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김치를 담는 못골 사람들과 김명순 부녀회장

 

매년 이맘때가 되면 수원의 각 동마다 떠들썩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판을 벌린다. ‘판’이라고 하면 ‘먹자판’이나 ‘놀이판’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 각 주민자치센터에서 벌이는 판은 바로 ‘김치판’이다. 수십 명이 모여 1,000포기 정도의 김치를 담는다. 물론 자신들이 먹을 것은 아니다.

 

11월 23일 아침 일찍 수원시 팔달구 지동 주민자치센터(동장 박찬복) 주차장에도 판이 벌어졌다. 5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앞치마를 두르거나, 혹은 비닐을 앞에 대고 고무장갑을 끼고 있다. 그리고는 너른 판 위에 있는 속을, 열심히 절인 배추에 집어넣는다. 배추 잎을 하나씩 들춰가며 속을 가득 채운 배추는, 금방 붉은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웃사랑의 본보기 보여주는 행동

 

말로만 하는 이웃사랑은 사실 사람들만 더 피곤하게 만들기 일쑤이다. 하지만 이렇게 날이 쌀쌀한데도 3일씩이나 고생을 하며, 몸소 실천하는 이들이야 말로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벌써 3일째 김장에 매달린 사람들이 무려 100여 명에 달한다. 첫날은 배추밭에 가서 배추를 뽑고, 둘째 날은 배추를 다듬어 절였다. 그리고 셋째날인 11월 23일에는 김장을 한다.

 

오늘 지동자치센터 앞에 모인 사람은 지동의 8개 단체가 모두 모였다. 오늘 김장담기의 주관모임인 새마을부녀회를 비롯하여, 주민자치위원회, 통장협의회, 새마을지도자회, 바르게살기협의회, 심지어는 방법기동대까지도 합세를 했다. 한편에서는 배추를 나르고, 한편에서는 속을 넣고, 또 한편에서는 상자에 담아 하나씩 정리를 한다.

 

 

‘2012 사랑의 김치’를 담는 사람들

 

부녀회원들과 함께 열심히 김장을 담고 있는 지동새마을부녀회 김명순(58세) 회장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챙기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그런 와중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김포댁이 지동으로 시집을 온 것은 벌써 35년. 그동안은 부녀회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그저 남편(정광수, 65세)과 남매의 뒷바라지만 열심히 하는 것이, 현모양처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자식농사는 반듯하게 지은 것 같아요(웃음). 남매를 다 유학까지 보내고, 큰애가 아들인데 가정을 꾸렸고, 딸애는 유학 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제가 부녀회를 맡은 지는 3년이 조금 지났어요. 지동 부녀회가 있다가 해체가 되었다고 하는데, 동장님과 여러분이 계속 부녀회를 맡으라고 종용을 해도 거절을 했죠.”

 

 

 

그러다가 반 강제로 부녀회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연신 부녀회원들이 ‘회장님’을 찾아댄다. 2012 사랑이 김치는 모두 150 박스 정도를 마련한다고 한다. 이렇게 담군 김치는 홀몸어르신(예전에는 독거노인이라고 했으나 요즈음은 명칭이 바뀌었다)들의 겨울 식량으로 보내드린다는 것이다.

 

“와서 가져가실 수 있는 분들은 오늘부터 와서 가져가시고요. 하지만 대개 어르신들이 거동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동직원분들과 통장님들이 배달을 해 주시죠. 이렇게라도 해야 겨울에 반찬 걱정을 좀 덜하고 사실 수가 있으니까요. 한 달에 한번은 저희들이 밑반찬을 만들어서 갖다 드리기도 하고요”

 

봉사를 하다 보니, 세상이 달라져 보여

 

그동안 몰랐었다고 한다. 지동이 지금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지동에 거주하는 주민들만이 갖고 있는 ‘정’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지동에 산다고 하면 이상하게 무시를 하는 투로 대했다는 것. 거기다가 지동은 ‘꼴통동네’라고 하기도 했단다.

