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힘든 것은 혼자 매표소를 지키다가 보니, 생리현상을 제대로 해결할 수가 없다는 점일 거예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하루에 두 번 정도 밖에는 가지 않아요. 자리를 비운 사이에 관람객들이 관람권을 구하러 오거나, 화성에 대해 묻기라도 하려고 찾아왔는데 사람이 없으면 불편하니까요”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 건너편 성곽 밑에 작은 임시건물이 하나 있다. ‘화성관람매표소’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이 작은 기와구조물이, 바로 김숙희씨가 근무를 하는 화성관람매표소이다. 사실 이 매표소는 화성의 6곳의 매표소 중에서는 가장 한적한 곳이다. 사람들이 많이 표를 구할 때라야 60여장 정도라고 한다.

 

 

관람객이 적다고 쉬운 일은 아니다

 

김숙희씨가 수원문화재단에서 일을 한지는 이제 5년째라고 한다. 원래 고향은 경남 거창이지만, 결혼을 하고나서 수원에 정착했다는 것.

 

“이제 저는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치고는 아직 햇병아리예요. 오래 되신 분들은 10년이 넘은 분들도 계세요. 저희는 매표소와 행궁, 안내소 등을 돌아가면서 3개월씩 근무를 하기 때문에, 꼭 어디가 편하고 어디는 힘들고 하는 것은 없어요. 저도 8월까지 이곳에 있다가 또 딴 곳으로 가서 근무를 하게 되니까요”

 

화홍문 매표소는 하루에 이용객이 가장 적다고 한다. 이곳은 화성열차를 승차하는 곳도 아니고, 딴 곳처럼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하루를 보내는 것은 어디나 똑 같다고 한다.

 

 

“아침에 9시에 근무지로 나오면 오후 6시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죠. 전에는 둘이 근무를 했는데, 지금은 혼자라서 밥을 먹거나 생리현상을 해결하거나 혼자서 알아서 해야 하죠. 또 관람객들이 이곳으로 돌아오면 검표도 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출입문을 열어놓고 있어야 해요”

 

시비를 거는 관람객의 의사도 존중해야 해

 

아무래도 매표소에서 혼자 감당을 하다가 보면, 이러저런 일로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명씩 시비조로 이야기를 하는 관람객들이라고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루에 보통 두 명 꼴은 시비를 거는 분들이 계세요. 이곳은 화성열차를 하차는 할 수 있어도 승차는 하지 못하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마구잡이로 승차를 하겠다는 분도 있고요. 표를 구입하지 않고 관람을 하겠다는 분들도 계세요. 그분들도 나름대로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라 할 수는 없는 일이죠. 그 중에는 존중해야 할 의사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지 않는 곳이라 낫다는 것이다. 연무대매표소나 장안문매표소, 행궁 등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

 

“그곳에 근무하는 동료들은 정말 많이 힘들어요. 올 해 1박 2일이 끝나고 나서 행궁 매표소 같은 곳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엄청나게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인해 몇 사람이 달라붙어도 힘이 들었으니까요. 장안문이나 연무대는 1박 2일 촬영지라고 간판을 놓았는데 여기는 그런 표시가 없으니, 사람들이 이곳에서도 촬영을 했느냐고 물어보시죠. 화홍문에서도 퀴즈도 내고 그랬는데, 안내판이 없어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어디에 근무하던 지 최선을 다할 터.

 

1박 2일이 끝나고 난 뒤 그렇게 밀려들던 관람객들도 지금은 소강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관람객들이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는 것. 매표소 앞에 있는 상점에서도 1박 2일 이후 정말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 이후 조금 줄기는 했지만, 아직도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날이 더워서 에어컨을 틀어도 시원한지를 모르겠어요. 그러나 제가 어느 곳에 근무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것보다는 제 일을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죠. 요즈음은 ‘생태교통 수원2013’ 때문에 가이드 분들이 많은 질문을 해요. 행궁 주차장이 사용을 할 수 없다는데, 어디에 차를 대느냐고요. 아직 저희들은 지침을 받은 것이 없어서 설명을 잘 해드릴 수가 없어 죄송하죠.”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는 김숙희씨. 수원 화성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늘 미소로 대한다는 그녀로 인해, 화성을 찾은 모든 관람객들이 행복해 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봉사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단다. 사업의 실패로 수원시 권선구에서 화성시 봉담읍 유리 기산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는 집안에만 있으니 심한 우울증에 걸렸단다. 그래서 시작한 봉사였다. 그렇게 1년 가까운 시간을 봉사를 하면서, 점차 우울증이 나았다고 한다. 문혜영(여, 49세)씨는 그렇게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봉사에 발을 디뎠다는 것.

