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이층에 길게 내려트린 현수막이 없었다면, 그저 겉으로 보기에 이 집을 과연 갤러리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은 지가 50년이 지난 2층 슬래브 집. 이곳이 문화공간 일파라는 갤러리이다. 이곳에서는 828일부터 1031일까지 이층 갤러리에서 행궁마을 사라진 집 살아난 집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30() 오후 화성박물관을 들렸다가 만난 일파 김충영 씨. 그동안 공직생활에 몸담아 오다가 퇴직을 하고, 지금은 수원 청소년육성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김충영 씨는 2006 ~ 화성사업소장, 2009 ~ 건설교통국장, 2010 ~ 수원시 팔달구청장을 지낸바 있다. 화성사업소장을 하면서 영원히 화성과 함께 살겠다고 작심을 한 사람이다.

 

 

칠도 안한 문화공간 일파

 

일파 김충영입니다. 저와 화성과의 인연은 참으로 우연이자 필연인 듯합니다. 199712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통과되었다는 낭보가 날아왔을 당시 저는 수원서 도로과장이었습니다. 그때 제 머리를 스쳤던 생각은 과연 수원이 관광객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부랴부랴 한 바퀴 돌아본 것이 계기가 되어 화성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뜻 맞는 이들이 모여 화성연구회를 결성하였습니다. 그간 화성의 변화를 눈으로 지며보면서 틈틈이 모아 온 사진자료 가운데 일부를 선보입니다.(하략)“

 

팸플릿의 인사말이다. 생태교통 수원2013에 맞추어 문화공간 일파에 기획전으로 열린 행궁동 사라진 집, 살아난 집은 수원화성의 변화를 오롯이 담고 있다. 문화공간 일파는 1963년에 건축이 된 집이다. 꼭 반세기의 역사를 담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예전에는 1층은 가발공장이, 2층은 여공들의 기숙사와 여관으로 이용을 했다고 한다.

 

 

수원 화성박물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은 그 동안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으며, 황량한 빈집으로 남아 있던 것을 이번에 매향동 레지던시 공간으로 변화를 했다. 1층에는 목공예와 도예작가가 입주를 하였으며, 2층은 갤러리로 꾸몄다. 칠도 하지 않은 체 그대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자체가 살아있는 반세기의 역사이다.

 

방만 14개인데 어떻게 꾸몄을까?

 

처음 이 집을 들어왔을 때는 온통 쓰레기더미였어요. 그것을 치우고 이렇게 전시공간으로 꾸민 것이죠. 평생을 화성과 함께 살고 싶어서 이 집을 마련했어요. 그래도 이제는 버젓이 이렇게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죠.”

 

사실 이 집을 구입할 때는 화성 곁에서 평생을 살고 싶었다고 한다. 1층은 작가들의 공방으로 내어주고, 2층은 전시실로, 그리고 3층에 20여 평 정도의 공간을 마련하여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화성박물관 바로 옆에 팔달구청 청사가 들어온다고 발표가 되자, 이 집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한 마디로 배 밭에선 갓끈을 고치지 말고, 참외밭에선 신발끈을 묶지마라.’는 옛 속담대로 일이 꼬여버린 것이다. 계획도 없을 때 사 놓은 집이, 당시 재직하던 자리가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동안 마음고생도 숱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집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죠. 그래서 그동안 모은 자료를 정리해서 이렇게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화성의 역사를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구분하였습니다. 이럴 때는 방이 많다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방문 앞에는 문패가 하나씩 붙어있다. ‘광장을 짓다’, ‘광장아래 사라진 집들’, ‘광장의 태동’, ‘수원화성이 살아온 길등의 분류로 방마다 달리 전시가 되어 있다. 물론 전시의 주테마는 수원화성이다. 그동안 사진자료에서나 보아왔던 일제강점기의 화성 사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변화를 한곳에서 볼 수 있다.

 

 

기록은 재산이다’. 일파 갤러리를 돌다가 보면 그런 말이 생각이 난다. 과거의 수원의 기록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고, 옆에는 작은 설명까지 일일이 달아놓았다.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들도 쉽게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1031일까지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문을 여는 일파 갤러리의 사라진 집, 살아난 집전시. 한 사람의 집념이 일구어 낸 수많은 자료들. 기록문화에 약했던 우리역사를, 이곳에서는 제대로 볼 수가 있다.

 

작가 최승일이 그려내는 작가의 속마음

 

“사람이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노력을 하는 사람은 성공을 합니다. 하지만 노력보다 더 자기의 성취도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일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즐길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7월 8일(목) 오후, 비가 뿌리는 날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131-2에 소재한 임 아트갤러리에서 전시 개막준비를 하고 있는 회화작가 최승일이 한 말이다. 7월 8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최승일전은 개막을 하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눈길을 끈다. 비가 오는 날 개막이라니 사람들이 찾아올까 걱정을 하지만, 정작 작가는 그러 것에는 걱정이 없다는 말투이다.

