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소유적지. 사적 제392호인 선소유적은 여수시 시전동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선소유적은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하게 한 거북선을 최초로 건조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선조 24년인 1591년, 이곳 여수에 전라좌수사로 부임을 하였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는 선조 26년인 1593년 8월부터, 선조 34년인 1601년 3월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이곳은 옥포, 합포, 당항포, 율포, 노량, 명량, 한산도 등에서 수군이 왜적에게 대승을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다.


배를 만들고 숨겨두었다는 굴강

그리고 보니 벌써 선소유적을 다녀온 지가 꽤나 시간이 흘렀다. 10월 10일 여수를 답사하면서 다녀온 선소유적. 선소유적 입구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표석으로 삼았다는 벅수가 나란히 한 쌍이 서 있다.

이곳 선소유적은 지도상으로 보면, 가막만의 가장 북쪽에 조선소가 있다. 현재 이곳 선소유적지 안에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굴강’과 칼과 창을 만들던 ‘대장간’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칼과 창을 갈고 닦았다는 ‘세검정’과 수군지휘소였던 ‘선소창’, 수군들이 머물렀던 ‘병영막사’ 등을 돌아볼 수가 있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 이 말은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한 수군의 거점인지 알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곳 선소는 나라를 구하는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선소유적 안으로 들어가면 바닷물을 돌로 쌓은 방파제가 있다. 입구는 좁게 만들어 놓아, 배를 숨겨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굴강’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조선시대 해안 요새에 만든 군사항만 시설이다. 여기에서 고장난 배를 수리하거나, 군사물자를 배에 싣고 내린 곳이라고 한다. ‘굴강(掘江)’이라는 명칭은 대피한 배를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를 흡사 작은 만처럼 조형을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선소주변에는 승리의 함성소리가

선소의 중심부에 마련된 직경 42m(면적 1,388㎡)정도의 굴강. 거북선 두 척이 들어갈 수 있었다는 굴강은, 깊이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서 바닥까지는 5~6m 정도가 된다. 북쪽으로 난 굴강의 입구는 폭이 9m 정도에 이르며, 방파제 역할을 하는 축대는 자연선과 깬돌로 막쌓기를 하였다.

이충무공 선소 유적지는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보고서에 의하면 1980년 1차 발굴조사 시 출토유물은, 금속류 7종에 94개, 자기류 2종에 13개, 기타 4종에 18점이 출토되었다. 1985년 2차 발굴조사 시 출토유물은 금속류 5종에 21개, 자기류 4종에 387개, 기타 4종에 44개가 발굴이 되었다.





이곳 굴강에서 서남방향으로 20m 부근에는 ‘세검정(洗劒亭)’과 군기고가 현재 복원되어 있다. 항상 검을 닦고 갈았다는 세검정. 그 마루에 앉아 앞으로 보이는 바닷물을 바라본다. 400여 년 전 해전에서 승리를 하고 난 거북선과 수군들이 이 세검정 앞을 지나면서, 승리의 환호로 이곳이 떠나갈 듯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의 선조들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던 이곳 여수 선소유적. 그곳 세검정 마루에 걸터앉아 자리를 뜨질 못하는 이유는, 그러한 함성이 그립기 때문인가 보다.

소를 타고 다녔다는 정승 고불 맹사성. 맹정승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많이 전하는 편이다. 정승 고불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인 1360년에 태어나, 조선조 세종 20년인 1438년에 세상을 떠났다. 려말과 선초에 걸쳐 세상을 살다 간 맹사성은 본관은 신창이며 자는 자명, 호는 고불이다.

많은 벼슬을 거쳐 1427년에는 우의정이 되었으며, 1432년 좌의정을 지내고 난 후 1435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정승 황희와 함께 조선 초 우리 문화를 금자탑을 이룩한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고불 맹사성.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로 명성을 높였으며, 효자로 유명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다.


청빈한 삶을 살다간 맹사성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소재한 고불 맹사성의 옛집. 사적 제109호인 '맹씨 고택'은 맹사성이 살던 고려 때 지어진 고택과 더불어 맹사성이 심었나는 수령 600년이 지난 은행나무, 그리고 맹우와 맹희도, 맹사성의 위폐를 모신 세덕사가 있다.

