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에 소재한 월정사. 오대산 월정사에는 국보 제48호 고려시대의 석탑인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과 보물 제139호인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을 만날 수 있다. 현재 석조보살좌상은 원작을 모사한 보살좌상으로 대체하였다. 구층석탑과 보살좌상은 고려시대에 조성이 되었으며, 월정사는 자장율사 창건한 사찰이다. 탑과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많은 불교문화재들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불교조형물 중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된다. 월정사의 구층석탑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팔각의 귀퉁이마다 달린 풍경, 그대로 장엄

 

국보인 팔각 구층석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뒤, 머리장식인 상륜부를 얹어 마무리를 한 모습이다. 기단의 중석에는 안상을 새겨 놓았고, 아래와 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팔각의 갑석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이 석탑의 1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의 모형은 고려 석탑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층 몸돌 4면에는 작은 규모의 불상을 모셔두는 감실을 마련했으며,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다. 이는 목조건물의 모습을 본따서 조형을 한 것이다.

 

 

 

화려한 고려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추녀가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으며, 바람이라도 불면 풍경소리가 은은하여 절 경내에 가득하다고 한다. 이 팔각 구층석탑은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고려 초기에 조형한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려불교문화의 특징을 보이는 공양보살좌상

 

석탑 앞으로는 공양을 올리고 있는 보살좌상을 두었다. 이는 강릉 신복사지 석탑과 같은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보물 제13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보살좌상은 팔각 구층석탑을 향해서 정중하게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다리를 세워 탑에 대해 공양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는 1.8m의 정도이며 밑에 받침돌을 두고 있다.

 

석탑을 향해서 공양을 올리는 이 석조보살상은 ‘약왕보살’이나 ‘문수보살’이라고 하지만, 있지만 어쨌든 머리에는 높다란 관보을 쓰고 있으며 갸름하면서도 복스러운 얼굴에는 만면에 미소가 어려 있다. 보살상의 머리칼은 옆으로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이 되었다.

 

 

목걸이는 매우 섬세하고 곱게 조각하여 가슴에까지 늘어지게 장식을 하였는데, 보살이 입고 있는 옷은 얇고 가벼워 몸에 밀착되어 있고 옷주름은 모두 희미하다. 원형의 보살좌상은 동자상을 받침으로 고이고 있으며, 오른쪽 팔꿈치를 동자상의 머리에 올려놓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모사품에는 동자상이 보이지 않는다.

 

당대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는 월정사 구층석탑과 보살좌상. 5월 6일 찾아간 월정사에서 만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5월 6일 일요일에 ‘삼사순례’에 나섰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서 7시에 오대산 상원사, 월정사를 거쳐 여주 신륵사까지 돌아보는 일정이다. 하루 만에 세 곳을 돌아온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여정이 아니다. 그래도 많은 문화재를 만날 수 있는 절집 들이라는 것에 가슴이 벅차다.

 

마지막으로 들린 여주 신륵사. 남한강가에 자리한 신륵사를 예전에는 ‘벽절’이라고 불렀다. 봉미산 신륵사를 벽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신륵사 동편 바위 위에, 벽돌로 만든 다층전탑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다층전탑은 보물 제22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석탑보다 높이 쌓은 전탑

 

벽돌로 만든 탑의 경우 그 높이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석탑의 경우보다 전탑은 그 높이를 높이 세우는데, 이것은 벽돌을 쌓아 층을 올리기 높이를 높이는데 있어 수월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높이가 9.4m나 되는 이 전탑은 돌로 만든 기단위에 여러 층의 벽돌을 쌓아올려 만들었다. 탑의 높이도 높지만 남한강 가 암벽 위에 자리하고 있어, 그 높이가 더 높은 듯 장중해 보인다.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7단의 기단 위에 여러 단의 벽돌을 쌓아 탑신부를 만들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전탑이기 때문에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손꼽힌다.

 

 

 

이 전탑은 얼핏 보기에도 신라시대 전탑보다는 섬세하지 못한 듯 보인다. 신라시대에 조성된 전탑들은 틈새가 거의 나타나지 읺는다. 그리고 벽돌을 촘촘히 박아 벽돌로만 쌓았는데 비해서, 이 전탑은 벽돌과 벽돌 사이를 띄워 그 사이를 점토로 채워놓는 방법을 택했다.

 

신륵사 다층전탑의 건립 시기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 전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며, 탑 북쪽에 있는 수리비 내용에 의해 이 탑을 조선조 영조 2년인 1726년에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올 봄에 문화재를 만나보자

 

봄은 여행의 계절이다. 그것은 날이 덥지도 춥지도 않고, 그저 걸음을 걷기에 가장 적합한 날씨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새로운 것들을 만날 수가 있다. 들판에 연두빛으로 물을 들인 아름다운 나무들이 사람의 눈길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그런 새로움을 느끼면서 답사를 하다가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난다. 그만큼 봄은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피곤을 덜 느끼게 만든다.

