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대(駐蹕臺)’,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천리. 전라북도 기념물 제120호인 이산묘의 곁에 서 있는 절벽에 쓰여 있는 글씨이다. ‘주필’이란 임금이 거동 길에 잠시 머무르거나 묵고 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곳을 왜 주필대라고 한 것일까? 전라북도 지역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는 곳이 상당하다.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물리친 이성계가 마이산에 올라가 금척과 관련된 시를 읊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24년 이 고을의 선비들이 뜻으로 모아 새긴 글이라고 한다. 그 커다란 암벽 한편에는 ‘마이동천(馬耳洞天)’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뜻은 달라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아

천마가 동쪽으로 와 형세가 이미 궁하니
흰털 말발굽 더 건너지 못하고 도중에 쓰러졌네.
연인(내시)이 뼈만 사가고 그 귀만 남기니
변하여 두 봉우리 되어 반공중에 걸려있네

아마도 이성계는 남원 운봉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나서, 스스로 나라를 세울 것을 다짐했는가 보다. 전주에 승리 후 전주에 온 이성계는 정자에 인척을 모아놓고 큰 잔치를 베푼다. 이 자리에서도 이성계는 은근히 자신의 마음을 피력하는 시를 읊기도 했다. 그런 이성계가 이곳을 들렸다는 것이다.




이곳 주필대 옆에는 사우가 있다. ‘이산묘(駬山廟)’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2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곳은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하나의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주필대의 위에는 1907년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의 집결지인 황단 터가 있으며, 그 하단부에는 이산묘라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산묘는 면암 최익현선생의 제자이자 고종의 스승인 연재 송병선의 제자들이, 연재의 송병선의 제자모임인 ‘친친계’와, 면암 최익현의 제자모임인 ‘현현계’를 구성한 후 건립한 곳이다. 이산묘 안에는 회덕전과 영광사, 영모사, 대한광복기념비 등이 위치하고 있다.



황단 터는 1907년 의병장 이석용을 비롯한 의병들이 집결하여, 호남 최초로 한말 국권 수호를 위해서 창의하였던 곳이다. 현재 창의동맹터 아래 조선 태조의 건국설화가 있는 곳을 택해서 사우를 건립하여, 항일의병의 위패와 그 기념흔적을 모아놓은 곳으로 지정, 보존가치가 큰 곳이다.

쓸쓸한 이산묘와 주필대, 역사속으로 지다

10월 6일 찾아간 주필대와 이산묘.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은 역사를 곧잘 잊는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역사에 대해 무관심한 민족도 그리 흔하지는 않은 듯하다. 수많은 역사의 굴레속에서 잘 잊는 방법이 잘 사는 방법이라는 것을 터득한 것이나 아닌지.




쓸쓸한 이곳에는 앞으로 지나는 차량들만 소음을 남겨 놓는다. 주필대라는 각자가 새겨진 암벽으로는 ‘송악’인 듯한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타고 오르고 있다. 이산묘와 주필대를 거쳐 돌아오는 길가에 ‘용바위’라는 바위를 만난다. 바로 ‘호남의병창의동맹지’라는 곳이다. 마이동천의 입구에 있는 이곳 용바위에서 정재 이석용이 해산 전기홍과 함께 500명의 의병들과 규합하여, 황단을 쌓고 천지신명께 국권회복을 빌었다는 곳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들의 형태는 달라도, 이곳은 나라를 위한 구국의 터가 분명한 듯. 주필대, 이산묘, 황단터인 용바위, 아마도 마이산을 들어가는 이 입구는 나라걱정을 하기에 가장 좋은 터가 아니었는지. 무심히 지나치는 차량들이 소음을 남겨놓는다. 역사는 그렇게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인지.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그 어느 것 하나에도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학술적인 것이야 전문가들이 더 잘 알아서 설명을 할 테고, 난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그 외에 들을 수 있는 이야기에 더 매력을 느낀다. 누구나 나에게 질문을 한다. 그 힘든 문화재 답사를 왜 하느냐고?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존재감’ 때문이라고 답을 한다.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을 지내 오는 동안 그 문화재를 만든 장인은 만날 수 없어도, 문화재로 인해 당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난 그것을 ‘존재감’이라고 설명을 한다. 즉 내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살아감을 느끼는 것이다.


