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62번지 일대에 소재한, 사적 제140호인 독산성과 '세마대지(洗馬臺址)'. 이곳은 몇 번이고 가본 곳이다. 이곳을 자주 찾는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산 위로 올라가면 주변을 훤히 볼 수가 있어, 가슴이 후련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국민학교(우리 때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불렀다)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린 권율장군의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선조 26년인 1593년, 권율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 여명을 이끌고 독산성에 주둔하여, 가토가 이끄는 왜군 수만 명을 격퇴시킨 곳이기도 하다.

 

 

쌀로 말을 씻긴 세마대

 

산성에 오르면 보적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 뒤편에 지금은 정자가 서 있다. 정자에는 '세마대'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 세마대에 전하는 전설이 바로 국민학교를 다닐 때,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었다.

 

1593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권율 장군이 이끄는 병사 2만 여명이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이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내 조롱하였다. 그러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를 산 위로 끌어 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본 왜군은 멀리서 보니, 그 모습이 꼭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기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산성 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오판하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렇게 흰말과 쌀로 왜군을 속여 물리친 곳이 세마대이다. 사적 제140호는 독산성과 함께 말을 씻긴 장소라는 세마대지를 지정하고 있다.

 

도성을 지키는 요충지인 독산성

 

독산성을 언제 쌓았는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은 성을,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거점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독산성은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성으로, 용인의 석성산성이나 광주의 남한산성 등과 연계하여 도성을 에워싸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조 27년인 1594년에는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1595년에는 성벽의 돌출된 치에 포루의 시설이 갖추어졌다. 1597년 2월에는 왜병의 조총을 방어하기 위하여,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거기에 성의 아래로 향한 창문을 시설하였으며, 석차와 포차를 배치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인 1602년에도, 당시 부사 변응성이 성을 다시 보수하였다.

 

그 후 정조 16년인 1792년에도 성을 보수하였으며, 정조 20년인 1796년에는 수원읍성인 화성을 축조할 때 함께 개축하여 성을 단단히 하였다. 이렇게 독산성을 보수하고 단단히 쌓은 것은, 도성을 지키는 길목에 있는 군사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봄바람을 맞으며 독산성을 걷다

 

독산성의 둘레는 3240m이다. 성에는 문이 4개이고 암문이 있다. 정조 당시에 성을 개축할 때는 성의 둘레가 1800보였으며, 성벽은 외면이 장방형이나 방형이 되도록 다듬은 석재를 이용했다. 성벽은 안으로 약간의 기울기가 있도록 쌓아 매우 견고하게 축조가 되었다.

 

성안에 자리한 보적사에서 시작해 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황사가 심하게 낀 날이라고 하지만, 모처럼 맞은 따듯한 휴일이라 그런지, 성곽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세마대를 거쳐 동쪽으로 성벽을 밟고 걸어본다. 단단하게 쌓은 성벽에 돌출된 치가 보인다. 아마도 저 곳에 포루를 설치하고, 밀려드는 왜적을 향해 포를 쏘았을 것이다.

 

 

 

산성 주변을 모두 잡목을 제거하여 성벽이 훤히 보이도록 하였다. 3월의 봄바람이 시원하게 땀을 식힌다. 문지였을 것 같은 곳에는 성벽이 유난히 단단해 보인다. 뒷짐을 지고 걸어보는 독산성. 성벽 틈에 아래로 꺼진 곳, 그곳에 암문이 자리하고 있다. 적의 배후를 기습적으로 공격을 하거나, 적이 모르게 군수물자를 옮기기 위해 만든 문이다.

 

가파른 산비탈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아마도 저 곳에 수만 명의 가토가 이끄는 왜병들이 주둔을 했을 것이다. 독산성의 위치만으로도 오르기 힘든 곳이거늘, 거기다가 이렇게 견고한 성이 자리하고 있었다니. 왜병들도 이 성을 공략하기란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한 시간 남짓 돌아본 독산성. 옛날 옛적 교과서에서 배운 전설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며, 산자락에 걸린 성을 뒤로한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는 사적 제156호인 무성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고 불렀으나, 숙종 22년인 1696년에 임금이 내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무성서원이라 불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전국에 4개 서원만이 남았는데, 무성서원은 그 중 하나이다. 이 무성서원이 있는 무성리에는 몇 개의 정자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성리 뒷산인 성황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송정(松亭)이다

 

송정은 절경에 자리하고 있지는 않다.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들판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소나무와 산죽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무성리 정극인의 동상이 서 있는 우측, 성황산을 소로 길을 오르다가 보면 하마비(下馬碑)가 나온다. 무슨 일로 하마비가 이렇게 성황산을 오르는 길에 놓여있는 것일까?

