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일부터 5일까지 서울시청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공동체 라디오 아시아 태평양 서울대회' 세계 공동체 아시아 태평양 라디오 대회는 이번에 세 번째 열리는 대회이다. 2005년과 2010년 인도에 이어, 아시아, 태평양 연안의 23개국 173명의 라디오방송국 기자들이 서울대회에 참석을 했다.

 

세 번째 열리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 대회는 각국에서 공동체를 위해 일하고 있는 관계자들이, 라디오 방송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주제별 토론을 통하여 공동의 관심사를 찾아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번 대회에 네팔에서는 모두 26명의 대규모 기자단이 참가를 했다.

 

 

네팔에는 모두 250여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라디오 방송이라는 특성상 김포 험한 산맥을 넘어 방송 송출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한 지역에 하나의 라이도 방송이 있다 보니, 그렇게 많은 숫자의 라디오 방송사가 있다는 것이다.

 

수원으로 초빙을 받아 온 네팔기자단 

 

네팔에서 참가를 한 26명의 기자단 중 대회에 지장을 주지 않는 기자단 중에서 11명과, 한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4명 등 15명이 수원을 찾았다. 이번 수원 초청은 e수원뉴스의 시민기자인 김형효씨의 초청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네팔에서 참가를 한 기자단 중에 2명의 지인이 있습니다. 부인 먼주구릉(네팔인. 네팔몽골리안 기자협회 한국지부장)과 함께 그들을 수원으로 초청을 한 것이죠. 네팔에서 한국으로 이주를 한 사람들의 규모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현재 한국에 체류 중인 이주노동자의 수가 공식적으로 21천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부분 이주노동자인 그들이 지난 2008EPS(한국어능력시험)제도에 의해, 매년 정기적으로 5천여 명 이상의 네팔노동자들이 한국으로 유입되고 있는 것이죠,”

 

이들은 수원역에 도착을 해서 화성과 지동 벽화골목 등을 돌아본 후,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바쁜 일정으로 수원을 찾았다. 라디오 아시아 태평양 서울대회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 잠시 동안이나마 수원을 구경할 수 있도록 김형효씨 부부가 배려를 한 것이다.

 

 

화성은 아름답고 전통적이다

 

예정시간인 오전 11시보다 늦게 수원역에 도착한 네팔기자단 일행을 김형효씨 부부가 수원역으로 나가 맞이했다. 이들은 자리를 화서문, 서장대 등을 돌아본 후, 성신사에서 화성열차를 타고 연무대로 이동을 했다. 연무대에서 창룡문을 거쳐 화성의 성 밖 길을 잠시 걸어 지동 벽화길로 들어섰다.

 

벽화길로 이동을 하면서 기자단에게 질문을 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본 소감이 어떠한가를. 그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화성은 전통적이고 참 아름답다.”

하긴 그 이상의 답변을 듣는다는 것이 과욕인지도 모른다. 수원에서 수십 년을 산 사람들조차 화성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벽화골목을 들어서도 기자단은 사진을 찍기에만 바쁘다.

 

 

지동 벽화골목에 있는 벽걸이 평상을 내려주자, 너나할 것 없이 그 자리에 앉아 포즈를 취한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자동적으로 포즈를 취해주는 바람에, 사진을 찍기는 수월하다. 시인의 벽으로 가서 고은 시인이 쓴 지동에 가면이라는 시의 설명을 들은 후, 바쁜 일정으로 인해 총총히 발걸음을 옮긴다.

 

과연 그들이 서너 시간의 수원구경에서 무엇을 느끼고 돌아갔을까? 그리고 그들이 그 짧은 시간에 본 것들을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하지만 그들을 초대한 김형효씨 부부의 바람대로 인쇄물을 통해서라도 화성과 정조를 기억하고, 다시 한국을 찾아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皎皎白紵白如雪 새하얀 모시 베옷 백설처럼 하얗구나

云是家人在時物 아내가 살아있을 때 남긴 물건

家人辛勤爲郞厝 사랑하는 남편 위해 모시 한 필 끊더니

要襋未了人先歿 바느질 미처 못 마치고 세상을 먼저 떠났구려.

舊篋重開老姆泣 할멈이 울면서 오래된 상자를 열어

誰其代斲婢手拙 아씨가 옷을 짓다 돌아가셨으니 누가 이 솜씨를 따를까

全幅已經刀尺裁 모시 베 전폭이 벌써 마름질은 끝나 있고

數行尙留針線跡 바느질하던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네.