덩그러니 남은 동헌의 문, 죽수절제아문

전남 화순군 능주면 석고리 754번지에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인 ‘죽수절제아문’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능주지방에 파견된 지방관이 업무를 보던 동헌건물인 녹의당의 정문이다. 이 문은 최초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선조 32년인 1599년에 문을 수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능주목사로 부임한 정윤이 녹의당을 지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지어진 죽수절제아문은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간결하게 짜여 있다. 죽수절제아문의 현판은 선조 35년인 1602년 당대의 문필가인 정이(1568∼1625)가 객관인 능성관과 함께 쓴 현판이다.




주변의 거목들로 아문의 역사를 알 수 있어

죽수절제아문은 전라남도에서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진 간결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능주는 죽수, 연주 등으로도 불렀으며, 인헌황후 구씨의 관향이라 하여 인조 10년인 1632년 능주목으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능주의 동헌건물의 문이 바로 죽수절제아문이다.



죽수절제아문은 현재 능주 관청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커다란 아름드리 거목들이 있어, 이곳의 역사를 알게 한다. 뒤편에는 이곳이 녹의당의 동헌지였음을 알려주는 커다란 석비 하나가 서 있다. 그것마저 없었다고 하면, 얼마나 쓸쓸히 이곳을 지키고 있었을까?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문화재

시간이 지났다. 답사를 하고 정리를 하다가 보면, 가끔은 빠트리는 것도 있다. 그런 것은 답사를 하지 못할 때 하나씩 꺼내어 본다. 그럴 때마다 마치 숨겨 놓은 보물을 만나는 기분이다. 지난 8월 21일 화순군 지역을 답사하다가 만난 죽수절제아문. 당시의 느낌은 소중한 문화재 하나가 천덕꾸러기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문 앞에는 누군가 차를 떡하니 받쳐 놓아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도 없게 만들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문화재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잔소리를 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영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한 마디로 문화재의 가치나 중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민족인 듯하다.




수많은 문화재들. 그리고 그 안에 간직한 사연. 그것을 찾아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 길이 때로는 힘이 들고 고통도 따른다. 하지만 그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바로 존재감 때문이라고 늘 스스로 위로를 한다. 그 존재감 안에 내가 있고,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문화재가 있기 때문이다.


대구 동구 도학동 620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북지장사. 신라 소지왕 7년인 485년에 극달화상이 세웠다고 전하는 절이다. 벌서 처음으로 절이 창건된 지가 1,526년이나 지난 고찰이다. 북지장사는 팔공산 인근에 자리한 고찰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절로, 같은 극달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동화사보다도 8년이나 앞선다.

절의 중심이 되는 대웅전은 보물 제805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조선 인조 원년인 1623년에 지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망자의 천도를 염원하는 극락전 또는 지장전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정면 한 칸의 작은 전각

현재 대웅전은 보수 공사 중이다. 단청을 마쳤으며, 전각 안을 공사 중이라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정면 한 칸, 측면 두 칸 규모이지만, 정면 한 칸 사이에 사각형의 사잇기둥을 세워, 세 칸처럼 독특한 양식을 띠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이 북지장사 대웅전은 여러 곳에서 특이하다. 이러한 전각은 우리나라 전역을 보아도 몇 채 되지 않는다. 순천 송광사의 약사전과 영산전, 그리고 여주 신륵사의 조사전 등이 이와 같은 건축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대웅전에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러한 형태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북지장사 대웅전의 세부 처리는 조선 중기 수법을 따르고 있다. 지붕 각 모서리에는 무게를 받칠 수 있는 추녀 끝에 얇은 기둥인 활주를 대었다고 하는데, 보수 공사를 하느라 활주는 임시로 제거하였다고 한다.

