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사 약사여래좌상, 신라시대 조성했을까?

 

이천시 송말리는 도립리, 경사리와 함께 봄이 되면 흐드러지게 산수유가 피는 곳이다. 이곳은 매년 봄 산수유축제로 인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는 한다. 도립리에는 여섯 명의 명현이 모여 세상을 논했다는 육괴정이 자리하고 있다. 육괴정은 이천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이 되어있고, 주변에는 거대한 느티나무들이 서있다.

 

백사면 소재지에서 도립리로 들어가기 전 마을인 송말리에서 원적산으로 난 길을 한참이나 올라가면 송말리 435번지에 소재한 영원사를 만날 수 있다. 영원사(주지 성원스님)는 대한불교 조계종에 속한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7년인 638년에 혜호선사가 수마노석으로 약사여래불을 조성하고 현 영원사 뒷산에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영원사에 전해지는 사적기를 보면 영원사는 이미 개창한 지 1378년이나 된 고찰이다. 그 뒤 고려 문종 때 화재로 전소된 것을 현재의 자리에 혜거국사가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영원암이라 개칭한 후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문종은 고려 제11대 왕으로 재위는 1046~ 1083년이다.

 

 

 

 

 

수령 800년의 느티나무와 영원암

 

문제는 고려 문종 때 혜거국사가 이곳에 은행나무를 심고 절 이름을 영원암이라고 칭했다고 했는데, 절 안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런 은행나무는 보이질 않는다. 대신 수령 800년이라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느티나무는 1982년에 지정이 되었으니 현재는 수령이 830년 정도가 되었다.

 

수고 25m, 가슴높이의 둘레가 4.5m에 달하는 영원사 느티나무는 영원사 경내로 오르는 계단 위에 소재하고 있는데, 주변에서도 나무가 눈에 띨 정도로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거대한 굵기를 자랑하는 밑동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많은 가지가 좌우로 퍼져있어 수형이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영원사 경내를 오르면 단청을 한 전각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산비탈에 층이 지게 조성한 전각들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산신각, 명부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영원사 대웅전은 꽃 창살로 화려하게 창호를 제작했으며 정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꾸며졌다.

 

 

 

 

신라시대 조성했다는 약사여래좌상

 

영원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우측으로 난 계단 앞에는 안내판이 서 있다. 바로 이천시 향토유적 제12호인 영원사 약사여래좌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안내판이다. 이 안내판에 따르면 영원사 약사여래불은 1985년 새로 연화대좌를 조성하여 유리광전에 안치를 해 놓았다고 한다. 당시 목 위의 두상 부분을 새롭게 조성했으며, 구 두상은 연화대좌 한편에 모셔놓았다.

 

약사여래불의 높이는 118cm, 어깨 폭은 71cm, 무릎 폭은 105cm이며 대좌의 높이는 94cm이다. 새로 조성한 두상은 나발에 육계를 표현했고, 상호는 원만하여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부드러운 어깨는 넓고 당당하다. 법의는 우편견단으로 옷섶에 걸쳐 조형한 주름이 독특하다.

 

 

 

 

 

약사여래불의 오른발은 왼쪽무릎에 얹어 결과부좌를 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은 오른쪽 발바닥 위에 약단지를 받쳐 들고 있어 이 불상이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 있다. 영원사 사적기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 7년인 637년에 해오선사가 절을 창건하고 수마노석으로 약사여래를 조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약사여래불의 표현기법을 보면 통일신라와 고쳐 초기에 걸쳐 나타나는 불상의 특징이 보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약사여래불이 삼국시대인 선덕여왕 때에 조성하기 보다는, 고려 문종 때 조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벌써 영원사를 다녀온 지 10여일이 훌쩍 지났다. 영원사의 창건과 약사여래불의 조성, 그리고 중창연대 등 그 어느 것도 시원한 해답이 없다. 하긴 그 해답을 찾는 것이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불가에서 말하는 인생은 허상을 둘러 쓴 조립품이라고 했는데, 연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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