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은 절의 중심건물이다. 절집에 들어가면 먼저 대웅전에 들리는 버릇을 갖게 된 것도, 대웅전 안에 본존불을 모시기 때문이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율현리 1034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율곡사. 율곡사는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중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단성현에 있는 절로 기록되어 있다.

8월 13일, 가늘게 뿌리던 비가 율곡사에 도착할 때쯤에는 잠시 멎는 듯하다. 그것도 잠시, 다시 쏟아 붓는 비를 피해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꼭 비를 피해서라기보다는, 늘 하던 참례를 하기 위해서이다.



아름다운 율곡사 대웅전, 기품이 서린 듯

율곡사 대웅전은 보물 제374호로 1963년 1월 21일에 지정이 되었다. 조선 중기의 건물인 대웅전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그리 크지 않은 팔작지붕으로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그 크지 않은 건물이 주는 느낌은 사뭇 기품이 서린 듯하다. 산 밑에 자리한 대웅전은 흡사 수줍음을 타는 새색시가, 신방에 조용히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대웅전 뒤편 비탈에서는 잡풀을 깎아내느라 소음을 내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커다란 소나무들만 남겨 놓은 산비탈이 깨끗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율곡사 근처의 잡풀들은 모두 잘려나갔다. 정리가 잘 된 사찰의 대웅전. 그래서 더 기품이 있는 듯 보였던 것일까?



대웅전 현판을 따라 눈을 돌려본다. 3단으로 짜인 목조장식인 공포는 복잡하면서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단청이 한층 거들고 있는 듯하다. 이 목조장식들은 조선조 초기와 중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웅장함을 잃지 않은 멋, 아마도 전각 중에서도 그 태가 유난히 아름답다고 생각이 든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전각

대웅전의 주초는 모두 덤벙주초를 놓았다. 어디나 그렇듯, 자연을 떠나지 않는 것이 옛 절의 특징이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음은, 스스로가 자연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율곡사의 대웅전 역시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연 속에 묻혀, 스스로 자연이 되어가고 있다.



옛 고찰을 찾아다니면서 마음이 편안한 것은 바로 자연을 넘지 않는 절의 전각들이다. 물론 그 중에는 웅장함을 보이고 것들도 있지만, 산을 타고 오르는 절집들을 보면 자연 안에 숨어 있다. 밖에서는 겨우 그 지붕만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저런 모습들은 바로 그 절을 창건하고 중창한 스님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내부와 삼존불

대웅전의 창호들은 모두 아름답게 꽃창살을 달아냈다. 그도 율곡사 대웅전의 자태를 아름답게 꾸미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양편에 문을 내어 놓았다. 측면의 문이야 불자들이 드나드는 곳이지만, 이렇게 뒷벽 양편에 문을 낸 것은 아마도 시원한 산바람을 맞아들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안을 들여다본다. 복잡한 목조장식이 아름답다. 천정은 모난 우물모양으로 꾸몄으며, 심존불의 위로는 닫집을 달아냈다. 어디하나 부족함이 없는 율곡사 대웅전, 많은 전각을 보아왔지만, 이처럼 단아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은 전각은 드믄 듯하다.

수미단 위에 모셔놓은 삼존불은 목조아미타삼존불이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37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삼존불은 중앙에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상이 좌정을 하고 있으며, 왼편에는 관음보살상을, 오른편에는 대세지보살상을 놓고 있다. 삼존불의 크기는 1m 정도로 어른의 앉은키만 하다. 반가부좌상의 모습으로 앉아있는 모습은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있다.


삼존불은 특징이 거의 일치하고 있어, 동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수줍은 듯한 느낌을 주는 전각과, 그 안에 좌정한 삼존불. 대웅전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마 이 편한 느낌 때문에 절집을 찾아드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퍼붓던 비는 어느새 맑게 개었다. 또 다시 걸음을 옮기라는 것인지.