 

“남편과 함께 수원에 살면서 봉사를 정말 많이 했어요. 그런데 2년 전에 사업의 실패로 인해, 집까지 이사를 하게 되었죠. 화성시 봉담으로 이사를 한 후, 사업 실패의 후유증으로 인해 심한 우울증이 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보낼 수가 없어 봉사를 다시 시작했죠. 봉사를 하는 시간은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으니까요. 봉사를 시작한 후 우울증도 사라지고, 이제는 옛날처럼 제 스스로를 되찾았다고 보아야죠,”

 

 

자신을 치료하기 위한 택한 봉사

 

봉사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말로만 하는 봉사야 누구든지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문혜영씨의 봉사는 그야말로 ‘살신성인’이라는 말이 적합하단 생각이다. 하루에 4시간, 봉담 인근의 18개 요양원을 한 달에 두 번씩 다닌다고 하니, 줄잡아도 하루에 한 곳 이상을 다니면서 봉사를 하는 셈이다.

 

그렇게 봉사를 하면서 차츰 우울증도 가시게 되었다니, 문혜영씨의 봉사는 자신과 남을 함께 살린 폭이 되었다. 요양원에 찾아가면 어떤 일이나 가리지 않고 했다. 청소부터 어르신들 목욕시키기, 심지어는 화장실 청소까지 맡아서 했다. 어르신들을 안마를 해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르신들께 다가서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어르신들을 내 부모님처럼 대하다가 보니, 정말로 좋아들 하시죠. 안마도 해드리고 발 마사지도 해드리고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발 마사지를 해드리다가 아마 간지러우셨나 봐요. 할머니께서 대뜸 욕을 하시는 거예요. 간지럽다고요. 조금은 당황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정말 고맙다고 하시데요.”

 

딸자식 보다 낫다는 봉사자들

 

화성 나눔에 봉사단의 회원은 모두 30~40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16명이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봉담의 요양원을 다니면서 하루에 4시간씩을 봉사도 하고, 노래교실도 운영한다고. 봉사를 하러 다니면서 어르신들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주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할머니들이 저희가 봉사를 가면 오히려 아들, 딸보다 낫다고 하세요. 자신들이 낳은 자식들도 찾아오질 않는데, 한 달에 두 번씩 찾아와서 청소도 하고 목욕도 시켜드린다고요. 그래서 가끔은 자식 대하듯 스스럼없이 대하시기도 하시고요”

 

그렇게 봉사를 하면서도 김장봉사도 하고. 농촌봉사를 나가 2만 여 평에 양배추를 돕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봉담 나눔에 봉사단’은 인원을 많지 않지만, 그래도 많은 일을 감당해 내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봉사를 하면 경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어떻게 조달하느냐고 물었다.

 

“저희들은 원칙적으로 남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저희가 해결을 하고 있어요. 2만 원씩 회비를 걷어서 그것으로 점심도 먹고, 만원은 남겨 두었다가 년 말에 장학금을 주기도 하고요”

 

천성이 봉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드는 문혜영씨.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전혀 힘들지 않다고 대답한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하요. 저도 나중에 나이가 먹으면 요양원에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항상 내가 올 곳이기에 더 열심히 봉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죠. 지금 이곳에 계신 어르신들이 결국 나중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노인에 관한 자격증은 모두 다 땄다고 한다. 요양사 자격증을 비롯하여, 자살방지, 노인상담 등 8가지가 되는 자격증을 갖고 있다는 것. 이렇게 자격증을 딴 것도 노인들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 올바른 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치매를 앓고 계세요. 그래서 이 분들이 저에게는 더 많이 소중하게 느껴지죠. 앞으로도 요양원 봉사는 꼭 하려고요. 시간을 내서 더 많은 봉사를 하고 싶기도 하고요”

 

 

봉사를 하겠다는 욕심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을 듯하다.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봉사를 하러 가야한다고 총총히 걸음을 옮기는 문혜영씨. 오랜 장맛비로 꿉꿉하던 마음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햇볕에 모두 가시는 듯하다.

