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역에서 보이는 수많은 석탑. 그 많은 탑들의 형태는 다 제각각이다. 시대와 지역, 혹은 장인에 따라서도 그 모습이 달라진다. 이렇게 다양한 석탑을 답사한다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석탑 중에는 조각이 화려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밋밋하면서도 장엄한 것도 있다.

그런가하면 그 크기에 압도당하기도 하고, 어느 것은 작지만 정말로 화려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전북 정읍시 은선리에 가면 백제시대의 석탑 양식을 이은, 고려 탑이 한 기 서 있다. 도로에서도 보이는 이 탑은,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탑곡마을이라는 곳에 자리한다. 뒤편으로는 예전에 석산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된 듯하다.


‘그 참 묘하게 생긴 탑일세.’

은선리 삼층석탑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으로 그 형태가 묘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일반적인 석탑처럼 몸돌이나 지붕돌 들이 정형화가 되어있지 않다. 그저 얼핏 보면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듯 조성을 한 듯하다. 이 은선리 삼층석탑의 높이는 6m 정도가 된다. 단층의 기단 위에 삼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층의 몸돌은 2m가 넘게 높이 서 있고, 이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다.

이 삼층석탑은 이층 탑신(몸돌)의 남쪽 면에 두 개의 감실을 새겨 넣었다. 일반적으로 하나씩만 새기는 것이 보편적인데, 감실을 나타내는 문짝을 두 개씩이나 새겼다는 것도, 이 탑이 색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이 은선리 삼층석탑은 지붕돌을 평면으로 처리를 해서, 그것이 지붕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없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하겠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

이 탑은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석탑과 흡사하다. 전체적으로는 모습이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당시 백제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물 제16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은선리 삼층석탑.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탑의 형태로, 그 변화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탑이다.

지난 주 찾아간 은선리 삼층석탑. 주변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발길을 미끄럽게 만든다. 탑 주변에는 아무도 들린 사람들이 없는지,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발목까지 빠진다. 눈이 빠진다고 해서 답사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고 보면, 이런 날일수록 더 열심을 내야한다는 생각이다.



지대석은 눈 속에 묻혀 정확한 모습을 알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위에 선 기단부는 판석을 세워 양우주를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탑이 약간 변형이 되었는지, 한편은 양우주의 표현이 정확하지가 않다. 아마도 무게 때문에 약간 변형이 된 듯하다. 기단부 위에 놓인 지붕돌은 평평하다. 그냥 넓은 판석을 올려놓은 것만 같다.

두 장씩의 돌로 쌓아 올린 탑

일층 몸돌은 길게 세워져 있다. 중앙에는 두 개의 판석을 붙였음을 알 수 있게 가운데에 금이 선명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린 지붕돌은 아래를 굽을 만들고, 그 위에는 평평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석탑에서 보이는 처마 끝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층서 부터는 급격히 몸돌이 좁아진다.



지붕돌은 사면에 일자로 금이 가 있는 것으로 보아, 네 장의 판석을 시용한 듯하다. 보기에는 밋밋한 것이 단순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견고한 석탑의 장중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백제 지역의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당시 이 지역 석탑의 특징이기도 하다.

수많은 석탑들. 그 다양한 형태를 접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답사가 힘들어진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힘이 부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면서 각각 그 나름의 특징들을 알아가는 것이 민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공부는 답사를 마치는 날까지, 다 배워지지 않을 듯하다.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84번지, 학성산에 위치한 ‘인취사’. 2월 13일, 일요일에 찾아간 인취사는 그리 넓지 않은 길을 구불거리며 들어간다. 인취사 주변은 온통 연꽃이 즐비한 곳이다. 연꽃축제로 더 알려지기도 한 이 절은, 백제 무녕왕 18년인 518년에 창건했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법흥왕 때 창건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주지 ‘창암스님’은 극락전에 모셔진 삼존불 등에 넣어둔 절의 내력을 적은 복장물들이 다 도난을 당해, 절의 중창 년대 등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신다. 인취사는 공주 마곡사의 말사이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인취사(咽嘴寺)’라고 나와 있고,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에는 지금과 같은 ‘인취사(仁翠寺)’로 적고 있다.


축대 밑에 자리한 연꽃단지

인취사를 둘러본다. 현재 주지인 창암스님이 이곳에 부임해 축대를 새로 쌓고, 안쪽에 있던 종각을 축대 앞으로 끌어내 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반듯하게 쌓은 축대 밑에는 고무 통을 나란히 땅을 파고 묻어, 그곳에 연꽃을 심어 놓았다. 봄이 되면 각종 연꽃이 피어나는 것이 볼만 하다는 곳이다.