담은 무슨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까? 단지 건물과 대지의 경계선이나 설치물의 주위에 두른 구조물일까? 담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한자로는 원(垣)·장(墻)·원장(垣墻)·장원(墻垣)·장옥(墻屋), 등으로 사용하며, 우리말과 한자가 합쳐진 말로는 담장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그 담 중에서 간단하게 구조물을 설치한 것이나, 안이 들여다보이게 만든 것을 울·울타리·바자울[笆子籬]·울짱·책(柵)·장리(牆籬)라 한다. 우리 소리에 보면 ‘울도 담도 없는 곳에...’ 라는 노래가사가 있다. 이렇게 울과 담은 그 형태에서 구분이 지어진다. 아마도 양반가의 높은 벽은 ‘담’으로, 민초들의 낮은 울타리는 ‘울’ 생각하면 맞는 뜻일 것이다.


담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생나무를 심는 생울이 있는가 하면, 싸리나무 등을 엮어 막아놓은 울타리가 있다. 진흙에 짚을 썰어 넣어 이겨서 만든 흙담도 있고, 널판지로 경계를 두른 판장과 판담이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돌담, 영롱담, 꽃담, 와담 등 담은 그 재료를 무엇으로 사용했는가에 따라 구분하고 있음을 본다.

담장의 용도, 과연 경계로 구분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담을 경계를 구분하거나 사람들이 사는 곳을 보호하기 위한 설치물로 구분 짓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이 담이 경계를 막고 설치물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물론 그 말이 맞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담과 울은 엄연히 다르다. 담은 경계를 가르고 안을 보호하지만, 울은 굳이 경계를 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은 경계를 나누고 보호를 위한 것이지만, 울은 하나의 결성을 위한 보호적인 차원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먹을 것을 담장 너머로 전해주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차단이라면 이해가 안된다. 우리의 울은 바로 나눔이요, 소통이다.

민초들의 울과 가진 자들의 담은 극과 극이다

우리 민가의 담을 보면 막힘이 아니다. 문이라고 해보아야 싸리를 엮어 만든 문이다. 그리고 담장이라고 해보아야 어른 키의 목 밑이다. 누구나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옆집과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보호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가의 담장이다. 사대부가의 높은 벽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왜 우리 민가의 담은 이렇게 낮은 것일까?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사대부가들이 숨길 것이 많다면 민초들은 숨길 것이 없다. 어느 집이나 터놓고 돌아다녀도 잊어버릴만한 것도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담을 높게 두를 이유도 없고, 안이 안 보이게 문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허전함만 가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숨기고 감추고 속이는 그러한 담장이 아니라, 소통하고 열고 보여주는 그런 것이 바로 민초들의 울이다.

역사는 늘 담으로 사람들을 구분했다

민가의 담을 보면 끝이 없다. 그저 이집에서 저 집으로, 또 그 다음 집으로 울이 연결이 된다. 낮은 처마 밑으로 두른 담장은 그보다 많이 낮게 만든다. 나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를 숨길 것도 없고 은밀히 숨어서 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이런 담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즉 담은 어느 시대에서나 소통과 단절로 대두된다.



소통은 민초들이요, 단절은 가진 자들이다. 가진 자들은 보여주기를 꺼린다. 그리고 늘 은밀히 안에 틀어박혀 궁리를 한다. 대개는 그 안에서 서로 목소리를 죽여 몹쓸 짓을 연구한다. 그리고 더 많은 몹쓸 짓을 생각해 낸다.

민초들의 담장은 스스로 낮춘다. 스스로가 부끄러움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저 있는 대로 행하고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진 자들은 항상 숨기려고만 든다. 그러한 검은 사고들이 담장을 높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이 위엄이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다. 소통과 보여줌, 숨김과 차단. 이것은 긴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고 전해진 우리 ‘담’과 ‘울’의 철학이다.


(주)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 송고가 되었던 것을 다시 정리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불교문화재 중 아름다운 전각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봉암사 극락전을 말한다.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어느 전각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극락전은 봉암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기도 하다.