 

“처음에는 정말 화도 많이 났어요. 그런데 살다가 보니 지동처럼 정이 넘치는 마을이 없는 것 같아요. 지동 분들은 떡을 해도 나누고, 하다못해 수제비를 떠도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분들이죠. 저희들이 어려운 이웃을 돌보려고 도움을 요청하면, 한 분도 거절한 사람들이 없어요. 오히려 저희에게 힘을 되는 말들을 해주시고는 하죠.”

 

 

부녀회를 맡고나면서 점점 지동에 빠져든다고 한다. 사실 김명순 부녀회장 부부는 지동에서는 봉사를 잘하는 부부로 유명하다. 부녀회에서는 결손가정돌보기, 홀몸어르신 찾아뵙고 도움주기, 불우한 이웃돕기, 김장담기 등 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회원들이 만나 함께 일을 한다고 한다.

 

결손가정 아이들에게 부모처럼 대하고 싶어

 

김치를 담느라 바쁜 일손을 오래 뺐을 수는 없다. 부녀회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어르신들도 물론 도와야 하지만, 결손가정 아이들을 저희들이 부모처럼 따듯하게 함께 해주고 싶어요. 그런데 이 이아들이 영 마음을 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보았죠.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아이들 대답이 ‘얼마 안 있으면 또 우릴 떠날 텐데’라면서 고개를 떨구는 거예요. 아이들 마음속에는 친 부모도 자신들을 버렸는데, 남이 언제까지 우리들을 끼고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을 그냥 놓아둘 수가 없어 동사무소에 부탁을 해 주차장 옆에 가건물을 하나 지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그곳에서 반찬도 만들고 함께 밥을 먹으면서 마음을 열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잖아요. 부모도 없이 저희끼리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혼자 자라나는 아이들이 잘못 된 길로 들어서도, 누구하나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요. 저희들이 앞으로 이런 결손가정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그 아이들이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베풀고 싶은 것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마당에는 김치상자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부녀회를 비롯하여 100여 명의 정성이 가득한 사랑의 김치. 이 김치를 받아서 고마워할 어르신들의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수고를 하는 분들을 위해 여러분들이 많은 것을 보내주었다고, 꼭 ‘고맙다’라는 말을 빼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김명순 회장.

 

“세상에 우리 지동 같은 마을은 없어요. 정말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곳으로 곧 거듭날 것입니다. 그 때 다시 한 번 찾아오세요.” 라고 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이 푹하다. 가슴이 따듯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 것인지.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 - 181에는 거주하는 조명화(여, 52세) 13통장은, 이제 지동에 보금자리를 튼지 30년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족들과 늘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 수원의 경치를 감상하고는 했다. 봄이면 연산홍이 붉은 화성을 바라보고, 여름이면 신록이 우거진 광교산과 팔달산을 바라보고는 했다.

 

계절마다 변해가는 주변의 경치를 옥상에서 늘 감상하고는 했던 것이다. 가을이면 팔달산을 붉게 타오르게 하는 단풍에 취하고, 겨울이면 주변으로 펼쳐지는 백설의 세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조명화 통장 댁의 옥상은 늘 가족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는 했다. 하기에 마을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열리는 ‘옥상음악회’를 선뜻 응낙을 했다.

 

 

도대체 ‘옥상음악회’라니, 놀랍기만

 

조명화 통장은 마을 일에 적극적인 사람이다. 늘 마을에 누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지동이 더 아름답게 변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마다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옥상음악회의 제의를 받았고, 가족들이 불편함에도 감수를 하고 옥상을 개방하였다.