 

수많은 문화재들을 만나는 즐거움. 그리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경관. 그런 것들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가을은 역시 여행에는 제철이다. 이러한 계절에 그저 편한 복장으로 훌적 차에 올라 길을 나서면, 어디를 가나 기다리고 있는 문화재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가을은 이야기들이 더 풍요로운가 보다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인 안양중초사지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에 1층의 몸돌만이 남아 있고, 그 위에는 지붕돌만 포개어져 있는 형태이다. 중초사터에 남아 있는 이 삼층석탑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고, 1960년 옛 터에 유유산업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1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부는 2·3층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3개 포개져 있다. 기단과 1층 몸돌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워 급한 경사를 이루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간략화 되었다.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해제된 석탑

 

안양시 석수동 중초사지에 있는 이 삼층석탑은, 지금은 건물만 남은 유유산업의 정문에 들어서면 좌측에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보물 제 4호)와 고려시대 석탑이, 문화재 보호구역(826㎡)내에 나란히 서 있다. 향우측에는 또다른 석탑의 부재로 추정되는 면석이 있다. 그중 석탑은 1963년에 보물 제 5호로 지정되었다가 최근에 해제된 상태이다.

 

‘중초사’는 통일신라 흥덕왕대의 사찰로 당시의 큰 절이었던 황룡사의 항창이 절주통으로서 이 당간지주의 불사에 참여 할였다고 한다. 그만큼 중초사는 커다란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초사는 『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흥지도서(興地圖書)』,『가람고(伽藍考)』같은 문헌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에 이미 폐사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안정한 석탑, 그러나 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해

 

전체적으로 기단부가 너무 크고, 탑신의 1층 몸돌이 그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석탑이다.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지면 위에 두꺼운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이단괴임으로 조각된 별석을 놓아 상층 기단부를 받치고 있는, 단층 기단 형식을 취하고 있다.

 

4매로 짜여진 기단중석은 중앙에 탱주는 없이 양우주만 조각되었고, 그 위에 덮여진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다. 괴임은 일단이나 남면은 약간 부서진 상태이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매의 돌로 조각되었는데, 1층 몸돌인 탑신석만 있을 뿐, 이삼층은 몸돌은 사라진 채 머릿돌인 옥개석만 포개어져 있다.

 

 

 

노반 이상의 상륜부 역시 사라진 상태이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한 편으로, 받침은 1 ·2층이 4단이고 3층은 3단이다. 대체로 이 탑은 원형을 잃었으나 고려시대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3월 3일에 찾았던 중초사지. 굳게 닫힌 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다가 우여곡절 끝에 안으로 들어가 찬찬히 돌아본 삼층석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형태로 보아도 상당히 훼손이 많은 석탑이다. 더구나 2, 3층의 몸돌까지 사라져, 지붕돌만 포개어진 모습은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아프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라도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숱하게 수탈을 당하고 망가져 그 형체조차 찾을 길 없는 수많은 문화재들. 그래도 이렇게 일부분이나마 남아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아무리 못생기고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해도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실상사 백장암.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에 소재한 백장암은, 남원에서 실상사로 가는 길 좌측으로 가파른 비탈을 올라가면 대나무 숲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백장암은 실상사의 암자로 예전에 경작지였다는 곳에, 국보 제10호 실상사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실상사 백장암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은 정리를 하고 사람 출입을 삼가게 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석등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국보인 삼층석탑을 만나면서, 석등은 빛을 잃게 된다. 그 정교함이나 아름다움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문화재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기존의 통일신라시대의 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백장암 삼층석탑은, 가히 국보 중에 국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삼층탑의 정교한 조각 뛰어나

 

백장암의 삼층석탑은 전체가 놀라운 조각의 솜씨를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삼층석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정교한 조각은 백장암 석탑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일층의 탑신에는 신장상과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금방이라도 호령을 하며 뛰어 나올 것만 같은 역동적인 신장상이나, 곱게 단장한 보살상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이층과 삼층의 탑신은 줄어들지 않고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층의 탑신에는 사방으로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8명의 천인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삼층의 탑신에는 천인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음악으로 치유를 해주는 것만 같다. 이렇게 다양한 천인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보기가 힘들다.

 

지붕돌의 삼존상. 삼층석탑의 색다른 멋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의 탑들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형식을 탈피했다. 탑을 조성한 장인의 솜씨는 최고였고,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 탑의 특징이다. 낮은 기단 위에 올려 진 삼층의 석탑은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돌에 조각을 한 지붕돌을 올렸다는 것이 특이하다. 기단과 탑신의 고임돌에는 난간모양을 새겼다.

