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에 소재한 태안사. 태안사는 『동리산태안사사적(桐裏山泰安寺事蹟)』에 의하면, 경덕왕 원년인 742년 2월에 이름 모를 스님 세 분이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가 절을 크게 늘려 지었는데, 이 때 절의 규모는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고종 10년인 1223년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인 1684년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 등이 보이고 있다. 태안사는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거대사찰인 태안사는 한국전쟁 때 전각 모두가 소실이 되고,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인 일주문과 능파각만이 남았다고 한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 소재한 고찰 태안사. 절 입구에 세워진 일주문은 전남 유형문화재 제83호이다. 현판에는 '동리산 태안사'라고 적었다

곡성으로 발길을 옮기다

2월 26일 토요일 오후,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온다고 하더니 날씨만 좋다. 오랜만에 두꺼운 옷을 벗어버리고, 나들이하듯 답사 길에 올랐다. 그동안 몇 번이고 찾아가려고 예정을 잡았던, 곡성군 죽곡면에 소재하는 신라 때 창건 된 고찰 태안사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곡성읍에서 태안사까지는 승용차로 30분 정도가 소요가 된다. 오후시간에 출발을 했으니 마음이 조급하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맡아보는 봄 냄새를 즐기기로 했다.

태안사 매표소에서 태안사까지는 2km 정도의 비포장 길이다.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가보면, 태안사 입구 계곡 위에 걸린 능파각을 만나게 된다. 계곡 중간에 그늘진 곳에는 얼음이 채 녹지 않았다. 헌데 계곡에는 시뻘건 흙탕물이 흐르고, 연신 커다란 트럭들이 드나들고 있다. 태안사 입구 계곡을 정비하는 모양이다.



일주문 안 쪽 굵은 기둥 윗부분에는 양편에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굵은 기둥 양편에는 보조기둥을 세웠다

한국전쟁을 피해간 일주문

능파각을 지나 200m 정도를 올라가면 태안사의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일주문. 몇 사람인가가 답사를 나온 듯, 일주문 곁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절 입구에 세워놓는 일주문은, 속세와 불계의 경계를 표시하는 의식적인 상징물이다.

한국전쟁 때 태안사의 그 많던 전각들이 다 소실이 되고, 계곡 위에 걸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인 능파각과 이 일주문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일주문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엇이라 표현할 수가 없다. 맞배지붕으로 꾸민 일주문에는, ‘동리산태안사 (桐裏山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 안에 조각된 다포식으로 된 공포

우선 안내판에서 일주문에 대한 설명을 읽어본다. 항상 어느 문화재를 만나든지, 먼저 안내판부터 살펴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래야 그 문화재가 갖고 있는 특성이나, 어느 것을 중점적으로 살펴야 하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작은 일주문 안에 숨겨진 화려함

일주문은 연못을 끼고 돌아 계단을 오르면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요즈음 절을 들어가다가 보면 위압적인 일주문들을 볼 수 있는데, 태안사의 일주문은 그저 산으로 오르는 작은 소로를 막아 경계를 삼았다. 그렇기에 장엄하지도 않고, 거대하지도 않다. 어느 고택의 일각문보다 조금 더 크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일주문은 조선조 숙종 9년인 1683년에 각현대사가 다시 지은 후, 영월선사가 중수하였다. 그 뒤에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일주문을 처음 볼 때는 너무 작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큰 규모의 태안사였다는데, 너무나 초라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정면 한 칸의 규모로 되었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워서 무게를 분배하였다.


사람을 겉만 보고는 모른다고 했던가? 태안사 일주문을 올려다보고,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음에 부끄럽다.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이다. 이 작은 일주문 안에 숨겨진 화려함. 앞, 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 찬 느낌이다.

양서로 된 살미첨차들로 내외 사출목의 공포를 짜서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그 작은 일주문 안에 이렇게 화려함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양편에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그 안에 청룡과 황룡이 마주하고, 속세에 찌든 사람들의 몸을 정결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절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은다. 작은 것을 보고 잠시라도 헛된 마음을 먹었던, 스스로를 반성하는 두 손의 모음이다.


