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여인이 배신을 했다. 장인은 그 여인에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씌웠다. 전등사는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족산성 안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의 말사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이름을 ‘진종사(眞宗寺)’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원종 7년인 1266년에 중창하였으며, 충렬왕 8년인 1282년에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승려 인기에게 부탁하여, 송나라의 대장경을 가져와 이 절에 두게 하고 옥등을 시주하여 전등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충숙왕 6년인 1337년과 1341년 승려들이 중수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고찰이다.

 

 

고졸한 멋을 풍기는 전등사 대웅전

 

전등사대웅전은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이 되었다. 전등사 대웅전은 1916년 수리 시에 발견된 ‘양간록(樑間錄)’에 의하면 선조 38년인 1605년에 일부가 불탔으며, 다시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불이나 전소가 되었다. 다음해인 161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군 13년인 1621년에 거의 완공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는 철종 6년인 1855년에 규영화주에 의해 중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전등사 대웅전은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집으로 막돌 허튼층 쌓기 한 높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짜올린 다포식 건축이다.

 

 

 

처마를 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들

 

전등사를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전등사와 만날 때마다 새로운 기분에 젖는 것은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다는 점도 있겠으나 볼 때마다 달라지는 처마 밑 ‘나목녀(裸木女)’들의 표정인 것 같다. 어느 날은 편안한 듯한 표정이었다가, 또 어느 땐가는 절박한 표정이기도 한 것은 찾을 때의 내 마음이 비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전하는 이야기 대로라면 도목수를 속이고 정분이 나서 사라진 여인을 영원히 절의 처마를 바치고 참회를 하라는 뜻으로 조각을 해서 올렸다는 것이다. 전하는 이야기가 참으로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왜인. 휴일을 맞아 찾아드는 많은 관광객들은 그저 처마 밑에 웬 사람이 있느냐고 반문을 하다가도 죄를 지은 여인이 벌을 받고 있다는 말에 시큰둥한 표정이다.

 

쭈그리고 앉은채로 무거운 처마를 받치고 있는 나목녀

 

아마도 요즈음에 그런 것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는 그런 마음인지도 모른다. 전등사 처마 밑의 나목녀들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참으로 많이도 변했다는 생각과, 이제는 그만 그 올무를 벗고 처마 밑에서 내려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인을 벌거 벗겨놓은 도목수의 숨겨진 마음

 

전등사 대웅전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나목녀는 마을에 사는 여인네라고 한다. 절집을 짓던 도목수는 그 여인에게 반하여 돈을 벌어 모두 그 여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여인은 도목수가 벌어다 준 많은 돈을 갖고 딴 남자와 눈이 받아 도망을 갔다는 것. 실의에 빠져 있던 목수는 배신감을 느꼈고, 그 여인을 벌거벗겨 대웅전 처마 밑에 올렸다. 그 곳에서 참회를 하고 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의아심을 갖는다. 그 도목수의 마음이다. 참회를 하라고 그 여인상을 만들아 올렸다고 하는데, 그러면 옷이나 입혀줄 일이지 하필이면 발가벗겨 놓았을까? 갈 때마다 그 여인을 바라보면서 측은하다는 생각을 한다. 오랫동안 무거운 처마를 이고 벗은 몸이 부끄러워 한손으로는 처마를 받치고, 한손으로는 무릎 밑을 가린 채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있는 그 여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때로는 그 도목수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 도목수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된 것은 몇 번인가 전등사를 찾은 후였다. 옷을 입혀 놓으면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다시 도망을 갈 테고 그러면 죄를 또 짓게 되어 그 업보가 더 깊어질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던 여인이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게, 마음이 아프지만 옷을 벗겨 대웅전 처마 밑에 올린 도목수.