 

 

아마 과거에는 이곳이 무성서원을 들어가던 길목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하마비를 지나 조금 오르면 단아한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현판에는 송정(松亭)이라고 새겨져 있다. 소나무 숲에 자리한 정자라는 뜻일까? 아니면 소나무처럼 그렇게 마음을 푸르게 살고 싶어서일까? 송정이란 단순한 이름을 붙인 것이 어쩌면 이 정자를 짓고, 이곳에서 세상을 등지고 세월을 보낸 7광 10현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의 폭정에 벼슬을 버린 선비들

 

송정은 광해군 재위시절 지어진 정자이다. 광해군의 폭정이 극에 이르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들이 모여 정자를 지었다. 광해군의 재위가 1608 ~1623년이었으니, 송정이 처음 지어진 지는 이미 400년 가까이 되었다. 이곳에 낙향한 선비들을 세상 사람들은 7광, 10현이라 불렀다. 이 선비들은 벼슬을 버리고 이 송정에 올라 자연을 벗삼아 살면서 명예를 초개같이 대했다. 아마 주변에 무성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정자를 지은 것은 아니었을까?

 

 

 

성황산 동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송정은 7광, 10현들이 모여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읊으며 즐기던 곳이다. 7광(狂)이라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미쳐버린 7명의 선비들.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을까?

 

아무리 질문을 해보지만 딱히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10현(賢)이란 어진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7광은 김대립,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상형, 이탁을 가르킨다. 10현이라 함은 7광에 이름이 있는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탁 외에 김관, 김정, 김급, 김우직, 양몽우 등을 말한다.

 

 

 

이들 7광 10현은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담소를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들 중 광해군의 재위를 마친 후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작은 정자에 모인 이들이 세상에 드러내지 않는 자연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을, 송정의 모습에서 알 수가 있다.

 

자연 속에 묻힌 정자 송정

 

송정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 정도의 작은 정자다. 사방에 마루를 놓고 그 중앙에 작은 방을 하나 두었다.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부정형의 주추를 놓았다. 마루는 난간도 없이 그저 평마루다. 가운데 들인 방은 4면에 모두 문을 내었다. 마루 한편 밑을 보니 아궁이가 있다. 여기에 불을 때서 겨울에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도록 헸다. 주변에는 노송이 자리를 하고 있고, 바람에 날리는 산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연을 거스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연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 속에 조용히 파묻혀 있다. 스스로 자연인양 자랑을 하지 않는다. 송정이란 정자의 이름이 '왜'라는 물음에 답을 하는 것만 같다. 7광 10현이 모여 스스로 자연과 같은 마음을 갖고, 사철 푸른 소나무와 같이 변함이 없는 마음, 그리고 산죽과 같이 곧은 마음을 갖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송정에 깃든 속내를 읽은 후에, 정자의 작음은 오히려 더 커 보인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자리하고 있는 옛 절터인 회암사지. 사적 제128호인 회암사지는 요즈음 한창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원래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전에는 회암사지에 수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회암사지에서 보이는 것은 전각들이 서 있던 곳의 축대와 주춧돌, 그리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부도탑 등이다.

2월 25일, 회암사지를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가려고 했던 곳이다. 멀리서 보아도 발굴을 하고 있는 회암사지의 모습은 장관이다. 회암사지에는 보물 제387호 회암사지선각왕사비,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부도,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무학대사비, 그리고 회암사지부도탑 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하나 그 이전에 이미 절이 있었다고도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그러나 일설에는 보우선사의 원증국사탑비에 의해, 충숙왕 즉위년인 1313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다고도 추정한다. 회암사는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회암사지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석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옹은 고려 우왕 2년인 1376년에 삼산양수지기의 비기(秘記)에서 이곳이 인도 나란타사와 지형이 같으므로, 이곳에 절을 일으키면 불법이 크게 흥한다고 하여 절을 중창했다는 것이다.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