 

‘옥상음악회’. 남들은 그저 옥상만 개방하면 되는 줄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옥상음악회는 그것과는 다르다. 우산 주거공간 안으로 많은 외부사람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생활에 방해를 받는다. 더욱 화장실까지 개방을 하고 안내판까지 만들어 붙였다.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마을. 그리고 그곳에서 더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가족들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더욱 학생들이 있어 많이 불편할 텐데도 그것을 감수한 것이다. 매사 남들보다 더 부지런 하고, 더 많은 생각을 하는 조명화 통장으로서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불편을 감수하고도 행복을 공유하겠다는 생각으로

 

“늘 가족들과 함께 옥상에 올라가 사계절 변화하는 주변공간을 보면서 감탄을 하고는 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우리 가족만 보아서는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나가 옥상음악회 제의를 받았고, 주민들과 함께 공유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선뜻 응낙을 하게 된 것이죠.”

 

올해 벌써 두 번째로 옥상음악회를 치렀다. 2013년에는 봄, 가을 두 번이나 옥상음악회가 잡혀있다. 또 번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조명화 통장은 싫은 기색이 없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남들에게 개방을 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옥상에서 바라보는 노을빛이 아름다워서인가, 옥상음악회의 이름도 ‘노을빛 옥상음악회’라고 했다. 노을빛을 바라보다가 화성에 조명이 들어지면 시작하는 옥상음악회이다. 옥상에 작은 무대를 만들고, 재능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잔치를 벌인다. 도시형 마을만들기의 롤 모델이기도 한 노을빛 옥상음악회는 순전히 조명화 통장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음악회로 자리를 잡았다.

 

 

지동, 화성,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다

 

요즈음 아이들은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이런 옥상음악회로 인해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불편해 할 수도 있다.

 

“아뇨, 우리 아이들도 다 좋아합니다. 지난번에 화장실로 개방을 한 방은 아이들 방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늘 옥상에 올라가죠. 그곳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화성의 야경을 감상하는가 하면, 하늘에 별도 헤어봅니다. 아이들이 자연과 동화가 될 수 있도록요.”

 

그래서인가 아이들도 옥상음악회를 연다고 하면, 무엇 하나라도 도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부모님들의 생활을 보면서 자라난 아이들이기에 올곧다는 생각이 든다. 지동과 화성,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 지동을 떠날 수 없었다는 조명화 통장. 앞으로도 얼마든지 옥상을 사용해도 좋다는 그녀의 말에서 작은 감동을 받는다. 늘 그렇게 주민 곁에서 따듯한 마음을 전이시키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나이 80에, 70년을 못골에서 살았지” 못골 경로당 신현구 회장

 

“내 나이 올해 80이야. 지금 생각하면 그 동안 살아온 세월이 꿈만 같지. 그래도 아이들 잘 키워서 대학 졸업시키고 결혼해서 실림을 났으니, 이제는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야”

 

11월 16일(금) 지동 못골경로당에서 만난 신현구 옹은 못골노인회의 회장님이시다. 마침 못골경로당을 찾았을 때는 방안에 어르신들이 30여명이나 계셨다. 일주일에 4번 정도 점심을 노인장에서 함께 드시는데, 이날이 점심에 국수를 드시는 날이라고 한다. 신문사에서 나왔다고 말씀을 드리고 나서, 신현구 회장님께 그동안 살아오신 이야기를 좀 들려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당신이 아니라도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다고 하시면서, 화성 태안에서 지동으로 이사를 오신 것은 벌써 70년이나 되셨단다. 지동의 한 맺힌 역사를 세월과 함께 지켜보신 분이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화성과 못골

 

“아버님이 경찰관이셨지. 그래서 아버님이 전근을 갈 때마다 이사를 하고는 했는데, 화성태안에서 수원으로 발령이 나시는 바람에 못골로 이사를 왔지. 70년 전에는 이 동네 아이들도 모두 신풍초등학교에 다녔어. 나도 그 학교를 38회로 졸업을 했거든. 그 때는 아이들과 어울려서 할 수 있는 놀이가 작대기를 들고 하는 병정놀이였어. 지금 제일교회 자리와 화성이 우리 놀이터였지. 그리고 저편에 연못도 그대로였고. 당시는 이곳이 다 논이었던 곳이야. 드문드문 논을 매워 지은 초가집이 한 채씩 있었고”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신현구 회장은 잠시 눈을 감는다. 아마도 그 당시를 회상하시는 듯하다. 신풍초등학교를 나와 수원중학교를 들어갔지만, 3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고 한다. 경찰관이던 부친은 한국동란 때 그만 적에게 학살을 당하셨단다.