 

 

“제 작품은 볼트와 전구입니다”

 

갤러리 벽에 걸린 작품들. 작품을 일일이 짚어가면서 설명을 하지만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미술에는 워낙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작업은 예술가에게 있어서 자아실현의 통로이며,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려는 또 다른 삶의 표현방식이라고 생각 됩니다. 판화라는 간접적인 매체가 지니고 있는 함축적인 표현과 독특한 재질감, 그로 인한 절제된 형상 등은 일상의 다양한 요소들을 형상화하고 이를 통하여 작가의 행위가 간접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작가 최승일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그동안 그림을 그려오면서 자신만의 내명을 표현하겠다는 생각으로 다작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림을 손에서 떼어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있지만, 새벽 시간과 낮 시간을 이용해 주로 작업을 하죠. 저는 작업을 매체의 이미지를 통하여 표면이 아닌 내면에 잠재된 조형적 언어를 표출하고 싶습니다. 하기에 남들은 제 그림을 보고 볼트와 전구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볼트란 조이기도 하지만 풀기도 하죠.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는 물질입니다. 즉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바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갈망입니다”

 

1년에 세 차례의 개인전을 열기도

 

현재는 수원시 팔달구 교동 등 세 곳에서 ‘호우와 자명’이라는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작가 최승일도 한 때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단다.

 

 

“졸업을 하고나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했죠. 그 때는 정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2004년에는 한 해에 개인전을 3회나 열기도 했습니다.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린 것이죠. 남들은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그림을 그리면서 나 스스로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렇게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것은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노력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한다. 외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선배나 동료, 혹은 후배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기도 했단다.

 

“외국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다가 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갤러리마다 찾아다니면서 스스로를 일깨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먹고 놀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성이 예민해 자신만 노력을 하면 얼마든지 외국에서도 성공을 할 수 있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결국 그런 것들이 작품 활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는 것.

 

 

해외에도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작가

 

“저는 일상적인 재료에서 찾아낸 어떠한 특성이 또 다른 공간에서도 나타나는 표현 행위 속에서 스스로 창조되는 환경을 설정하여, 이러한 가변적 재료들은 그 무엇을 초월하면서도 모든 것에 공통되고 모든 것과 연결된 어떤 무엇에 접하고 있다는 일종의 암시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국내에서 10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런데 그 10회의 개인전 중 9회가 일 년에 세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2004년 3회, 2010년 3회, 2011년 3회이다. 그 중 세 번의 개인전은 해외에서 갖기도 했다. 작가 최승일은 국내보다는 주로 국제전에 더 많은 작품을 냈다. 1995년 동경미술관 임팩트 비엔날레, 2010년 Art by Geneve 2010 아트페어(팔렉스포 제네바), Art Asia 마이애미 국제 아트페어(마이애미, 미국) 등 10여 차례 국제전을 가졌다.

 

 

최승일 작가의 그림은 해외에도 소장이 되어있다. AD갤러리(프랑스 리옹), 스위스 국립의료재단 등 해외에서도 그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나혜석 여성미술대전 심사위원이면서 한국미협, 수원미협 회원으로도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 최승일. 14일(일)까지 임 아트갤러리를 찾아가면, 또 다른 작가의 속마음을 만날 수가 있다.

 

‘디렉터(director)’란 제작 책임자, 연출가, 감독, 지휘자 등을 말한다. 한 마디로 디렉터란 어느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의견을 상호 조율하여 효과적인 성공을 도출해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수원시 팔달구 영동시장 아트포라 디렉터를 맡고 있는 서길호(수원시 팔달구 교동 90-7)씨를 7월 2일 공방에서 만나보았다.

 

“올해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디렉터라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아트포라는 예술작가들의 모임공간입니다. 이곳은 작가들과 상인들의 상호 협력을 도출해 내야하는 자리이다 보니, 상당히 어려우 점이 많이 있습니다. 작가는 작가들의 의견을, 상인들은 그들의 의견을 각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잘 조화시켜 상호 교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제가 맡은 일이죠.”

 

 

중학교 때부터 그린 그림

 

서길호씨는 중앙대학교 미술대학 회화학과를 졸업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 때부터라고. 오산출신이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원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수원에 와서 김석환 선생님께 그림 공부를 했습니다. 학교 미술선생님이신 김두환 선생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무엇을 하고 살 것이냐? 세상과 교류하고 공유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비로 그림이다’리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들이 저에게 왜 그림을 그리느냐고 묻는다면, 음악을 하는 사람은 음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글로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듯, 그림을 그리는 저희들 역시 그림속에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후회를 해 본적은 단 한 번 밖에 없다고 한다. 대학을 다니면서 3학년 때인가 보내요. 왜 이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 하는 점에 깊은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외에는 아직 한 번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해 후회를 한 적이 없죠.“

 

그만큼 자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곧 자기가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아트포라의 디렉터라는 소임을 맡은 것도, 아트포라 작가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라는 것.