사람들은 흔히 절 입구를 들어서면서 무시무시한 사천왕을 만나게 된다. 대개는 ‘사천문(四天門)’이나 ‘사천왕문(四天王門)’ 등의 현판을 달고 있는 곳에 있는, 사천왕상이다. 이 ‘사천왕’ 혹은 ‘사대천왕’이라고 부르는 사천왕은, 그 외에도 ‘사왕’ 혹은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부른다. 세상을 보호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천왕은 사방을 뜻하는 것으로, 동방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자리한다. 또한 남방에 ‘증장천왕(增長天王)’이 있으며, 북방에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을 각각 배치한다. 사천왕은 두 분씩 모시기 때문에 한편에는 동방과 북방, 그리고 남방과 서방을 한편에 모신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모셔져 있다.

송광사는 사천왕문이 아니고 사천왕전이다. 문을 달아 전이라는 표현을 한다.

해질녘에 달려간 송광사

2월 23일, 5시가 넘어서 길을 나서 달려간 송광사. 바쁘게 움직였지만 사천왕을 모신 전각의 문을 닫아걸려고 한다. ‘잠깐만요’를 외치면서 쫒아갔다. 헐떡거리면서 ‘사진 몇 장만 찍고요’ 라고 소리를 치면서 급하게 사진을 찍어댄다. 고맙게도 일부러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 분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나왔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 길을 묻고는 제대로 차에서 내려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갈 길을 재촉하다가 보면 예의를 제대로 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것이 늘 마음이 아프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소재한 송광사의 사찬왕상은 소조사천왕상이다. 소조란 흙으로 상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보기에도 커다란 이 소조사천왕상은 보물 제125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사천왕상은 크기 면에서도 압도를 하고 있지만, 색을 입힌 모습이나 그 조성이 뛰어나다. 몇 번인가 들린 송광사인데도, 오늘 따라 사천왕상이 달라 보인다. 그동안 자세히 살피지 않았음을, 속으로 반성을 해본다.



사천왕전에 대웅전을 보고 들어서면 우측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자리한다. 지국천왕은 칼을,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었다. 다문천왕의 팔을 복구 중이다

문을 달아 낸 전각 사천왕전

완주 송광사는 사천왕을 모신 곳을 천왕문으로 하지 않고, ‘천왕전(天王殿)’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천왕문이 여닫는 문이 없는데 비해, 송광사는 여닫는 문이 있어 ‘문’이 아닌 ‘전’으로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그 조성연대가 적혀있다는 것이 가치를 더욱 높인 것으로 보인다.

서방을 지킨다는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년인 1649년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적혀있다. 또한 왼손에 얹어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인 1786년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조성연대가 확실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은, 어느 것보다도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는 갖는다.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모셔져 있다. 증장천왕은 용과 보주를 잡고 있고, 고아목천왕은 보탑을 손에 들고 있다

사천왕은 악귀를 쫒는 힘을 갖고 있다.

사천왕상을 보러 달려갔는데 대웅전을 향한 우측 안 편에 있는 천왕상을 흰 천으로 가려놓았다. 북방 다문천왕의 팔이 훼손이 되어,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자연적인 훼손이 될지를 모른다. 그나마 사람들이 애써 보존을 하지 않는다면, 한 해에도 수많은 문화재가 우리 곁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한쪽 팔을 가린 북방의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조성한 동방의 지국천왕은, 팔을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다리 옆의 악귀는 상의를 벗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굵은 띠를 왼쪽 옆구리에 걸쳐 두르고 있다. 남방의 증장천왕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다. 용은 팔뚝을 한번 감아 올라가고 있다.

