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 아름다움만이 아니고, 고급스럽기까지 하다. 415()부터 19()까지 수원시청 로비에서 만나볼 수 있는 맥간공예 금빛에 반하다전은 맥간공예가인 이수진(, 41)씨가 2인 전으로 연 전시회이다. 맥간공예란 자연 고유의 소재인 맥간(麥稈·보리줄기)을 이용해, 모자이크 기법과 목칠공예기법을 도입해 만드는 독특한 예술장르이다.

 

사람들은 언뜻 이 맥간공예 기법을 이용한 금박공예를 나전칠기로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전칠기가 조개껍데기인 자개를 잘라 붙여 만든다면, 맥간공예는 보릿대를 평평하게 펴서 이를 모자이크 방식으로 붙인 뒤 목칠공예로 마무리기 때문에 그 공정과정은 더 어렵다고 한다.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한 맥간공예

 

공예가 이수진씨는 삼성전자를 다니면서 동아리 활동으로 처음 맥간공예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수진씨에 따르면 맥간공예는 수원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맥간공예는 수원에서 처음으로 시작이 되었어요. 맥간공예의 창시자인 이상수 선생님께서 수원에서 시작을 하셨죠. 하기에 맥간공예를 배우시는 분들은, 전국 어디서나 수원으로 와서 습득을 해야 했고요.”

 

이상수 선생에게서 맥간공예의 기법을 배운 이수진 공예가는 벌써 21년 째 맥간공예 작품을 만들고 있단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했으나, 배우기 시작한지 2년이 지나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어렵고 힘든 전문 공예가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에서 동아리 활동을 할 때 맥간공예의 창시자인 이상수 선생님께서 지도를 해주셨죠. 작품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그 재미에 빠져들었어요. 결국 전문 공예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죠

 

맥간공예 금빛을 만나다전은 맥간공예의 기법을 이용, 금박시트지를 재료로 삼아 작품을 만드는 새로운 금박공예이다, 이 금박공예 역시 현재 수원에만 공예가가 있다는 것.

 

 

어렵고 힘든 작업, 그러나 보람도 있어

 

맥간을 이용한 금박공예는 수많은 손질을 해야 작품 하나가 완성된다고 한다. 금박은 금이나 금빛 나는 물건을 두드리거나 압연하여, 종이처럼 얇게 만들어 작품을 만든다. 금박공예는 금박시트지를 이용하여 순금을 이용하지 않고도,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금속공예의 한 장르이다.

 

맥간금박공예는 송곳을 이용해 수없이 금박시트지에 줄을 그어서 입체감을 불러오죠. A4용지 한 장에 1,200번에서 1,400번을 선을 그어야합니다. 촘촘하게 줄을 그어 결을 만들어 내어 맥간공예와 마찬가지로 결에 의한 입체감을 주는 것이 특징이죠.”

 

금박공예는 이제 새로 시작한지 3년이 되었다고 한다. 3년 동안을 준비를 해, 이번에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고.

 

정말 작품 하나 완성하기가 어려워요. 대작인 용이란 작품의 경우 금박시트지가 9장정도 들어간 작품인데, 한번에 1,200회의 선을 송곳으로 그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일만 번이 넘게 송곳으로 금을 그은 셈이죠. 또 조금만 힘이 덜하거나 더해도 입체감이 살아나질 않아요. 그래서 더욱 세심한 주의를 요하죠.”

 

그렇게 힘들여 만든 작품을 시민들에게 보여주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것. 용이란 작품 하나를 제작하는데 만도 한 달이 넘는 기간이 걸렸다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맥간 금박공예가 이수진씨는 현재 권선동에 맥간아트 및 아카데미 대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동안 작품 활동을 하면서 2012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 협의회 선정으로 전통, 연희 부문에 특별예술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회의 개인전과 아세아미술초대전 초대작가 및 운영위원을 맡기도 했으며, 북경 문화당미술관 초대전을 갖기도 했다.

 

 

금박공예는 화려하죠. 고급스럽기도 하고요. 누구나 다 금빛을 좋아하잖아요. 저희들이 시청로비에서 전시회를 하는 것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니까요. 많은 분들이 와서 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수원에서 처음 시작하였다는 맥간공예. 그리고 그 맥간기법을 이용해 조형한 금박공예. 공예가 이수진씨의 금빛에 반한 작품을 수원시청 로비에서 만나보기를 권한다.

화장실을 홍보하는 여인, 이연숙팀장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186-3에 소재한 해우재. ‘근심을 푼다라는 뜻을 가진 해우소에서 이름을 딴 해우재는, 심재덕 전 수원시장의 집이었다. 20071111일 완공된 해우재는, 2009년 유족들이 고 심재덕 전 수원시장의 유지에 따라 수원시에 기증하였다. 2010년 수원시는 해우재를 화장실 문화전시관으로 전환하였고, 지난 해 화장실 문화공원으로 개장한 바 있다. 327일 해우재를 찾아 화장실을 홍보하는 여인이연숙 팀장을 만났다.