朝來試拂空房裏 이른 아침 빈방에서 혼자 모시옷을 입어보니

怳疑更見君顔色 마치 당신의 얼굴을 어렴풋 다시 보는 듯

憶昔君在窓前縫 당신이 창 앞에서 바느질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安知不見今朝着 내가 이 옷 입은 것을 당신이 못 볼 줄 어찌 알았을까?

物微猶爲吾所惜 이 옷이 하찮아도 당신의 사랑이 묻어 있으니

此後那從君手得 이후에는 언제 당신이 바느질한 옷을 입을 수 있을까?

誰能傳語黃泉下 누가 황천에 가 내 아내를 만나거든 말을 전해주오

爲說穩稱郞身無罅隙 아내가 지은 모시옷 내게 너무 잘 맞더라고

 

 

아내를 그리워하는 채제공의 마음

 

백저행이라는 번암 채제공의 시이다. 집으로 객들이 찾아왔을 때 남편의 행색이 초라할까봐 부인이 직접 모시옷 한 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모시옷을 다 끝내지도 못한 체, 부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배에서 돌아 온 채제공은 집에서 일을 하는 할멈이 내민 모시옷을 보고 지은 시이다. 아내를 그리는 채제공의 글 속에는 아내를 그리는 속내가 그대로 담겨있다.

 

누가 황천에 가 내 아내를 만나거든 말을 전해주오

아내가 지은 모시옷 내게 너무 잘 맞더라고

 

채제공은 영조, 사도세자, 정조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임금의 주변에서 큰일을 감당하게 된다. 특히 정조대왕은 채제공을 일컬어 불세출의 인물이라고 칭찬을 했다. 백저행에 담긴 그의 글을 보면 눈물이 난다. ‘누가 황천에 가 내 아내를 만나거든 말을 전해주오. 아내가 지은 모시옷 내게 너무 잘 맞더라고라는 글귀 속에 아내를 그리워하는 체재공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채제공은 10여 년을 정조와 함께 했다. 홀로 재상의 지위에 그 오랜 세월을 지낸 것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시키려 하자 채제공은 그에 반대를 했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정조임금이 채제공을 중용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눈이 사시였던 채제공은 어릴 적부터 많은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출중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70세에 신해통공을 주도

 

채제공은 15세세인 1735년에 향시에 급제를 했다. 29세인 1748년에 영조의 탕평책을 위한 선발로 예문관 사관직을 제수 받았으며, 31세인 1751년에 중인의 분산을 탈취하였다하여 삼척으로 유배의 길에 올랐다. 이때 부인이 사망을 했고 돌아온 후 부인이 짓다가 만 모시옷을 보고 백저행을 지었다.

 

39세인 1758년에 영조가 세자폐위의 비망기를 내렸다. 채제공은 목숨을 걸고 이를 막았다. 하지만 4년 뒤인 1762년에 사조세자가 뒤주에서 사망을 했다. 이해 채제공은 모친상을 당하고 그 2년 뒤에는 부친상을 당했다.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자들을 처단한다.

 

 

채제공은 1780년부터 홍국영의 실권 후에 모함을 받아, 8년간 은거 생활을 했다. 1788년에 우의정을 제수 받았으며, 이 때부터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재상으로 재임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791년에는 소상인들의 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을 주도했다. 신해통공은 조선후기 상업사에 큰 변혁을 일으킨 사건이다. 79세에 모든 벼슬에서 물러난 체재공은 1년 뒤인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채제공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28일 오후 3시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49에 소재한 화성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개막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조를 도와 화성이라는 거대한 자연친화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채제공을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다. 20142월까지 계속될 번암 채제공의 모든 것. 화성박물관을 찾아보기를 권유한다.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진 마을에 살아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서로가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는 마을이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수원시 팔달구 지동은 정말 사람살기 좋은 마을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세계문화유산인 화성(華城)을 끼고 형성된 지동만큼 아름다운 마을도 없을 듯하다.