 

수원시 팔달구 영동 43-2 번지에 소재한 영동 거북산당. 이 도당은 18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역사가 200여 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한다. 영동 거북산당은 화성을 축성을 하기 이전부터 이미 그곳에 서 있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 거북산당이 자리한 앞쪽으로는 낮으막한 ‘거북산’이라는 산이 있어, 그 명칭을 거북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거북산당은 처음에는 현 구천동의 마을 제당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곳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후에는 영동시장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도당으로 기능이 바뀌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거북산당은 주변 상권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화성 축성을 위해 팔도에서 모여 든 수많은 노역자들로 인해 장시가 개설이 되고 난 후. 그때부터 팔달문 앞에 형성된 장시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재인청의 마지막 화랭이 이용우 일가가 지켜 온 거북산당

 

영동 거북산당은 옛날에는 세습무인 화랭이에 의해 굿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재인청 도대방을 역임했던 이종하의 삼남인 이용우 선생이, 생존 시 거북산당 도당굿을 주관하였다. 이용우 선생 일가는 현 오산시 부산동(당시 수원 오산리)에 거주하였으며, 경기도 지역의 많은 도당굿을 주관해 오기도 했다.

 

현재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의 기와로 조성된 겨북산당은 수원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거북산당은 과거에는 짚으로 이엉을 엮어 만든 ‘터주가리당’이었다고 한다. 1935년(乙亥年)에는 터주가리 당 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으며, 당 옆에는 3층으로 된 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거북산당 주변에는 기와집과 판잣집들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이 팔달문 앞 장시의 외곽에 있던 당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터주가리 당을 당시 인계동에 거주하던 이씨 만신이 관청의 도움을 받고, 개인이 사비를 들여서 거북산당을 축조하고 그 안에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 그리고 대왕님의 탱화를 모셨다고 한다.

 

그 탱화는 현재 거북산당 안에 모셔진 그림과 동일한 형태이다. 그 뒤 1994년 10월 24일(음력 9월 10일) 수원시청의 지원을 받아 당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로 입혀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당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당 앞에 있었다는 연못이 메어지고, 그 자리에는 앞 건물에서 가건물을 내 짓는 바람에 옛 형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당의 형태가 변한 거북산당은 세습무인 화랭이들이 주관하던 것을, 이용우 선생의 제자인 강신무로 전 경기도당굿 기, 예능보유자였던 고 오수복으로 전해졌다. 보유자 오수복의 별세 이후 지금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의 회원들이 도당굿을 맡아서 하고 있다.

 

 

영동시장 내에 거북산당이 건립된 이유는?

 

영동 시장 내에 거북산당이 축조된 이유를 보면 화성의 축성과 무관하지 않다. 화성 축성을 위해 전국에서 많은 노역자들이 몰려들었고 자연히 팔달문밖에 장시가 서게 되면서, 상인들 을 주축으로 상가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도당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시장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당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시장에 불이 잘 나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 시장에서 터를 잡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없어도 당제는 올려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의 명칭이 거북산당으로 불리는 것은 원래 이곳에 거북이 모양의 돌이 있었다고도 하고, 또 인근의 구천동과 가까우며 주위에 물이 많은 곳이라서 풍수적으로 불을 제압 할 수 있는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근처에 ‘거북산’이라고 부르는 작은 언덕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따 거북산당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도당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신 당

 

경기도의 도당은 당집을 마련하고 그 안에 도당신을 섬기는데, 신위는 위패를 모시거나 무신도를 모셔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동 거북산당 안에는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대왕님(염라대왕)을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 7일에 영동시장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서 지내오던 것이다.

 

이 도당굿은 시장의 번영과 상인의 대동단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공동체적인 삶의 필요로 창출된 굿이다. 그러나 1990년 초에 이르러서는 영동시장 번영회에서 별도로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 보존회원들에 의해서 굿이 진행되지만 옛 형태는 찾아보기 힘들다.

 

수원 화성 행궁 앞에서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오후 8시부터 한 시간 정도 계속되는 ‘야한음악회’. 야한(夜寒)이란 무더운 여름밤을 시원하게 만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무더운 여름밤에 화성 행궁, 그리고 팔달산 등의 경관과 더불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임으로써 더위를 가시게 만든다는 것.