공포 끝에 용머리 조각이 돋보여

10월 8일 팔공산 갓바위 석조여래좌상을 돌아보고 찾아간 북지장사. 몸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대웅전이 보물이라는 말에 1.5km를 걸어 찾아들었다. 복원공사 중인 대웅전은 새 건물처럼 보인다. 이미 단청까지 마친 상태라 옛 고풍스런 멋은 사라졌으나, 말끔한 모습이 오히려 새로운 느낌이 든다.




북지장사에는 원래 대웅전이 있었으나, 불에 타 소실되는 바람에 이곳을 대웅전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북지장사의 대웅전은 측면도 한 칸이나 퇴칸을 달아냈다. 그리고 뒤편 퇴칸에 출입문을 낸 특이한 구성이다. 공포는 내, 외 4출목으로, 공포 위에 설치한 용머리 조각 등은 조선 후기 수법을 따르고 있다.

건물의 안쪽은 특이하게 정자에서 쓰는 건축 기법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공사 중이라 안을 볼 수 없음이 아쉽다. 불전의 건축기법으로는 보기 드문 형태를 갖추고 있는 이 전각은, 조선시대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건물을 몇 바퀴를 돌아본다. 공포 끝마다 작은 용두(龍頭)를 조각한 연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이 건물이 지장전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 자체를 망자를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반야용선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을까? 대웅전 앞에 놓여있는 석물은 석등의 받침돌로 보인다. 아마도 지장전 앞을 장식했던 석물이었을 것이다.

작지만 아름다운 북지장사 대웅전. 결코 아무것이나 보물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기품을 지니고 있다. 작아서 더 아름다운 전각. 내년에는 안을 볼 수 있다고 하니, 봄이 되면 다시 한 번 대구 올레 길을 걸어야 할 듯하다.

비천도(飛天圖). 손목에 묶은 ‘표대’(혹은 복대라고도 한다)를 바람에 날리며, 그 표대로 하늘을 날면서 바람의 방향과 이동하는 방향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생명에 없는 차디 찬 돌에 새겨진 비천도로 인해, 돌이 생명을 얻는다. 아마 비천인들은 그린 많은 화공이나 조각을 하는 장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늘을 날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천도는 범종에 많이 장식되지만, 법당의 천정이나 석등, 부도, 불단, 또는 전각의 외부 단청 등에도 나타난다. 비천은 ‘불국(佛國)’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춘다. 때로는 두 손에 공양물을 받쳐 들기도 하고, 꽃을 뿌려 부처님을 공양을 찬탄한다.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비천상은, 도교 설화 속의 선녀를 연상케 한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에 새겨진 비천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 온 비천상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인 허균의 글에 따르면(2005, 1, 14 불교신문) 2000여 년 전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전래될 때 비천도도 그 뒤를 따랐다. 불교의 중국 전래의 통로였던 돈황 막고굴 벽에 그려진 비천은, 인도신화의 건달바나 긴나라의 괴이한 모습이 아닌 도교의 여신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상반신은 배꼽을 드러낸 나체이고, 하반신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속옷 차림이다. 표정 또한 요염하고, 손동작은 유연하고 섬세하다.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신한 비천상이, 4세기 말경 우리나라의 삼국 시대에 불교와 함께 전해졌다. 불교미술에 수용이 된 비천상은 약간의 양식적 변천을 거치며 한국적 비천상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후 한국 불교의 모든 곳에서는 비천상이 불교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으면서 나름대로 변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 용주사 보물 범종에 새진잰 비천인

비천상은 나름대로 중요한 우리 미술의 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으며, 어느 절을 찾아가도 비천도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불화 중의 하나다. 이 비천도가 요즈음에는 현대적인 것과 우리 전통예술과 접목이 되면서 나날이 변화를 하고 있다. 요즈음에 그려지는 비천도는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고 있다.

