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대를 지나 천천히 걷는다. 저만큼 높이 솟은 동북공심돈의 지붕이 보인다. 언젠가 저 위에 올라가 아래를 보니, 앞쪽의 전망이 상당하다. 연무동. 지동, 우만동 등의 지붕들이 눈 앞에 점점이 펼쳐진다. 옛날에는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화성 밖의 풍경이 어떠했을까? 아마도 성으로 밀려드는 적이 있었다고 한다면, 개미 한 마리 달라붙지 못했을 것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화성은 싸움을 위한 성이 아니라, 거대한 조형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조물 하나하나가 다 아름답다. 공심돈 위에 전각을 올릴 생각을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 선조들의 미적 감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그래서 고 3짜리 학생조차 ‘화성이 말을 걸어온다.’라는 표현을 했는가 보다.

 

 

 

성 아래로 난 길조차 끌어안을 수 있는 화성

 

동북공심돈에서 동북노대를 걷는 길 밑으로는 도로가 뚫려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이런 구조물로 만들어 성을 연결했다는 것이다. 현재 수원 화성은 남수문에서 팔달산까지의 성벽과 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는 구간 두 곳이 끊긴 상태이다. 이 끊어진 부분이 연결이 될 때 화성은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길이 난 위 성벽 앞으로는 작은 길이 있지만, 위험으로 인해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있다. 밑으로 돌아 동북노대 쪽으로 오른다. 노대는 다연발 화살인 쇠뇌를 쏘아대던 노대. 동문인 창룡문에서 불과 96보의 거리에 있는 이 동북노대의 위엄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동복노대는 아래는 돌로 쌓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오려 축조를 했다.

 

 

 

성벽은 세월을 말하 듯 여러 가지 색깔을 내고 있다. 아마도 이곳은 그렇게 급한 경사가 아닌 곳이기에, 나름대로 단단하게 축조를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천천히 성벽을 따라 걸어본다. 성 밖 나무그늘아래, 어르신 두 분이 무엇을 그리 이야기를 하시는 것인지. 저런 모습 하나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성이 바로 화성이다.

 

창룡문, 그 위엄을 어찌 말로 다하랴

 

창룡문 앞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문을 통해 드나든다. 아마 예전에는 이 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동문인 창룡문의 의미는 남다르다. 장안문이나 팔달문도 물론 중요한 길목이다. 하지만 동문의 의미는 성의 가장 근간이 되는 곳이고, 사실은 동문인 창룡문이 정문인 셈이다.

 

 

 

창룡문은 행궁에서 1,040보 떨어져 있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하고 있다. 창룡문은 성문 밖으로 옹성을 쌓았는데, 북쪽 한편만 얼어놓았다. 이렇게 한편으로 치우쳐 옹성의 입구를 낸 것은 고제(古制)에 따른 것이다. 또한 옹성 중앙에 입구를 내는 것보다, 더 공격을 하기가 쉽지가 않다.

 

옹성의 북쪽을 틔워놓고, 남쪽 끝을 계단으로 해서 원성과 연결을 하였다. 연결되는 곳은 문을 달아내었다. 옹의 높이는 9척 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동문과의 거리는 28척이다. 아마도 전투가 벌어졌을 때 동문을 공격하려고 했다면, 비탈진 위에 축조한 동문도 버거운데, 한편으로 입구를 몰아 놓은 곳으로 공성무기를 들여보내 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옹성만으로도 버거운데 성문 양편의 성벽을 밖으로 돌출시켜 놓아, 삼면에서 성문으로 몰려드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축성을 했으니 가히 난공불락의 성문이 아니겠는가? 화성 겉돌기 그 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만난 창룡문. 이제는 이 동문에 대한 의미도 재해석이 필요할 때란 생각이다. 성문 중에는 동문이 으뜸이기 때문이다.

사적 제251호 파사성은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다. 파사성은 신라 파사왕(80∼112)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암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해발 235m 정상을 중심으로 5각형 모양의 둘레로 경사가 가파른 곳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성 둘레는 약 943m로, 높이 4 -5m 견고한 암반층을 기반으로 하여 쌓았다. 잘 다듬은 직사각형 돌을 이용한 초축성벽과 부정형의 쪼개진 돌을 이용한 추축성벽이 있는데, 이는 여러 시기에 걸쳐 축조되어 오늘날 구조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 구조물로는 치 3개소, 문지 2개소, 우물지 1개소, 수구지 1개소 등이 있다. 파사성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보인다. 성벽 발글조사중 출토된 삼국시대 유물은 대부분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류였으며, 축성기법 또한 신라 산성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파사성은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여주, 이천, 양평으로 가는 길목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더욱 여주에서 양평을 흐르는 남한강을 한 눈에 볼 수가 있어 이 파사성의 중요성을 알 수가 있다.

