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소재한 무량사. 무량사는 신라 말에 범일이 세워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자세한 창건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 말 고승 무염대사가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다시 지었으며,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고찰들은 저마다 계절별 아름다움이 있다. 절이라는 곳이 사시사철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은 다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무량사는 겨울에 특히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고찰이다. 무량사는 사실 우리소리문화의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내력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운 곳이다.

 

 

2층으로 지은 불전 무량사 극락전

 

무량사의 중심건물은 보물 제356호로 지정이 된 무량사 극락전이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치않은 2층 불전으로,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아래, 위층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트여 있다. 아래층 평면은 정면 5, 측면 4칸으로 기둥 사이를 나누어 놓았는데 기둥은 매우 높은 것을 사용하였다. 위층은 정면이 3, 옆면이 2칸으로 되어 있다.

 

위층은 아래층에 세운 높은기둥이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벽면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는 그 얼마 되지 않는 낮은 벽면에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창문을 설치했었는데 지금은 나무판 벽으로 막아놓았다. 아미타여래삼존상을 모시고 있는 이 무량사 극락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불교 건축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배흘림기둥과 활주가 고풍스러워

 

무량사 극락전은 이 사찰의 경내가 극락세계임을 뜻한다. 무량사는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탄 뒤 인조 11년인 1633년에 중창하였으며, 이 극락전도 그때에 지은 것이다. 무량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의 전각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2층 불전으로 지었으며, 조선 중기 건축의 장중한 맛을 잘 드러내 주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겉에서 보면 2층집이지만, 내부는 통으로 되어있는 이러한 불전은 오층 목탑 형식인 법주사 팔상전과, 3층 전각인 금산사 미륵전 등이 있다. 그 외에도 화엄사 각황전이나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도 이러한 형태로 지어졌다. 이 불전들은 모두가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뚫린 통층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극락전의 기단은 장대석 세벌대로 쌓고,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배흘린 원형기둥을 세워놓고, 1, 2층 모서리에는 처마 끝에 활주를 받쳐놓았다. 아래층 문살은 가운데가 네 짝이고 점차 두 짝, 한 짝씩으로 줄었다. 정면은 모두 창살문을 달아냈으며, 2층 정면도 원래는 살문을 달아있다고 한다. 이는 집안에 빛이 잘 들어오도록 마련한 것이다. 다른 벽들은 모두 흙벽이 아니고 나무판자를 대서 만든 판벽이다. 이런 점은 평지가 아닌 산간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보기이다.

 

동양 최대의 소조삼존불을 모셔

 

극락전 안에는 보물 제1565호인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모시고 있다. 이 심존불은 흙으로 빚어 조형한 것으로 동양 최대의 삼존불이다. 중앙에 좌정한 아미타불은 높이 5.4m이며, 양쪽에는 높이 4.8m의 관세음보살과 역시 4.8m의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 두고 있다.

 

 

17세기 대규모 사찰에서 널리 조성되었던 대형의 소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삼존상은, 발견된 복장발원문을 통해 현진이라는 조각승과 1633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특히 조선후기 조각사 연구는 물론, 조각 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물로 지정이 된 채제공의 초상화 3

 

아마 우리나라에서 역대 군왕을 제외하고 한 인물을 그린 초상화가 세 점이나 보물로 지정된 경우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번암 채제공 한 사람뿐일 것이다. 채제공은 10여 년을 정조와 함께 했다. 홀로 재상의 지위에서 그 오랜 세월을 지낸 것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시키려 하자 채제공은 그에 반대를 했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정조임금이 채제공을 중용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난 달 28일부터 20142월까지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49에 소재한 화성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개막을 한 번암 채제공전. 이곳에 가면 자신의 속한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 3점을 만날 수가 있다. 이 초상화들은 3점 모두가 보물 제1477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부채와 행낭을 든 시복본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에 그려진 것으로, 채제공이 73세에 그려진 초상화이다.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을 그렸다. 초상화의 우측 상단에는 聖上 十五年 辛亥(1791) 御眞圖寫後 承 命摸像 內入 以其餘本 明年 壬子(1792) 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그림을 그린 화가는 이명기임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우측 상단에 채제공이 직접 쓴 자찬문도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정조임금으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선물을 표시하기 위해서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시복본은 보물 제1477-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시복본 초상화는 120x79.8cm이며, 전체 크기는 173x90cm이다.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난 금관조복본