 

 

 

그야말로 정녕 그 시대의 아름다운 사랑을 안 것은 아닐는지. 요즈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콧방귀를 뀌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아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 여름 피서도 할 겸 강화 전등사를 찾아 나목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사랑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또 다른 작은 절 영산암

 

현재 경북 민속문화재 제126호인 영산암은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소재한다. 이 영산암은 우화루, 삼성각, 응진전, 염화실, 송암당, 관심당 등 5개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산암이 언제 건립이 되었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봉정사영산암향로전창건기'와 ‘봉정사영산전중수기'등의 사료로 볼 때 19세기 말로 추정된다.

 

 

 

영산암은 건축적으로는 크게 주목할 만한 부분은 없으나, 우화루와 송암당 등에서 폐쇄적인 공간을 개방적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삼성각 앞의 조경수법도 경직될 수 있는 공간을 부드럽게 유도한 것 등은 ,매우 뛰어난 공간처리 수법으로 볼 만 하다.

 

공간배치가 뛰어난 영산암

 

영산암은 봉정사의 동쪽 약 1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저 작은 암자 하나뿐인 곳이 아니라,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는 암자다. 그래서 난 오히려 봉정사보다도 이 영산암에 더 매력을 느낀다.

 

 

 

 

영산암은 입구인 우화루를 들어가면 건물이 ‘ㅁ’자 형태로 배열이 되어 있다. 자연적 지형을 이용한 3단으로 된 마당으로 된 구조와, 우화루의 벽체를 없애고 송암당의 누마루를 깐 모습 등에서 폐쇄적인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사람들의 발길을 답답하지 않게 만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좁은 공간이지만, 그 좁은 공간 안에 나열된 전각들이 그저 편안하다는 느낌을 들 수 있도록 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산문

 

원래 극락전 앞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하는 우화루는, 영산암의 입구에 해당하는 누각이다. 우화루란 석가모니께서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실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 것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남다르다. 전각의 밑으로 통과를 해야하는 영산암은 , 들어갈 때부터 낮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안에 자리를 한 영산암. 오밀조밀하니 고풍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는 영산암. 그저 어느 작은 기와집 한 채를 보는 듯한 모습이지만, 그 안에 커다란 뜻이 있어 이곳을 즐겨 찾는다.

삼국지에서 출연하는 명장 가운데 한 사람인 관우(關羽, 160년~219년)는 3세기경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유비, 장비와 더불어 도원결의를 맺고 수많은 공을 세운다. 삼국지에 나타나는 관운장은 청룡연월도를 빗겨들고 적토마에 올라 적군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다. 이 관운장이 우리나라에 와서 왜 무신(武神)으로 신격화되어 숭배를 받는 것일까?

 

임진왜란 때 진인이 세운 신상이 효시

 

관우를 우리나라에서 신성시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진인이 서을 남묘에 관우를 조각한 신상을 모신 것이 그 효시로 보여진다. 그 뒤 관우는 전국에서 관왕묘, 관제묘 등의 명칭으로 불리면서 신격화됐다. 관우를 가장 신성시하는 것은 역시 무속인들이었다. 무속에서는 관우를 무신으로 신성시하고, 집집마다 모셔둘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추앙을 받았다.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남고산성 안에도 주왕묘, 관성묘 또는 관제묘라 부르는 관우를 모신 사당

 

관우에 대한 전설은 많이 전해진다. 그것은 신격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도 있고, 명나라 장수 진인의 활동이 관우와 혼동이 될 수도 있다. 처음에는 남묘에 모셔졌던 관우가 현재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소재한 보물 제153호 동묘(동관왕묘)로 옮겨졌다. 이렇게 동묘로 옮겨진 것은 관우의 영험이라는 전설이 한 대목 전한다.

 

전설 속에서 우리나라를 구한 관우

 

'임진왜란 때 한양이 왜병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한양 남대문 앞에 왜병들이 다다르자, 적토마를 탄 장수 한 명이 수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왜병들을 맞아 일전을 벌였다. 적을 물리친 장수는 남산의 한 굴속으로 사라졌는데, 나중에 그곳을 가보니 대나무 잎만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한다. 후에 한 조정 대신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동묘로 가자, 동묘로 가자'라고 하였다. 그래서 관우의 조각상을 동묘로 옮겼는데, 그날 밤에 남묘에 불이 나 다 타버렸다.'