 

지동은 살기 좋은 마을이다. 비록 집들이 문화재보호구역에 들어가 있어, 증개축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곳이다. 하기에 집들은 낡고 비좁은 골목길이 많지만, 그 골목에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전국적으로 지동을 벤치마킹을 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정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화성의 동쪽마을에서 김장을 담그다

 

20일부터 21일까지 지동 주민센터 옆 주차장이 시끌벅적하다. 50여명의 지동주민들이 모였다. ‘사랑의 김장담그기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지동새마을부녀회(회장 김명순)에서 주관을 하고, 지동주민자치위원회, 통장협의회 등 7개 주민단체에서 후원을 하는 사랑의 김장 담그기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열리는 이웃사랑의 실천이다.

 

올해는 배추를 1000포기를 하려고 했는데 700포기만 했어요. 워낙 배추의 통이 크기 때문에 네 쪽으로 쪼개도 이렇게 크잖아요. 그래서 700포기를 해서 100박스를 만들어 홀몸어르신들께 나누어 드리려고요.”

 

앞치마에 고무장갑을 끼고 주민들과 함께 열심히 배추를 버무리던 박찬복 지동장의 말이다. 한편에서는 절임배추를 맑은 물로 행구고, 한쪽에서는 30여 명이 긴 테이블 위에 올린 소를 갖고 열심히 버무리고 있다. 과거 우리네 김장하는 날은 마을 잔치 날이었다. 품앗이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김장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잘 절여진 배추에 굴과 소를 넣고 한 입 싸먹으면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인다. 돼지고기를 잘 삶아 함께 싸먹어도 감칠맛이 돈다. 그래서 김장하는 날은 이웃들을 불러 함께 즐기고는 했다. 지동 사람의 김장 담그기에는 표영섭 주민자치위원장을 비롯해 통장협의회, 기동순찰대, 바르게살기위원회, 새마을협의회, 새마을부녀회 등 많은 단체의 회원들이 참여를 했다.

 

나누면 나눌수록 행복해

 

오늘 100상자의 김장을 해서 홀몸어르신들께 나누어 드리고, 며칠 있다가 저희 방범기동순찰대 회원들이 삼성전자로 김장을 하러가요. 도와달라고 요청에 와서요. 그날 삼성전자에서 김장을 하고나면 100상자를 준다고 하네요. 그러면 모두 200상자를 어르신들께 전달할 수가 있으니까요.”

 

지동 방범기동순찰대 박경숙 대장의 말이다. 지동사람들은 무엇이나 열심히 한다. 특히 나눔에 있어서는 으뜸이다. 그저 마을에 무슨 일만 생기면 모두가 내일처럼 발 벗고 나선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하지 않은 마을이지만, 나눔에 대해서만큼은 익숙한 곳이다. 어느 마을이 가진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누는 것을 좋아할까?

 

 

 

저희 지동은요 정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은 마을예요. 우리나라 어느 곳이 골목길에서 자리를 펴고 주민들이 앉아서 삼겹살 파티를 하겠어요. 거기다가 이렇게 김장해서 나누죠. 일 년에 두 번은 화성의 야경을 배경으로 음악회 열죠. 골목길마다 벽화가 그려져 있어 길을 걸어도 심심치가 않죠. 정말 좋은 마을이죠.”

 

한 통장의 지동자랑이다. ‘125일에 블랑드 웨딩홀에서 2013 이웃사랑 나눔 일일찻집 열거예요. 그날도 꼭 오세요,’라면서 굴과 배추 소를 함께 싼 배추를 갖다 준다. 입안에 가득한 굴과 김치 소의 향처럼, 그렇게 정이 넘쳐나는 곳이 지동이다.


 

수원 화성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방화수류정이다. 수원에서 7년 동안 살면서 가장 많이 가본 곳이기도 하다. 이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네 곳에 있는 각루(角樓) 중 하나로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 9월 4일 터 닦기를 시작으로 그 해 10월 19일에 완성을 하였으니, 200년이 지난 역사를 갖고 있다.

 

주변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정자

 

화성은 자연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가장 큰 조형물이라고 한다. 화성의 아름다움이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어느 곳 하나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좇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아름다운 정자다. 성벽 밑으로는 용연을 파서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하고, 옆으로는 흐르는 버드내 위에 화홍문을 세워 그 주변 경관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했다. 누마루로 깐 정자에 올라서면 사방의 경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방화수류정의 또 다른 멋이다.