동종에 새겨진 비천도를 보고 반해

아름다운 천인을 그려내는 비천도는 불교미술에서는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야 미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니, 어디 이렇다 저렇다 할 자격이야 있겠는가? 그저 보고 느낀 바를 적는 것이다. 내가 비천도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상원사 동종 등 사인비구가 제작한 보물 제11호 동종에 나타나는 비천도를 보고나서 부터이다.

작가 김선옥의 그림 비천인(2007년 작)

그 다음 절마다 찾아다니며 비천도를 유심히 보고 사진에 담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인가 절집에 들리면 먼저 벽화며 탱화에 그려진 비천도를 찾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은 비천도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나 자신이 천인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음악을 전공한 나로서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천인상이라는 비천도가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가 요즈음 현실적으로 많이 발전한 비천도를 보면, 비파를 타거나 횡적을 불거나 아니면 춤을 추는 비천도도 있다. 심지어는 무당춤을 추는 비천도까지 그려질 정도니, 나날이 변화를 해가는 천인상인 비천도는 이제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장르로 발전을 하는 것인 아닌지 모르겠다.


비천도를 보며 마음은 불국토를 향해

비천도 그 자체만 보면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저 표대를 바람에 날리며 때로는 앉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날아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비천상이 주는 느낌은 볼 때마다 달라진다. 어느 때는 그 비천상을 바라보며 함께 하늘을 날기도 하고, 어느 때는 비천인과 함께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 비천상을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기분은, 스스로의 마음이다. 비천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당시의 느낌이 바로 나란 생각이다. 불교의 교리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그저 전각에 들어서면 절로 머리를 조아리고 참례를 한다. 그리고 비천상을 물끄러미 쳐다보기가 일쑤이다. 하늘을 날고 있는 그 비천인의 모습에서, 굳이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불국토가 따로 있겠는가? 그 비천상을 따르는 마음 하나가 불국토가 아닐는지. 오늘도 마음 한 자락 허공에 띄워 비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세속의 답답함을 훌훌 떨쳐내고, 어디론가 가을바람에 실려 떠나가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려니.(위 사진은 고기와에 그려진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 김선옥 작 2007년)

어제 뉴스를 보니 국보 제147호인 울주 ‘천전리각석’에 낙서가 발견되었다고 난리들이다. 낙서를 한 추정시기가 지난 3월에서 7월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는데, 벌써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야 관할 지자체에서 포상금 1,000만원을 걸고 낙서범을 찾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각석 주변에 CCTV 있는데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녹화도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에 소재하는 ‘울주 천전리각석’은 태화강 줄기인 내곡천 중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이다. 위와 아래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사진출처 / 울산포커스의 사진을 인용했습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을 매번 말로만
 

국보를 비롯한 각종 문화재에 대한 낙서가 어디 어제 오늘 일이던가? 수도 없이 많은 문화재들이 낙서와 훼손에 멍이 들고 있다. 그런데도 관계당국은 매번 가중처벌이니 무엇이니 해대면서, 이런 일이 왜 자꾸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문화재청에서는 숭례문 화재 후 재난 예방 및 대응체계강화를 위해 목조문화재 방재시설 구축 예산을 증액하였으며, 중요목조문화재 150건에 대한 안전경비인력을 558명으로 증원 배치했다고 한다. 또한 '문화재보호법' 등을 개정하여 문화재 훼손범 가중처벌 규정과 문화재별 화재대응 지침서를 마련하였다고 하는데, 어째서 국보인 천전리각서에는 CCTV가 멀고, 녹화도 안된 것인지 모르겠다.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어른 가슴 높이에 돌멩이로 긁은 듯한 방법으로 ‘이상현’이라고 적혀있다는 것이다. 경찰에서도 범인을 잡기 위해 지난 8일에 수사에 착수를 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렇게 낙서를 하는 인간들을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수백 년에서 천년 이상을 지켜온 소중한 문화재이다.