 

보물 제1477-2호로 지정이 된 금관조복본1784년 작으로, 65세 때 그린 초상이다. 초상의 왼편에는 채제공의 자찬문을 이정운(1743- ?)이 썼다. 이 금관조복본은 서양화법을 따른 명암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금관조복을 금박과 선명한 채색, 명암법 등으로 화려하게 표현했다.

 

이 금관조복본은 사실성과 장식성을 어우러지게 하여, 조선 초상화의 뛰어난 수준을 잘 보여준다.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화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입체감이 두드러진 안면과 옷주름의 표현, 그리고 바닥의 화문석 표현기법으로 볼 때 이 금관조복본 역시 당대의 화공인 이명기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관조복본은 그림부분 145x78.5cm, 전체영정은 202.9x 91.6cm이다.

 

 

부여 도강영당에 모셔진 흑단령포본

 

보물 제1477-3호로 지정이 된 흑단령포본은 오사모에 쌍학흉배의 흑단령포를 입은 전신의좌상이다. 이 흑단령포본은 본래 부여 도강영당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그 안면의 기색으로 볼 때 부여본은 앞에 살펴본 73세상과 흡사하다. 안면과 옷주름의 입체감 표현, 투시도법에 의한 화문석과 족좌와 의자의 사선배치는 이명기의 초상화법으로 보인다. 흑단령포본은 그림 크기 155.5x81.9cm이고, 전체길이는 210x94cm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그려진 번암 채제공의 초상화는, 조선후기 채제공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초상화를 그린 화가 이명기의 회화적 수준이 당대 최고임도 알 수 있다. 채제공의 3점의 영정은 조선후기 문인 초상화의 각종 유형을 다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유지초본까지 전하여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에 학술적 가치도 높다.

 

화성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보물로 지정이 된 채제공 초상화. 정조시 10년간이나 재상의 위치에 있으면서, 강한 국권을 형성하기 위해 애쓴 정조를 도와 화성축성 등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는 그 시기마다 삶의 척도를 재는 가치관이 다르다. 지난 과거에 삶을 이 시대에 맞추어 왈가왈부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하기에 어떤 사람이 어느 시기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그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적 배경을 배제할 수가 없다.

 

우리는 흔히 근본이니 뿌리라는 말을 쓴다. 무슨 시시콜콜한 말이냐고도 하겠지만, 그런 것을 지난 삶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는가 보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1호인 절열양정씨지려가 있다. 작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전각에 節烈兩丁氏之閭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전각 안에 걸린 두 사람의 여인

 

말 그대로 하자면 두 사람의 정()씨가 굳건한 마음으로 절개를 지킨 것을 기리기 위해 문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과연 누구였으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한 칸의 정려각은 조선조 후기에 세운 전각이다. 주변은 흙을 조금 높게 돋우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좌우로 갈라 두 사람의 정려가 있다.

 

이 정려는 절개와 지조를 지킨 두 사람의 여인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가 정씨이기 때문에 양정씨라고 표현을 했다. 이 정려각은 조선조 경종 3년인 1723년에 세웠으며, 그 뒤 순조 19년인 1819년에 고쳐 지었다. 단칸 팔작지붕으로 마련한 양정씨 정려는 그저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지난 47, 장수군 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양정씨지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작은 전각 하나는, 그냥 무심히 지나치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작은 것 하나에도 눈길을 떼지말아야 하는 문화재 답사에서는, 그런 소소한 것도 확인을 해야만 한다.

 

죽음으로 가문을 지켜내다

 

이 두 사람의 여인은 정황(1412 ~ 1560)의 후손들이다. 정황은 조선 중기 전북 남원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이다. 자는 계회, 호는 유헌, 시호는 충간으로, 부친은 필산감역 정세명이다. 정황의 후손이라는 이 두 여인의 행적은 정려 안에 걸린 현판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안에는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현판과, 뒤편에는 행적을 기록한 현판이 보인다.