 

야한음악회는 원래 7월 13일부터 8월 24일까지 열리기로 되어있었으나, 장맛비로 인해 7월 19일 오후 8시에 그 첫 번째 무대를 마련하였다. 야한음악회를 감상하기 위해 행궁 앞 광장 무대로 나가보았다. 무대에서는 새마을부녀회 합창단의 노래가 밤 행궁 광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으나, 관람객은 고작 50여명 정도가 앉거나 서서 구경을 하고 있다.

 

 

경기경찰청 홍보단의 젊은 무대 돋보여

 

새마을부녀회 합창단의 순서를 마치고 난 후, 이어진 순서는 경기경찰청홍보단 의경들이 무대를 꾸며주었다. 의경 김봉주는 뮤지컬 이순신 중에서 ‘나를 태워라’ 등을 열창했다. 이어진 무대는 탭댄스. 그리고 경기경찰청 홍보단의 밴드 팀이 무대에 나와 단발머리 등을 열창하기도.

 

이 밴드 팀의 리더는 입영 전에 보컬 팀인 ‘어반자카파’에서 작곡을 하던 리더였다고 소개를 하기도. 밴드 팀이 공연을 마치고 난 후, 경기경찰청 홍보단의 마지막 무대는 마이클 잭슨의 퍼포먼스로 이어졌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인 ‘빌리 진’에 맞추어 독특한 스텝과 동작으로 많은 박수를 받기도.

 

 

야한음악회가 끝나갈 무렵에는 관객들이 150여 명 정도로 불어났으며, 이날 마지막 무대는 밴드 팀인 루키가 담당을 했다. 장맛비로 인해 한 주의 공연이 취소가 되는 바람에 관객들이 많이 모이지 않은 듯. 그래도 올 해 첫 무대치고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으며, 관객들도 즐거워했다.

 

야한음악회는 그야말로 더위를 가시게 할 정도로 ‘한(寒)’한 음악회를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시작이 되었다. 한 여름 밤의 열대야와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행궁 광장에서 음악회를 감상하면서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그러나 열심을 내는 출연자들과는 무관하게, 음악회가 진행되는 동안 문제점들이 보였다.

 

 

물론 야한음악회에 출연하는 팀들이 모두 다 잘 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늘 최선을 다해야 하고, 관객들을 위해 최상의 공연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날 공연을 보면서 조금은 시원하지 않고 짜증스런 부분도 있다.

 

노래를 하는 사람들이 고음을 내면 소리가 갈라진다는 점이다. 시원하게 터트리지 못하는 소리로 인해, 답답하기까지 하다. 고음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 노래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시원치가 않다.

 

 

이제 2013년의 한 여름 밤을 시원하게 만들어 줄 야한음악회의 무대가 열렸다. 이런 점들을 좀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무척이나 더위가 오래 갈 것이라는 올 해의 더위가 싹 가시는 야한음악회가 되기를 고대한다.

 

‘재인청’, 한 때는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의 모든 부문을 총 망라한 예인들의 집단이었다. 자칫 재인청이라는 곳이 어떤 특정한 전통예술을 하던 것처럼 포장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 때는 재인청에 속한 수많은 기예인들이 있었고, 모든 전통예술분야를 총괄하던 곳이 재인청이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재인청은 ‘무부(巫夫=화랭이)’들이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재인청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도 고려조부터 전해진 무기(舞技)들의 예인 집단인 ‘교방청(敎坊廳)’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조직이면서도 그 안에 화랭이, 광대, 단골, 재인 등 수 많은 예인들이 속해 있었으며 아주 엄한 규제가 있었다.

 

 

삼도 예인집단 재인청

 

재인청은 경기도를 비롯해 충청과 전라도에도 있었으며, 각 군마다 군 재인청이 있었다. 각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고 하고, 군 재인청의 수장은 장령이라고 불렀다. 재인청에서는 선생 밑에 제자들을 두어 학습을 하게 하였으며, 전국에 산재한 많은 예인들이 이 재인청에서 학습을 하거나 재인청에 적을 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각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고 하였으며 3도(경기, 충청, 전라)의 재인청을 당시 화성재인청에서 총괄을 했던 관계로, 화성재인청의 대방을 ‘도대방’이라고 하였다. 대방과 도대방의 선출은 재인청 인원 중에서 3명을 추천을 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 당시에도 상당히 민주적인 방식의 선거를 했음을 알 수가 있다.