국보인 김제 금산사 미륵전에 적힌 낙서들. 파고 쓰고 별 짓을 다했다. 국부는 마음대로 보수를 할 수도 없다. 밑에 '문화재가 아파해요'라는 글이 속이 아리다.(2006, 5, 26 답사자료)


낙서나 훼손이 되면, 그것은 다시 원상태로 되돌릴 수가 없다. 복원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과거의 장인의 혼이 깃들어 있을 것인가? 단지 외형적인 모습만 흉내를 낼 뿐이란 생각이다. 진정한 복원이란 장인의 혼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수도 없이 문화재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쇠귀에 경 읽기일까?

어느 누구도 그런 심각한 문화재 훼손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 않은 듯하다. 그런 무관심이 불러온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다. 오래 전에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때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사람들. 그들도 방관자라는 생각이다. 그 글의 일부를 다시 보자.

부끄러운 낙서 천국 대한민국

(전략)김제 금산사의 미륵전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그 벽을 보면 정말 가관이다. 남녀 두 사람이 이름을 적어 놓고 영원히 사랑을 하자고 부언을 달았는가 하면 언제 자신이 다녀갔다고도 파 놓았다. 어느 것은 문화재를 일부러 훼손시키기 위한 문구도 있다. 종교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그저 파 놓고 간 것도 있다. 도대체 낙서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면 저희 집으로 가서 벽에 대고 마구 그리거나 마룻바닥 혹은 거실에라도 파 놓던지 왜 꼭 문화재나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다가 낙서를 하는 것일까?

(중략)전국 어디를 가나 여기저기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낙서는 그 도를 넘고 있다. 문화재고 머고 가리지를 않는다. 이런 낙서의 버릇은 무속적 사고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과거 사람들이 많은 질병으로 목숨을 잃거나, 재앙으로 인해 사고가 잦을 때는 커다란 암석이나 단단한 쇠붙이 등에 이름을 적어 놓으면 그 바위나 쇠붙이처럼 오래 간다고 하여 명산의 바위에다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그런 후에는 많은 치성을 드렸겠지만 그런 곳에 이름을 적고 오래 살았는지, 아니면 출새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자신의 이름을 그 곳에 적고 출세를 하고 싶다거나 사랑을 오래 지속하고 싶다거나 하는 발원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한마디씩 안 좋은 소리를 하고 지나간다면 오히려 좋아지라고 한 짓이 더 나빠질 것만 같다. 우리는 흔히 ‘입 살이 보살’이라는 속담에서 그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보물인 완주 화암사의 우화루 벽에 가득한 낙서. 어른의 팔을 뻗쳐도 닫지 않는 높이에도 낙서가 되어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높이까지 낙서를 한 것일까?(2008, 3, 27 자료)

사람들의 입에는 살이 있다는 소리다. 악담을 들으면 그만큼 자신에게 해롭다는 사실이다. 낙서를 한 것을 보고 한 마디씩 모두 악한 말을 하고 간다면 그 자신들에게 결코 좋은 일이 생길리가 없다. 욕을 많이 먹으면 명이 길어진다고 하는데 그도 괜한 소리다. 지지리 궁상을 떨면서 명만 길어지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는 제발 어디를 가나 버릇처럼 하는 낙서에서 좀 벗어나자. 어느 아는 분이 이런 소리를 하셨다. 낙서를 아무 곳에나 하는 사람들은 세상살이가 낙서판만큼이나 편하지가 않고 시끄러워진다고 말이다. 이젠 해외에까지 낙서를 하는 짓거리가 비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말로는 문화민족이니 어쩌니 운운하면서 속내는 비문화적인 일을 일삼는 몇몇의 사람들 때문에 정말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자숙하였으면 좋겠다.

내 나라의 문화를 내가 지키지 않으면 과연 누가 지켜낼 것인가? 아름다운 내 강산을 낙서투성이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준다면야 후에 무슨 지탄을 받을 것인가? 낯부끄러운 짓일랑 이제 그만하고 있는 그대로 자연과 문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보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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