평소 청빈한 삶을 살아 온 맹정승은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면 대문 밖까지 나가 맞아들이고, 언제나 상석에 앉혔으며 손이 떠날 때도 반드시 대분 밖까지 배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하는 ‘쌍행수’

고불의 고택이 있는 곳을 ‘맹씨 행단’이라고 한다. 행단은 은행나무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담으로 양편을 쌓은 쪽문 안에는 <청백리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밖으로 돌아 계단을 오르면 맹사성의 유적을 관리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듯, 솟을대문 안으로는 ㄱ 자 형의 집이 있다. 그 집을 바라보고 우측 계단으로 오르면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고물 맹사성이 1380년경에 이곳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이다. 두 그루 은행나무 중 우측의 은행나무는 외과 수술을 한 듯, 나무 가운데에 남성의 성기 같은 시멘트로 바른 죽은 가지가 보인다. 수령 630년이 지난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쌍행수'라고 부르는데, 높이는 35m 둘레는 9m 정도에 이른다. 잎이 떨어져 가지만 남아 있어도 이렇게 위용을 보이고 있으니, 여름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면 대단할 것 같다.

최영장군도 살다 간 680년 역사의 맹씨 고택

은행나무 앞으로 자리하고 있는 고택 한 채. 바로 고불 맹사성이 살았던 고택이다. 이 집은 고려 충숙왕 17년인 1330년에,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이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무민공 최영이 살았던 집이다. 최영장군과 고불 맹사성이 살았다는 고택 한 채. 이 집의 내력이 대단하다.

고불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자사위이다. 최초로 지어진 지 680년이나 된 이 고려 때의 고택은, 최영과 맹사성이라는 역사의 일면을 장식한 두 사람이 거처로 정했던 곳이기도 하다. 맹씨 고택은 성종 13년인 1482년, 인조 20년인 1642년, 그리고 순조 때인 1814년과 1929년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집은 '공(工)' 자 형으로 꾸며져 있으며, 27.5평에 불과하지만, 고려 때의 고부재와 창호 등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집이다.




집안 곳곳에 배어 있는 고불의 청렴

두 사람의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살다 간 고택. 최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다. 고불 맹사성은 청백리로 소를 타고 다니며 직접 아궁이에 불을 땔 정도로 청렴한 정승이었다. 이렇게 세상의 탐욕과는 거리가 먼 두 분의 마음이 맹씨 고택에는 그대로 배어 있다. 기단은 커다란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주추도 다듬지 않은 덤벙주추를 놓았다. 중앙에는 두 칸의 마루를 놓고, 양편에는 길에 방을 드렸다. 그 방의 끝이 앞뒤로 삐죽이 나와 工 자 형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방은 별다른 꾸밈없이 양편에 길게 들였는데, 뒤편을 막아 각각 윗방을 들였다. 이 집의 아궁이는 별다르게 부엌을 만들지 않고, 앞면 담 밖에 아궁이를 놓았다. 이런 아궁이의 형태는 밑에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 불을 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불 맹정승의 청빈한 삶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700년 가까운 세월. 그렇게 청빈한 주인들이 살다 스러져간 고택 한 채. 그 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요즈음 돈푼께나 있고, 권력께나 가졌다는 자들은 앞을 다투어 고래등같은 집을 짓고 자기자랑을 하고자 할 때, 그저 작은 집 하나로 비바람을 피했다. 그 청빈하고 세상에 찌들지 않은 마음 하나를, 비워놓은 내 마음에 담아간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7) - 봉돈

화성 안에는 독립구역이 몇 개소가 자리를 한다. 이 독립구역들은 같은 화성에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방비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독립구역은 바로 봉화를 올리는 봉돈과, 공심돈이다. 이 독립지역은 화성 안에 또 다른 작은 성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신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곳이다.

봉돈은 외부와는 차단되어 있다. 봉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 안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야 하며, 사방은 벽돌로 쌓아 막혀있다. 하기에 이 봉돈을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앞쪽에 난 문 뿐이다.



일반적인 봉수대와 다른 봉돈

화성의 봉돈은 1796년 6월 17일에 완성이 되었다. 화성 봉돈은 일반적인 봉수대와는 다른 형태이다. 일반적인 봉수대는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부의 높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봉돈은 화성의 몸체 위 성벽에 맞물려 축조를 하였다. 봉돈의 재료는 벽돌로 활용하였으며, 우리나라 성곽 형식에서는 색다른 형태이다.

이 봉돈은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남쪽 횃불구멍인 첫 번째 ‘화두(火頭)’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한다. 화성 봉돈에서 신호를 보내면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로 신호를 보내는데, 다른 4개의 화두에는 위급한 일이 없으면 불을 피울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방지를 하였다.