 

 

 

 관성묘 입구의 솟을대문과(위)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하)

 

대개 전설은 이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이 내용을 살펴보면 관우를 신격화하기 위한 전설임을 알 수 있다. 동묘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왜병에 의해 파괴가 되었다. 명의 신종은 친히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보내와, 1599년부터 새로 짓기 시작하여 1601년에 완성을 하였다. 이 때 서묘와 북묘가 함께 건축이 되었으며, 현재는 동묘만 남아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동묘로 가자'고 했다거나, 남묘가 불이 나 타버렸다는 것은 관운장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설화로 보인다. 정작 임진왜란 때 파괴가 된 것은 동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대문에서 관우가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것도, 남대문 밖에 남묘가 있기 때문에 나타난 설화로 볼 수 있다.

 

전주 남고산성 안에 자리한 관성묘

 

동남아 일대에서는 관우가 가장 추앙받는 장수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관우를 모셔놓은 사당이 보이는데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남고산상 안에도 주왕묘, 관성묘 또는 관제묘라 부르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 있다. 이 관성묘는 고종 32년인 1895년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남고산성을 책임지던 무관 이선문이 제안하여 건립했다.

 

 

 관우의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에도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부귀공명과 자손들의 창성을 기원하고 있다

 

전주 '관성묘'를 찾았다. 남고산성 안으로 들어가 하마비를 지나면 주변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돌계단 위에 솟을대문이 보인다. 대문의 현판에는 '관성묘'라고 적혀있다. 솟을대문은 모두 5칸으로 축조되었으며, 중앙의 세 칸 밖으로 좌우에 한 칸씩이 더 달렸는데, 그 안에는 말을 끌고 있는 무장을 조각해 놓았다. 이 조각이 관우를 조각한 것인지, 아니면 사당을 지키는 무장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위로 오르는 돌계단에 또 하나의 중문이 보인다. 이도 역시 솟을대문으로 꾸며 관우가 신격화돼 있음을 짐작케 한다. 사당으로 오르는 좌측에는 사당을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인 듯, 한 채의 가옥이 있다. 돌계단에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신격화된 관우의 영험으로 안과태평을 기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전각 안에 그려진 '관우의 적벽대전'과 그림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문화재

 

계단을 오르면 앞으로 부속건물을 달아낸 사당이 있고, 그 좌우에는 살창으로 앞을 막은 전각이 있다. 그 안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내용들을 포함, 관우의 활약상이 그려져 있다. 사당은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안을 볼 수가 없다. 안에는 관우의 상을 모셔 놓았다는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양편에도 조각상들이 보이고, 중앙에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굳게 닫힌 사당안을 문 틈으로 보니 무신상들이 보였다

 

관우가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그의 충정이다. 그리고 몸을 도사리지 않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이다. 그렇기에 무관들이 주축이 되어 지어진 관성묘가 아닐까? 아마 무관들에게는 관우가 그 누구보다도 숭앙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문화재는 보존이 중요하다. 문화재가 올바로 지켜질 때 그 가치가 높은 것이다.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고 누구나 찾아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사람들은 그 문화재의 가치를 더 높게 보지 않을까? 관성묘의 제대로 된 보존이 아쉽다.

金入垂楊 玉謝梅(금입수양 옥사매) 금빛은 수양버들에 들고 옥빛은 매화를 떠나는데

小池春水 碧於苔(소지춘수 벽어태) 봄 작은 연못의 물은 이끼보다 푸르구나.

春愁春興 誰深淺(춘수춘흥 수심천) 봄 시름 봄 흥취 어느 것이 깊고 얕은가

燕子不來 花未開(연자불래 화미개) 아직 제비도 오지 않고 꽃도 피지 않았는데.