 

 

한 사람은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봉변을 당하고, 스스로 물 속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또 한 사람은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음을 택했다. 옛날 이야기라고 해서 당시의 사상이 죽음으로 몰아갔다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 시대적인 배경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정려에 써 있는 글귀를 보면 전각 안을 바라보면서 우측에는 절부라 기록을 하였으며, 사옹원 첨정 권백시의 처 창원정씨 지려이다. 좌측에 적힌 것은 열녀라 적었으며, 성균생원 풍천 노세기의 처 창원정씨 지려이다. 뒤편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뒤편에 걸린 편액에 적힌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음이 아쉽다. 다만 한 여인은 절부로 한 여인은 열녀로 기록해 절열지려라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 두 분의 여인들은 그길이 스스로를 지키고, 가문을 지킨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랜 유교적 사고에서 온 행동이라고 일침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여성은 그길이 최선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전각 앞에서서 머리를 숙이고, 두 여인의 명복을 잠시 빌어본다. 아픈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여인들을 생각하면서.

전북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내소사의 대웅보전은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에 지어진 전각이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고 한다. 원래는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고 하였는데, 그 중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가 지금의 내소사이다.

 

대웅보전은 조선 인조 11년인 1633년에, 청민대사가 절을 중창할 때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대웅보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이다. 대웅보전의 규모는 정면 3측면 3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짠 장식구조가 다포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포개진 모습은 우리 옛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꽃 창살의 아름다움은 창호의 백미

 

내소사 대웅보전의 앞쪽 문에 달린 창호의 창살은 꽃무늬로 조각하여, 당시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연꽃, 국화꽃, 해바라기 등 꽃문살 무늬는 문마다 모양이 다르고 나무결을 그대로 살려 꽃잎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대웅보전 안쪽으로 들어가면 벽체 윗부분에 있는 부재 끝을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보머리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 건물의 화사함을 더해 준다.

 

천장은 우물천정으로 꾸몄으며, 불상 뒤쪽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가장 큰 백의관음보살상이 그려져 있다. 공예로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과 독창적인 장식물 등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 양식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목침으로 꾸민 내소사 대웅보전

 

이 보불로 지정이 된 내소사 대웅보전에는 전설이 전한다. 대웅보전 오른쪽 천장의 목침이 왼쪽의 것보다 하나가 부족한데, 그에 관해 전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소사가 퇴락해 가고 있을 때 창민대사는 날마다 내소사 일주문 앞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웅전을 짓기 위해 목수가 찾아왔다. 그 목수는 나무를 목침만한 크기로 잘라 다듬기를, 3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는데 그 동안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일만 계속하였다. 주지인 청민대사는 기다리기만 했다.

 

그 절에 상좌스님이 목수를 곯려주려고 목침 하나를 감췄다. 3년 동안 목수는 목침 다듬기를 다 마친 후 수북이 쌓아둔 목침을 세더니 눈물을 흘리며 청민대사를 찾아갔다. 목수는 목침 하나가 없어졌으니 대웅전을 지을 인연이 없다고 말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청민대사는 목침이 하나 없는 채로 법당을 짓도록 부탁을 했고, 목수는 그 목침을 이용해 순식간에 법당을 완성했다.

 

 

법당을 완성하자 청만대사는 화공을 불러와 단청을 그리도록 했다. 단청이 완성될 때까지 누구도 그 안을 들여다보아서는 안된다고 신신 당부를 했다. 법당 앞에는 항상 목수가 지키고 있었다. 상좌스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목수에게 대사가 찾는다고 거짓말을 하고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오색영롱한 작은 새가 부리에 붓을 물고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상좌스님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새가 날아가 버렸다. 법당 앞에는 큰 호랑이 한마리가 죽어 있었다. 커다란 호랑이가 죽어있는 모습을 본 청민대사는 대호선사여, 생사가 하나인데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이러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내소사의 대웅보전. 벌써 다녀온 지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하다. 올 봄 꽃이 필 때는 내소사를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남한산성은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 35년인 1759년에 성내 남동에 614호에 2,246명이 살았고, 성내 북동에 462호에 1,862명이 거주를 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당시 성안에는 1,076호에 4,10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 초기부터 주변에는 토성 및 석성을 구축하고 적의 침입에 방비를 했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성안에 1,044호에 3,631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혜종 2년인 1836년의 인구는 <남한지>에 의거하여 1,117호에 4,353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남한산성은 그만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서장대 밑. ‘청량당이라는 당호가 보이는 작은 전각이 있다.

