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 소재한 사나사에 가면, 딴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절에서 인물의 영정을 모신 전각은 조사당이라고 하여, 절과 관계가 있는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전각이 있다. 그런데 사나사에는 함씨각이라는 전각이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함왕성주 함규를 모셔 놓은 전각이라는 함씨각. 왜 사나사에는 이런 함씨각이 있는 것일까?

양근을 근원지로 한 양근 함씨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사나사 인근에 소재한 함왕성은 별칭 함공성(咸公城), 양근성(楊根城), 함씨대왕성 이라고도 불렀다. 포곡식 석축 산성인 함왕성은 해발 1031m의 봉우리를 기점으로 사나사가 있는 계곡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자연석으로 쌓은 함왕성은 현재 700m 정도의 무너진 석축이 남아있는데, 그 내성의 규모가 2km에 달한다고 하니 작은 성은 아니다. 석축의 성벽은 거의 무너졌다고 하는데, 눈이 쌓인 함왕성을 오르지를 못해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양근에는 이 함왕성에 대한 전설이 전한다. 성 밖 계곡 아래 있다는 함공혈이라 부르는 바위굴에서 삼한시대에 주악이라는 함씨대왕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양근 함씨의 시조 함혁이 삼한시대에 석성을 쌓고 스스로 함왕(咸王)이라 칭했으며, 이곳을 세거지로 정한 함씨들이 이 바위굴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고 웅거하였다가 멸망하였고, 그 자손들이 본관을 양근으로 삼았다 한다.

통일신라시대 말기에는 지방에 산거한 호족들이 각지에서 스스로 한 세력을 일으켜 왕이라는 칭호를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양근을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 중 함규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스스로를 함왕이라 칭한 듯하다. 그러나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왕건에게 귀속하여 후삼국의 통일에 공을 세웠다. 그런 연유로 함규는 개국공신이 되고, 그가 죽은 후 사나사를 원찰로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高麗太祖統合三韓翊贊壁上功臣名錄'을 살펴보면 1등 공신에는 최응,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있고, 2등 공신에는 유금필, 김선평, 장길, 류차달, 이도, 함규, 김선궁, 홍규, 왕희순, 김훤술, 윤신달, 박윤웅 등의 이름이 보인다. 또한 3등 공신에는 왕식, 염태, 평견, 권행, 박희술, 능식, 권신, 염상, 전락, 연주, 마난 등이, 4등 공신으로는 김홍술과 박수경이 공신록에 책봉이 되었다. 함규는 개국공신 중 2등 공신으로 책봉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함공혈에 얽힌 전설

옥천면 용천 2리 사나사 입구 계곡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여기서 함씨 시조인 성주 함왕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이 함공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오랜 옛날 함공혈 부근에 함씨족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함씨들은 나름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여 살아가길 열망 하였으나, 그 무리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씨족사회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우두머리가 없으면,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함씨들은 의견을 모아 하늘에 제사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함공혈에서 한 남자 어린이가 나왔다. 함씨들은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점지한 아이라고 여겨, 그 아이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아 함왕으로 추대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후 함씨들은 번창을 하였으나,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다른 부족들의 침입을 받아 함씨들의 왕은 죽고 점차 쇠퇴해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함씨마을을 지나던 나그네가 말하기를 '어머니는 버려두고 자기들만 번창하길 바라면 될 것인가? 그러니 나라가 이 꼴이 되었지'라면서 혀를 차고 갔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은 함씨들은 왕이 태어난 바위를 성 밖에 두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뒤에 함씨 중에서 왕의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나타나지를 않아, 결국 새로운 성을 축조하지 못하였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은 단지 전설로 끝이 나지만, 함규를 어찌하여 함왕이라고 칭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함공혈을 찾아보고 싶었으나 눈이 많이 쌓여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역사의 흔적은 늘 색다른 이야기로 다가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수많은 난 속에 함씨각의 존재가 있어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깨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이렇게 많은 수난을 당한 사나사에 함씨각을 건립했다는 것은, 사나사와 함규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함씨각은 미타전 옆에 마련되어 있다. 1칸으로 된 함씨각 안에는 함규의 영정인 듯한 탱화가 걸려있다. 언제부터 함씨각이 있었는지는 정확지가 않다. 하지만 함규가 사후에 사나사를 원찰로 삼고 함씨각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양근지방을 근거로 세력을 확장했던 함씨들이, 사나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함규라는 고려의 개국공신을 이곳에 모셔, 함씨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사나사에 있는 함씨각은 그렇게 색다른 이야기로 찾는 이를 즐겁게 만든다. 눈이 쌓여 발목까지 빠져들지만, 겨울 답사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석남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절로, 고려 초에 해거국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태종 7년인 1407년에는 국가에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자복사(資福寺)'로 지정이 되기도 했다. 절에는 대웅전 등 많은 전각들이 국보나 보물, 혹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 민가와는 달리 절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각 등의 훼손이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오랜 시간 충실한 보수로 인해, 그 본모습을 지켜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석가모니의 팔상도를 모시는 영산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에 소재한 석남사의 영산전은, 보물 제82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신 전각의 명칭이다. 석남사의 영산전에는 16나한을 함께 모셔 놓았다.