회암사지는 현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회암사는, 발굴된 터만 보아도 대가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세종 6년인 1424년에 행해진 ‘선교양종(禪敎兩宗)’ 폐합 때의 기록으로도, 그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회암사는 성종 3년인 1472년에는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을 하였으며,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다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유생들의 탄핵으로 보우는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기옥을 보면 선조 때까지는 간간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만, 1818년 재건한 무학대사비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날 꼭 비워야 하나

발굴을 한다는 안내판에는 2012년까지로 기록이 되어있다. 문화재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고 하여,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으니 대답이 없다. 아마도 일요일이라고 쉬는 모양이다. 그런데 소중한 문화재를 발굴을 한다고 해서, 이전을 한다는 것이 영 미덥지가 않다. 혹 이전을 하면서 훼손이라도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안내판을 보니 절터 위에 전망대가 있고, 그 곳에 가면 문화관광 해설사가 있다고 하여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해설사가 있다는 컨테이너는 굳게 닫혀 있다. 요즈음 주말과 일요일이 되면, 가족들이 나들이를 하면서 문화재를 둘러보고는 한다. 자녀들과 함께 온 가족인 듯한데, ‘꼭 일요일에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한다.

물론 일요일은 모두가 쉬는 날이기 때문에, 그들보고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딴 지역을 돌아보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주말과 일요일은 근무를 하고 평일에 쉬는 곳이 많다. 관광객들이 찾아들기 때문에, 쉬는 날을 변경해 사람들에게 문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기대를 하고 찾아간 회암사지. 결국은 발굴중인 사지에 즐비하게 늘어선 석물만 보고 온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 갖고도 회암사지가 과거 얼마나 대가람이었는가는 충분히 가늠할 수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수밖에.

매월당 김시습(1435(세종 17년)~1493(성종 24))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김시습의 한문 단편소설인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되었던 만복사는, 현 전북 남원시에 소재하는 사적 제349호이다. 한문 단편소설인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를 비롯하여 「이생규장전」「취유부벽정기」「남염부주지」「용궁부연록」 등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책이다.

이 중에서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인 양생이 왜구의 침입 때 정절을 지키다가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사람)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처녀가 떠난 뒤에도 양생은 그 사랑을 잊지 못해 장가를 가지 않고, 산속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조금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흔적만 남긴 만복사지. 도선국사가 창건한 남원 최대의 가람

남원 만복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에 창건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오층과 이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으며, 그 안에 길이 35(10m)척의 동으로 조성한 불상이 있다"라고 했다.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 당시에는 대웅전, 약사전, 장륙전, 영산전, 보응전, 천불전, 나한전 등 많은 전각이 있었고 수백 명의 승려가 생활하는 큰 절이었던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만복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만복사지 발굴조사 때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아내었다. 또한 청자와 백자, 많은 와편 등이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사지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만복사지에는 5층석탑(보물 제30호)·불상좌대(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 등이 절터내에 남아 있다. 만복사지는 고구려식의 절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중에 하나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들

김시습은 왜 이 만복사를 단편소설의 무대로 삼았을까? 만복사지를 찾아간 것은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해서이다. 낮은 경계로 주변을 둘러 친 만복사지. 입구를 들어서면 우측 길 밑으로 보물 제32호 당간지주가 서 있다. 투박한 모습으로 조성이 된 이 당간지주는 고려 초기에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너른 사지 복판에 보물 제31호 석좌가 보인다. 이 석좌는 불상을 올려놓았던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석좌의 아랫부분은 각 측면에 꽃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을 새겼으며, 그 위에 연꽃을 조각하였다. 높이 1.4m 정도인 돌에 여러가지 문양을 조각했는데 육각형으로 만들어졌다.

석좌를 지나 전각 쪽에는 5층석탑 1기가 서 있다. 보물 제30호인 이 오층석탑은 고려 초에 세운 것으로, 높은 기단부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다. 현재 남아 있는 탑의 높이는 5.75m이다. 1968년 탑을 수리하던 중 1층 몸체에서 사리 보관함을 발견하였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이에 넓은 돌판을 끼워 넣은 점은 특이하다. 전각 안에는 보물 제43호인 석불입상이 있다.