넓은 마당의 뒤편으로는 삼존불을 모신 극락전이 자리하고, 그 앞으로는 공양간이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을 딴 용도로 사용했을 것 같다. 공양간 좌우편 끝에는 요사가 자리하고, 그 중간에 석탑 2기가 서 있다. 그저 넓은 공간에 듬섬듬성 서 있는 탑이며 전각들이, 조금은 휑한 듯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산비탈에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시원한 정경이 펼쳐진다.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석탑 2기

인취사에는 옛 석탑이 2기가 서 있다. 극락전을 바라보고 좌측 보호철책 안에 서 있는 이 석탑은 모두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다. 앞에서 산 쪽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것은 오래된 것이나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오른쪽에 서 있는 탑은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23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강암 석재로 구성한 이 석탑은 기단 갑석위에 삼층 석탑이 올려 진 상태로 있다. 기단갑석은 한 편이 떨어져 나가 상태이고, 탑신과 옥개석인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탑신인 몸돌에는 양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의 받침은 아래서부터 4-3-3단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2단의 굄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삼층석탑은 비례가 맞지를 않는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깊게 떨어지고 있으며, 옥개석 끝의 반전도 그리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보이고 있어, 전체적인 탑의 모습을 가늠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5층으로 추정되는 인취사 석탑

탑의 맨 위에는 부정형의 돌을 하나 올려놓았다. 이 탑도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데, 절을 정리하면서 이곳으로 모아 놓은 듯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탑은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단갑석의 크기가 탑의 크기에 의해 맞지가 않는다는 것이 그 첫째 이유이다.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은, 아래 이층부분이 유실된 듯하다. 기단부가 없어지고 갑석만 남아있는데, 그 갑석의 크기로 보아도 그렇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취사 삼층석탑. 비록 문화재자료이기는 하나, 그 또한 소중한 고려시대의 유산이다. 이런 탑 하나에도 공을 들여 조성을 했을 당시 장인의 마음과 손길을 기억해 내는 것은, 지금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다.

2월의 찬바람에 올라간 인취사. 넓은 절터에 부는 한줄기 바람이 탑을 돌아 저 밑 연꽃마을로 사라진다. 곧 꽃피는 춘3월이 돌아오면 인취사는 각종 아름다운 연꽃으로 단장을 하게 될 테고, 그 바람 한 점이 꽃을 재촉하는 듯하다.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소재한 사적 제150호인 미륵사지. 뒤편으로는 미륵산이 자리하고, 그 남쪽 기슭에 자리한 백제시대의 절터이다. 『삼국유사』권2 무왕조에 따르면, 백제 무왕(600~641)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소재 사자암)로 향하고 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무왕과 함께 거동을 하던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간청하자, 무왕은 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 등의 전각을 건립하고 ‘미륵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미륵사가 언제 사라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7세기경에 이미 폐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백제의 멸망이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이었다고 보면, 그 당시 전쟁 통에 이미 사라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 개의 화려한 탑이 서 있던 미륵사

현재 미륵사지에는 반쯤 파손되어 있는 국보 제11호인 서탑을 해체 복원중이다. 1980년대에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로는,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2011년 1월 25일 찾아간 미륵사지에는 날이 추운 탓인지,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아직도 눈이 많이 쌓여 있는 미륵사지에는, 찬바람만이 스산하게 불어댄다.

해체를 한지 수년이 지났지만 국보인 미륵사지 서탑은 아직도 해체된 그대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건너편에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원 9층 석탑으로 발길을 돌린다. 장중한 모습으로 복원이 된 동탑은 몇 개의 돌만이 당시의 석재이다. 1974년 동원 탑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기단의 형태 및 발굴 유물 등으로 보아 이 동원 탑지에도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복원된 미륵사지 동원 9층 석탑은 백제 때의 기단석재 등을 사용하였다

복원된 동탑의 아름다움

동원 9층 석탑은 동탑지에 1991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복원을 완성하였다. 이 9층 석탑의 복원에 따른 고증자료는 서탑과 동원 동탑의 기단부 및, 1980년 이후 동탑지 부근에서 발굴조사 때 발굴된 노반석 등을 비롯한 탑의 석재를 이용하였다. 현재 이 동원 9층 석탑의 기단부에는 발굴 당시 발견이 된 석재 일부가 사용이 되었다.

이중 기단위로는 높은 1층 탑신이 서 있다. 1층 탑신은 사방에 계단을 놓았으며, 계단 위에는 철문이 있다. 이 문을 통해 탑신 안으로 들어서면, 十 자 모양으로 통로가 사방으로 나 있다. 하지만 이층부터는 위가 막혀있다. 9층 석탑과 상륜부까지의 총 높이는 27.8m나 되는 거대한 탑이다.



