV를 확보해 분석한 결과, 전기난로 주변에서 불꽃 발화가 확인됐다’며 그 이상은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전한다.

 

아무리 지정문화재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문화재 등록을 추진 중에 있었다고 하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그런 대웅전이 완전히 소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문화재의 안전에 대해 불감증 환자가 되어야만 할까? 이렇게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한 것을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단풍철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내장사

 

더구나 지금은 내장산이 아름답게 단풍이 들 계절이라, 수많은 관광객들이 내장산으로 찾아드는 절정의 시기이다. 이렇게 불에 타 전소가 된 내장사의 대웅전을 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할 것인지. 좀 더 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를 따지기 이전에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할 때이다.

한산섬, 그 이름으로 만도 가슴이 설렌다. 어릴 적 가장 존경하는 이를 쓰라고 하면 언제나 ‘이순신장군’을 써 오던 나이기 때문이다. 꼭 한번은 가고 싶었던 곳. 10월 14일 한삼섬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한삼섬은 세종 1년인 1418년 삼군도제찰사 이종무가, 병선 227척과 병력 1만 7천 285명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의 대장정에 오른 출전지이기도 하다.

 

1592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행영으로 이곳에 제승당을 설치하였고, 이듬해인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원균의 참패로 제승당이 소실되었다. 1739년 조경 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을 중건하였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은 사적 제1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퉁영유람선터미널을 떠나 인근으로 가는 유람선(위)과 한산섬으로 가는 도중 만나는 남해안의 섬들(아래)


 

유람선을 타고 한산섬으로

 

10월 14일 오전 10시 30분. 통영유람선터미널을 출발하여 뱃길로 20여분. 한산섬으로 들어가는 길에 바라다 보이는 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한산대첩 기념비가 서 있는 봉우리와 거북등대를 지난다. 이곳은 물이 빠지면 암초가 많이 솟아있다고 한다. 한산대첩은 바로 그런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했다는 것.

 

선착장에 배가 닿자 사람들이 부지런히 걷기 시작한다. 주어진 한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둘러볼 것은 둘러보아야지. 바다를 끼고 반원을 그리고 있는 적송이 한편으로 우거진 갈을 걷는다. 호흡을 깊게 해본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가 가슴 깊이 바닷내음을 전해준다.

 

매표소인 한산문을 지나 걸어서 5분. 과거 이순신장군이 사용을 했다는 우물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치면 제승당으로 오르는 길이다. 천연기념물 제63호인 팔손이나무가 길 양편에 넓은 잎을 벌리고 손을 맞이한다. 조금 걸어 올라가면 계단 위에 충무문이 있고, 그 안에 이순신장군의 혼이 깃든 많은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장군의 충정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승당이다. 제승당은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 간적들의 모함으로 장군이 한양으로 압송될 때까지, 3년 8개월 동안 진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1,491일분의 난중일기 중, 1,029일의 일기가 이곳에서 쓰여졌다. 제승당을 바라보고 우편에는 그 유명한 장군의 시에 나오는 수루가 서 있다.

 

 

제승당으로 오르는 길에 서 있는 팔손이나무(위)와 제승당(아래)

 

수루 위에서 바라다 본 한산만의 모습이 아름답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얼마나 많은 포화가 터졌던 곳일까? 수루를 내려오다가 보면 좌측에 충무공의 후손들로 통제사와 부사로 부임을 했던 이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송덕비가 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들은 240년 ~ 130년 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제승당의 뒤편으로는 바닷가에 서 있는 한산정이 있다. 한산정은 충무공이 장병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한산정에서 바다를 건너 과녁이 보인다. 과녁까지의 거리는 145m. 충무공이 이곳에 활터를 만든 것은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서 실전거리를 적응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사적지 안에 한산만을 바라보고 서 있는 수루(위)와 장군의 후손들의 덕을 기리는 송덕비들(아래) 

한산정에서 바라다 본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화살을 쏘는 과녁

 

