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사천왕문이 방화로 추정되는 가운데 전소가 되어버렸다. 뉴스를 통해 불이 타 무너져내리는 천왕문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외국의 열강 등에 의해 수도 없이 찬탈당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같은 민족에게까지 그렇게 훼파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 문화재들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리다.

도대체 이 나라사람들은 종교가 다르다고, 혹은 세상이 마음에 안든다고 문화재에 화풀이를 하는 것일까? 이참에 문화재보호법을 더 강력하게 제정을 해,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이런 날 꼭 소개하고 싶은 문화재 한 점이 있다. 바로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마을 뒤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294호 승안사지 삼층석탑이다.


통일신라 석탑의 형태를 계승한 고려탑

승안사지 삼층석탑은 우선 보기에는 매우 둔탁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저 첫눈에 보이는 느낌은 조금은 시골스런 남정네를 연상케 한다.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는 신라 석탑을 계승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지역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석탑이기 때문인가 보다.

기단부에는 비천인과 불, 보살 등의 조각이 되어있다. 이 모든 조각들은 무릎을 꿇은 형태로 되어있는 점도 특이하다. 탑의 전체적인 높이는 4.3,m 정도로 길쭉한 편이다. 그러한 점이 조금은 불안한 듯하지만, 투박한 탑의 형상이 그런 불안감을 조금은 해소시키고 있기도 하다. 자칫 탑의 조형의 비례가 맞지를 않아 중심이 흐트러질 뻔한 것을, 투박한 무게로 이겨내고 있다고 보겠다.




자리를 옮긴 석탑의 놀라운 조각예술

이 석탑은 1962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올 때, 홍치 7년인 1494년에 중수를 한 기록이 한지에 먹으로 쓴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승안사는 당시에 존재해 있었다는 점이다. 이때도 탑이 옮겨졌음을 알 수 있는데, 결국은 두 번이나 자리를 옮긴 셈이다. 당시 1층 몸돌 위에 만들어진 사리구멍에서는 원통형사리함, 녹유사리병, 비단조각과 주머니,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기단부는 네모나게 조성을 하고, 그 위에 우주와 탱주를 새긴 위층 기단부를 놓았다. 위층 기단에는 불, 보살, 천인상을 조각을 하였으며 덮개돌에는 연꽃 문양을 새겨 넣었다. 기단부의 덮개돌은 층이 없이 평평한 돌을 위로 불룩하게 돋아 조각을 하였다.



일층 몸돌에는 사면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사천왕상의 조각이 일반적인 탑에서 보이는 사천왕상과는 다르다. 사천왕상의 발밑에 보면 목제 사천왕상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무엇인가를 밟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수한 조각기법과 장엄한 모습 등이 이 승안사지 삼층석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탑 하나에도 장인의 숨결이

탑을 돌아보고 석불을 돌아보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오랜 세월 그렇게 보존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장인의 숨결이 배어있는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인의 집중한 정신이 그 안에 함께 내재되어 있기에, 천년 세월을 버틴 것은 아닐까? 오랜 풍상에 시달리면서도 그렇게 한 자리에 버틸 수 있었음은, 보이지 않는 장인의 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승안사지 삼층석탑의 몸돌에 새긴 사천왕상은 장중하다.

이번 화재를 거울삼아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일제 점검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매번 입으로만 앵무새가 따라하 듯, 문화재의 소중함을 떠들어 댈 것이 아니라, 실제로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지켜 낸 문화재들은 한번 잃으면 그만이다. 그런 자산을 이렇게 바보스럽게 잃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벽송사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259번지에 소재한 고찰이다. 벽송사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절이다. 벽송사가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 달려갔는지도 모르겠다. 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벽송사를 오르는 길은 그리 평탄치가 않다. 마침 이 해들어 가장 춥다는 날에 길을 잡았으니.

전날 저녁 남원으로 내려가 12월 11일(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요즈음은 일찍 길을 나서지 않으면, 하루 종일 돌아다닌다고 해도 몇군데 못 들리기 때문이다. 한때는 빨찌산의 야전병원으로도 이용이 되었다는, 벽송사를 들어가는 입구는 계곡이 아름답다. 내년 여름에는 꼭 한번 들려보고 싶은 곳이다. 가파른 길을 헉헉대고 올라 벽송사에 당도했다.


지금은 옛 영화는 볼 수 없어

벽송사는 조선조 중종 때인 1520년, 벽송 지엄 선사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고 전한다. 벽송사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공부를 한 절로도 유명하다.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는 벽송사에서는, 109분의 대 종장을 배출했다고 한다. 벽송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는데, 신라 때의 양식을 계승한 보물 제474호인 3층 석탑과, 경남 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 묘법연화경 책판과, 경남 민속자료 제2호인 목장승 등이 있다.