 

 

앞으로는 수원의 문화예술을 위해 힘쓰고 싶어

 

수원미술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한 서길호씨는 그동안 많은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북경프로젝트 ‘장안문에서 천안문까지’은 북경과 한국의 현대미술관에서 가졌다. 2010년과 2012년에는 수원미술관에서 ‘한중일 국제교류전’을 갖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의왕에서 가진 ‘국제프랭카드 아트-Ulpat 2012’, 2012 오산예술가전 초대작가전 등 국내외에서 다수의 전시를 가졌다.

 

“올해에는 포항에서 수원, 포항 교류전을 가졌고요. 경기문화의 전당에서 경기청년작가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올 8월에는 수원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준비 중애 있습니다. 9월과 10월에는 오산에서 단체전을 열 계획입니다”

 

현재는 영동시장 아트포라 디렉터로 활동을 하면서, 한국미술협회 수원지부 서양화분과위원장과 경기수채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대담 중에도 요즈음 젊은 미술학도들의 사고에 대해 걱정을 하기도 하는 서길호씨.

 

“요즈음 미술대학을 보세요. 서양화로 스스로가 화가가 되겠다는 학생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의지가 없다고 할까요? 대학이라는 곳이 취업을 할 수 있는 과목을 선호하다보니 디자인 쪽으로만 몰려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죠.”

 

 

후배들이 이렇게 작가로서의 자긍심을 갖기보다는 취업에 목적을 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마음 아파한다. 바쁜 시간을 내어 대담을 하면서 긴 시간 붙들고 있을 수가 없어,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선 제 책임이 아트포라 디렉터를 맡고 있으니, 우리 작가분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온전히 작업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죠. 더 나아가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수원의 문화예술, 특히 시장문화에 대한 많은 것에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려고 합니다.”

 

비를 머금은 하늘이 잔뜩 흐렸다. 그러나 한 사람의 변화가 주변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언젠가는 아트포라에 더 많은 작가들이 입주를 해, 서길호 디렉터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꼭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처음 문화센터 등을 찾아다니면서 서예로도 사람들의 치유가 가능하다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애를 먹고는 했죠.”

 

올해로 서예를 시작한지 30년이 되었다. 예전에는 미술대학에 서예과가 없었다. 단지 취미생활로 시작한 것이, 서예가 좋다가 보니 어쩌다가 서예가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단다.

 

예전에 정보통신부에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을 때, 서예와 접하게 되었어요. 글씨를 쓰는 것을 워낙 좋아해, 틈이 나는 대로 서예에 몰두했죠. 취미생활을 하던 서예가, 저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죠.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 좋아, 1994년에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서예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학업을 시작해

 

처음에는 한문과 한글을 구분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저 묵향을 맡으며 글을 쓰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체계적인 공부가 하고 싶어,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에 서예전공으로 미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에 공무원 생활을 접고 서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연금을 포기하고 퇴직금으로 서실을 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난관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직 서예에만 몰두를 했다.

 

한문과 문인화도 그렸지만, 글을 쓰다가 보니 한글에 대한 애착이 생겼습니다. 그 매력에 빠져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글의 서체에 많은 연구를 하게 된 것이죠. 지금 세계는 우리 한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한글의 세계화를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원 윤경숙(, 54) 선생은 서예가 점차 침체되어 가는 것이 안타까워, 직장까지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실을 열어 한글 서체를 연구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접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생활서예에 심취하다

 

저는 생활서예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다가서기가 수월하기 때문이죠. 요즈음은 글씨를 갖고 캘리그래피라고 하여서 아름다운 글을 씁니다. 캘리그래피는 전통 서예와 디자인을 접목한 아름다운 글씨를 말하는 것이죠. 이제는 글씨가 정보를 전달하는 문자의 기능을 뛰어넘어, 감성까지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 감성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캘리그래피가 되는 것이고요

 

원래 캘리그래피(Calligraphy)'아름다운 서체'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 '칼리그라피아(Kalligraphia)'에서 비롯된 말이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캘리그래피를 멋짓글씨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요즈음은 사회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마음이 메말라 거칠어지고요. 이런 사람들을 서에로 치유를 할 수 있습니다. 왜 음악이나 미술은 치유가 되는데, 서예는 안된다고 할까요? 저는 석사논문을 <서예치료에 관한 연구>로 받았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분들이 서예를 하다가보니, 마음이 치료가 되는 듯하다고 합니다. 저도 서예를 하면서 치유가 되는 것을 느꼈고요.”