 

조선 전기의 대문장가요 학자인 서거정의 시 ‘춘일(春日)이다. 서거정은 조선조 세종 2년인 1420년에 태어나 성종 19년인 148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달성이요, 서거정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四佳)이다. 할아버지는 호조전서 ’의(義)‘이고, 아버지는 목사 ’미성(彌性)‘이며 어머니는 권근의 딸이다. 최항은 그의 자형이다.

 

 

조수와 유방선 등에게 학문을 배은 서거정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성명, 풍수 등 여러 방면에 두루 관통하였다. 세종 26년인 1444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1년인 1451년 사가독서 후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세조 3년인 1457년 문신정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45년간 6명의 왕을 섬긴 서거정

 

서거정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벼슬에 나아간 서거정은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으며,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문장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세조 6년인 1460년에 사은사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에서 안남사신과 시재를 겨루었다. 요동인 구제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고 하며, 또 성종 7년인 1476년에는 원접사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을 때에는 수창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후, 성종 1년인 1470년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이 되고 달성군에 책봉되었다.

 

 

 

조선조 문인의 대표적 인물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다. 『경국대전』『동국통감』의 저술에 참여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지방연혁과 풍물을 담은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도 함께하였다.

 

신라의 설총에서부터 조선건국 이후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약 5백인의 작가들 작품 4,302편을 수록한『동문선』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언해했다. 그의 저술서로는 『역대연표 歷代年表』『동인시화』와,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와 설화와 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대표적인 저술서로는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방이동서 이묘한 서거정의 묘

 

서거정의 묘소는 본래 서울시 강동구 방이동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1975년 6월 13일 이장하여 현재의 위치에 모셔졌다. 현재 봉담읍에서 수원으로 올라오는 도로변 우측,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47번지에 소재한다. 묘소 앞에는 사당이 세워져 있고, 옛 석물로 남아있는 것은 묘표, 문인석뿐이고, 상석 등은 이장할 때 새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5월 10일 목요일 오후, 봉담읍에 소재한 서거정의 묘를 찾아보았다. 조선조의 대문장가로 알려진 서거정의 묘소 앞으로는 후손들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아래편에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묘를 이장할 때 19매의 묘지석이 출토되었으며, 이 묘지석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어 경기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묘지석은 백자로 구워졌으며 제1번 묘지석은 특별히 ‘청화(靑畵)’로 썼고, 나머지는 정사각형의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도필로 글자를 써넣었다.

 

 

 

축대 위에 지은 솟을대문의 앞에는 ‘전성문(展省門)’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은 재실인 ‘염수재’가 있다. 염수재는 24평으로 염수재의 앞에는 ‘염수재기’를 적은 비가 놓여있는데, 비의 뒤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사가공 재실인 염수재는 서기 1976년도 이축하여 약 25년간 유지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했으나 오래되고 낡은 도가 지나쳐 고심하던 차에, 종산의 일부가 경부고속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그 보상금으로 1999년 3월에 옛 재실을 헐어버리고 새롭게 재실의 지었다는 것이다.

 

 

 

안내판 하나 없는 대문호 서거정의 묘역

 

재실인 염수재를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비스듬히 비탈이 진 곳에 서거정의 묘를 맨 위에 둔 서씨일가의 묘역이 층층이 마련되어 있다. 서거정의 묘는 묘 앞에 세운 묘표와 좌, 우측의 문인석만이 옛 것이고, 남은 석물은 묘를 이전하면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묘표에는 조선숭정대부 좌찬성 달성군 서거정과 정경부인 선산김씨의 묘임을 적고 있다.