벽송사가 어느 정도로 많은 선사들이 이곳에서 도를 이루었는지, ‘벽송사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는 것이다. 벽송사는 조선조 숙종 30년인 1704년에는 환성 지안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는데, 이 때에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 등 30여동의 전각이 즐비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상주하는 스님이 300여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는 10여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의 벽송사는 참으로 한적하다. 그러나 오랜 동안 전해진 전통은 그리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 벽송사 경내를 들어가면서 느낀 것은 알 수 없는 기운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옛날 법이 높은 선승들의 기운인가 보다.

삼층석탑과 두 그루의 소나무

벽송사라는 절의 명칭은 벽송스님에 의헤 창건이 되었기 때무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벽송사를 답사하고 난 뒤 느낀 점은, 이곳의 소나무를 보고난 뒤 지엄스님이 호를 벽송이라고 지은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그만큼 벽송사 주변에는 노송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현 벽송사의 맨 위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 보물 제474호인 이 삼층석탑은 신라 때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조성시기는 벽송사가 창건한, 조선조 초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이 삼층석탑은 당시에 조성된 석탑으로서는 단연 백미라고 볼 수 있다.

2단으로 구성된 기단은 아래층 가운데돌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얕게 조각하였다. 몸돌에는 층마다 우주와 탱주를 새겼으며, 지붕돌은 날렵하게 위로 솟아, 금방이라도 청왕봉의 정상을 행해 줄달음을 칠 듯하다. 지리산의 천왕봉이 지척에 보이는 곳에 벽송사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탑의 맨 위에는 머리장식으로 조성한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있다. 석탑의 일부분이 조금 훼손되기는 하였지만, 그런대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탑이다.

미인송과 도인송

탑을 돌아보다가 보면, 근처에 년륜이 들어보이는 소나무들이 있다. 그 중 미인송과 도인송이 있다는 것이다. 미인송은 나무가 굽어 받침대로 받쳐놓았고, 도인송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뻗어 있다. 그냥 보아도 범상치가 않다. 그 중 도인송은 밑 둘레가 2m가 넘을 듯하며, 줄기의 길이가 20m는 족히 될만하다. 줄기에는 가지 하나없이 곧바로 위로 올라간 나무 끝에, 마치 버섯처럼 잎이 달려있다.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미인송에 기원을 하면 그 사람은 미인이 된다’고 한다. 과연 그 말이 맞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벽송사 경내를 한 바퀴 돈 후에는 그 말도 믿고싶다. 그만큼 벽송사는 무엇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담고 있다.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참 희한안 일을 자주 보고는 한다. 어떤 때는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도 있다. 도대체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어릴 적부터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적어도 사회생활에서 문화재는 무엇이며, 우리가 문화재를 왜 보존해야 하는지 정도는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문화재에 낙서를 하는 것은 비일비재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문화재를 나무로 두드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발로 차기가 일쑤이다. 목이 달아난 석불이며, 국보나 보물의 벽에 가득한 낙서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를 폄하하고 훼손하는 것일까?

보물 제94호 사자빈신사지 석탑

본질적인 교육도 되어있지 않은 나라

문화재가 무엇인지, 그것을 우리가 왜 보존해야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말로는 우리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고 잘도 떠들어 댄다. 그러나 정작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보면, 그런 말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우리의 문화재 보호 점수는 빵점이다.

답답한 정도가 아니다. 고작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생각에서 나타난 행위는 바로 꽁꽁 잠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다고 올바로 보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숱한 문화재들이 도난을 당한다. 요즈음 TV 광고에 보면 문화재 도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광고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그런 광고를 해야 할 정도로 문화재에 대해 무지한 것이 우리네들이란 이야기다.

왜 기를 쓰고 좋은 학교를 가야만할까? 그러기 위해서 어릴 적부터 학원을 몇 군데씩 돌아야 한단다. 그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공동체, 우리, 이런 말을 알기나 할까? 우리문화, 우리민족, 우리말, 우리글, 이런 것은 알기나 할까? 나만 잘 살겠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작금에 우리는 잊어도 너무 소중한 것을 잊고 산다. 내 종교와 관계가 없다고, 내가 돈을 버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차라리 무관심이 나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폄하나 훼손이라도 하지 않을 테니까.

명문. 기단석에 쓰여진 명문. 몹쓸 적들이 영영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고려 현종 13년(1022년)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웠다‘고 적었다

여기서 모하는 짓이야!