석남사의 영산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꾸며진 크지 않은 전각이다. 석남사의 입구에 있는 금강루라는 누각 밑으로 난 입구를 지나면 계단 중간 우측에 자리한다. 그리 크지는 않은 전각이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건축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위로 올라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이 영산전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명종 17년인 1562년이다. 이 영산전은 임진왜란 때도 소실을 면하였다.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건축양식을 갖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작아도 소중한 문화재

석남사 영산전은 딴 전각에 비해서 크지가 않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작은 전각으로 주위를 돌아보면, 나름대로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산전은 돌 축대를 쌓고, 돌로 쌓은 돌담으로 앞을 둘렀다. 그리고 지붕 가구는 오량으로 구성하였다.

이 영산전은 지은 지도 오래되었지만,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전국의 많은 사찰의 전각들이 소실되고 폐허가 된 것에 비해, 이곳은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석남사는 영조 1년인 1725년에는 해원선사가 영산전과 대웅전의 기와를 갈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웅전은 원래 영산전 앞에 있던 것을, 영산전 뒤로 높여놓았다. 그러나 영산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영산전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형태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주추로 사용했다는 점이나, 그 위로 올린 민흘림기둥의 일부가 여기저기 파여 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큰 보수 없이 보존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영산전 앞의 석탑

계단을 오르면 영산전 게단 양편에 두 기의 석탑이 서 있다. 고려 말기의 탑으로 보이는 이 두 기의 탑은, 절 아래쪽에 서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이 탑 중에 영산전 방향으로 있는 석탑은 옥신석에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누군가 그 안에 작은 부처를 갖다가 놓았는데. 이곳이 감실임을 나타내려고 그런 것 같다.

석남사는 유서 깊은 절이다. 현재 석남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 외에, 대웅전과 석탑, 그리고 마애불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산비탈에 늘어선 전각들이 자리한 석남사. 여름철 녹음이 짙어지면 이곳을 다시 찾고 싶다.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란 생각에.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11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팽성읍 객사. 팽성 객사는 조선 성종 19년인 1488년에 크게 지었으며, 그 후로 2번의 수리를 거쳤다. 객사란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묵어가는 곳이며, 일반적인 형태는 중앙에 중대청을 놓고, 양편으로 동, 서헌을 둔다.

팽성객사는 일제시대에는 양조장으로 바뀌었다가, 그 후 주택으로도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1994년 해체, 수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대문간채는 중앙에 솟을문을 두고, 양편으로 방과 광 등을 드렸으며, 동편을 꺾어 ㄱ 자형으로 마련하였다.