이 석불입상 역시 만복사를 처음 창건할 당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석불입상은 민머리에, 정수리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솟아 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 코, 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풍만한 인상이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의 광배로 구분이 되어 있다. 이 석불입상의 뒤에는 선각을 한 부처상이 조각이 되어 있어 특이하다.

만복사지에 가면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수백 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는 만복사. 지금은 그저 옛 영화를 알아볼 수 있는 몇 기의 보물들이 서 있을 뿐이다. 김시습은 도대체 만복사란 절을 왜 무대로 했을까? 김시습은 어려서는 신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는 불교 철학의 사유를 공유하려 했던 사람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만복사를 무대로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금오신화에 보이는 「남염부주지」는 미신과 불교를 배척하는 경주 박생(朴生)이 꿈속에 염라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염라대왕과에 토론을 하고 돌아온 후 염라국 왕이 되어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이생과 저승을 넘나들며 사랑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도교와 유교, 불교에 통달한 것으로 알려진 김시습. 어쩌면 이 만복사를 무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만의 고차원적인 사랑을 일깨우고자 했음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그런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이야기 때문에 광인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만복사지를 떠나면서 돌아본 옛 절터. 어디선가 양생과 처녀의 애절한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 3290번길 19, 옛 구읍리에는 사적 제403호인 반월성이 있다. 반월산성은 총 길이 1,080m 이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이 반월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 에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눈길을 밟으며 반월성에 오르다

2월 5일 아직 산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있다. 고모리산성을 돌아보고 난 뒤, 이어서 찾아간 반원성. 하루에 두 곳의 산성을 돌아본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더구나 눈길에 오른 산행이라 다리도 아프지만, 그레도 인근에 있으니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여름에는 차가 성지까지 올라간다고 하는데, 눈길에 위험할까봐 그런지 입구를 막아 놓았다. 할 수없이 걸어 오르는 수밖에. 길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미끄럽다. 언덕길을 올라 반원성의 남쪽 성곽 쪽으로 다가갔다. 수령 400년이 지난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서부터 천천히 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일부는 아직 복원이 되지 않아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다. 반월성은 성벽을 높게 쌓고, 일부구간은 안과 밖을 함께 성벽을 쌓아두기도 했다. 서쪽에는 문지인 듯한 곳 옆에 치성을 쌓았다. 이곳의 치성은 그 크기가 상당하다. 성 위에서 바라보니 건너편에 왕방산이 보이고, 그 밑으로는 포천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북에서 내려오는 길목, 고구려의 전진기지

성 위에서 보면 성 밑으로 난 길이 훤히 보인다. 철원으로 가는 길에는 차들이 줄을 잇는다. 이런 지리적 위치로 보아, 반월성은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쪽에서 성벽 위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보니, 좁은 문루가 있었던 곳이 보인다. 암문이 있었던 곳일까?



조금 더 가니 건물터가 보이고 동편으로 난 문지가 있다. 반월성은 문을 그냥 바닥에 놓은 것이 아니라, 돌을 쌓고 그 위에 문을 내었다. 1m 가 넘는 축대 위에 문을 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문지 안으로는 건물터가 있고, 조금 더 가니 삐죽 내민 치성이 보인다. 반월성은 상당히 견고한 성곽이었을 것이다.



해발 283.5m의 청성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테뫼식 석축산성인 반월산성. 고구려는 이곳을 남진을 하기 위한 기지로, 신라는 북진을 하기 위한 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 성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포천지역의 주성(主城0으로 역할을 했다. 이곳을 발굴 당시 <마흘수해공구단>이란 명문이 적힌 기와가 발견이 되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마흘군’이 바로 포천지역임을 입증하고 있다.

반월성이란 마치 성이 반월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성 중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성이었다는 반월성. 고구려가 쌓은 이성은 통일신라 시기까지 사용을 하다가, 고려 때는 폐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조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후금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다시 쌓았다고 한다.



아직은 일부분이 복원이 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반월성. 한 바퀴 돌아본 반월성은 상당히 요충지에 자리를 하고 있으면서, 매우 견고하게 쌓은 성임을 알 수 있다. 눈길에 돌아본 반월성. 아마도 완전히 복원을 마친다면, 이 지역의 또 다른 명소가 될 것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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