답사를 하면 여기저기 많이 다닌다.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똑 같은 거리를 걷는다고 해도, 그냥 관람을 하는 사람의 세 배를 더 걸어야 한다. 그만큼 여기저기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쉴 새 없이 걸음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바쁘게 돌아다니는 날은 아침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14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걷기도 한다. 그만큼 열심을 내지 않으면 문화재 답사는 의미가 없다.

문화재가 꼭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문화재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기고, 산 속이나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에 있기도 하다. 제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보물 제94호인 사자빈신사지석탑을 답사하러 가는 길에 덕주산성의 문이 보인다. 문을 촬영하려고 위로 올라가 보니, 누각의 문이 닫혀있다. 산성의 문은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이 아니면 일반적으로 개방을 하고 있다.

상층기단에 조성된 사사자 상은 내 마리가 모두 다르게 조형이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보니 안에서 기척이 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남녀가 둘이 부둥켜안고 뒹굴고 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순간 화가 치민다. “이 사람들 문화재 안에서 지금 모하는 짓거리야?” 순간 두 사람도 놀랐는가 보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 보니, 그 안에서 둘이 사랑이라도 나누려고 했는지. 여자가 황급히 옷을 추스르고 얼굴을 가리고 도망을 가버린다.

마침 밑에는 동행을 한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도 얼굴이 벌겋게 변해 어쩔 줄 모른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문화재 안에서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타일러 보내고 나니 기가 막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문화재에 대한 상식인지도 모른다.

빈신사지 석탑의 상층 기단 중앙에 있는 비로자나불

사진을 찍고 내려오니 일행이 무슨 일인가 묻는다. 여자가 황급히 내려와 차를 몰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를 이야기를 했더니, 어이가 없어 그냥 웃고 만다. 이런 황당한 짓을 한 사람들이 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TV광고로 아무리 문화유산이 소중하다고 이야기를 해보았자, 누가 그것을 눈여겨 볼 것인가? 어릴 적부터 우리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해수관음으로 유명한 낙산사 7층 석탑만큼 아픔을 바라본 석탑은 없을 것이다. 보물 제499호인 낙산사 칠층석탑은 원통보전 앞에 서 있다. 2005년 산불로 인해 원통보전을 비롯한 낙산사 일부가 불에 탈 때, 담장이 무너지고 원통보전이 전소되는 것을 앞으로 보면서, 그저 열에도 꿋꿋하게 지켜 낸 탑이다. 난 개인적으로 이 탑을 볼 때마다 문화재이기 보다는, 한 시대의 아픔을 이겨냈다는 장인의 온기를 느끼기도 한다.

낙산사 칠층석탑은 의상대사가 처음에는 조성을 할 때는 삼층이었다고 한다. 그 뒤 세조 13년인 1467년에 4층을 올려 현재의 모습인 칠층석탑이 되었다는 것이다.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낙산사 칠층석탑은 안정감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6.2m의 높이에 비해 기단부가 좁기 때문이다. 삼층석탑을 4층을 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진 위는 이번 11월 14일 답사 때의 칠층석탑, 가운데는 지난 2006년 12월의 모습. 그리고 아래는 무너진 원통보전의 담장모습. 불에 탄 흔적이 보인다.
 

부분적인 손상 외에는 제 모습 지녀

일반적으로 석탑은 기단부와 몸돌인 탑 부분,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이 된다. 낙산사 칠층석탑은 덮개석이나 탑의 일부가 훼손이 되었을 뿐, 상륜부 등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다. 기단부에는 정 사각형의 지대석 2매가 놓여있으며, 윗면에는 24판의 겹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는 고려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양식의 특징으로 보인다.

낙산사 칠층석탑의 특징은 탑신부인 몸돌에 있다. 각 층마다 고임돌을 놓고, 위에는 3단의 옥개받침을 올렸다. 이는 간략하기는 하지만 조선조에 보이는 석탑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맨 위에 상륜부에는 노반 위에 청동 복발과 보륜 등으로 장식을 했다. 이러한 형태의 모습들은 조선시대 다층석탑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탑을 볼 때마다 가슴이 허전해

불타버린 원통보전. 그리고 일부가 무너져 내린 담장. 낙산의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기와로 문양을 내고, 중간에 둥근 석재를 이용해 멋을 더했다. 그러한 아름다운 원통보전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이번 답사에서 만난 원통보전과 담장을 말끔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산불이 원통보전을 태울 때, 그 뜨거운 열에서 칠층석탑이 온전하게 버티었다는 것이 장하기만 하다. 온 나라가 불이 타는 낙산사를 보면서 가슴 아파 할 때, 그래도 그 불길 속에서 남아있던 칠층석탑이다. 그래서인가 칠층석탑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각별하다. 하나의 소중한 문화재가 무너져 내렸다면, 아마 내 마음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리라는 생각이다.

