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에 소재한 통도사. 영축산에 자리한 ‘영축총림’ 통도사는 우리나라 3보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사찰’이다. 우리나라의 삼보 사찰은 ‘법보사찰’인 합천 해인사, ‘승보사찰’인 순천 송광사, 그리고 불보사찰인 통도사이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인 64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통도사를 불보사찰로 부르는 것은, 자장율사가 당나라로부터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와 승복의 하나인 가사를 모신 사리탑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을 모시고 창건하였기 때문에, 창건 초기부터 중요한 절로 불보사찰이라는 삼보사찰 중 한 곳으로 이름을 떨쳤다.


용화전 앞에 서 있는 탑의 용도는?

통도사 용화전 앞에 서 있는 ‘봉발탑’이라 하는 이 탑은, 보물 제47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전국 어디를 돌아보아도 이런 형태의 탑은 전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탑의 용도에 관해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그 용도에 관한 정확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 봉발탑의 용도가 석가모니의 옷과 밥그릇을, 후천세계의 미륵부처가 이어받을 것을 상징한 조형물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미륵부처님은 후천세계의 부처님이다. 불교적 메시아로 널리 알려진 ‘미래불’인 ‘미륵불(=Maitreya)’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열반하신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서 이 세상에 나타날 부처님을 말한다.



이 미륵부처님은 현재 도솔천 내원궁에서 보살로서 존재해 있으며, 이미 수기를 받은 부처님이다. 현재는 도솔천을 주재하고 설법을 하기 때문에 ‘미륵보살’이라 칭하지만, 인간의 사바세계로 내려오면 ‘미륵불’로 불러지게 된다.

스님들이 사용하는 발우를 닮은 탑

이 봉발탑은 불교를 조금만 알고 절을 드나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스님들의 공양 그릇인 ‘발우’와 같은 모습이다. 탑의 기본 형태는 받침부분 위에 뚜껑이 있는 큰 밥그릇을 얹은 듯한 형태이다. 이 발우를 받치고 있는 기단부는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아랫부분의 둥근 기단석과 간주석, 그리고 발우를 받치고 있는 윗부분이다.



아래받침부분은 연꽃으로 화려하게 조각이 되어있다. 아래받침에는 둥그런 형태에 기둥이 표현되어 있어, 이것이 땅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치 땅과 부처님의 연화세계를 잇는 간주석을 둔 것이란 생각이다. 그 위 부분은 간주석으로 잘록한 형태이다. 이 간주석은 네모나게 조형을 하였으며, 모서리 부분을 다듬어 부드럽게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맨 위 상대석은 앙화가 크게 조각되어 있다.

고려 이전에 조성한 탑으로도 보여

맨 위에 올려놓은 발우는 뚜껑과 높은 굽 받침이 있는 그릇 모양의 석조물이다. 연꽃조각이나 받침부분의 기둥 양식 등으로 보아, 이 봉발탑의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이러한 모형의 탑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이전의 작품으로도 보인다. 일반적인 동 시대의 그릇 모양을 한 조각물과는 품격의 차이가 보이기 때문이다.



후천세계의 부처님인 미륵불의 밥그릇이라는 통도사 봉발탑. 7월 11일 통도사에 스님들의 공양을 준비하러 갔다가 용화전 앞에서 만나본다. 벌써 서너 차례나 본 봉발탑이다. 그리고 그 때마다 이 탑을 보면서 생각을 한다. 아마 어느 날 아침 저 봉발탑의 밥 그릇 뚜껑이 열리면, 그 날이 미륵부처님이 이 땅에 나투시는 것은 아니실까 하고.


김제 금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금산사 경내에는 국보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바로 대적광전 앞에 자리한, 보물 제27호인 육각다층석탑이다. 이 다층석탑은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을 현재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 탑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아쉬움이다.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탑일까를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의 석탑이 대부분 화강암으로 조성을 한데 비해, 이 탑은 기단은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몸돌과 지붕돌은 흑색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으로 조성한 다층석탑이다.


육각으로 조성한 탑, 놀라움으로 다가와

화강암이 아닌 점판암을 이용해 탑을 조성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기단부는 또 다른 색을 지닌 돌을 이용해 흑백의 조화를 이끌어 냈다는 것에 대해서도 경이롭기만 하다. 이 탑은 조선조 인조 1년인 1633년 금산사 재건 시에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원래의 층은 알지 못한다. 현재는 11층만이 남아있는데, 그 외형이 육각으로 되어있어 ‘육각다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화강암으로 된 기단은 3단으로 되어 있는데, 각 단의 1변의 길이는 아래층부터 각각 80㎝, 70㎝, 65㎝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용과 풀, 사자상 등이 새겨져 있다. 이 위에 점판암으로 된 2개의 판석이 있는데 아래의 판석에는 복연이, 위의 판석에는 앙연이 각 면에 5변씩 양각되어 있다.