 

내면에 담고 있는 감성을 표현하는 것

 

그동안 국전초대작가가 되었지만, 그런 자리에 오르기까지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다. 현재 수원미협 서예분과장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서원 윤경숙 선생은, 대한민국미술대전, 경기도미술대전, 전국휘호대회, 대한민국서예한마당, 공무원미술대전, 추사선생추모휘호대회 초대작가, 한국미협, 강물회, 묵향회, 서예치료학회 등에서 활동을 했다.

 

 

한글서학회는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단체입니다. 우리의 우수한 한글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홍보를 하는 것이죠. 저는 단지 한지에 글씨만을 갖고 작업을 하지는 않습니다. 버티컬이나 스탠드, 스카프, 방석 등 다양하게 한글을 사용하죠. 저희 공방 명칭이 먹즐방입니다. 먹을 즐기는 방이라는 뜻이죠.”

 

수원시 팔달구 영동시장 2층 아트포라에서 만날 수 있는 서원 윤경숙 선생은,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한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표출해 내고 있다. 영동시장 2층 전시실에서는 현재 윤경숙 선생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의 아름다움에 취해보고 싶은 사람은, 그곳에 들려 우리 한글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보기를 권한다.

55(五人五色), 다섯 명의 개성 있는 화가들이 모였다.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131-2에 소재한 임 아트 갤러리에서, 516일부터 전시를 갖는 5인의 화가들. 각자 개성 있는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516일 오후 6시에 개막식을 하기 전에, 갤러리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김영섭, 종준, 이명숙, 한성휘, 황보 경 등 5인의 화가는 그동안 함께 전시를 해오기도 했단다. 반응이 좋아 이번에도 함께 전시를 하게 되었다는 것. 그 중 가장 연장자인 김영섭 화백이 개막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5명의 화가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 것일까?

 

 

그림이 그리고 싶어 직장도 그만두었죠.“

 

김영섭 화백은 교도관 출신이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전혀 낯선 직업을 가졌던 김영섭 화백은, 82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직업 때문인지 그림이 상당히 어두운 면이 많았다고 주위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반죄수라는 교도관이라는 직업상, 늘 침침한 곳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

 

벌써 그렇게 그림을 그린지가 32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었단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그림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그림을 그려오면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해 왔던 것도, 그림만을 그리고 싶어서라는 것, 그래서 5년 전에 아예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직장까지도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김영섭 화백이 들려주는 5인의 그림

 

김영섭 화백에게 5인의 화가들이 그림에 대해 물었다. 물론 작가의 의도와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딴 화가의 그림을 평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런 일일 수밖에 없다. 그저 그림의 특성만을 알려달라고 주문을 해보았다.

 

제 그림은 제목이 새처럼 꽃처럼입니다. 저는 그림을 그릴 때, 제 그림을 보시는 분들이 행복하고 기쁜 감정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 그림은 제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제 스스로가 기쁜 감정, 그리고 생명을 느낀다고 표현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기자로서는 그런 설명을 해도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다. 하기에 늘 이렇게 설명을 듣고, 또 묻고는 할 수밖에. 그러다가 보면 언젠가는 그림에 대해 조금은 눈을 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이명숙 화백의 그림은 많은 재료를 혼합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로 나무를 상징하는 그림들은 동심의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성휘 화백은 한국화를 전공했습니다. 한성휘 화백은 기존의 천이나 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석고에 먼저 조각을 하고 그 위에 채색을 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입체감이 살아있기도 하고요. 아마 우리 한국화의 재해석이라고 보아야죠.”

 

한성휘 화백이 그린 그림을 자세히 본다. 설명 그대로 석고에 조각을 하고 그 위에 아름답게 채색을 하였다. 주로 꽃을 주제로 그려낸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황보 경 화백은 홍대 미술대학원을 나온 뛰어난 화가입니다. 매화 등을 그려내는데, 그림이 독특하죠. 아마 작가만의 색깔을 그 그림들에게서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황보 경 화백은 디자인을 전공한 분 답게, 그림을 회화적인 표현으로 풀어내고는 하죠. 종준 화백은 한지를 물에 풀어서 그것으로 그림의 소재를 삼는 듯합니다. 그림의 색이 강렬하기 때문에 남성스러움이 배어있죠. 아마도 작가의 심성이 배어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5인의 화가들과 그림에 대해 설명을 마쳤다. 작은 전시 공간인 임 아트갤러리의 공간에 맞게 그려진 작품들. 5인 오색전인 ‘It's Yummy 64일까지 계속된다, 5인의 색깔 있는 화가들을 만날 수 있는 전시에 가서 그 아름다움을 느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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