 

 

방화수류정의 동편 바로 옆으로는 북암문이 있어, 쉽게 용연을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암문은 깊고 후미진 곳에 설치한 비밀 문으로, 적이 모르게 가축이나 사람들을 통용할 수 있도록 낸 문이다. 그러나 이 북암문을 이용하면 방화수류정에서 용연까지 가장 짧은 거리로 이동할 수가 있다. 용연은 방화수류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용연의 가운데는 인공 섬을 만들어 놓았으며, 전체적인 조화를 보이는 이 용연과 방화수류정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성중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2단의 벽돌담으로 쌓은 위에 지은 정자

 

방화수류정은 정자의 모양도 특이하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다. 성벽이 높게 오르기 시작하는 산중턱에 지어진 방화수류정은, 그 서 있는 장소마저 눈에 잘 띄는 곳이다. 정자는 이단의 기단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을 벽돌로 쌓아올렸다. 일단의 벽돌을 쌓은 후 장대석 계단을 놓고, 그 위에 정자의 기둥을 세웠다. 그런 다음 다시 벽돌을 높여 정자를 지었다. 이곳에 모든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좌측에는 문을 달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는데, 그 문 또한 아름답다. 그 문 안에로 들어간 병사들이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적과 교전을 하는 성곽의 건물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자. 그리고 정자로의 기능만이 아니라, 본연의 성곽 기능을 갖고 있는 정자가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아름다운 십자문양의 벽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은 정자만이 아니다. 정자 밑에 있는 쪽문을 돌아서면 벽면이 십자모양의 문양을 넣었다. 이런 조선시대 건축에서 많이 나타나는 문양이기도 하다. 이런 문양 하나가 방화수류정을 지으면서, 얼마나 자연경관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가를 생각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벽면이 사방을 둘렀다면, 그 또한 지금과 같이 아름답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벽만 그렇게 처리를 한 것이 더욱 돋보이는 미가 아닐까? 아마 방화수류정을 축조한 공인이 그런 것 하나까지 모두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의 기단을 오르면 정자가 한편으로 서 있게 된다. 정자는 남쪽은 쪽문의 위까지 돌출이 되고, 북쪽은 중앙으로 돌출을 시켜 용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게 했다. 그저 넘길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이 된 아름다움이다. 일단의 기단 위 공백은 네모난 흑색으로 된 돌을 깔았다. 그런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방화수류정이다.

 

 

지붕위에 올린 용두

 

아마 방화수류정만큼 많은 용두가 지붕 위에 올려 진 건물은 없을 것이다. 방화수류정은 정자가 여기저기 돌출이 되어있고, 그 돌출이 된 곳의 지붕이 서로가 엇물려 있다. 그 양편에 모두 용머리를 올렸다. 또한 한 가운데는 절병통과 같은 모양도 있다. 이렇게 많은 용머리를 올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위치는 정조가 직접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45일 만에 공사가 끝난 이 정자에서 활을 쏘기도 했다. 방화수류정은 정조 자신이 왕권을 상징하는 마음을 알린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징적인 정자이기 때문에, 그 많은 용두를 지붕 위에 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지붕 위에 유난히 많은 용두들. 아마 정조가 끊임없이 추구해 온 힘이 있는 왕조를 상징하는 듯하다.

 

 

수원 팔경의 하나인 '용지대월'이 용연에

 

보름달이 뜨면 방화수류정에는 네 개의 달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에, 또 하나는 바로 용연에 뜬단다. 그리고 세 번째의 달은 술잔에, 네 번째의 달은 사랑하는 님의 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멋진 말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난다. 강릉 경포호에도 있다. 그러나 화성의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은 그것과는 뜻이 다르다. 그래서 용연위에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용지대월(龍池大月)'이라고 하여 수원 팔경 중 하나로 꼽았다.      

 

사실 이 용연은 화성의궤에 나타난 용연과는 다르다. 지금의 용연은 당시의 용연보다 많이 형태가 달라졌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처음 용연을 조성했을 때는, 반달 모양의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당시의 용연은 둘레가 250m에 깊이가 185cm라고 적고 있다. 지금의 연못보다 오히려 크다. 그 연못 가운데 인공 섬을 만들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고 했으니, 그 운치가 어떠했을까?

 

아름다운 용연이 제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도 한결 더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찬바람도 마다않고 찾아간 곳에서 그 아름다움에 빠져 시간을 잃어버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인 팔달문 동종. 현재 수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팔달문 동종은 원래 만의사의 범종이었다. 현재의 만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화성 용주사의 말사이다. 만의사 동종은 고려 문종 34년인 10802, 개성에서 주조되어 수원 만의사에서 사용되다가, 숙종 13년인 16873월 만의사 주지승 도화가 다시 주조되었다.