현재 11층이 남아있는 탑신부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현재 10층과 11층이 남아있는 몸돌은, 각 귀퉁이마다 기둥모양인 우주를 새겨 넣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을 선각으로 새겨 놓았다. 그 모습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 육각다층석탑의 조형이 얼마나 정성을 들인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은 낙수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있다.

상상만으로도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현재 남아있는 옥개석의 처마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보인다. 각층의 끝마다 달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 것을 상상하면, 가히 그 아름다움을 어디에도 비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현재 꼭대기의 머리장식인 싱륜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훗날 화강암으로 만든 연꽃봉우리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돌이다. 이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남은 옥개석은 각 층의 줄어드는 체감비례가 아름다우며,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1변의 길이가 1층부터 차례로 46㎝, 46㎝, 41.5㎝, 41㎝, 39㎝, 37㎝, 35㎝, 33㎝, 31㎝, 29㎝, 27㎝로 줄어들고 있으며, 현재 몸돌이 남아있는 10층과 11층은 각각 18cm와 17cm이다.

이렇게 줄어들고 있는 비율로 볼 때, 현재의 9층과 10층 사이에 또 다른 층이 있고, 몇 개 층의 옥개석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9층과 10층의 줄어듦의 차이가 급격하기 때문이다. 이 탑은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짐작된다.

벌써 몇 번이고 돌아본 육각다층석탑이다. 5월 28일 찾아 본 다층석탑 앞에서 눈을 감고 상상을 해본다. 사라진 몸돌의 각 면에도 선각으로 조각을 한 좌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층마다 다르게 새겨진 또 다른 형태의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찾아갈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그 원래의 모습이 어떤 형태였는지, 그리고 그 전체적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알 수가 없어, 늘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이렇게나마 남아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그 앞에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는 것은, 아직도 그 아름다움의 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남 거창군 북상면소재지에서 전북 무주 방향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송계사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2km 정도가면 도로변에 삼층석탑 한 기가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탑불’이라고 불리는 마을로부터, 약 200m쯤 떨어진 옛 절터에 위치한 탑이다. 아마도 탑불이란 마을의 이름도, 이 탑과 절터로 인해 붙여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절터는 대부분 논밭 등의 경작지로 변해, 탑이 있는 절의 옛 규모를 파악하기 힘들다. 또한 그 절에 대한 내력을 전해주는 자료도 없어, 이 탑이 어느 절의 것이었는지, 어느 시대에 조성한 것인지조차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석탑의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할 뿐이다.


통일신라 석탑을 충실히 따른 모형

5월 20일(금) 잠시 틈을 내어 달려간 답사길. 전북 장수, 무주를 고쳐 경남 거창으로 접어들었다. 길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만나는 문화재는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갈계리 석탑도 그 중 하나이다. 차를 달리며 주변을 돌아보는데, ‘갈계리 삼층석탑’이란 문화재 안내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높은 보호철책 안에 서 있는 갈계리 삼층석탑은, 처음 만나는 순간 ‘참으로 반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석탑은 사각형으로 된 이중의 기단을 두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일반 석탑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탑의 구성으로 볼 때 간략화 된 조성 기법은,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변화하는 석탑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몸돌에 비해 넓은 지붕돌이 불안정 해

받침대 부분인 상하 기단은 모두 모서리기둥인 우주와 함께, 중앙의 받침기둥인 탱주를 새겼다. 몸돌인 탑신과 받침을 이어주는 상대갑석은 경사가 별로 없는 한 장의 돌로 조성하였다. 위 기단은 판석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아래기단은 한 장의 넓은 돌로 조성을 하였다.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인 우주를 양편에 조각했을 뿐, 그밖에 별다른 조각은 없다.

지붕돌인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각각 4단이며, 추녀의 낙수면은 낮게 조성하여 경사가 심하지 않다. 그러나 모서리 부분인 처마의 끝자락이 너무 치켜 올려져 있어, 과장이 심한 편이다. 하지만 그 과장이 오히려 이 탑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몸돌에 비해 넓은 옥개석의 처마가 위로 치켜 올라가, 조금은 불안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상륜부가 남아있지 않아 원래의 모습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받침부분인 기단이 큰 데 비해, 몸돌과 지붕돌이 왜소해 보여 전체적인 조형미는 조금 뒤떨어진다. 지붕돌인 옥개석 역시 너무나 두터워 조금은 투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대개 고려시대로 넘어간 후 보이는 조형양식이다.