 

사람들이 저희 해우재에 들리시면 먼저 웃기부터 하십니다. 입구에 있는 응가하는 소년을 보고요. 그리고 해우재 안으로 들어오면 더 많은 웃음을 웃죠. 어머니들은 조형물에 아이를 먼저 올려 보내려고 다투기도 하십니다. 정말 재미있는 일이죠.”

 

 

() 미스터 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의 기회홍보팀장을 맡고 있는 이연숙(, 38) 팀장의 말이다. 이연숙 팀장은 20101030일 해우재가 처음으로 개관을 할 때, 해우재에 서 지금의 홍보팀장의 자리로 함께했다. 이연숙 팀장이 하는 일은 전시운영과 행사기획, 홍보 등이다. 그리고 관람객들이 단체로 들어오면 친절하게 안내도 맡아한다.

 

안내를 하는 방법도 색달라

 

이연숙 팀장이 안내를 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다고 한다. 일반인들하고 기업이나 공무원들이 단체로 왔을 때, 판에 박은 설명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저는 일반인들이나 아이들이 오면 걸리버 여행기를 보았느냐고 먼저 물어보죠.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나라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변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모두 신기해하죠.”

 

이연숙 팀장의 안내를 받은 사람들은 상대에 맞추어 안내를 하기 때문에 지루하지가 않아서 좋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상대방의 눈높이를 맞춘 안내라는 것. 기업이나 공무원들이 단체로 방문을 할 때면 화장실 문화운동의 메카 해우재를 찾아주셔서 고맙다. 여러분들은 지금 세계 최초의 화장실을 소재로 한 문화공간을 둘러보고 계시다.’ 등의 이야기를 한다고.

 

자신이 근무하는 해우재에 대한 사랑도 남다르다. 그리고 이곳에서 근무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도 대단하다.

 

 

많은 행사를 계획하고 있어

 

그동안 어떤 행사를 했느냐고 묻자. 지난 해 개관 2년을 맞아 유치부와 초등부의 ''을 주제로 한 그림대회를 열어, 그 중에 수상작들을 전시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초등학교 5~6학년을 대상으로 20여명의 해우재 어린이기자단을 선정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어린이들에게 해우재 어린이 기자증과 볼펜 등을 줍니다. 이번에는 기자수첩도 준비했어요. 어린이 기자들이 공중화장실 등을 다니면서 나름대로 느낀 점을 기사로 올리고는 하죠. 그런 것이 깨끗한 화장실 가꾸기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올해는 54일에 제 3기 해우재 어린이기자단의 발대식을 가질 예정이란다. 올해는 수원관내의 100여 개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5~6학년의 학생 중에서 신청을 받아, 25명 정도를 기자로 임명할 예정이란다. 55일에는 작음악회 등 어린이 날 행사를 갖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내년에는 심재덕 전 수원시장님이 타계를 하신지 5년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매년 114일에 하던 시장님의 추모식을 좀 큰 행사로 할 생각입니다. 음악회와 화장실에 대한 학술대회도 열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미정이지만 화성박물관을 이용한 특별전도 열어볼까 합니다.”

 

아직 2% 부족한 문화공간, 더 많은 것이 필요해

 

아직은 화장실문화공원 해우재가 조금은 부족한 듯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 해우재 안이 비좁아, 아이들이 마음대로 뛰어놀 수가 없어서 답답해한다고 한다.

 

문화센터가 꼭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러 이유에서죠. 저희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합니다. 그저 뛰고, 웃고, 즐기다가 보면 저절로 공부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배변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체험을 하면서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 좋은 공부가 되죠. 교육을 위한 체험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센터가 생기게 되면 많은 곳에서 벤치마킹을 하러 올 테고, 그러다가 보면 해우재가 관광과 교육, 연구, 산업 등으로 저절로 연계가 될 것이라고 한다.

 

해우재는 변기처럼 생긴 조형물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보아야 그렇게 보이죠. 지금은 해우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사람들이 사진을 보고는 합니다. 해우재 곁에 전망대처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조형물을 하나 세웠으면 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지적을 하시죠.”

 

사람들에게 해우재를 더 많이 알리고 싶어 하는 이연숙 팀장. 아마도 끝없는 발전을 위한 욕심이 있어, 이곳에서 근무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을 하는가 보다. 화장실을 홍보하는 여인 이연숙 팀장. 그녀가 있어 해우재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즐겁단다.