 

정조 때 화성축성과 함께 파루용의 기능으로 전락하여, 화성행궁 사거리(종로)에 종각 설치 후 이전되었다. 1911년 일제에 의해 정오 및 화재경보용으로 팔달문 누상으로 다시 이전, 설치되었으며, ‘팔달문 동종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67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팔달문 동종의 만의사를 찾아가다.

 

대동여지도에 보이는 무봉산(舞鳳山)의 이름은 만의산(萬義山)이다. 신라 때부터 있었다는 만의사가 산 동남쪽에 있었기에 그렇게 불린 듯하다. 13922, 21일 동안이나 계속된 대법회 때 권근이 쓴 '수원 만의사 축상화엄법화회중목기(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華會衆目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수원의 동쪽 수십 리 거리에 절이 있으니 만의사라고 한다. 나라의 복리와 비보를 기구하던 옛 절이다. 파괴되고 폐지된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초목이 우거진 황무지가 되었더니, 황경 연간 천태종의 진구사 주지인 혼기 대선사가 옛 터를 와서 보고 새로 절을 중건하였으며, 삼장법사 의선공이 뒤를 이어 절을 주간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나 만의사는 비보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봉산 만의사 사적비>에는, 이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에 큰 역할을 한 신조대사의 중건과, 사명당의 제자 선화대사의 주석을 자세하게 적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10월 27일 찾아간 만의사. 팔달문 동종이 달려있던 원 사찰을 둘러보기 위해 오후 늦은 시간에 이곳을 찾았다.

 

만의사는 수원군 동북면 만의리에 있었다.

 

본래의 만의사는 신라 때 창건되었다. 그 후 고려 충렬왕 10년인 1284년에 정길과 현묵이 중창하였고, 충선왕 4년인 1312년 당시 천태종 진구사 주지였던 혼기대선사가 주지로 부임한 뒤 크게 중창하고였다. 혼기대선사는 법화도량을 열어 천태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의선이 사세를 더욱 키웠다.

 

 

고려 말 우왕(재위: 13751388) 때부터는 천태종과 조계종에서 주지를 교대로 맡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 절이 사전과 노비를 많이 소유한 부유한 절이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는 두 종파간 다툼이 심해지자 노비를 모두 수원부에 속하게 하고, 절은 천태종이 관할하게 하였다.

 

고려 우왕 14년인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할 때, 공이 컸던 신조가 주지로 온 뒤부터 다시 노비를 받았으며 사패지 70결도 함께 받았다고 한다. 서산대사 휴정이 이 절에서 수도를 했으며, 사명대사 유정의 제자 선화도 이곳에 머물다가 조선조 인조 22년인 1644년에 입적하였다.

 

조선조 현종 10년인 1669년 당시 수원군 동북면 만의리(현재 동탄면 신리)에 있던 만의사가 우암 송시열의 장지로 선택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기며 이름을 만의사(萬義寺)’로 바꾸었다. 정조 20년인 1796년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이 절의 동종을 가져다가 팔달문에 옮겨 달았다.

 

 

구절초에 쌓인 절 만의사

 

만의사를 찾았을 때, 절의 경내는 온통 구절초로 뒤덮여 있었다. 가을이 되면 구절초가 아름다운 절이라고 한다. 절의 경내를 바라보고 좌측 무봉산 기슭에는 구절초 산책로가 나 있다. 장독대며 전각들 주위에 구절초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그저 그 산책로를 걷기만 해도 저절로 힐링이 될 것만 같다.

 

만의사 경내를 천천히 돌아본다. 바쁠 필요가 없는 절이다. 구절초의 향을 마음껏 맡으면서 걷다가 보니 빗방울이 후드득하고 떨어진다. 비가 오는 날이면 꽃의 향이 더 강해진다고 했던가?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꽃잎을 흔들어서인지, 조금 전보다 향이 강해진 듯하다. 아마도 이렇게 가을에 느끼는 구절초의 향이 짙어, 사람들이 이곳을 더 찾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절을 중창할 때마다 새로 주조해 소리를 울린, 범종의 소리가 듣고 싶어서였을까?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만의사에서, 깊은 가을의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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