봉암사 극락전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이다. 지증국사가 봉암사를 창건하면서 지어진 건물로, 지어지고 난 후 80년이 지나 봉암사의 많은 전각들이 화재로 모두 소실이 되고 극락전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 뒤 고려 태조 18년인 935년에 정진대사가 봉암사를 재중창 하였으나, 임진란을 거치면서 일주문과 극락전만 남기고 모두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경순왕이 피난 시 원당으로 사용한 극락전

봉암사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 시에,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옥개석을 보수 한 듯, 망와에는 소화16년(1941년)이란 기록이 남아있다. 봉암사 극락전은 얼핏 보면 중층으로 지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층 몸채에 차양 칸을 둘러 마치 중층 같은 외관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6일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봉암사를, 하안거에 든 스님들에게 공양을 대접하기 위해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봉암사는 공양대접을 하는 사람들도, 3시간 이내에 사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도 그 시간이면 경내에 있는 문화재를 답사하기에는 조금은 버거울 듯해, 걸음을 바삐 해야만 했다.



탑처럼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봉암사 극락전. 현재 보물 제157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전은 기단부의 상, 하 갑석을 면석으로 처리를 하고, 기단의 바닥은 장방형 판석으로 깔았다. 원형의 주추는 잘 다듬은 원형의 화강석을 사용하였으며, 외진주 12본과 내진주 4본으로 중층 목탑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삼면에 문을 낸 극락전, 궁전의 천정과 같은 아름다움

중앙에 마련한 전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배면의 벽에 기대어 작은 불단을 만들었다. 전면의 문은 세 짝문을 내었으며, 좌우측에는 폭이 넓은 세살문을 중앙에 넣고 졸대를 세운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뒤편으로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를 해, 단칸의 불전이지만 일반 불전과 마찬가지로 정면과 양 측면으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내출목의 상단에는 장혀를 올리고 상벽을 구성한 후, 외진으로 17개의 우물을 돌려 궁전천정을 연상케 한다. 천정의 중앙에는 용이 그려져 있으며, 불단은 간략하게 조성을 하고 그 위에 불상을 모셨다.

지붕의 꼭대기에는 석탑과 같이 돌로 만든 장식을 올려놓았다. 많은 전각을 보아왔지만 봉암사 극락전과 같은 아름다움은 그리 흔치가 않다. 봉암사를 들어갈 수 있었던 것만도 행운이란 생각인데, 거기다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극락전까지 볼 수 있다니. 아마도 오랜 세월동안 전국을 다니며 문화재를 답사한 것에 대한 보답은 아니었을까?


극락전을 뒤로하고 삼층석탑으로 향하면서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언제 또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를 모르니.

6월 2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장맛비라고 하더니 며칠 동안 참 사람을 움직일 수 없도록 뿌려댄다. 일기예보에서는 남부지방에 꽤 많은 비가 내릴 것이란 예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진주에 볼일을 보아야하니, 후줄근하지만 길을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출발은 했지만 이 빗길에 어찌해야 할지.

몇 곳을 들려 당동 당산을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거창 가조면 소재지에서 가북면 방향 지방도 1099호 선을 타고 가다보면, 우측으로 사병리 당동마을이 나온다,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당산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외부인에게 그 속내를 보여주기 싫은가보다. 몇 분에게 길을 물어 겨우 마을 뒤편에 자리한 당산을 찾았다.



당산은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거처

‘당산(堂山)’은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산신당· 산제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는 주로 당산이라고 한다. 당산은 돌탑이나 신목, 혹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신표로 삼는다. 집을 지었을 때는 그 안에 당신(堂神)을 상징하는 신표를 놓거나, ‘성황지신’이란 위패를 모셔 놓는다.

당산은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부르는 명칭 또한 다르다. 내륙에서는 신당, 당집, 당산 등으로 부르지만,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 대개 ‘용신당’이라고 부른다. 이 당산에서는 매년 정월 초나 보름, 혹은 음력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여 제물을 마련하는데, 이런 이유는 마을 사람 모두가 똑 같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당산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일제치하에서 문화말살정책을 편 것도, 그 한편에는 당산이 갖는 공동체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이 당산에 모여 정성을 드리고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의 끈끈한 정을 이어갔던 것이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과 풍어, 그리고 다산을 기원하던 곳인 당산. 그 당산에서 이루어지는 기원은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당산은 우리의 마음의 거처이기도 했다.

당동마을 당산을 찾아가다

비는 잠시 멈춘 듯하다. 그러나 논둑길에 자란 풀들이 다리를 휘감는다. 빗물에 젖은 풀들을 헤치고 걷노라니 바짓가랑이가 축축이 젖어온다. 돌담을 쌓은 안에 작은 집 한 칸이 바로 당동마을 당집이다. 옆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 당산이라도 되는 듯.

