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선원사에는 약사전 뒤편으로 조금 비켜선 곳에 자리한 칠성각. 칠성각에 모신 칠성은 수명과 재복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보통 아이들의 수명을 관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칠성은 원래 도교에서 발달하였으나, 조선조에 들어 불교와 습합이 되면서 불교에서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칠성각은 대개 경내의 위편에 자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신, 칠성, 독성(혹은 용왕)을 모신 삼성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호법신의 일종으로 대부분 칠성각을 건립한다.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두고 칠원성군을 그 아래에 둔다. 혹은 칠여래를 함께 모신 탱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선원사 칠성각 문 위에 조각된 거북이와 토끼

가신신앙에서도 중요한 칠성

우리 무속에서도 칠성은 중심적인 신격 중의 하나이다. 굿거리에는 칠성굿이 있으며, ‘칠성풀이’나 ‘칠성본풀이’ 등의 무가가 전해진다. 집안에서는 주부가 주체가 되어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칠월칠석날 밤에 집 뒤편의 장독대에 백설기와 정화수를 떠 놓고, 촛불을 밝힌 다음 북두칠성을 향해 절을 하며 비손을 한다.

이렇게 비는 이유는 집안에 자손들이 병이 없이 무탈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장수를 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칠성이기 때문에 절 안에 자리한 칠성각에는 항상 주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느 집이나 아이가 있으니, 당연히 자식이 무탈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선원사 칠성각은 세 칸 팔작집으로 150~200년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선원사 칠성각에는 왜 별주부가 있을까?

선원사 칠성각은 건축을 한지가 150 ~ 2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 칸 팔작지붕으로 꾸며진 칠성각 양편 문 위에 보면 이상한 것이 보인다. 벽 밖으로 무엇인가 돌출이 된 것이 있다. 다가가 보니 밑에는 자라가 있고, 그 위에 토끼가 타고 있는 형상이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이 칠성각 문 위에 있는 것일까? 양편에 똑 같이 만들어 놓았다.

주지스님께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칠성각에 별주부가 왜 있는 것일까? 자라를 거북이로 생각한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수명장수를 비는 칠성각에 장수동물인 거북이를 표현하였을 것이다. 십장생인 해와 달, 산과 물 그리고 돌과 소나무, 불로초와 거북, 학과 사슴 중에는 거북이가 포함된다.

문제는 그 위에 올라타고 있는 토끼의 존재다. 그 토끼가 왜 거북이의 등에 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물론 이 칠성각에 거북을 형상화해서 벽에 올린 것은 장수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토끼가 그 등위에 올라타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토끼는 장수동물도 아니고, 칠성각과 뚜렷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문 위 문틀에 붙인 거북이와 흙벽에 돌출된 토끼

판소리의 고장이기 때문은 아닐까?

혹 이런 생각을 해볼 수가 있다. 남원은 명창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운봉에서는 가왕이라는 송흥록이 태어났고, 그 뒤를 이어 송광록, 송만갑 등 명창과 여류명창인 박초월 등이 바로 남원출신이다. 그런 명창들 때문에 남원은 어디서나 소리 한 대목을 들을 수 있었을 테고, 그 소리를 들은 대목이 칠성각을 짓다가, 수궁가(별주부전)에 나오는 한 대목을 형상화 한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도심에 자리하고 있는 선원사는 이래저래 많은 이야기꺼리를 간직하고 있는 고찰이다. 절집을 찾아 문화재 외에도 이런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그래서 이런 재미에 절집을 찾아들어가는 것이지만.

 

진천군 지역을 답사하다가 답사하는 중에, 길가에 서 있는 아주 작은 전각이 하나 눈에 띤다. 앞에는 오래되어 바란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곁에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가 그래도 이 전각이 역사적인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무슨 전각일까? 궁금한 것도 있으려니와, 이런 길가에 서 있는 전각에 우리가 모를 슬픔이라도 있을까보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775-1에 해당하는 작은 전각. 앞으로는 사석삼거리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우측으로는 청주와 오창으로 향하는 17번 도로이고, 좌측으로는 진천읍과 진천IC로 나가는 21번 도로이다. 전각 앞으로 가니 ‘일문사충(一門四忠)’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말 그대로 한 집에서 네 명의 충신을 배출했다는 뜻이다.