서방의 광목천왕은 오른손을 들어 깃발을 잡고 있는데, 왼팔을 올려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놓았다. 이 보탑은 1786년에 새롭게 조성을 해서 올려놓은 것이다. 사천왕상의 다리 쪽에는 악귀들이 있다. 이 악귀들의 형태도 각각 다르다. 이런 악귀의 모습으로 보아, 사천왕은 불법과 불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상의 발밑에는 악귀들이 있다.

지은 죄가 커서 그런가?

사람들은 절에 가면 사천왕상이 제일 무섭다고 한다. 흔히들 농담 삼아 ‘지은 죄가 커서 그런가봐. 그 앞에만 가면 괜히 기분이 이상한 것이’라는 말도 한다. 그러나 정작 사천왕은 사람들을 보호하는 신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스스럼없이 사천문을 드나들지만, 처음에는 옆으로 돌아다녔다. 아마 당시 나처럼 답사를 하는 사람이 있어 설명이라도 해주었다면, 좀 더 편하게 드나들었을 것을.

겨우 문을 닫는 것을 막아선 채로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섰다. 다음에 복원이 다 끝난 다음에는 초라도 한 자루 켜야겠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흔히 국보나 보물이라고 하면, 아름다운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국보나 보물 중에는 상당히 많은 전각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로 지정된 전각들은 거개가 절이나 궁궐, 능 등에 자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사찰에 있는 전각일 것이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에 의상이 처음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 귀신사의 처음 명칭은 ‘국신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사적기 등이 전하지가 않아서 정확한 창건 년대나, 창건주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 말에 도윤이 중창한 뒤, 귀신사라고 개칭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물 제826호 귀신사 대적광전

고려 때에는 원명국사가 중창을 한 귀신사는, 임진왜란 대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다시 복원하였다. 고종 10년인 1873년의 일이다. 귀신사에는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이 있다. 대적광전은 귀신사의 본 건물로, 현재 보물 제82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귀신사 대적광전은 사찰의 대웅전 등에서 많이 보이는 팔작집이 아닌 맞배집이다.

2월 17일, 저녁 무렵에 갈음을 재촉한 귀신사. 2월 중순의 해는 짧다. 조금만 늦으면 해가 질 것 같은 길을 재촉해 귀신사에 들렸다. 겨울의 설원 속에 있는 대적광전을 보기 위함이다. 사찰은 여름과 겨울의 풍광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한 곳을 사계절을 모두 둘러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귀신사의 대적광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것을, 고종 때 다시 복원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뒤 1823년과 1934년에 중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몇 번의 보수를 거치는 동안, 대적광전은 단청을 칠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처음부터 단청이 없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다.

맞배지붕의 멋을 느끼게 하는 건물

17세기에는 사찰의 불전이 맞배지붕으로 많이 지어졌다. 아마도 그 당시에 유풍일 것이다. 논산의 쌍계사 대웅전, 월성의 기림사 대적광전 등이 그 당시 지어진 맞배지붕의 전각이다. 귀신사 대작광전은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으로 두는 구조가, 기둥 위에 하나씩 있는 주심포계가 아니다. 중간에 장식을 더 넣은 다포계로 구성이 되었다.

대적광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눈이 하얗게 덮인 지붕이나, 하얀색을 칠한 담벼락이 하나가 된 듯 조화를 이룬다. 역시 겨울에 보는 정경은 남다른 멋을 풍긴다. 귀신사 대적광전의 벽에는 위에서 아래로 기둥을 내렸다. 죽죽 내려놓은 듯한 기둥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가 있다.




창호도 색다르게 조성을 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지어진 대적광전은, 앞면의 세 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아냈다. 그리고 좌우의 퇴칸은 조금 좁게 구성해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다. 양편 측면으로는 문을 달아내고, 뒷벽으로는 중앙 하단 부에 문을 달아냈다. 우측으로 돌아보니 뒤편에 까치구멍이 나 있다. 왜일까? 환기를 시키기 위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전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사진촬영 하시면 안돼요’

대적광전 안으로 들어가 먼저 향을 피우고 삼배를 한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늘 하는 차례이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대적광전은 원래 중층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물제1516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존불은, 진리의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에 모셨다. 그리고 협시불로는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모셨는데, 모두 소조불이다.