 

  
아직은 복원이 끝나지 않아 군데군데 무너진 곳을 볼 수 있다.

  
성위로 오르면 양평방향의 남한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미 고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여주 북방 53리에 있으며, 둘레가 3만8825척의 석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595년(선조28) 3월에 비변사의 요청으로 승 의엄을 도총섭으로 임명하여 수축하도록 하였다. 의엄은 성안에 집을 짓고, 성밖의 구릉과 평지는 둔전을 마련하고 군사의 양식을 마련하였으며, 무너진 성벽은 승인을 동원하여 수축하여 1597년에 공사를 마치었다"고 했다.

 

이 파사성에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파사왕 때 남녀 두 장군이 내기를 했다. 남장군은 나막신을 신고 중국을 다녀오고, 여장군은 파사성을 쌓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장군이 성을 다 쌓기전에 남장군이 돌아왔다. 그 소식을 들은 여장군은 마지막으로 성을 쌓을 돌을 양평군 개군면 석장리에서 날라오다가 놀라는 바람에 치마가 찢어져, 그 마을에 돌담이 쌓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파사성은 미완의 석축산성이라는 것이다.

 

  
파사성은 뚜벅이 여행족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복원이 된 성벽. 견고한 석축산성임을 알 수 있다

전설이야기를 생각하며 천천히 성벽 안으로 난 길을 걸어본다. 아직은 복원이 다 되지 않아 여기저기 널부러진 돌무더기가 오히려 정감이 간다. 잘 복원된 동문지 성벽들이 단단한 석축산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 밖으로 걷다보면 어느새 파사산 정상에 도착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절경이라고 칭찬을 늘어놓는다.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본다. 이 곳은 주변이 모두 30~40m 낮은 구릉지대이기 때문에, 사방 어디를 보아도 한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중요한 전략지라는 것이다. 이곳에 산성을 쌓은 것도 그러한 지리적 중요성 때문이다.

 

  
정상에 오른 뚜벅이 연인들

  
파사성의 정상에 서 있는 안내표지목

  
성 위에서 바라본 여주방향의 남한강.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아이들 손을 잡은 젊은 부부들도 성내를 걷는다. 한 쌍의 연인들은 정상에 올라 밑으로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환호를 한다. 신라 때부터 수차례 축성을 해 온 파사성. 산 높이나 성벽 길이나 걷기에는 적당한 것 같다. 뚜벅이족의 주말 나들이 장소로는 최적이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정리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할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역사와 건강이 함께하는 파사성. 전설이 있어 더욱 좋은 곳이다. 산성을 한 바퀴돌아 산성 밑에 자리한 막국수촌에 들려, 시원한 막국수 한 그릇에 산성의 가을이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곳이기도 하다. 

화성에는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바로 북수문인 화홍문과 남수문이다. 남수문가지 복원되어 수원천의 물길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북수문은 칠간수문으로, 남수문은 구간수문으로 생김새는 전혀 딴판이다. 북수문 위에 건립된 누각에 화홍문(華虹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화홍문이란 말 그대로 수문의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넘쳐흐를 때 생겨나는 물보라의 장관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팔경 중에 하나로 손꼽힐 정도다.  

 

화강암으로 쌓은 북수문

 

화홍문은 화강암으로 쌓았다.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조성한 화홍문은 보기에도 여간 단단해 보이지를 않는다. 아마 이러한 수문이기에 그 오랜 시간 많은 물을 맞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인지도 모르겠다.

 

 

바닥 역시 화강암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았다. 7개의 수구가 있는 화홍문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원래는 쇠창살로 막아 외부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수문 옆 양편에 쌓은 축대도 당시에는 없었을 것이다. 넓은 내를 이루며 흐르는 물이 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 또한 장관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 화홍문 위에 누각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봄철부터 가을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누각에 올라 쉬어간다. 여름철이면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피서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누각은 이층으로 되어있으며, 아래는 군사들이 들어가 적을 맞아 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위는 장대석으로 계단을 만들어 양편에서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지금은 문이 없지만 예전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아름다운 누각, 수문과 조화를 이뤄

 