일층 탑신 안에는 사방으로 통로가 나 있다

금이 가고 있는 복원된 탑, 방치하면 안 돼

이 동원 9층 석탑을 재현하는 데는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총 2,000여개의 석재는, 그 무게만도 2,700여 톤이나 되는 양이다. 이 탑을 복원하는 데는 백제시대의 기단석과 탑신석 35개가 사용이 되었다. 탑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상륜부에 달린 풍탁은 동탑지에서 발견이 된, 백제시대의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금이 가고 있는 미륵사지 동원 9층 석탑

동원 9층 석탑을 한 바퀴 돌아본다. 탑 안까지 살피고 난 후 밖으로 나왔다. 건너편에는 서탑을 복원하느라 커다란 구조물을 세워놓았는데, 밖으로 나와 9층 석탑으로 바라보니 무엇인가 이상하다. 일층 탑신석 철문 위쪽에 금이 가 있다. 그러고 보니 그 위에도 금이 보인다. 문 위 석재에 금은 그 끝이 약간 어긋나 보일 정도이다.

1992년에 복원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 복원된 지가 20년째다. 익산 황등 화강암은 단단하기로는 전국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런 석재가 금이 가고 있다니. 괜한 걱정이 앞선다. 요즈음 광화문 현판을 비롯한 문화재 복원의 문제점이 야기되고 있는데. 이곳도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더 이상 금이 가는 것을 방치하면 안 될 것 같다. 아무리 복원이 된 탑이라고 하지만, 그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제대로 지역에 있는 문화재 하나 주변 정리도 못하는 지자체가, 문화 운운하는 것은 정말로 짜증스럽다. 용인시는 딴 지역에 비해 월등한 문화자원을 갖고 있는 곳이다. 공연장만 해도 용인시청 청사 내를 비롯해, 수지 등 몇 곳에 어느 곳에도 뒤처지지 않는 공연장을 갖고 있다. 그런 용인시에 소재한 문화재가 방치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어이가 없다. 문화재 주변에 가득한 말라버린 덤불이며, 누군가 갖다 놓은 농기구 등, 이렇게 문화재 관리를 하고 있다는 것에 울화가 치민다. 많은 문화재를 보았지만, 이렇게 황당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264번지에 가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된 공세동 오층석탑이 있다. 탑안마을이라고 하는 곳에 서 있는 이 공세동 탑은 몇 년 전부터 찾아다닌 탑이다. 아파트 공사를 할 때부터 찾아갔으니, 어림잡아도 몇 년은 지난 듯하다. 당시는 이 탑을 보기 위해 여러모로 힘을 썼지만 찾지를 못했다. 이번 12월 26일 답사 길에서 만난 공세동 탑. 혼자 그렇게 독야청청하게 버티고 있는가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2호인 용인 공세동 오층석탑. 주변이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백제계열의 고려 석탑

공세리 오층석탑은 백제탑을 모방한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인다. 탑의 높이 2.5m의 이 석탑은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옛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곳에 서 있다. 그 옆에는 목이 잘린 석불이 한 기 마른 덤불 속에 방치되어 있다. 탑의 앞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면 이 석불의 머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석불이 지금처럼 머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나보다.

「높이 2.5m의 이 탑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옛 절터에 불상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백제계 석탑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은 지대석에는 연꽃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윗면에는 낮은 받침이 있다.(하략)」

이와 같은 설명으로 보아 무너져가고 있는 담장 밑에 방치되어 있는 목 없는 석불 한기가 같은 절터에서 발견이 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사라지고, 기단부의 상단은 앞뒤 판석이 없다.

옛 절터, 사전에 발굴조사는 제대로 이루어졌을까?

이 안내판을 보면서 의아한 점이 있다. 5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는 공세동 옛 절터라는 옆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몇 년 전인가 이 탑을 답사를 하려고 왔을 때는, 이곳에 아파트를 짓느라 부산했을 때이다. 그런데 그 당시 이 탑 주변의 발굴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가 궁금하다. 아마 당시 아파트를 짓느라 이 일대를 다 파헤쳤을 텐데, 그런 절터에 관한 것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은 가셨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문화재가 서 있는 곳을 발굴한다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다. 더구나 이곳이 절터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좀 더 세심한 발굴이 이루어졌어야만 했다. 또한 아파트를 건설한 축대 밑에 있는 이 석탑과 불상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써서 관리를 해야만 했다. 도로에는 수많은 예산을 쏟아 붓고 있는 지자체에서, 이렇게 문화재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납득이 가질 않는다.

안양사로 추정하는 절터라는 곳에 있는 석불좌상. 목이 없고 주변은 온통 말른 덤불투성이다.