삼인삼색, 최연숙, 최자영, 윤주은의 시화전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세 명의 미인과 마주 앉았다. 삼인삼색의 시인들이다. 시인이라는 분들이 워낙 개성이 독특하다보니, 조금은 버거울 듯도 하다. 그래도 어찌하랴, 마음 단단히 먹고 부딪혀 보는 수밖에. 119일 저녁에 전시장에서 만난 최연숙(, 56, 수원시 영화동), 최자영(51, , 수원시 정자동), 윤주은(, 41세 수원시 세류동) 세 명의 여류시인이다.

 

이들은 각각 독특한 스타일의 시를 쓴다. 최연숙 시인은 원래 수필로 등단을 했. 최연숙은 2005년에, 촤자영은 2004년에, 그리고 막내인 윤주은은 2002년에 등단을 했다. 나이순이 아닌 역순으로 등단을 한 셈이다. 이들이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133-2 ‘그림이 있는 공간 크로키에서 삼인삼색의 시화전을 연 것이다.

 

좌로부터 윤주은, 최자영, 최연숙 시인

 

시로 안주를 삼아 술을 마신다고

 

참 세상은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 한 시인이 이야기를 한다. 술안주 중에 가장 좋은 안주는 바로 ()’라는 것이다. 시를 쓰시는 분들이야 그런 말에 대뜸 환한 미소를 짓겠지만, 시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 무슨 말이냐고 물어도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야 겨우 그 말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아직도 그 깊은 속내는 알 수가 없다. 그저 같은 시를 쓰는 분들끼리, 타인의 시를 갖고 시평을 하면서 술을 마신다고 설명을 한다. 그런 내용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그런 말귀라도 얻어 들었으니, 그보다 큰 공부는 없을 듯하다. 이 세 시인들을 동시에 함께 취재를 한다는 것이 참 힘도 든다. 우선은 시를 모르는 인사니 말이다.

 

시화전이 열리고 있는 그림이 있는 공간 크로키 

 

시는 나를 내려놓는 것’, 최연숙 시인

 

끊임없이 내려앉는 느티나무 잎 사이로

닭 울음소리 길게 퍼지고 순한 개가

기다림도 없이 앉아있다

간간이 서너 집씩 모여 살아도 산중에는

골마다 이름이 있어

느티나무골

쌀밥보다 비싼 보리밥을 먹겠다고

여자랑 남자랑 느티나무 밑에서

낙엽을 맞으며 나물보리밥 비비는데

오는 사람마다 밥상 차려주는 시인은

떨어지는 느티 잎으로 시인은

가을 해를 비빈다(이하 하략)

 

밥차리미 시인의 가을이란 최연숙 시인의 시이다. 최연숙 시인은 시가 무엇이냐고 묻자 내려놓는 것이라고 한다. 가슴에 차고 넘치는 것을 시로 풀어낸다는 것이다. 수필은 소재를 찾아가지만, 시는 스스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삶을 살다가 보면 말을 하라고 시가 시킨다는 것. 그것을 글자로 풀어 놓은 것이 바로 시라고 설명을 한다.

 

시는 삶의 이야기라는 최자영 시인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는

시작되기 전에 끝났고

끝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사람들 귀를 기울이고

당신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다가

이야기 속으로 떠난 사람

특별한 이야기 찾아 헤매는

당신의 이야기가 되어

옛날부터 이야기가 있었다.

 

최자영 시인의 이야기1’이라는 시이다. 어쩌면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이야기인줄도 모르겠다. 시인은 시는 삶의 이야기라고 표현을 했다. 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글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 최자영 시인은 스스로 어려움이 닥치면 시를 써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참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점점 어렵다.

 

시는 삶의 기록이자 치유의 방법이라는 윤주은 시인

 

한 때 면도칼 좀 씹었다는 그녀와의

키스는 아슬아슬하다

혀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고

아직도 비처 빠지지 않은 채

깊이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면도칼 조각을 찾으며

아니 피하며

그녀의 혀 위를 산책한다.(하략)

 

윤주은 시인의 입안의 칼이라는 시 한 부분이다.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등단은 가장 먼저였다. 윤주은 시인은 시가 무엇이냐고 묻자, ‘시는 삶의 기록이자 치유의 방법이라고 대답을 한다. 참 어렵다. 시는 쓰는 시인과 보는 독자가 모두 마음의 아픔을 치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뒤풀이- 문을 연 것이 시작이고 문을 닫는 시간이 끝이었다 

 

한 달간 준비한 시화전

 

삼인삼색(三人三色), 참 난해하다.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질문과 대답이 서로 선문답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닮았다. 세 여인 모두가 시인이고 시를 쓰지 못하면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시를 사랑하기에 시를 쓰고,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시를 쓴다. 그런 마음속에 돌아다니던 글자들이 조합이 되어, 아름다운 시 한편으로 태어난단다.