 

 

이회장군을 모신 사당

 

18일 일요일 오후.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찾아간 청량당. 이곳을 찾아온 것도 벌써 여러 번이다. 이곳에서는 매당왕신 도당굿이라는 굿이 펼쳐지기도 하는데, 사전 조사를 하러 처음 찾아간 것이 2002년이었으니,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다.

 

한때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과 혹세무민의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몰리기도 하고, 더욱 종교적 사대주의에 기인한 박해로 인해서 중단이 되기도 했던 도당굿. 이 매당왕신 도당굿은 남한산성 축조의 중임을 맡았으나, 지정된 기일 안에 성을 쌓지 못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가 된 이회장군과 그 부인 송씨의 넋을 위로하는 굿이다.

 

 

둘레 길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힘들게 올라간 서장대. 굳게 닫혀있는 청량당의 문을 바라보며 조금은 아쉽다. 물론 예전 자료야 갖고 있지만, 새로운 모습을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회장군의 탱화를 모시고 있는 청량당은, 남한산성 내 일장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 서편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누명을 쓰고 참수당한 이회장군

 

이회장군은 조선조 인조 2~4(1624~1626) 사이에 지세가 험악한 산성 동남쪽의 축조 공사를 맡아했는데, 워낙 지형이 험해서 제 날짜에 공사를 마감하지 못하자 장군을 시기하는 간신의 무리들의 모함에 빠졌다.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져서 공금을 탕진해 공기를 맞추지 못했다는 모함으로 인해, 서장대 앞뜰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 장군은 구차스런 변명을 하지 않고, '내가 죄가 없으면 죽는 순간에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라. 만일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가 죽어 마땅하지만, 매가 날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단다. 그런데 정말로 참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서장대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죽임을 당하는 장군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고 하여서 그 바위를 매 바위라고 불렀으며, 청량당 안에 매 바위의 화분(탱화)을 그려서 보관하고 있다.

 

이회장군은 성의 축조를 완고히 하기 위해서, 처첩을 삼남지방으로 보내 축성 비용을 모금케도 하였다.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장군의 비보를 들은 처첩은, 비분을 금치 못하고 송파 강 머리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고 하여 당 안에 같이 모셔져 있다.

 

 

1920년도 자료에 보이는 매당왕신

 

1920년대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남한산성 안에는 매당왕신(鷹堂王神)’이라는 도당이 있었으며, 이는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를 당한 홍대감을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남한산 위에 화주당을 세웠다고 했다. 또한 처인 산활부인은 그 비보를 듣고 뚝섬 교외 한강변의 저자도에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가 날아왔다거나 성을 축조할 비용을 주색잡기로 탕진했다는 내용이 서로 일치하고 있어서, 매당왕신 도당이라는 것이 지금의 청량당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2002년도에 청량당을 들렸을 때, 당 안에는 이회장군과 남편의 참형소식에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한 송씨부인, 첩실인 유씨부인, 승병을 이끌고 남한산성 축성을 한 벽암대사의 화분이 있었다.

 

 

그리고 무속신인 백마신장과 오방신장, 이회장군의 당을 지키던 나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화분으로 모셨다는 대신할머니, 군웅, 별상 등의 화분도 함께 모셨다. 2002년 당시 조사를 할 때, 마을 주민들은 대감당(청량당을 마을 어르신들은 대감당이라고 불렀다)을 조성하고 그 앞에 향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런 전해지는 이야기로 본다면, 청량당이 지어진 것은 벌써 400여년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청량당. 꽁꽁 닫힌 전각 안에서 이회장군은 답답함을 호소할 듯하다. 장군이 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슬피 날아간 매처럼, 문을 열어 훨훨 날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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