난중일기에는 이곳에서 활쏘기 시합을 하여 진편에서 술과 떡을 내어 배불리 먹었음을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장군의 탁월한 전술로,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장군의 영정 앞에 서다

 

한산정을 벗어나 충무사로 향한다. 외삼문인 솟을삼문을 지나면 한편에 제승당유허비가 서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타버린 것을, 1739년 제107대 통제사인 조경이 제승당을 다시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유허비를 지나 내삼문을 들어서면, 충무사가 나온다. 충무사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무사


 

향을 한 개비 들어 불을 붙여 꽂고 머리를 숙인다. 왈칵 눈물이 흐른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듯하다. 문화재 답사를 시작하면서 그렇게 찾아오고 싶었던 곳이다. 30년이 지난 오늘에야 이곳에 섰다. 그저 목석이 된 듯 서 있는데 사람들이 빨리 가야한다고 부산을 떤다. 일행이 없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있고 싶었는데. 그렇게 잠시 장군을 보고 되돌아서야 한다니. 걸음이 떼어지질 않는다.

 

 

배를 타고 한산섬을 떠나오는데 갈매기 떼들이 배를 따르며 난리를 친다.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먹느라고. 저 갈매기라면 언제나 그 곳 한산섬을 갈 수 있으련만. 언젠가는 혼자 시간을 내어 다시 이곳을 찾아야겠다. 저 갈매기들처럼 자유롭게.

경남 통영시 명정동에 소재한 사적 제236호인 충렬사. 이순신 장군의 제를 지내기 위해서 선조의 명에 의해, 1606년에 제7대 통제사인 이운룡이 세운 사당이다. 지난 10월 13일 아침 찾아간 충렬사.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들어가면서부터 행복을 느낀 곳이다.

 

우선 충렬사의 입구를 들어서면 정당으로 올라가는 우측에 몇 그루의 동백나무가 보인다. 이 동백나무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나무로, 수령이 4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일 년 간의 어업의 안녕을 위해 풍신제(風神祭)를 지냈다고 한다,

 

 

 

강한루에서 아픔을 느끼다

 

정당으로 오르는 길에 이층 누각 한 채가 서 있다. 앞에서 보면 ‘강한루’요, 뒤로 올라가면 ‘영모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강위는 강한루에 올라 다음과 같이 이곳의 풍광을 읊었다.

 

물길 거슬러 신선의 꿈 어렸더니

강한루 다시 올라 흉금을 활쫙연다

외로운 달 먼 하늘 떠가고

개울물 모두 흘러 깊은 바다로 가는 구나

사람 만나서 옛 땅 물어보고

술 나누는 첫 마음 아련도 하여라

여기 충렬사 있어

찾아온 지 벌써 두 번째렸다.

 

 

 

강한루 누마루 밑으로 난 통로를 지나 계단을 지나야 정당으로 오를 수가 있다. 그런데 계단으로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강한루의 지붕에 기와들이 많이 흐트러져 있다. 아마도 이 일대를 강하게 휩쓸고 간 태풍 때, 저리 기와가 제 자리에서 벗어났는가 보다. 그 때가 언제인데 아직도 저렇게 볼썽사납게 놓아둔 것인지.

 

적어도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인데 좀 심하단 생각이 든다. 물론 문화재의 보수는 절차를 거쳐서 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기왓장들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도, 어찌 정리조차 하지 않았을까? 그런 모양새를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파온다.

 

장군께 향을 올리다

 

강한루를 지나 외삼문을 들어서면서 좌우측을 보면 충렬묘비명을 비롯한 몇 기의 비석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제111대 통제사 이언상 사적비, 충무공 이후로 덕수 이씨 후손들 중에서 12명의 통제사가 있었는데, 그 중 121대 통제사 이태상, 138대 이한창, 143대 이한풍, 167대 이항권, 172대 통제사인 이승권 등 5명의 공적비 등이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 위에 내삼문이 서 있다. 내삼문에는 문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인 활주는 육각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였는데, 그 밑에 해태상을 조각해 놓아 특별하다. 통용문인 양편에 협문을 낮게 만든 것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뜻이라고 하니, 그 또한 선조들의 마음자세를 배워야 할 듯.