 

“아버님이 빨갱이들에게 총을 맞아 돌아가신 후, 집이 풍비박산이 난거여. 갑자기 내가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학교를 다니겠어. 할 수 없이 태안으로가 농사를 짓다가 다시 돌아왔지. 그리고 나서 지금 살고 있는 지동 366-3번지에 국수공장을 차렸어”

 

당시는 배급이 밀가루로 나와, 처음에는 그 포대를 가져다가 검게 염색을 해서 옷의 안감으로 팔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국수 공장을 차리게 되었다고. 처음 국수공장을 차렸을 때는 손으로 일일이 기계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하면서 분식 장려를 했잖아. 새벽 3시부터 집사람과 함께 일어나 하루 종일 국수를 만들어야 했어. 회사에 국수며 칼국수를 생산해 납품을 하면서 생활이 조금 나아졌지. 국수공장을 하면서 번 돈으로 아이들 대학까지 다 졸업을 시켰으니까, 꽤 질 번 것이지.”

 

그렇게 직원도 없이 두 내외분이 새벽 3시부터 일어나 국수를 생산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험하게 살아오신 옛날 생각이 나시는지, 잠시 말씀을 멈추신다. 지금 사람들이야 어찌 당시를 가늠이나 할 것인가? 80년 세월을 살아오시면서, 그래도 자녀들을 잘 가르친 것이 큰 재산이라고.

 

모범경로당을 만들고 싶어

 

지난해에 못골경로당 회장으로 피선이 되시고 난 뒤, 못골 경로당 십계명을 만드셨다. 1. 모범 못골 경로당이 되자. 2.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3. 즐겁게 기쁘게 살자. 4. 회원끼리 미워하지 말자. 5. 회원끼리 욕하지 말자. 6. 항상 웃음으로 지내자. 7. 회원끼리 단결하고 뭉치자. 8. 회원끼리 다트지 말자. 9. 건강검진을 2년에 한 번씩 하자. 10. 99, 88, 2, 3, 4 용어가 있다.

 

그런데 10번은 그냥 십계명이라고 하기 보다는, 어르신들의 인생을 마감할 때를 숫자로 표시를 해 놓으셨다. 그것은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 ~ 3일 아프다가, 4일 후에 영원한 고향으로 가자’라고 적어 놓으셨다.

 

신현구 옹이 경로당의 회장 소임을 맡은 뒤로, 못골경로당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심심하면 다투고는 하시던 어르신들이 다투는 것이 없어졌다고. 또 매달 1일에는 전 회원이 경로당 주변 청소를 해서,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기도 한단다. 경로당 운영도 민주적이라고 한다. 매달 27일에는 정기월례회를 가져 50명 회원들의 의사를 반영시키기도 한다는 것.

 

“우리 못골경로당을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동안에 꼭 모범경로당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 처음에는 회원이 30명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회원이 50명이 넘어. 그리고 회비도 한 달에 3,000원씩 걷어서 필요한 곳에 사용을 하고 있지. 이젠 모범경로당 지정을 받아도 될 만큼 많이 변했어.”

 

점심을 먹고 가라고 굳이 손을 잡아 이끄시는 것을 마다하고 경로당을 떠났다. 다음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황혼을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시는 어르신들. 십계명의 10번처럼 그렇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T-station 수원 지동점 윤선희 대표를 만나다

 

“지동으로 이사를 온지 만 2년이 지났어요. 처음에 지동주민센터에 전입을 하러갔는데, 어르신들이 동사무소에서 나누어주는 쌀을 받아 가시는 거예요. 그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생소했다고 느꼈어요. 아직도 저렇게 사시는 분들이 있나 해서요. 저에게는 그런 풍경이 낯도 설었지만 가슴이 많이 아팠거든요”

 

그래서 사업을 열심히 해서 이익이 생기면, 구제와 선교에 사용을 하겠다고 한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478 - 5에 소재한 T-station의 윤선희(여, 46세) 대표의 말이다. 2010년에 수원이란 곳을 처음으로 찾았고, 지금까지 생활을 하면서 주변의 이웃들의 아픔을 보아왔다고 한다.