그래도 내 눈에는 아름답게 보여

하지만 그렇게 불안정한 가운데 위로 치켜진 옥개석의 처마가 있어, 오히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나만 느끼는 것인지. 탑의 전문가적인 소견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장인의 마음을 읽고 싶은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 크지 않은 삼층석탑을 조성하면서, 나름대로의 정성을 다한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단부와 몸돌의 밑에는 위를 조금씩 층을 내어 돋아놓았다. 그런 정성을 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이 탑을 조성한 장인의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경남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갈계리 삼층석탑. 이 탑을 만나면서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은 ‘대박이다’였다.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가면 계곡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한 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곳이 있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 소(沼)가 있어, 이 소를 ‘용소(龍沼)’라 부른다. 소 옆에는 ‘장수 양악탑’이라고 부르는 5층 석탑이 서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세운 시기가 2천 년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탑이 서 있는 주변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이 탑을 ‘심방사 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심방사라는 절이 언제 적에 이곳에 있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양악리 일대에는 향고 터, 동헌 터 등의 자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고려 말기에 이 부근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로 만들어진 탑

이 양악리 탑은 높이가 2m 정도로 크지 않은 탑이다. 주변에 많은 암반이나 석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은 석탑을 조성했다는 것은, 이 탑이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탑은 장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파손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탑의 원형을 알아 볼 수가 있다.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있으며, 누군가 탑 위에 둥근 강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탑은 그 생김새가 딴 지역의 석탑과는 다르다. 1층의 몸돌은 사다리꼴로 만들어졌으며, 2층부터 4층까지는 각 측의 지붕돌인 옥개석 위에 몸돌을 붙여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몸돌 밑에는 아래 단의 지붕돌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탑의 모양은 소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심방사 탑을 찾아 양악리를 맴돌다

5월 20일 오후에 잠시 들린 장수군. 몇 번인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들린 곳이지만, 20일 낮에 들린 양악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날 수가 있었다. 양악리는 애국지사요 한글학자인 건재 정인승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마을에는 건재 기념관과 재실, 동상 등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심방사 탑의 이정표를 보고 들어갔지만,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마을을 돌다가 만난 주민에게서 탑의 위치를 파악하고서야 탑을 찾을 수 있었다. 탑은 마을 반대쪽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소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탑이기에 마을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전설로 남아있는 심방사

양악리 오층석탑은 양악마을과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마을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격전지였던 흔적이 있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는 옛날에 한 도사가 살고 있어, 학을 길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마을이름을 양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앞에 산을 ‘학산’이라 부르고, 이웃마을로 가는 고개를 ‘학고개’라고 부른다.

이 오층석탑은 원래 백제의 심방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전화로 심방사가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탑을 옮기거나 없애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에서 보존을 하고 있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특이한 양악탑. 심방사라는 절이 어떤 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암벽을 흘러 소로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린다. 그 물소리를 들으면서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 온 석탑. 지금은 그 위로 저수지 공사를 하느라 중장비의 굉음만 시끄럽다. 그렇게 또 다른 소리를 들어가며 탑은 묵묵히 오늘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기도 여주군에 소재한 고찰 신륵사를 사람들은 ‘벽절’이라고 부른다. 신륵사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탑이 있기 때문이다. 신륵사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로도 유명하지만, 판소리 중고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명창 염계달이 이곳에서 득음을 하고 ‘경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륵사 경내에는 전탑 외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바위 위에, 심하게 마모가 된 체 서 있는 석탑 한기가 있다. 옆에는 강월헌이 자리하고 있어, 남한강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이 삼층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나옹화상을 화장을 한 자리

기록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을 신륵사 경내 남한강 가에서 화장을 했다고 한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석탑은 대웅전 앞에 많이 세우는데, 이렇게 동떨어진 강가에 서 있기 때문에, 기록에 보이는 화장을 한 장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석탑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화강암을 깎아 조성한 이 삼층석탑은 현재 3층의 몸돌은 멸실된 상태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탑은 기단부 밑에 기단부를 한 장의 넓적한 돌로 조성을 하고, 그 밑으로는 자연 암반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강가의 암반에서 나옹화상을 떠나보냈는가 보다.


짜임새가 간결한 고려 후기의 석탑

남한강가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기단부는, 아래기단은 2단의 형태로 조각하였다. 그리고 위기단은 양 우주와 탱주를 조각하였다. 위에 탑신에는 양편에 우주를 새겨 넣었다. 그러나 몸돌의 끝 부분이 마모가 심하여 양 우주를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몸돌 위에 얹은 지붕돌인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하다. 옥개석은 심하게 훼손이 되어, 일반적으로 석탑에서 보이는 처마가 날렵하게 솟아오른 모습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기단의 위에 덮은 지붕돌에는 앙련을 크게 새겨 넣었다.




옥개석 아랫부분에 새긴 층급받침은 3단과 4단으로 일정치가 않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부는 사라져 버렸으며, 맨 위의 옥개석 위에는 둥근 구멍이 나 있다. 아마도 상륜부를 고정시키기 위해 철골로 된 구조물을 얹었던 것 같다.

나옹화상을 기억해 내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牙)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럴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이렇듯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화상이 입적 한 후 화장을 한 장소에 세웠다는 삼층석탑.

아마도 그 탑의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나옹화상의 성정을 닮은 것은 아니었을까? 4대강 개발이라는 허명아래 파헤쳐지고 있는 남한강을 보면서, 나옹화상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글을 지었을까? 5월 19일 찾아간 신륵사 삼층석탑 앞에서 깊은 상념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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