기단에 새겨진 화려한 연꽃 무늬와(위) 정비가 된 담장(아래).
그러나 무녀졌던 곳의 색이 달라 아픔을 기억하게 한다.

이번 답사에서도 낙산사에 들려 칠층석탑을 바라보면서, 낙산사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저 고맙고 또 고마운 생각에 부여안고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그 생명도 없는 차디찬 돌에 대고 무슨 할 말이 그리 많냐고 질문을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탑이라도 생명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온 열과 정성을 다해 하나하나 만들어 놓은 문화재들. 비록 그 돌과 쇠붙이에는 생명이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 장인의 혼이 그 안에 깃들어 있지는 않을까? 아마 하나의 문화재가 소실이 되고 훼파가 될 때마다, 숱한 조상들의 마음이 함께 사라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낙산사 칠층석탑이 그저 돌을 쌓아 놓은 것으로 보이지 않고, 생명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진전사지가 있다. 진전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곳 진전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니 8세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을 일으킨 도의선사가 신라 헌덕왕 13년인 821년에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한 곳이다.

이 진전사에서는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와 같은 고승들이 많이 배출이 되었으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도 이곳에서 체발득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진전사는 16세기경에 폐사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진전사지에는 국보 제122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39호인 부도탑이 있다.

양양군 강현면에 소재한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

거대사찰이었을 진전사

국보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보물인 부도탑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상당하다. 또한 둔전리를 나오다가 보면 절의 축대로 사용되었을 만한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아마 이 진전사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현재 둔전리 야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은 현재의 진전사로 가는 길 우측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이번 답사가 4번째이다. 2004년과 2006년, 그리고 2008년 비가 오는 날과 이번 11월 14일이다. 다행히 갈 때마다 시기적으로 다르게 찾아갔는데, 가을에 찾아간 것은 처음인 듯하다. 갈 때마다 달라지는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가?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언제나 감탄을 하게 만든다.


하층 기단에 조각되어 있는 비천좌상

도대체 여래불의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그동안 수많은 문화재를 답사를 하면서도, 지금 다시 찾아가보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문화재를 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창피스럽다. 지금처럼 문화재 한 점에 적게는 30장, 많게는 60장 정도의 사진을 담는 것이 아니고, 고작해야 5~6장의 사진만 달랑 담아왔으니 지금 생각해도 낯이 부끄럽다. 하지만 그런 지난 사진이라도 있으니 문화재의 변화를 알 수 있어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높은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설치했다. 밑 기단에는 연화좌 위에 좌정한 비천상을 각 면에 2구씩 조성을 해, 총 8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윗 기단에는 한 면에 2구씩 8구의 팔부중상을 조각하였다. 일층 탑신에는 한 면에 한 구씩 여래좌상을 조각되어 있다. 진전사지 석탑의 특징은 모두가 좌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천인이나 팔부중상의 경우에는 입상을 조각하는데, 이 석탑은 돋을새김한 모든 상이 좌상이다.


기단 상층에 조각되어 있는 팔부중상 좌상. 이 탑에는 모든 조각이 좌상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이 여래좌상 중에 서편으로 앉은 여래좌상의 얼굴이 사라져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지난 사진자료를 찾아보니, 역시 그 자료에도 여래좌상의 안면이 없다. 그저 희미한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번 답사를 하면서 ‘도대체 이 여래좌상의 안면을 누가 떼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 땅에 소재한 문화재부터 관심을 가져야.

딴 면은 다 괜찮은데 서쪽 편의 여래좌상과 그 아래 팔부중상 중 왼편의 얼굴도 보이지가 않는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탑이다. 만일 일부러 훼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저렇게 깨끗하게 안면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안면을 일부러 떼어낸 듯하다.

기단부와 몸돌 1층에 세련된 조각들이 있어 국보로 지정이 될 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안면이 사라지다니. 혹 세월이 오래되어 자연적으로 마모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렇다면 딴 조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한 편의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얼굴이 사라진 것일까?


돋을새김한 여래좌상은 안면부분만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마치 떼어낸 것처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화재들. 세월이 지나 자연적으로 변화가 되고, 풍우에 씻겨 그 아름다움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도 안타까운데, 이렇게 누군가 일부러 훼손이 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문화재의 반환도 중요하지만, 내 땅에 있는 문화재부터 간수를 해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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