쇠스랑충신의 충혼을 배우다


사각형으로 마련한 전각에는 일문사충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그 안에는 충신들의 정려가 걸려있다. 위와 아래로 두 개의 정려에 걸린 4명은 바로 이 지역에서 충혼을 불태운 분들이다. 조선조 영조 4년인 1728년에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청주와 진천을 함락시키고, 이지경이란 자가 자칭 진천현감이 되어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때 사석리에 거주하던 김천주는 이들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동생 천장과 아들 성추, 그리고 조카 성옥 등이 마음을 합해, 이인좌의 무리들에게 대항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무기도 없이 이인좌의 무리들과 혈전을 벌였다. 맨손으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라, 쇠스랑과 괭이 등으로 무장을 하고 진천을 탈환하기로 했다.





이인좌는 남인의 명문출신이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남인들이 정계에서 소외된 것을 불만을 삼은 이인좌는 남인명문가들의 후광을 업고,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728년 3월 15일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에 이르러 도순문사 오명항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패하였다.


이 와중에 진천에서 이지경이란 자가 스스로 현감이라 칭하고 백성들을 괴롭히자, 동생과 아들, 숙질과 힘을 합하여 반란군을 섬멸하자고 뜻을 모은 것이다. 쇠스랑과 괭이 등으로 무장을 한 이들은 진천을 탈환하기 위해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족으로 패배하여 모두 전사를 하였다.


네 분의 충혼 앞에 머리를 숙이다.


정려에는 위편 우측에는 <충신 가선대부 김천주 지려>라 쓰고, 그 옆으로는 <충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김천장 지려>라고 적혀있다. 형제가 나란히 정려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뒤 늦게 이들의 충심을 알게 된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향제케 하였다. 그 뒤 고종 22년인 1885년에 아들 성추와 조카 성옥도 정려를 내려 함께 병정케 하였다.





밑의 정려에는 우측에 충신 김성추를, 좌측에는 김성옥을 배향하였다. 일문에서 네 명의 충신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을 알려주는 작은 전각이다. 이 전각은 안내판에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화재 지정은 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어디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야만 소중한 것일까? 이 네 분의 나라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마음이란 생각이다.


길가에 서 있는 외로운 작은 전각하나. 쇠스랑과 괭이를 들고 무장을 한 반군들과 혈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죽음을 당한 이분들의 그 충정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새롭게 조명을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이 땅 한 귀퉁이 한 뼘이라도, 이런 충혼들의 뜨거운 피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종교행위 자체를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종교를 갖던지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종교행위로 인해 남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적 제414호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소재한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 및 태실을 말한다. 태실이란 아이가 태어난 뒤 나오는 탯줄을 보관하는 곳을 말한다. 이 일대는 사적지로 조성을 한 후 한참 주변 정비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가야사람 김유신은 왜 진천 땅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내막을 알면, 이해가 간다.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라는 계양리에 세워진 유허비

김유신의 탄생지 상계리 계양마을

김유신이 태어난 곳은 만노군(현 진천군) 태수로 부임한, 김유신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집무를 보던 상계리 계양마을이다. 김유신은 진평왕 17년인 595년에 이곳에서 태어나 나이 15세가 되던 진평왕 31년인 609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의 군주가 되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유신은 선덕여왕 때는 상장군이 되고, 무열왕 7년인 660년에는 상대등이 되어 당군과 연합, 백제를 멸망시켰다. 8년 뒤인 668년에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태대각간이 되었다. 나이가 먹은 김유신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되찾은 후, 673년 음력 7월에 병이 악화되어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신이 죽은 후 한참 후인 835년에 김유신은 ‘흥무대왕’으로 추존이 되었다.



사적 안에서 종교집단의 부흥회가 웬 말.