 

서거정의 묘로 오르는 길에 그 앞에 자리한 묘들을 보니, 봉분의 흙이 파이고 제대로 관리가 안된 듯하다. 서거정의 묘는 서울 방이동에서 이묘를 했다고 하지만, 그 묘를 이묘할 때 나온 묘지석이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상태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서거정의 묘역은 당연히 화성시에서 관리를 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거정의 묘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근처의 공장 안내판과 함께 걸려있으며, 재실과 묘역 앞에는 안내판 하나가 서 있지 않다. 길가에 따로 서 있는 신도비의 앞에 퇴색이 되어 글씨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묘소 안내문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그래도 조선의 대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서거정의 묘역치고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의 대문장가요, 중국에서까지 기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서거정. 화성시에서는 이곳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 인물이 묻힌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몰라라식의 처사인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오대산은 높이 1,563m로 태백산맥에 솟아 있는 산이다. 오대산은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동대산(1,434m)과 호령봉(1,042m), 상왕봉(1,493m), 두로봉(1,422m) 등 5개의 봉우리가 있다. 이 봉우리들 사이로는 중대라고 부르는 지공대와 동대로 칭하는 만월대, 그리고 서대로 부르는 장령대와 남대인 기린대,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북대인 상삼대 등 5개의 평평한 대지로 둘러싸여 있어 오대산이라고 했다.

 

또한 중대는 문수보살이, 동대는 관음보살이 상주하고 있으며, 서대는 대세지보살, 남대는 지장보살, 북대는 아라한이 상주하면서 설법을 하던 곳이라고 하여, 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상원사와 세조, 그리고 문수보살

 

오대산 상원사는 대웅전이 문수전이다. 이곳에 모셔 놓은 문수동자상 때문이다. 국보 제221호인 목조문수동자좌상은 조선조 세조와 문수보살의 일화에서 비롯하였다. 1464년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세조가 즉위한지 10년 째 되던 해 등창(부스럼의 일종)을 얻게 되자 신미대사의 권유로 오대산으로 행차를 하였다.

 

상원사에 도착한 세조는 다음 날 상원사 밑 계곡을 흐르는 오대천에 몸을 담구고 있는데, 동자 하나가 길을 가고 있었다. 세조는 동자에게 등을 좀 밀어달라고 부탁을 했고, 동자는 세조의 등을 밀어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세조는 동자에게 임금의 몸을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동자가 웃으면서 ‘임금님도 문수보살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 세조가 놀라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동자는 간 곳이 없고, 자신을 괴롭히던 등창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을 알았다.(국보 제221호 문수동자좌상/ 사진 평창군)

 

 

세조는 궁으로 돌아와 화공을 불러 자신이 만났던 동자를 그리기를 권유하였으니, 아무도 자신이 본 동자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했다. 그런데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그려 온 동자의 모습이 너무도 똑같아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영산회상에서 왔노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버렸다.

 

그 후 의숙공주와 효녕대군의 발원으로 세조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 문수동자상이 조성되어 1466년에 상원사에 모셔진 것이다.

 

세조가 의관을 걸었던 관대걸이

 

상원사 입구에서 상원사로 향하는 좌측에 보면 작은 석물 하나가 보인다. 옆에는 관대걸이라고 안내판이 적혀있다. 이 작은 석물은 기대석과 간주석, 그리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린 형태이다.

 

 

딱히 이 석조물이 무슨 용도로 조성이 되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간주석도 그냥 네모나게 조성하였으며, 특별한 문양도 새겨 넣지 않았다. 이 관대걸이에 옷을 걸었다면,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다리 밑을 흐르는 계곡물에서 세조가 몸을 씻지 않았을까?

 

볼품없는 석조물 하나로 인해 문수동자와 세조와의 이야기를 생각해내면서 다리 밑 계곡물을 바라본다. ‘참 맑기도 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마도 그 역사속의 이야기대로라면, 저 물에 몸을 씻으면 속세에서 든 병이 절로 낫지는 않을까? 5월 6일(일) 삼사순례를 하면서 들린 상원사에서 이야기 하나를 꺼내든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