일설에는 안양사라고 하는 절터였다고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만 같다. 그리고 이렇게 덤불 속에 방치된 석불좌상 등 분노마저 느끼게 하는 문화재 관리이다. 만일 사전에 충분한 발굴이 이루어졌다면, 그에 대한 조사보고 정도는 안내판에 적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름 섬세한 고려시대의 석탑

이 공세동 오층석탑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고려시대의 석탑으로는 상당히 정교하게 조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단부는 네모나게 조성을 해 연꽃문양을 둘렀는데, 상면만 땅 위에 보일뿐, 흙에 묻혀있어 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주변을 정리하고 흙이라도 좀 파냈다면 한결 보기가 좋았을 것을. 상층 기단부는 앞뒤의 판석이 떨어져 나갔다.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는데, 탱주가 없는 것은 탑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몸돌은 모두 오층으로 조성이 되었는데, 일층의 몸돌은 크고 이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일층은 탑 몸돌과 덮개석을 따로 제작했는데, 이층부터는 몸돌과 덮개석이 한 장의 돌로 꾸며졌다. 지붕돌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그 위에 추녀를 두었는데 처마꼬리가 약간 위로 치켜 올려졌다. 비록 일부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약간 치켜 올라간 처마 등 나름 멋진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는 모두 사라져 어떠한 형태였는가를 알 수가 없음이 아쉽다. 이제라도 공세동 오층석탑 주변을 정리를 하고, 문화재다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근 아파트에 사는 자라는 학생들이 이런 모습을 본다면, 우리 소중한 문화재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갖게 될까 걱정스럽다. 가뜩이나 문화재가 홀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요즈음에.

기단부가 땅에 묻혀있어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전북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에 소재한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운산리 삼층석탑. 이 탑을 찾아들어갔다가 고생을 어지간히 했다.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잡는 바람에 산등성이까지 눈길을 걸어야만 했다. 문화재를 알리는 이정표는 길을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안내자이다.

탑이 서 있는 마을 이름을 내후사동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이, 운산리 삼층석탑은 옛 절터에 서 있는 탑이다. 그러나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탑의 모습을 보니 옮긴지가 그리 오래지 않은 것 같다. 탑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고, 탑에는 앞면이라고 먹물로 쓴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왜 이 탑을 옮긴 것일까?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진안 운산리 삼층석탑

탑을 지키는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울어 

원래 운산리 삼층석탑은 현재의 자리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이 서있는 땅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이 탑을 진안읍으로 옮겨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마을에서는 이변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주민들은 밤마다 꿈을 꾸었는데 흰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울면서 지금의 자리에 안치를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의 꿈도 아니고 마을사람들이 자주 이런 꿈을 꾸게 되자, 마을에서는 이 탑을 현재의 자리에 새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 탑을 ‘신들린 탑’ 이라고 부른다. 정월 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촛불을 켜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정하는데,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이 되었다.





평범한 삼층석탑, 찾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천연기념물인 진안 천황사 전나무를 찾아가다가 보니 ‘운산리 삼층석탑’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전나무를 답사하고 난 뒤 돌아 나오는 길에, 운산리 삼층석탑을 찾아들어갔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다가 보니 양 갈래 길이 나온다. 어디로 가야할까? 안내판 하나가 없다. 이럴 때는 대개 직진을 하면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에, 직진을 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을 지나 길이 좁아진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을 물을 집 한 채도 없는 눈길을 아무리 가도 탑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렇게 계속 간 것이 결국엔 임도를 따라 산등성이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답사 시간은 자꾸만 지나간다. 겨울 해는 짧기만 한데, 마음이 조금해진다. 기던 길을 급히 돌아 나오다가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마을이 아니고, 들어오기 전 마을이라는 것이다.


처마는 약간 위로 올려졌다. 받침돌에는 기둥을 상징하는 우주와 탱주가 양각되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다시 길을 돌아 나와 내후사동으로 들어갔다. 마을입구에 서 있다는 삼층석탑은 마을을 몇 바퀴를 돌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도대체 안내를 하는 표시 하나만 길이 바뀌는 곳에 세워주었어도, 이런 고생은 면할 수 있을 텐데. 다시 마을주민에게 물어볼 수밖에. 바로 앞에 탑을 두고 찾아다닌 것이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탑이 보인다. 그러나 길에서는 안쪽에 숨겨진 듯한 탑을 찾기란 수월하지가 않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이층의 가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렸다. 위층 기단의 몸돌에는 탱주와 우주가 양각되어 있고, 일층 몸돌의 한 면에는 문이 새겨져 있다. 나머지는 모두 평면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으로,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다. 탑의 머리부에는 꼭대기에 동그란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가 남아있다.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왜소해 보이고, 일층의 몸돌에 비해 이층이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미는 떨어진다.


1층 몸돌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고, 받침돌 하단에는 안상이 음각되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안상을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 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변형된 모습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보인다. 탑 하나를 찾기 위해서 두 시간이나 소비를 했다. 하지만 이 탑 하나가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니 어찌하랴. 그나마 찾았으니 다행이랄 수밖에. 흙이 아직도 묻어있는 운산리 석탑이 주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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