상당히 큰 규모의 삼존불을 불단에 모시기 위해서는 중층으로 건물을 들였을 것이다. <귀신사중수기>에도 법당이 중층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눈에 발이 빠지는 것도 마다하고, 여기저기 눈밭을 뛰는 짐승처럼 빠르게 이동을 하며 돌아보고 있다. “사진촬영하시면 안돼요” 귀신사에서 일을 보고 계신분인가 보다.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이럴 경우 참 답답하다.

명색이 문화재를 답사하러 다니는데, 일일이 허락을 받기도 버겁다. 그러다가보면 시간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돌아 나오기는 했지만, 내내 아쉬움에 속이 아프다. 봄철이 돌아오면 다시 한 번 귀신사에 들려, 소조부처님들을 담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의외의 모습에 가끔은 놀랄 때가 생긴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 국보나 보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자리한 송광사. 송광사에는 모두 네 점의 보물이 있다. 한 절에 이렇게 많은 보물을 소유하고 있는 곳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선사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인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지금은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사찰 중 한 곳으로 번성하였다.


십자각으로 지어진 특별한 종루

송광사에는 십자각으로 지어진 누각이 있다. 흔히 종루라고 이야기하는 이 누각은 열십자로 축조를 하였다. 이층형 누각으로 지어진 이 전각은 범종이 걸려있는 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각 한 칸씩을 덧붙였다. 지붕 역시 중앙에서 한 곳으로 모여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2월 23일, 퇴근을 하고 부리나케 송광사로 달려갔다. 수차례나 찾아간 송광사지만, 늘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송광사로 달려간 것은 종각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송광사에 있는 소조사천왕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보물로 지정된 소조사천왕상은 일반적인 전각과 달리 문을 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왜 십자각이 눈에 걸리는 것인지. 일몰시간이 다되었다는 것에 마음이 바쁜데도, 종각에서 발길이 멈추고 말았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 북, 운판을 각각 돌출된 곳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대웅전 방향으로 돌출된 남은 한 칸에는 전북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동종을 두었다.

누마루 밑의 기둥이 자연일세.

송광사 종각에서 보이는 여유로움은 바로 이층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목조 기둥으로 마련을 한 이 기둥은 중앙 칸을 중심으로 각 면에 두 개씩의 기둥을 두고, 열십자로 빠져나온 곳마다 다시 2개씩의 기둥을 놓았다. 어느 방향에서 보던지 한 방향에는 4개씩의 기둥이 나열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기둥을 보다가 손바닥을 쳤다. 그렇게 몇 번을 보았는데도 새로운 것을 보았다. 그동안 아마도 별 신경을 쓰지 못한 듯하다. 그저 종각이 아름답다는 것만 알았지, 그 종각의 면면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만 했다. 이제 보니 그 기둥들이 각양각색이다.

어느 기둥은 원형으로, 또 어떤 것은 사각형으로 되었다. 밑에 바친 주추도 모두 제각각인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을 하였다. 누각을 조성할 당시 이만한 절에서 보기 좋게 조형을 한 주추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기둥도 자연에다 받친 주추도 자연이다. 송광사 종루는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현란한 조각이 돋보이는 종각