관리청으로서 위엄을 보이는 팽성객사

본채는 전체 9칸으로 가운데 3칸은 중대청, 양 옆에 동, 서헌이 각각 3칸씩 있다. 객사 본 건물의 중앙에 마련한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관리들이 한 달에 두 번 절을 하던 곳이다. 절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행해진다. 중대청의 지붕은 양 옆에 마련한 동, 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 서헌은 각각 중대청과 가까이에 한 칸의 온돌방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모두 누마루를 깔았다. 이 동 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팽성객사의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꼭대기 양끝에는, 용머리조각을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팽성읍 객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팽성객사는 원래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조 현종 때 크게 중창을 하였고, 영조 36년인 1760년과, 순조 1년인 1801년에 다시 중수를 했다고 한다.

문은 잠가놓고, 쓰레기는 쌓이고

2월 12일 오후 팽성객사를 찾았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처음 팽성객사를 방문한 것은 2007년 10월 21일이었다. 그 때도 문은 굳게 잠겨있고, 관리사에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객사의 대문은 잠을 통으로 굳게 잠겨있다. 그리고 관리인이 묵는 관리동과 심지어 화장실까지 잠겨 있다.



화장실 앞에는 지저분하게 담배꽁초와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으며, 담장 밑에도 담배꽁초와 누군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담은 비닐봉지들이 나뒹굴고 있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리동까지 지어놓고 정작 관리는 하지 않는 문화재. 관리동과 화장실이 붙어있는 이 건물은 벽도 떨어져 나가 흉물로 변하고 있다.

주말과 일요일이 되면 문화재를 답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곳이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잠가만 두면 된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전주객사의 경우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누구나 들어가 동, 서헌 마루에 앉아 쉴 수가 있다.





문화재란 더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그것의 소중함을 인식할 때 지켜지는 것이다. 무조건 문을 걸어놓고 출입을 시키지 않는다고 보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돈을 들여 관리사를 짓고 사용도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도대체 왜 혈세를 낭비하면서 문화재보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해당 지자체의 반성이 있기를 바란다.

국보 제304호 진남관. 전남 여수시 군자동 471번지에 소재한 여수 진남관은 조선조 선조 31년인 1598년에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이다. 진남관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을 간직한 곳이다. 진남관은 지금까지도 숙종 44년인 1718년에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이 진남관은 객사로 역대 임금을 상징한 궐자를 새긴 위폐인 ‘궐패’를 모신 곳이다.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던 장소로,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원형의 기둥이 웅장한 전각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인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 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전문적인 설명이 아니라고 해도 진남관은 보는 이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단청이 벗겨진 그대로 놓아둔 처마 등은 오히려 예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진남관을 한 바퀴 돌아보면 이곳이 바로 전라좌수영의 본영이 있던 곳이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 그 웅장함이라니. 진남관은 원래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뒤인 선조 32년(1599)에 삼도통제사 이시언이 이 자리에 마련하였다. 숙종 42년(1716)에 소실된 것을 수사 이제면이 재건하였고, 그 후에는 여러 번 중수를 하였으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찬찬히 돌아보면 이 진남관의 건축술이 얼마나 정교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 조각 하나에서부터 기둥과 마루의 짜 맞춤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그저 돌아만 보아도 그 위용이 저절로 느껴진다. 우리는 가끔 같은 문화재인데 왜 국보며, 보물, 혹은 문화재자료 등으로 구분을 지을까를 의구심을 갖게 된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 가치를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남관을 돌아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 국보에는 특별한 것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올 해가 지기 전에 여수 진남관을 찾아 국보의 참다움을 느껴보기를 바란다.


낯 뜨거운 옛 자료

이상은 예전에 운영하던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낯이 뜨겁다. 당시는 그저 인터넷이나 자료를 인용해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 글은 처음으로 블로그를 운영할 때 썼던 글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열정을 갖고 문화재 답사를 하고 글을 썼던 때였다. 정말 날밤을 새우면서 글 하나를 쓰고는 했다.