화홍문은 전체적으로 보면 수구와 누각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누각은 2층으로 아래층은 전술에 필요한 공간이고, 이층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문이 있었을 당시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웠을 것이란 생각이다. 한 겨울에도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누각의 아래는 살창으로 문을 내었다. 그것은 앞면이 벽돌로 막혀있어, 성 안쪽으로는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누각의 밑에 성 안쪽으로 난 살창문을 들어서면 장정이 고개를 숙여서 움직일 만한 높이의 공간이 있고, 밖으로는 안혈(眼穴)을 냈다. 북수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이다. 그저 수문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누각인 듯 하지만, 철저하게 전쟁을 대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화홍문의 멋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창문의 양 옆으로는 검은 벽돌을 이용해 문양을 넣었다. 양편에 있는 문양으로 인해 누각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누각의 앙 옆의 성곽은 돌이 아닌 흑벽돌로 쌓은 점도 돋보인다. 투박하지가 않아 누각의 형태에 중압감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세한 부분까지도 미적인 감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화성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누 위에 오르면 절로 시 한 수 나와

 

화홍문의 누각 위에 오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성 밖으로 보면 우측에 연지가 있고, 성벽을 따라 바라보면 그 유명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조금 떨어져 북문이 우뚝 서 있다. 수문을 지나는 물소리가 귓전을 간질인다. 수문 안쪽은 돌로 바닥을 깔고 격차를 두어 물이 낙수치는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그런 자연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조성을 한 것이 바로 화성의 멋이다.

 

 

 

 

누각 위 마루로 깐 바닥이 편안하게 만든다. 흡사 사랑방 앞의 대청마루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주변에 두른 난간도, 어느 경치 좋은 계곡 물가에 지은 정자 같기만 하다. 전쟁을 위한 성곽이면서도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자연 안에서 꾸며진 화홍문. 성곽으로서의 기능도 뛰어나지만, 그 모습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화성을 돌아보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화홍문 역시 그 아름다움의 한 부분이다. 싸움터이면서도 커다란 자연의 조형물 같은 화성. 그리고 수문이면서도 누정과 같은 화홍문. 언제나 찾아가도, 늘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고는 한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구암마을.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707번지인 이곳에는 사적 제103호인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이 있다.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서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그 형태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한다. 북방식은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을 말하며, 남방식은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인 바둑판식을 말한다.

 


 

10기의 지석묘가 남아

 

구암리에는 1956년 조사 때 고인돌이 총 13기가 있었다고 하나, 1982년 사적으로 지정이 될 당시에는 민가의 울타리 안에 있던 것인데 현재는 10기만 남아있다. 구암리에는 여러 곳에 고인돌 무덤떼가 있는데, 고인돌은 대체로 자연암석을 떼어내 덮개돌로 사용한 바둑판식 지석묘이다.

 

이곳 고인돌의 뚜껑돌인 상석은 큰 것이 길이가 6.35m, 너비 4.5m, 높이 70 ∼ 100㎝에 달하며 받침돌 8개가 이를 받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인돌은 보통 4개의 받침돌을 이용하는데 반해, 8개의 받침돌을 받쳐 다른 지역 고인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작은 것들은 길이 3 ~ 4m에 너비가 2 ~ 3m 정도이다.

 

남방식 지석묘인 바둑판식이다. 상석을 작은 몇 개의 굄돌 위에 올려 놓았다.

 

독특한 구암리 지석묘군

 

구암리 지석묘군은 딴 곳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부안의 딴 곳에 있는 지석묘를 보아도 구암리 지석묘와는 형태가 다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 있어, 이곳을 문화재 보호지역으로 정하고 울타리를 쳐놓고 보존을 하고 있다. 가장 큰 것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첫 눈에 보기에도 그 크기가 남다름을 알 수 있다.

 

주변을 돌면서 굄돌을 살펴보니 굄돌의 크기도 모두 다르다. 가장 큰 고인돌은 8개의 굄돌로 받치고 있는데, 주변의 고인돌의 굄돌보다 크다. 아마 위에 올린 뚜껑돌인 상석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인듯하다. 굄돌의 개수도 다 다르다. 큰 것은 8개, 그 외에는 6개, 5개, 4개 등 다양하다. 아마 그 돌의 무게에 따라 적당한 굄돌을 받쳐 놓은 것인가 보다.  


 

 

이 구암리 지석묘의 밑에서는 돌칼과 돌화살촉 등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고창지역과 부안지역은 북방식 고인돌인 탁자식 고인돌이 군데군데 분포하고 있는데 비해, 이곳 구암리 지석묘는 모두 남방식 지석묘이다.   