조선시대에 지어진 전각 중에 유일한 십자각이라는 송광사 종루. 처마 밑으로는 익공과 포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종각 위로 올라가보니, 그곳에서 바라다보는 주심포, 주간포, 귀포 등 일일이 명칭을 열거하기조차 힘든 모습으로 눈을 현란케 만든다. 아마도 이렇게 복잡한 건축기술로 인해 송광사 종루가 유명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사천왕상을 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다시 일깨운 종각의 모습에 넋을 놓아버린 문화재 답사. 그래서 문화재 답사는 시간을 정할 수가 없다. 만나는 문화재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다가 보면, 시간이 가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눈을 떠갈 때마다, 조금 일찍 시작하지 못했음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546에 소재한 범어사 사천왕문이 화재로 인해 전소가 되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법이 참으로 종이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재란 그 나라의 상징이다. 그러한 문화재에 대해 훼손을 한다고 해도, 벌이라는 것이 참 어이없을 정도로 약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화재가 일어나기 전날에는 누군가에 의해 법고까지 훼손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문화재법에는 화재 등이 났을 때 지자체의 장이 화재, 도난 등을 방지하도록 되어있다. 이런 조짐이 계속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방화로 인한 화재로 천왕문이 타버렸다는 것이다. 


범어사 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상(자료 / 범어사 홈페이지)

제14조(화재 및 재난방지 등) ① 문화재청장이나 시·도지사는 지정문화재의 화재 및 재난방지, 도난예방을 위하여 필요한 시책을 수립하고 이를 시행하여야 한다.

② 문화재청장 및 시·도지사는 문화재별 특성에 따른 화재대응 지침서(이하 “지침서”라 한다)를 마련하고 이를 지정문화재의 소유자, 관리자 또는 관리단체가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야 한다.

③ 지침서는 연 1회 이상 정기적으로 점검·보완하여야 하며, 화재대응을 위하여 포함되어야 할 사항 및 지침서를 마련하여야 하는 문화재의 범위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④ 지정문화재의 소유자, 관리자 및 관리단체는 지정문화재의 화재예방 및 진화를 위하여 「소방시설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서 정하는 기준에 따른 소방시설과 재난방지를 위한 시설을 설치하여야 하며, 지정문화재의 도난방지를 위하여 문화체육관광부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따라 도난방지장치를 설치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제4항에 따른 소방시설과 재난방지를 위한 시설 또는 도난방지장치를 설치하는 자에게는 예산의 범위에서 그 소요비용의 전부나 일부를 보조할 수 있다.

제85조(문화재 방재의 날)

① 문화재를 화재 등의 재해로부터 안전하게 보존하고 국민의 문화재에 대한 안전관리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매년 2월 10일을 문화재 방재의 날로 정한다.

②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문화재 방재의 날 취지에 맞도록 문화재에 대한 안전점검, 방재훈련 등의 사업 및 행사를 실시한다.

③ 문화재 방재의 날 행사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문화재청장 또는 시·도지사가 따로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문화재가 화재가 나고 소실이 될 때, 혹은 도난이나 재난 등에 대비해 얼마나 방비를 하고 있는가가 의심스럽다. 범어사 측에 따르면 이미 천왕문이 화재가 나기 이전부터, 많은 이상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대도 어찌 이렇게 방화로 인해 전소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문화재를 훼손할 경우 상당한 징벌에 처해야

범어사 천왕문은 보물 제1461호인 일주문과, 불이문 사이에 있어 보물의 보호차원에서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방당국과 범어사 측이 협의를 거쳐 굴착기로 건물을 완전히 철거했다고 한다. 당초 천왕문에 있던 4대 천왕상은 경내 성보박물관에 보관했다고 전해 다행스럽다. 화재 당시 천왕문에 있던 천왕상은 모사본이어서 문화재의 소실은 막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방화에 의하거나, 또는 종교적인 편향으로 인해 수많은 문화재가 훼손이 되고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방관을 하고 있을 것인지 답답하다. 지금이라도 문화재법을 더욱 강력하게 시행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더불어 종교적인 편향으로 인해 소중한 문화재를 훼손한다면 특가법이라도 만들어 가중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소중한 문화재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다면, 어찌 이 나라를 문화대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화대국, 문화의 나라 등. 말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강력한 처벌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불탄 다음 찾아가는 그런 뒷벽은 이제 제발 그만두고. 현상금까지 걸었다고 하니, 하루 빨리 용의자가 검거되어 모든 사정이 소상히 밝혀지기만을 바란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