 

시는 아픔을 치유를 합니다. 시를 쓴다고 하면서 나와 남을 치유할 수 없으면 시인이 아닙니다.” 당당한 말에 수긍을 한다. 그래서 나는 자책한다. 시인이 못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한 달간 준비하여 마련했다는 시화전. 크로키를 찾아가 시인들과 시를 논해보고, 시 한 수로 안주로 삼아 날밤을 새워봄은 어떨지.

수원 화성 행궁 앞에는 가을이 익어가는 냄새가 난다. 국화향이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고 좀처럼 놓아주지를 않는다. 10월 26일(금)부터 28일까지, 제38회 수원농생명과학고 국화전시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1800점이 넘는 국화와 분재 등이 행궁 앞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중에는 코끼리 형상을 닮게 조형을 한 국화도 있어,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단풍이 든 분재들이었다. 단풍나무, 중국단풍, 소시나무, 느티나무 등 단풍이 들어가는 분재는, 전시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 현장을 사진으로 감상하시길.

 

 

 

 

 

 

 

 

우리의 옛 탑 중에서 벽돌로 쌓은 탑을 ‘전탑’이라고 부른다. 이와는 달리 모전탑이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쌓은 탑을 말한다. 대표적인 모전석탑은 분황사지 9층 석탑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음성군 읍성읍 읍내리 설성공원 경내에 있는, 향토자료전시관 앞에는 오층 모전석탑이 서 있다. 균형 있는 형태로 서 있는 모전석탑,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무엇인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부서진 채로 발견된 모전석탑

 

음성 오층 모전석탑은 본래 음성향교 앞 옛 절터에 무너진 상태로 있었던 것을, 1956년 수봉초등학교 이철세 교장이 학교 안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그 후 1995년 향토 민속자료전시관 앞으로 이전하여 현재의 모습대로 조성한 것이다.

 

이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가 있는데, 현재 2층과 5층의 탑신석이 사라졌다. 그리고 상륜부는 모두 사라져 조금은 정형화되지 않은 상태로 서 있다. 탑의 지대석은 4각 2매로 되어 있으나 한편이 훼손되어 있다. 기단은 단층으로 조성이 되어 있으며, 일석의 돌에 각 면에 양우주가 돌출이 되어있다. 갑석에는 부윤이 정연하며, 상면에 각형으로 1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1층 탑신 사면에는 감실을 음각해

 

1층 답신에는 각 면의 중앙에 장방형의 감실을 음각 하였다. 1층 탑신에는 직경 9cm, 깊이 10cm 의 사리공이 있다. 탑의 옥개석은 낙수면이 층단을 이루고 있어, 전탑의 형태를 모방하고 있다. 이러한 모전석탑을 조성하면서도, 벽돌로 쌓은 전탑모양의 형태로 꾸몄다는 것이 특이하다.

 

 

1

 

층 몸돌 위에 올린 옥개석은 2매의 돌로 조성했으며, 옥개받침이 3단으로 되어 있다. 2층 이상의 옥개석은 모두 한 장의 돌로 조성을 했으며, 2층과 3층의 옥개받침은 3단이다. 2층과 3층 낙수면의 층도 3단으로 되어있다. 4층 옥개석은 옥개받침과 낙수면 층은 2단이며, 5층 옥개석은 옥개받침만 2단이다. 이렇게 위로 올라 갈수록 폭이 좁아지면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5층 옥개석의 중심에 찰구공이 있으며 그 위에 상륜부는 멸실되어 있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의 석탑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사라진 석재가 안타까워

 

우리나라에 모전석탑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더욱 전탑의 형태를 석탑으로 모방한 이 음성 5층 모전석탑의 경우에는, 그 형태도 안정감이 있게 조성이 되었다. 각 층의 옥개석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있어, 처음 조성을 했을 때는 그 어떤 탑보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석탑이 언제 훼파가 되었는지, 또 어떤 이유로 이 모전석탑이 존재하던 절이 사라졌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이 모전석탑이 음성향교 앞 절터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일대에 고려시대까지 꽤 웅장한 사찰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아 모전석탑의 일부 부재가 사라진 것도, 그렇게 무너져 내려져 있었을 당시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석조물에 사용했던 부재들이, 어느 시기에 문화재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채취가 되고 심지어는 집안의 주추나 축대, 디딤돌 등으로도 사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205호인 중원고구려비의 경우에도 그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마을입구에서 발견 당시 이 비를 빨래터의 빨래판으로 사용을 하여, 사면에 새겨진 비면이 마모가 심해졌다고 한다. 이 음성 모전석탑도 이와 같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 석물의 일부가 훼손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낸다는 것은, 어느 특정인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깊이 느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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