 

 

 

정당은 충렬사이다. 이춤무공의 영정을 모셔놓은 곳으로 선조의 명에 의해 1606년에 지어져, 300년이란 긴 시간동안 역대 통제사들이 봄, 가을로 제향을 모시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정당의 지붕 용마루에는, 주역의 팔괘를 기와로 그려내었다. 아마도 이런 충렬사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큰지도 모르겠다.

 

 

 

사당 앞에 향이 놓여있다. 장군께 향을 올린다. 뒤에서는 해설사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들어올 때 본 강한루의 망가진 지붕이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벌써 이곳을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났는데, 이제는 말끔히 수리가 되었길 속으로 빌어본다.

국보 제305호인 세병관은 그 규모면으로는 국보 제224호인 경복궁경회루와, 국보 제304호인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한다.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세병관은 <통영지> 공해편에 보면,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두릉포에서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선조 37년인 1604년에 완공한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2박 3일의 통영답사 2일째인 10월 13일 오후에 찾아간 세병관. 통영시 문화동의 이 일대는 사적 제402호인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예전 통제영은 전각이 100여 동이 서 있었으며, 그 안에는 세병관을 비롯하여 운주당, 백화당, 중영, 병고, 교방청, 산성청, 12공방 등의 건물이 있던 대규모 병영이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통제영

 

통제영의 중심에 있는 세병관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경상, 전라, 충청 3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이다.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그 위용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현재 이곳 통제영은 복원계획을 세워 많은 건물이 세병관 주변에 새로 들어서고 있다.

 

290년 동안이나 3도 수군을 지휘하며 우리나라의 바다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통제영. 그러나 고종 32년인 1895년에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지고, 일제는 우리민족의 정기 말살정책을 펴 지역의 많은 문화유산과 전통민속 등을 훼파할 때 세병관을 제외한 많은 건물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세병관이 남아있어 고맙다

 

세병관 주변은 공사 중으로 복잡하다. 중장비의 굉음소리가 요란한 공사장을 피해, 세병관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들어선다. 멀리서부터 그 위용을 보았기에 좀 더 자세히 세병관을 들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병관 건물의 기단은 장대석 2벌대로 쌓았다. 기단의 윗면에는 전돌을 깔았고, 큼직한 자연석 초석 위에는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앞뒤에는 간살을 작게 잡은 퇴칸을 설치하였다. 현재는 사방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원래는 평면의 기능에 따라 벽체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았으며, 중앙 뒷면에는 약 45㎝ 정도 높은 단을 설치하여 궐패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 홍살을 세우고, 중방 위로는 판벽으로 마감하여 무인도를 그렸으며 천장은 소래반자를 설치하였다.

 

 

 

세병관의 또 다른 이름 ‘괘궁정’

 

세병관 밖을 한 바퀴 돈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측변 벽 위편에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왜일까? 대개 이런 군영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이 아니던가? 반대편에도 역시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그림도 많이 퇴색하고 벽이 높아 자세히 식별을 할 수 없지만, 틀림없이 비천인상이다.

 

세병관 전각 안을 찬찬히 살피면서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바깥 세병관의 현판이 걸린 안쪽으로 작은 현판이 높다랗게 걸려있다. ‘괘궁정(掛弓亭)’, 말 그대로라면 활을 걸어두는 정자라는 뜻이다. 이곳이 군영의 중심이었으니 이해가 간다. 이렇게 삼도수군을 호령하던 곳인 세병관에서 만난 작은 현판하나가, 선조들의 마음의 여유를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든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무엇 하나 놓칠 수가 없다. 그래서 일일이 하나하나를 짚어보아야만 한다. 그저 겉으로만 후다닥 보고 다음 일정을 따라갔다고 하면, 나중에 꼭 후회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때 삼도 수군을 호령하던 세병관, 통제영의 복원이 이루어지는 날 그 위용을 만나러 다시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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