 

 

얼떨결에 시작한 사업

 

T-Station은 최고의 장비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타이어 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이다. 이곳에서는 기존에 경험하지 못하셨던 무선 휠 얼라이언먼트와, 진동 밸런스 서비스를 비롯한 차량 기본점검 등의 토탈 경정비 서비스를 받을 수가 있다. 이런 자동차 정비 등을 하는 사업체에서, 여성이 대표를 맡아본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결국 이 사업으로 꼭 성공을 하고 싶다는 것이 윤선희 대표의 마음가짐이다.

 

“남들은 이런 정비업체에 사무실에 여자가 있으니까 경리인 줄로만 알아요. 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이니 이 사업으로 꼭 성공을 하고 싶어요. 여자라서 안 된다는 관념을 깨고 싶은 것이죠.”

 

전주에서 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윤대표는, 경희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가정을 꾸리고 딸 둘과 아들을 두었다. 남편(오문경, 50세. 의왕에서 정비업체를 운영하고 있단다)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그저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큰 애가 대학생이고 둘째가 고등학생, 그리고 막내가 초등학생에요. 이제는 다 자랐죠. 그런데 아이들을 키워놓고 보니,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하데요. 그래서 나도 무엇인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던 중에, 아이들 아빠가 이 사업체를 차리고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뛰어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차량을 정비하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다가 보니, 조금은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는 것. 자신이 직접 했으면 더 많은 것을 고객들에게 돌려줄 수가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조금은 불만이라고 한다. 고객중심의 영업을 하고 싶다는 것.

 

지동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곳

 

“지동으로 옮긴 뒤 화성과 지동 여기저기를 다녀보았어요. 그런데 이 지동이 정말로 정감이 가요. 아마도 어릴 적 전주 한옥마을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곳 지동이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인 듯해요. 화성도 너무 아름답고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영업장 3층에 살림집을 마련하고 있어서, 출퇴근에 신경을 쓰지 않아 좋다고 하는 윤 대표. 아이들을 키울 때는 ‘이것을 해라’라는 말 보다는, 두 부부가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고 자라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항상 우애 있게 잘 자라고 있어 고맙다고 한다.

 

“저희 시부모님께서 없는 사람들을 늘 도와주고는 하셨어요. 아마 어린 시절 부터 그것을 보고 자라서인지, 저희 남편도 남을 돕는 것을 즐거워하죠. 아이들이 그런 좋은 행동을 보고 자라났기 때문에 착한 것 같습니다. 저희는 그저 아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아이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죠. 최선을 다하라고요”

 

 

늘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꼭 여성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야 말겠다고 다짐을 하는 윤선희 대표,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를 않는다. 아직은 사업이 어렵지만 이익이 창출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남을 위해 베풀고 싶다는 것이다.

 

“이곳 분들은 정말 아파트하고는 달라요. 이웃과 소통이 잘 되고, 담이 없는 듯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래서 지동이 더 정감이 가는 듯해요.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서 오래도록 살면서 사업도 성공하고, 어려운 이웃도 돕고 싶은 것이 제 각오입니다.”