 

 

이 백장암 삼층석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삼층 지붕돌이다. 일반적인 지붕돌은 연꽃이나 구름 등을 새겨 넣는다. 그런데 이 탑의 삼층 지붕돌에는 각 면마다 삼존불상을 새겨 넣었다. 각 면마다 조각한 삼존불상이 있어 이 탑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탑의 어느 한 곳도 빠짐없이 조각을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해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그것이 바로 백장암 삼층석탑이 예술적으로 뛰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이지 않는 석탑

 

'백장암 석탑을 보지 않았거든 석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지 말라'

 

문화재 답사를 하러 다니는 중에 전주의 한 사찰에서 만났던 스님의 이야기다. 그만큼 백장암 삼층석탑의 조각이나, 전체적인 모습이 아름답다는 표현이다. 실제로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가 않는다.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만들어 낸 정교한 예술품이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고 해도 어찌 이러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통일신라시대 손으로만 빚어낸 걸작. 백장암의 삼층석탑을 만들기 위해 장인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다했을까? 그 앞에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렇게 땀과 정성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문화재들.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그 누구라도 우리 예술품의 높은 경지를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문화재를 보호하고 살펴야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전히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최고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많은 전설을 간직한 이 미륵대원의 동쪽.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에 서 있는 석탑 한기. 모든 석조물들이 아래편에 모여 있는데 비해, 이 삼층석탑만 떨어져 있다. 석탑을 찾아 오르다보면 좌측에 솟대와 장승이 서 있고, 하늘재를 오르는 길임을 표시하는 석비가 서 있다.

이 석탑을 찾았던 날은 눈이 채 녹지 않은 주변이 미끄럽다. 눈밭 위에 누군가 이곳을 다녀갔음을 알게 하는 발자국이 찍혀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미륵리 사지이다 보니, 이곳이라고 찾지 않았을 리가 없다. 탑 너머로 아름다운 월악산 줄기의 자태가 보인다. 탑과 월악산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신라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의 비보석탑

월악산을 배경으로 하늘재를 오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삼층석탑.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석탑은, 일반형의 단순한 삼층석탑이다. 석탑에는 고려시대의 탑에서 보이는 안상이나, 석불 등을 조각하지 않았다. 밋밋한 삼층석탑은 기단이 견실하다. 그리고 그 위에 삼층의 몸돌과 노반을 얹었는데, 몸돌은 위로가면서 급격히 줄고 있다.

탑 전체의 분위기는 매우 안정적이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신라탑의 유형을 본다, 이 탑이 미륵리 사지의 한편에 올라앉아 있는 이유를, 지기를 충족시키는 비보사탑 설이라고 보기도 한다. 비보사탑설이란 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논리로, 땅 기운이 약한 곳에 세워 기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김두규 교수는 『풍수지리의문화의 이해』에서 「비보진압풍수 행위란 부족하거나 지나친 것을 눌러주는 풍수 행위로서, 물이 부족한 지역에 연못을 파거나, 골바람이 부는 곳에 나무를 심거나, 잘못된 물길을 돌리거나, 군사적 취약점에 있는 곳에 비보사찰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미신행위가 아니라, 정교한 과학적 논리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변과 어우러진 단아한 모습

백제의 석탑은 7세기 이후에 목탑을 석탑으로 변화를 시키면서, 독창적인 조탑의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비해 신라의 경우에는 백제보다 늦은 7세기경에 석탑을 쌓기 시작해, 8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인 탑의 조성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초기의 석탑이라고 추정되는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면 지방 장인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리의 많은 석조물 등을 보아도 섬세하기보다는 단아하고 장중하다. 삼층의 기단은 먼저 지대석을 놓고, 지대석 위에 하대, 하대중대, 하대갑석의 순으로 하층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하층기단의 돌들은 서로 엇갈리게 놓아, 무게의 중심을 분산해 견실하게 하였다. 그 위에는 4매의 판석을 세워 상대중석을 만들고 상대갑석을 얹어 상층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상대중석에는 양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모각했다.

몸돌은 밋밋하게 조형하였으며, 옥개석은 낙수면이 완만하다. 옥개석의 받침은 5단으로 꾸몄으며, 위에는 4매의 노반을 얹었다. 이렇게 기단을 견실하게 만든 이유도 비보사탑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천년세월을 월악산과 한몸이 된 석탑

중원 미륵리 삼층석탑은 천년의 세월을 월악산과 함께 했다. 뒤로 보이는 월악산이 마치 한 몸인 양 느껴진다. 눈이 쌓인 탑 주변과 군데군데 눈이 쌓인 탑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마 저 밑에 보이는 미륵대원지의 모든 것을, 이 석탑이 품어 안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남북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하기에 이 석탑 앞에서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잠시 멈추어 숨을 돌리고는 했을 것이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말없이 서 있는 삼층석탑. 지금은 여기저기 파손이 되고, 탑의 틈새는 벌어져 있지만, 그 단아함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우리 땅의 곳곳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삼층석탑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온다. 천 년 전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 남북으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삼층석탑.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 하나를 간직할지 궁금하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