지금의 계양마을 입구인 장군터라 불리는 태수 관저가 있던 곳에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이 일대에는 장군의 역사가 많이 남아있다. 김유신과 관계가 있는 태실과 투구바위 등을 돌아보기 위해 찾아갔다. 그런데 무슨 약장수를 방불케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한창이다. 시끄럽게 스피커 볼륨을 높여 놓고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있다. 어림잡아 수백 명은 되는 듯하다.

유허비를 돌아본 후 전각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스피커에서는 연신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연사의 뒤편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 ○○ 기도회>인가하는 글을 쓰여 있다. 순간 참 어이가 없다. 모처럼 맞는 휴일에 자녀들과 함께 사적지를 찾은 사람들도,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하고 돌아선다.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인 옛 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

그렇게 기도회를 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일까?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을 보니 ○○교회, △△교회 라는 글이 보인다. 여러 곳의 교회에서 장소가 넓은 이곳을 택해 합동기도회를 하는가보다. 그런데 어떻게 사적지 안에서 이런 종교행위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음 날 진천군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혹 종교집회를 허락해 준 사실이 있는가를. 전혀 모르는 일이란다. 그렇게 사적지에서 시끄럽게 집회를 하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사적지. 그것도 공휴일에 이런 대책 없는 행동을 한 종교인들을, 과연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사적지 안에서 종교적인 집회를 하는 모습과 줄지어 선 차량들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419 교룡산성 동문 안으로 들어가 산길을 10여분 정도 오르면 선국사를 만나게 된다. 선국사는 통일신라 당시에 지어진 절로 알려져 있으며, 경내에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114호인 대웅전이 서 있다. 이 대웅전은 교룡산성 안에 자리한 선국사의 중심 법당으로, 통일신라 신문왕 5년인 685년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선국사가 개창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 3년인 180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선국사의 대웅전은 산성의 안에 비탈진 곳에 절을 마련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돌로 단을 쌓고 그 위에 대웅전을 앉혔으며, 지금은 한창 전각을 짓느라 부산한 모습이다.



퇴락한 단청에 숨은 화려함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이 대웅전은 돌로 낮은 기단을 쌓고, 주추는 넓적한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기둥은 위아래의 변화가 없는 기둥을 사용했으며, 지붕이 밖으로 많이 돌출이 되어 사면에 바깥기둥을 대었다. 대웅전의 단청은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색은 오래되고 퇴락했지만, 그 화려함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선국사의 대웅전을 돌아보니 이상한 것이 하나가 있다. 작은 법당치고는 유난히 여기저기 용의 조각이 많다. 대웅전 앞이나 측면의 공포와 부연 등에서 용의 조각이 보이고 있다. 법당 안에 있는 닫집에도 끝에 용두가 조각되어 있으며, 대들보 끝에도 용이 있다. 대웅전에서 만날 수 있는 용만해도 10여 마리는 됨직하다.




대웅전 외부에서 보이는 용조각

임진왜란 때 승병이 주둔하던 곳

왜 이렇게 크지 않은 대웅전에 용의 형상이 많은 것일까? 대웅전 안에는 한편에 커다란 북이 매달려 있다. 이 북은 전북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또한 승병대장이 사용했다는 인장도 있다고 한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 북은 둘레가 269cm, 지름이 79cm, 길이는 102cm로 절에서 사용하는 법당용 북으로는 상당히 큰 편이다. 소나무 몸통에 쇠가죽을 씌워 만든 이 대북은, 그 제작시기가 조선조 말엽으로 추정한다. 이 대북은 언제 사용을 했던 것일까?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가 승병의 주둔지라고 한다면, 아마 이 북도 그와 관련이 잇을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안에 걸린 민속자료 대북

선국사의 옛 이름은 용천사였다.