당동마을 당산제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그 숱한 세월을 당동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를 잡아 온 것이다. 이 당산은 철종 9년인 1858년과 고종 15년인 1878년에 부분적인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1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1858년에 기록한 상량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동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초하루에 마을 원로회의에서 제관을 정한다고 한다. 보름이 되면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하고 있는 문수산, 금귀봉, 박유산, 장군봉의 산신께 제를 지내고 난 후 마을에 있는 당집에서 제를 올린다. 당동 당산은 경남 민속자료 제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당산을 만나 마음을 내려놓다.

멈추었던 빗방울이 다시 떨어진다. 당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문을 열어본다, 한 칸 남짓 돌과 흙으로 지어진 당집 주변에는 금줄이 여러 겹 쳐져있다. 이 당동 당산제에서는 닭피를 뿌린다고 한다. 당집 안에는 간소하다. 벽에 걸린 선반에는 ‘당사중수기’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밑에는 촛불과 향을 피웠던 그릇들이 있다. 당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마을 주민들만 아니라 아마도 무속인들도 이곳에 와서 정성을 드린 것인지. 소나무 가지와 금줄에 오색천에 걸려있다. 당집을 찬찬히 돌아본 후 머리를 조아린다. 마음 한 자락 이곳에 내려놓고 가고 싶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는 당동마을 당산이다. 그 안에 마음 하나두고 빗길을 돌아선다.

한말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일제의 만행에 앞서 피를 흘리며 싸웠다. 그들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것이다. 그런 고귀한 죽음을 아직도 망령된 일제의 잔재들이 더럽히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가끔은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이젠 그도 세월이라는 역사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313번지 순창군청 옆 순창초등학교 내에 위치한 순창객사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6.25때도 불타지 않고 잘 보존된 중요 유적지며 사적지다. 순창객사는 조선조 영조 35년인 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이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48호인 순창객사와 망궐례를 행하던 정당(가운데, 아래)

서대청이 사라져 버린 순창객사

순창객사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다. 정당이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전하 만만세’라고 새긴 궐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던 곳이다. 또한 나라의 일이 있을 때도 궁궐을 향하여 절을 했다고 한다.

새로 부임한 고을의 수령은 반드시 이곳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중앙의 관리가 이 고을에 찾아 왔을 때는 이곳에서 묵었던 곳이다. 객사는 공무로 일을 보는 관리들의 숙박 장소였던 곳이다.




순창객사의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안의 바닥은 누마루를 깔았으며 전면은 모두 살창으로 막아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이는 공적인 궝례를 행하는 곳이기 때문에, 잡인의 출입을 금지시킨 것이란 생각이다.

방이 없는 동대청

원래 객사를 공무를 보는 관리들이 묵는 곳이기 때문에 객방이 있다. 현재 남아있는 동대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그런데 이곳 동대청이 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서대청에 방이 있었는가 보다. 동대청은 시원하게 누마루를 깔았으며, 주변에는 오래 묵은 고목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객사의 역사를 가늠하게 한다.


동대청은 1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올렸다. 그리고 원형의 기둥을 세워놓았다. 대청의 누마루 위에는 가운데 기둥을 세웠으며, 천정 위에는 신서도와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정교한 건축기술을 자랑하는 이 객사는, 한말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임병찬 의병장이 진을 치고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의병들의 구국열기가 뜨겁던 곳

순창객사는 단순히 객사로서의 기능만 갖고 있던 곳이 아니다. 순창객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읍의 무성서원에 모였던 의병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운동을 거세게 펼쳤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잔주에서 급파된 병사들에 쌓여 항전을 벌이던 의병들은 결국은 숫자열세에 밀려 패퇴를 하고 말았고, 최익현은 순창객사에서 일본군에게 생포가 되어 대마도로 유배가 되었다.



관원들의 공무길에 묵을 수 있었던 객사. 언제 서대청이 소실되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정당과 동대청만 보아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커다란 고목들이 자리하고 있어, 객사의 단조로움을 벗어나게 해준다. 군청 옆 순창초등학교 건물 앞에 서 있는 순창객사는, 역사의 산 증거물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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