 

 

까다로운 규제 속에 생활을 한 재인청

 

재인청은 그 규제가 까다로워 스스로의 천시 받는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당시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스승에게 예를 갖추지 않거나 주정을 하면 태장을 칠 정도로 엄한 규제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갔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서 재인청이 폐청이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한 인원이 3만 여명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 재인청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지금도 경기도 내의 여러 곳에 보면 광대마을, 혹은 재인마을로 불리는 곳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지난 날 군 재인청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재인청이라는 곳이 춤을 추거나, 단지 소리를 하거나 하는 예인의 집단이 아니다. 재인청이란 한 마디로 3도에 있던 모든 예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거대 기, 예능조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제인청의 춤을 잇는 사람들

 

7월 16일(화).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있는 재인청 춤을 추고 있는 곳을 찾았다. 창밖으로는 화성이 보인다. 그곳에서 5명의 춤꾼들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춤을 추고 있다. 바라춤, 무녀도, 재인청 기본무, 재인청 살풀이 등이다. 근 두 시간 정도를 땀을 흘리며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김성용(여, 66세. 조원동), 김현희(여, 58세. 영통동), 박옥희(여, 48세. 매탄동), 유미녀(53새. 용인 고매동), 박영옥(여, 50세. 용안 동백동) 등이다.

 

재인청의 춤은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이 행궁 옆 화령전에 기거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전수를 시키면서 그 맥이 이어졌다. 이동안 선생은 어린 나이에 재인청에 속한 예인으로, 많은 재인청의 기, 예능을 학습한 예인이다. 이날 재인청의 춤을 전승한 사람들은, 그러한 재인청의 춤을 어려서부터 배운 고성주의 춤 맥을 잇고 있는 춤꾼들이다.

 

 

춤을 추는 이유는 각양각색

 

이들은 대개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30년 이상을 춤을 추어온 사람들이다. 30년이나 춤을 추었다는 김성용씨는

“그동안 춤을 추면서 여러 가지 춤을 다 배워보았어요. 그러나 재인청 춤은 나름대로 독특한 면이 있어요. 아무래도 무부들의 춤이다보니 남성적이고. 딴 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춤사위가 많아요. 그래서 재인청의 춤은 매력이 있죠.”라고 한다.

 

이제 춤을 추기 시작한지 5년이 되었다는 김현희씨는

“어려서부터 춤이 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어요.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컸고 해서, 무엇인가 나만의 즐길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찾은 것이 재인청 춤이었고, 이제는 이 춤을 추면서 나름 건강도 찾았고요”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 했던가? 한 자리에서 춤을 추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녀들의 춤을 추는 이유는 나름대로 특색이 있다. 재인청 춤을 학습하는 사람들 중 막내인 박옥희씨.

“저는 원래 운동을 좋아해 운동을 열심히 해왔어요. 그러다가 좀 더 색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는데, 우리 춤이 저한테 맞는 것 같아서 춤을 추가 시작했어요. 이제는 춤을 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죠.‘라고.

 

어려서부터 춤을 추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춤을 추었다는 유미녀씨는

“재인청 춤은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춤사위가 있어서 어렵지만, 그래도 춤을 추다가 보면 정말 매력이 있어요. 재인청 춤을 배우고 그것을 무대에까지 끌고 올라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성취욕을 느낄 수도 있고요.”라고 한다.

 

시골에서 공부를 하면서 춤이 추고 싶었지만 무용학원이 있는 도시로 나올 수가 없어, 무용과를 들어가지 못하고 일반 학과를 지원했다는 박영옥씨.

“시골에서 살다가 보니 고등학교까지는 열심히 춤을 추었어요. 그런데 많은 학원비를 감당하기도 어렵고, 무용과에 들어가고 싶다고 부모님들께 이야기를 못했죠. 이제 재인청 춤을 추면서 그동안 가슴에 맺힌 한을 푸는 것 같아요”란다.

 

춤을 추는 이유는 같지가 않다. 하지만 그녀들이 무대에 올라 춤을 춘다는 것은 한결같다. 독특한 재인청의 춤에 매료가 되어, 이제는 춤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재인청의 춤은 그렇게 맥을 이어가고 있다. 3만 여명이나 되는 예인집단에서 추어지던 많은 춤들이, 오늘도 수원 화성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그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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