북과 인장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이 선각사 대웅전에는 왜 특별히 용의 조각이 많이 나타나고 있을까? 선국사는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절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어떤 이름을 썼을까? 바로 ‘용천사’였으며, 승려가 300여명이나 기거하던 대규모 절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국사에 용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의 산성명칭도 교룡산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이곳이 특별히 용과 관련이 된 전설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용이 유난히 많은 선국사의 대웅전. 그 용들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본다. 대웅전 현판 옆에 있는 용은 입에 물고기를 물고 있다. 가끔 물가에 서 있는 정자 등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대웅전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용조각

사실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반야용선’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대웅전의 중앙에는 용머리를 항상 조각한다. 하지만 선국사처럼 중앙과 네 귀퉁이에 용을 조각하는 예는 그리 흔치 않다. 그리고 법당 안에도 용의 조각이 있다. 이는 교룡산성, 용천사 등과 이곳의 지세가 남다른 점으로 보아, 이곳에서 더 큰 대국의 꿈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다음번 이곳을 답사할 때는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겠다.


전북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에 가면 전북 유형문화재 제93호인 여산동헌이 자리하고 있다. 이 동헌 건물은 조선 시대에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던 청사이다. 이 건물은 3단의 계단식 건물 제일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맨 아래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을 피로 물들인 병인박해로 인한 아픔의 장소이다.

조선 고종 3년인 1866년 정월에 대원군은 전국에 천주교의 탄압 교령을 포고했다. 병인사옥, 혹은 병인박해라고 하는 이 천주교의 탄압 포고령으로 인해 여산 동헌의 맨 아래 뜰에서는 천주고 신도들을 잡아와,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여러 겹 붙여 호흡을 못하게 만드는 백지사를 행한 곳이다.


한식 건물의 아름다움을 지닌 동헌

여산동헌은 조선 조 말기에 벽과 방의 구조를 일부 개조하기는 했지만,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특히 추녀와 대청마루에서 한옥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동헌 앞뜰 우측에 서 있는 수령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는 이 동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전북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느티나무는 여산 동헌과 주변에 7그루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여산 동헌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느티나무를 보면 여산 동헌은 조선조 태종 조에서 세종 조대에 설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느티나무는 가슴 높이 둘레는 4.5m, 높이는 22m 정도이다.



여산동헌은 한옥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산동헌을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다. 동헌을 바라보면서 좌측 2칸은 뒤로 물린 방을 드리고, 우측 세 칸은 마루로 놓았다. 이 대청에서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맡아 본 것이다. 여산은 고려 공양왕 3년인 1391년에는 감무를 두었고, 조선 태종 2년인 1402년에는 여산현으로 불렀다. 그 뒤 세종 18년인 1436년에는 원경황후의 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동헌은 장주추를 써 높였다. 그리고 기둥은 보수를 한 흔적이 역력하며, 대청의 뒷벽은 판벽으로 구성했다.
 
동헌 한 편에 남아있는 아픔, 척화비

동헌은 구조가 간단하면서도 한옥의 멋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대청마루 밑은 앞을 벽으로 막아 그 안에 아궁이를 내고, 주초는 장초석을 사용했다. 마르를 높게 만들고 그 밑으로 아궁이를 낸 것도 이 건물의 특징이다. 대청의 뒷벽은 모두 판벽으로 마감을 했으며, 판자문을 내었다. 3단으로 구성된 축대 맨 위에 자리한 동헌. 아마 이곳에서 호령을 한다면 밑 뜰에 모인 사람들은 오금이 저렸을 것이다.


동헌 앞뜰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

동헌의 우측에는 일각문이 있는데, 그 사이에 비석이 줄지어 서 있다. 송덕비라도 모아 놓은 것일까? 그런데 그 앞에 철책으로 둘러 친 한 기의 비석이 눈에 띤다. ‘척화비’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면서 전국에 세운 척화비 중에 하나이다. 그 비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다, 저 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이 앞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인지.

더위는 한풀 간다고 하지만 아직 한 낮의 더위는 따갑다. 동헌마루에 올라 앉아 그늘을 드리운 느티나무를 바라다본다. 철 늦은 매미 한 마리가 목청을 돋는다. 저 매미도 이 여름이 가는 것이 안타까운가 보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어도 동헌 앞마당의 느티나무가 변하지 않듯, 이곳의 아픔도 쉬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만 같다.

동헌의 경내에 서있는 송덕비와 그 앞에 섰는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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