독립된 축조물 봉돈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방이 있다. 좌측의 방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우측의 방은 봉돈을 지키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식으로 축조를 한 봉돈의 내부 벽은 모두 4층으로 구성이 된다. 각 층마다 성벽으로 타고 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안이나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봉돈이 독립된 구조물이라는 것은 성 안의 벽쪽으로도 총안이 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이 일부 적에게 열려도 봉돈은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의 계단마다 안으로 들어쌓기를 하고, 그 위편에 통로를 내어 군사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화성 봉돈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구성이다.




봉화의 신호체계는 어떻게 구별할까?

봉돈에는 모두 5개의 불을 피우는 화두가 서 있다. 일반적인 봉수대가 보이는 숫자와는 사뭇 다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이 되면 횃불을 피운다. 총 다섯 개의 화두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만을 올린다
○ 적이 국경 근처에 출몰하면 봉수가 2개가 오르고
○ 적이 국경선에 도달하면 3개의 봉수가 오른다
○ 봉수 4개가 오르면 적이 국경을 넘었다는 신호이며
○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수에 신호가 모두 올라간다



예전에는 이 봉돈의 연기나 햇불이 아마도 가장 빨리 상황전달을 할 수 있는 신호였을 것이다. 멀리서보면 아름다운 하나의 축조물과 같은 봉돈. 그러나 이 봉돈이 갖는 중요성은 화성의 그 어느 구조물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55번지에 소재한 사적 제346호 ‘무장현 관아와 읍성’. 몇 번이고 찾아가고 싶었던 길을 번번이 뒤돌아서야 했던 곳이다. 고창군 답사를 서너 번을 했지만, 이상하게 이곳까지 갈 수가 없었다. 답사 중 날이 저물어서이다. 지난 9월 4일 마음을 먹고 찾아간 무장읍성.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무장읍성은 한창 공사중이었다.

무장읍성은 1991년 2월 21일에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 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1,4km 정도이며 넓이는 43,847평이다.


토성과 석성으로 쌓은 무장읍성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에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다고 하는 무장읍성. 성내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여기저기 복원과 보수 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진 무장읍성. 진무루를 지나 객사를 거쳐 뒤편에 있는 동헌건물인 취백당으로 향한다.

만 4개월 동안 2만 여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하였다는 무장읍성의 동헌. 동헌은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로, 당시 무장현감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명종 20년인 1565년에 세웠으며 한때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하기도 하여 변형이 된 것을, 1989년 원형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무장동헌은 멀리서 보아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팔작 지붕으로 지은 동헌 건물은 겹처마로 구성해, 전체적으로는 장중한 느낌을 주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동헌은 현재 전라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동헌 취백당

무장읍성의 동헌건물은 객사 뒤편에 자리한다. 동헌 뒤편으로는 토성으로 쌓은 성이 있으며, 동한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줄 지어 서 있어, 무장읍성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동헌을 찾았을 때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정면 6칸인 동헌 건물의 중앙에는 <취백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무리 동헌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넘치는 취흥을 이기지 못해 붙인 이름인가 보다. 대청 안에는 많은 시판들이 걸려있는데, 그 중에는 최집의 취백당기를 비롯해 김하연의 찰미루기, 정곤의 아관정기, 우여무의 동헌시, 이덕형의 동헌시, 정홍명의 동헌시, 기준의 동백정시가 보인다.

이런 시판으로 보아 동헌을 동백정이라고도 불렀는가보다. 무장은 무송과 장사를 합한 고을이라 하여 동헌 이름을 ‘송사(松沙)’라 하였는데, 영조 때 최집이 부임을 해와 ‘취백(翠白)’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장중한 느낌을 주는 취백당

단 한 동의 건물이 사람에게 주는 느낌이 이리 장중할 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마도 뒤편에 있는 토성이나, 주변에 늘어선 아름드리나무들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날렵하게 솟아오른 처마 끝이 살아있는 듯하다. 아래는 넓고 위가 좁게 마련한 주초위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그러고 보니 두리기둥의 길이가 길어 건물 전체가 장중한 느낌을 주는 듯하다. 대청은 세 칸으로 마련하였으며 뒤편에는 판문을 달아냈다. 건물을 바라보며 좌측은 두 칸의 방을 한 칸 뒤로 밀어서 드렸으며, 우측은 마루 끝까지 방을 드렸다. 우측방은 따듯하게, 좌측 방은 시원하게 계절을 보낼 수 있을 듯하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뒤편전체를 복도마루로 마련한 것도 취백당의 특징이다. 아무래도 뒤편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단 한 동의 건물이면서도 장중함을 느끼게 하는 취백당. 그 이름 속에는 솔처럼 푸른 기상을 지니고, 힌 모래처럼 그렇게 민초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고고함을 지키라는 뜻이 있는 듯하다. 취백당은 450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켜오면서, 늘 푸른하늘을 동경했는가보다.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6) - 서남암문과 용도

‘화성(華城)’,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알면 알수록 대단한 성이다. 어느 한 곳도 화성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성을 축조할 수 있었는지, 그저 혀를 내두를 판이다. 사람들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칭찬하면서 ‘우리나라의 성은 성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난 그 사람들에게 한 마디로 이렇게 묻는다. “성을 제대로 알기는 하는가?”라고.