물론 문화재 적인 요소로만 본다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보다 월등히 전문적이고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생명이 없는 글이란 생각이다. 말없이 버티고 있는 문화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내 일이란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그 때는 왜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두고두고 낯부끄러운 일인데. 오늘 이 글을 다시 올리면서 생각을 한다. 생명이 없는 글은 쓰지 않겠다고.

마을 입구, 혹은 사찰 입구에 보면 부릅뜬 눈에 왕방을 코, 그리고 삐져나온 날카로운 이빨. 어째 썩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있다. 흔히 장승이라 부르는 이 신표는 지역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장승, 장성, 장신, 벅수, 벅시, 돌하루방. 수살이, 수살목, 수살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이다. 대개는 마을 입구에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지만,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표시나 이정표의 구실도 한다. 장승은 대개 길 양편에 나누어 세우고 있으며, 남녀 1쌍을 세우거나 4방위나  5방위, 또는 경계 표시마다 11곳이나 12곳에도 세우기도 한다. 마을 입구에 선 장승은 동제의 주신으로 섬기는 대상이 된다.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장승. 깎을때마다 세워놓아 집단의 장승군으로 변했다. 솟대와 함께 서있다. 2010, 3, 20 답사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장승의 모습

장승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정확하지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 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좌측은 충남 공주시 상신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목장승(2007, 1, 25 답사) 우측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무갑리 목장승(2008, 12, 5 답사)

좌측은 전북 남원 실상사 입구에 서 있는 석장승(2010, 11, 27 답사) 우측은 전남 여수 영등동 벅수(2007, 12, 6 답사)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 기록이 보여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보물 제157호인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탑비>에,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 탑비의 내용에는 759년에 ‘장생표주(長生標柱)’가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했다. 그 외에 <용재총화>나 <해동가요> 등에도 장승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통일신라나 고려 때는 이미 장승이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경계표시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장승은 성문, 병영, 해창(海倉), 관로 등에 세운 공공장승이나, 마을입구에 세운 수호장승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하면서 민속신앙의 대상물로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현재까지도 마을에서는 장승을 신표의 대상물로 삼고 있는 곳이 상당수가 있으며, 옛 지명 중에 ‘장승백이’ 등은 모두 장승이 서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광주 엄미리 장승은 마을의 입구에 서서 수호장승의 역할을 하지만, 밑 부분에는 거리를 알리는 로표장승의 역할도 한다. 2011, 1, 3 답사 

함양 벽송사 목장승. 목장승이 오래되어 훼손이 되었다. 보호각을 지어 보호를 하고 있다. 2010, 12, 11 답사 

장승은 설화나 속담 등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럴 정도로 우리와는 친숙하다는 것이다. 장승을 잡아다가 치죄를 하여 도둑을 잡았다거나. 판소리 변강쇠타령 등에 보이는 장승에 대한 이야기는, 장승이 민초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척 장승같다’거나 ‘벅수같이 서 있다’ 등은 모두 장승의 형태를 빗대어 하는 속담 등이다.

해학적인 생김새는 민초들의 삶의 모습

마을 입구의 양편에 서서 마을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서 있는 장승. 처음 장승이 대하는 사람들은 ‘무섭다’고도 표현을 하고, ‘흉측하다’고도 표현을 한다. 그러나 이 장승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서 있으면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장승은 점점 마을 사람들을 닮아간다.

선암사 입구에 세워진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경계표시 장승. 2011, 3, 5 답사

사람들은 목장승을 1년에 한 번, 혹은 3년에 한번 씩 깎아 마을입구에 세우면서, 자신들의 심성과 닮은 모습을 만든다. 석장승 또한 돌을 다듬는 장인의 마음을 닮는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장승이 무섭기도 하지만, 해학적인 요소를 많이 띠고 있는 것은 민초들의 삶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권력이나 물질을 가진 자들에게 보여주는 험상궂은 얼굴 뒤에, 같은 민초들에게는 한 없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이란 생각이다.

오랫동안 민간신앙의 대상물로 남아있는 장승. 아마도 사람들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은, 언제나 우리 곁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함께 해 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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