 

이제 사업을 시작한지 불과 2년. 아직은 모르는 것이 더 많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들이 하기 힘들다는 이 사업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올곧은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윤선희 대표에게, 그런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참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다가 보면 힘들 때도 있고, 가끔은 실패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무슨 이야기꺼리가 있겠느냐고도 묻는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행복이라는 것이 날마다 내 주변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길을 가다가 보면 의외로 허름한 집에서 호식(好食)을 할 경우가 생긴다. 생각지도 않고 들어간 집에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그 날은 괜히 횡재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든다. 아직은 세상을 많이 살아보지 못해서라고 늘 위안을 삼는다. 그런 것 하나가 세상살이를 조금은 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화요리 신흥원의 사장님은 바쁘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97 - 21에 소재한 중화요리 신흥원.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촌에 있는 중국집의 외형과 흡사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놀랍다. 벽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다. 이 소리는 곧 메뉴판이 없다는 소리이다. 그렇다고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신훙원의 박기수(남, 50세) 사장은 지동 31통의 통장님이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 틈틈이 마을 일도 보아야 한다. 이곳에서 가깝지 않은 시장사람들이 주문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낮에 가면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다. 11월 15일 오후 7시가 넘은 시간에 신훙원을 찾았다. 마침 가족들이 모여 있는 시간이다.

 

잠시 대담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30분이면 족하다고 하였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배달을 하느라, 겉에 입고 있던 작업복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그만큼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타면만 만들기 벌써 30년

 

“중학교를 마치고 집을 나왔어요. 그 때는 무조건 서울이라는 곳을 가야 성공을 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살기가 어려웠던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큰일을 좀 해보고 싶었거든요. 1969년에 집에서 가져 온 얼마 되지 않은 돈을 갖고, 동대문시장에서 가방 장사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사회 경험도 없는데다가 자금도 부족해 결국 손을 놓고 말았죠.”

 

그길로 군에 입대를 했다. 그리고 제대를 한 후 서울의 중국집에 종업원으로 들어가 중화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3년을 고생을 한 후 30년 전에 수원 지동으로 내려와 중화요리집을 차렸다.

 

“벌써 30년이 지났네요. 30살에 이곳에 들어와 정착을 했는데, 그동안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세월이 흘러버렸습니다. 참 이런 것을 보면 세월이 참 빠른 듯합니다.”

 

잠시 옛 일을 생각하는 듯 사색에 잠긴다. 이 집은 테이블이라고 해야 세 개인가 밖에 없다. 그저 시골의 어느 중국집과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도 단골들이 많다고 한다. 아마도 이집의 수타 자장면 맛이 일품이기 때문인가 보다.

 

“저희 집은 주로 주민들보다 시장상인들이 더 많이 찾습니다. 배달도 시장으로 더 많이 가고요. 지동 벽화를 보러 오셨던 분들이 들렸다가 가시면, 다음에 딴 분들을 모시고 오기도 합니다. 맛이 있다고 하시면서요. 그럴 때가 가장 기분이 좋죠.”

 

 

통장 일도 자영업이라 할 수 있어

 

영업하랴 마을 일 보랴 바쁘다. 그렇게 쉴 틈도 없이 바쁘다가 보면, 아무래도 건강에도 문제가 있을 것만 같다. 일찍 영업장으로 나와 준비를 하고, 점심시간 전인 11시부터는 영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시장 상인들은 아무래도 시간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주문을 하면 빠르게 음식배달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타로 자장을 뽑다보니 그도 만만찮다.

 

“자영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체력이 받쳐줄 때까지는 계속해야 하는데 탈이라도 나면 안되죠. 그래서 많이 피곤하면 쉬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희 집은 오후 7시가 되면 마감을 합니다.”

 

박기수 사장은 현재 지동 31통의 통장님이시기도 하다. 31통은 원래 지동 10통이었는데, 인구가 늘어나자 분통을 해 31통이 생겼다. 그리고 벌써 14년 째 통장을 맡아보고 있다.

 

“손님들이 찾아오셔서 옛날 짜장 맛이 난다고 하시죠. 그리고는 또 찾아오십니다. 그럴 때마다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요. 아들만 둘인데 이제 다 자랐으니 조금은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지동으로 와서 정착을 한지 30년 세월. 그리고 그 숱한 사연을 간직한 체 지동 한 편에 오롯이 자리를 잡고 있는 신훙원. 그곳에 불이 꺼졌다. 내일 또 신흥원에는 면을 뽑느라 들리는 소리가 정겨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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