중국과 수도 없이 많은 국경에서의 전쟁을 한 고구려. 그 고구려에 왜 그 수십만의 수나라나 당나라 군사들이 형편없이 패하고 돌아갔을까? 그것은 바로 고구려의 성이 그만큼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축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화성은 그런 각 시대의 성곽에서 좋은 점만 모아서 축조가 된 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화성의 모습이다.


산으로 오르는 적군이 다시 놀라다

화성은 4대문으로 공격을 하거나, 성벽으로 공격을 하기에는 어렵다. 어디라도 비빌 언덕이 없기 때문이다. 성 주위를 맴돌던 적은 한 곳의 빈틈을 발견하게 된다. 성벽보다 더 높은 팔달산의 남쪽 능선이다. 그곳으로 오르면 성 안으로 총과 활을 쏘고 불을 날릴 수가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적은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성벽에 가까이 접근하면 여지없이 성안에서 날아오는 총탄과 화살에 맞아죽기가 일쑤다. 그래서 일부러 팔달문에서 멀리 떨어진 쪽을 향해 팔달산의 능선을 향해 오른다. 쉴 새 없이 적들은 능선을 향해 올랐다. 나무숲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오른 능선.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고함소리와 함께 수많은 총알과 화살이 날아온다.



서남암문의 위에 놓인 포사(위)와 용도에서 바라 본 암문, 그리고 암문으로 오르는 성벽과(붉은 선) 용도가 놓인 산등성이(노랑색 선)

고개를 숙이고 능선을 향해 치닫던 적들이 놀라 황급히 고개를 들어본다. 놀랍게도 그 능선을 따라 또 다른 성벽이 있다. 바로 서남암문에서 길을 따라 화양루까지 가는 '용도(甬道)'가 있었던 것이다. 용도란 말 그대로 길을 따라 양편으로 담을 쌓은 것을 말한다. 팔달산의 반을 갈라 쌓은 성 끝자락에는 이 용도가 있어, 남부 능선으로 올라오는 적을 막을 수 있도록 되어있다.

용도와 서남암문, 그리고 서남각루

팔달문에서 성벽을 따라 남부 능선으로 오르면 그 정상부에 서남암문이 있다. 이 서남암문 위에는 주변을 경계하는 ‘서남포사(西南舖舍)’가 자리한다. 한 칸으로 지어진 이 포사에서는 주변 경계는 물론, 성 밖의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적이 공격을 하면 깃발을 이용하거나, 포를 쏘아 신호를 했다. 이 포사는 항시 장병들이 기거를 하기 때문에, 온돌로 꾸미고 사면을 판문으로 막았다.



포사 아래 문이 바로 서남암문이다. 이곳은 안과 밖으로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성가퀴를 설치하였으며, 화성의 암문 중 유일하게 포사가 설치가 된 곳이다. 암문을 빠져나가면 능선을 따라 양편으로 성벽을 쌓고 여장을 올린 용도가 나타난다. 이 용도는 능선의 끝까지 나 있으며, 그 끝에는 ‘서남각루’인 화양루가 설치되어 있다.

준 지휘소인 각루

용도 끝에 자리한 각루는 준 지휘소이자, 군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서남각루가 서 있는 곳은 능선의 끝이자, 용도의 끝이 된다. 이곳에서 양편으로 돌출된 성벽은 양편 모두가 치의 역할을 하고 있어, 용도동치와 용도서치와 함께 적을 공격하기에 용이하게 축성이 되었다. 오죽하면 유네스코에서 18세기 동, 서양을 통 털어 가장 완벽한 군사시설이라고 화성을 극찬하였겠는가?



용도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서남각루. 서남각루는 화양루라고 부른다. 각루의 양편 끝에도 둘출이 되어 치와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서남각루는 한편은 바닥이 돌로 되어있고, 한편은 장초석을 놓고 기둥을 올려 마루를 놓았다. 언제나 이곳에서 군사들이 주변감시를 하면서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팔달산 남쪽 능선에 올라 성안을 공격하겠다고 죽자 사자 능선으로 오른 적군들. 그들은 능선에 버티고 있는 용도로 인해, 또 한 번의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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