 

거북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

 

구암리 지석묘의 뚜껑돌인 상석의 형태는 다양하다. 거북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도 있고, 어느 것은 막돌을 갖다 올린 듯한 것들도 있다. 굄돌을 받친 형태도 일정하지가 않다. 이렇게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은, 당시 이 지석묘의 주인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크고 작은 고인돌의 형태가, 이곳 주변에 살던 부족 중에서 나름의 위치를 알려주는 듯하다.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큰 돌들을 잘라낼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이 무거운 상석을 어떻게 올려놓은 것일까? 지석묘를 볼 때마다 늘 궁금하다. 지금처럼 장비가 있지도 않았던 시절에, 이렇게 큰 돌을 이용해 지석묘를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다.


 

뚜껑돌인 상석이 큰 것은, 길이가 6.35m, 너비 4.5m, 높이 70 ∼ 100㎝에 받침돌 8개를 돌려 세웠다.

 

그 가운데 작은 것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띈다. 길이는 1.5m 정도일까? 저런 지석묘는 혹 어린 아이가 죽었을 때 쓴 지석묘였을까? 구암리 지석묘를 보면서 쉽게 뒤돌아 설 수 없었던 것은 수많은 의문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재 답사는 힘이 들기는 하지만, 수많은 해답을 얻어내는 재미가 있다.

안회당은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동한인데도 유일하게 동헌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사적 제231호는 홍주성과 홍주아문, 그리고 안회당 등이 일괄 지정이 되어 있다. 그 중 안회당은 홍무목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으로 '안회(安懷)'란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하여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일반 동헌과는 전혀 다른 안회당

 

안회당은 동헌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아왔던 동헌과는 그 형태가 전혀 다르다. 동헌과 달리 위엄이 있어 보이는 높은 지붕에 넓은 대청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느 부유한 집의 사랑채 정도로 꾸며져 있다. 안회당이 처음부터 동헌은 아니었다. 안회당 뒤편서남쪽에 '근민당'이라는 동헌이 있었다. 근민당은 천주교 박해를 한 동헌으로 유명하다.

 

 

근민당이 어떻게 해서 유실되고 대신 안회당이 동헌이 되었는가는 정확지가 않다. 다만 안회당이 1977년 해체 복원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조 숙종 4년인 1678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하니, 그 이전에는 근민당이 동헌이었을 것이다. 홍주성은 처음 축조한 년대는 정확지가 않다. 그러나 고려시대 백월산 중턱에 위치했던 해풍현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안회당은 모두 22칸으로 조성된 목조 팔작집이다. 숙종 4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후에, 고종 7년인 1780년 목사 한응필이 개축하였다고 한다. 처음 안회당을 지었을 때, 안회당이라 쓴 편액을 대원군이 하사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뛰어난 목조건축의 미가 돋보여

 

안회당을 돌아보면 이런 아름다운 집에서 집무를 하는 목사는 절로 사람들을 위하는 위민정치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이름답게 꾸며진 동헌이다. ㄱ자 형으로 된 안회당은 정면 7.5칸에 측면 2.5칸 정도로 되어있으며, 건물을 바라보고 좌측 끝에는 꺾이어 나온 누마루 방이 달려있다. 누마루 방은 모두 두 칸의 마루방으로 장초석 위에 기둥을 세워 정자처럼 꾸몄다.


 

 
 


 

측면 반 칸의 앞은 누마루를 깔았으며, 뒤편으로는 높다랗게 연도를 뺀 굴뚝을 올렸다. 누마루 방 뒤로는 개방마루를 놓아 뒤편 여하정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동헌이라는 느낌이 들지를 않는다. 거기다가 날렵하게 위로 솟은 처마는 한옥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사적 안에 주차를 하고 있는 사람들

 

홍주성과 안회당 등을 돌아보다가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 있다. 차들이 여기저기 주차를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곳은 사적 안이 아닌가. 더구나 안회당과 건물 앞에 있는 홍주아문 등은 모두 사적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문화재 바로 곁에 주차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곳은 많은 차들이 문화재 안에 주차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주차장이 부족하다고 해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홍주성은 1978년 10월 7일 강도 5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주변 가옥들을 매입하여 주변 정리를 하고, 홍주성곽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해 지속적인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먼저 홍주아문과 안회당 주변에 있는 건물부터 먼저 철거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선이란 생각이다. 그것이 많은 예산이 들어 불가능하다면, 그전에 주차문제라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사적지 안에 버젓이 들어가 주차를 하고 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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